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조선의용군으로 탈출한 학병들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한 이들 중에는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신사군이 점령한 지역으로 넘어가 ‘조선의용군(대)’에 가담한 이들도 있다. 이들의 경우, 대부분 해방 후 북한에 남거나 지속적으로 관련을 맺은 탓에 제대로 부각되지 못하였으며, 구체적인 인명이나 행적도 파악되지 않는다. 다만 일부 사람들이 기록을 남겨 그들의 행적을 파악할 수 있다. 조선의용군에서 활동한 학병 출신자들 가운데 신상초, 엄영식, 정철수가 기록을 남겼다.(주1)

이들의 회고와 중국 자료에 따르면, 학병을 탈출해 조선의용군에 가담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중국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解放日報)』 1944년 7월 6일자는 일본군 독립혼성 제3여단 소속의 오대하변(五台河邊) 분견대의 조선병사 3명이 5월 8일 조선의용대에 참가했다고 보도했다. 1944년 10월 31일자는 남경에서 조선병사 6명이, 1945년 2월 3일에는 남경에서 김해종 등 조선병사가 양자강을 건너 팔로군에 가담한 사실을 보도했다.(주2) 팔로군에 투항한 이들은 모두 조선의용군에 편입되었다.

신상초도 “우리가 탈출해 들어온 지 며칠 만에 또 한국 또 한국 학병 세 명이 탈출해 들어왔”으며, “그 후 학병 중 탈출해 들어오는 자는 계속 증가하여 그 해 8월말에는 15명에 달했다”(주3)고 했다. 엄영식은 “우리에 앞서 이미 많은 조선 학도병들이 일본군 부대를 탈출하여 이곳에 와 있었”으며 “그들은 모두 서주 부근에 자리잡고 있던 숙현, 회음 등의 일본군 주둔지에서 용감히 탈출한 학도병들이었다. (…) 그들 중에는 고향 친구인 신상초를 비롯하여 한명삼, 방휘재, 심영순, 박항구 외에도 20여명의 낯익은 얼굴들이었다”라고 했다.(주4)

신상초와 엄영식은 조선의용군에 소속되었다가 북으로 온 뒤 후에 월남했는데, 두 사람의 수기 제목이 공교롭게 모두 ‘탈출’이다. 신상초의 ‘탈출’ 수기는 1966년에 출간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자유주의에 대한 자신의 지향”을 강조하고 “조선의용군과 북한사회에 대한 강도 높은 거부감”을 표출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다분히 “남한사회를 의식한 면이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2005년도에 출간된 엄영식의 탈출기에 등장하는 신상초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서의 모습과 신상초 자신의 기록에서 이야기하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거부감과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주5)

당시 남한은 극단적인 반공주의 사회였다. 신상초는 1950년대부터 장준하가 창간한 『사상계』의 주요 필진으로 활약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구의 사회민주주의를 긍정적으로 수용한 자유주의 지식인이었지만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반공이 국시였던 시절에 발간한 수기에서 “신상초는 강도 높은 공산주의 비판을 통해 자신의 사상검증을 의식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2000년대에 출간된 엄영식의 수기에서는 중국공산군과 의용군 지도자들에 대한 긍정적인 묘사가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는 시대 상황이 바뀐 것이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주6)

▲ 엄영식의 수기 『탈출』

탈출 학병 출신 중에 정철수는 해방 이후 중국에 잔류했다. 그는 중국 제남에서 탈출하여 조선의용군에 투신, 항일 투쟁을 전개하다 해방을 맞았다. 이후 연길현정부 교육과장, 길림중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는 등 교육계에 종사했으며, 연변대학교 일문과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주7) 정철수 또한 문화대혁명의 거대한 광풍에서 자유롭지 못해 우파분자로 찍혀 홍위병들에게 숱한 수모를 당해야 했고, 1976년까지 노동개조, 사상개조의 명분으로 옌벤의 인쇄공장에서 보일러공으로 힘겨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주8) 경기도 용인 출신으로 포은 정몽주의 24대 종손이었던 정철수는 학병 탈출 후 조선의용군에서 활동하였으나 해방 후 남한으로 돌아오려 했다. 그러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결국 옌벤에 남아서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주9)

당연히 정철수와 신상초·엄영식의 조선의용군에 대한 기억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들의 존재 위치에 따라 과거의 기억도 일정하게 왜곡되거나 변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늘 현재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 학병 탈출 후 조선의용군에서 활약한 정철수의 수기(사진=알라딘)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학병 출신은 아니었지만 자발적으로 조선의용대에 가담해 전사가 된 인물 중에는 김학철이 있다. 김학철(金學鐵)의 본명은 홍성걸(洪性杰)이다. 1916년 11월 4일 함경남도 원산 출생으로 누룩업자의 둘째 아들이었던 그는 형이 일찍 죽는 바람에 실제로는 장남이 되었다. 그의 어린시절은 그다지 유복한 편은 아니었다. 그가 7세 되던 1922년 부친은 34세라는 젊은 나이에 폐병으로 사망했고, 어머니는 29세의 젊은 나이에 두 명의 누이동생과 김학철을 뒷바라지하며 가난한 살림을 꾸려야 했다.(주10)

유년시절 방정환이 주관하는 월간 잡지 『어린이』를 애독하는 한편, 일본서적을 가리지 않고 탐독하면서 현실에 대한 어렴풋한 이해를 쌓았다. 또한 그는 소학교 시절 1929년 1월 시작되어 100여일에 걸쳐 투쟁한 원산총파업을 겪었고, 서울의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해서는 11월의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 사건들은 그의 세계관과 민족의식 정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김학철의 인생항로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사건은 자신이 일한 서점에서 책을 사 가지고 오다가 빗방울을 피해 옷자락에 넣고 돌아오다가 일본 순사의 검문을 받으면서 도둑누명을 쓰게 되는 사건이다. 서점의 점원이 와서 확인한 뒤 도둑누명은 벗었으나 김학철은 이때 망국민으로서의 울분과 설움을 직접 몸으로 체험했다.(주11)

원산 보통소학교를 마치고 서울의 보성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그는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의거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조국 광복에 바치기로 결심하고, 17세의 나이에 임시정부를 찾아 단신으로 북행열차에 올랐다. 그러나 1935년 김학철이 상하이에 도착했을 때에는 윤봉길의사의 폭탄투척사건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임시정부가 그곳을 떠난 뒤였다. 그는 그곳에서 의열단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조선민족혁명당(민혁당)의 당원과 접촉하여 상해특구에 소속되었고, 난징으로 건너가 정식으로 민혁당에 입당해 2년간 테러행동대와 선전부원으로 활동했다.

1937년 일제의 중국 본토 침략으로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민혁당 지도부는 테러 활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대중적인 무장투쟁을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깨닫게 되었다. 이에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민혁당은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조선의용대를 결성하고, 청년당원들을 중국 군관학교에 보내어 간부로 양성하는 일을 진행하였다. 김학철도 이러한 방침에 따라 1937년 12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 성자(星子) 강릉분교(江陵分校)에 입학해 1938년 5월 졸업했다.

1938년 10월 김학철은 조선의용대 제1구대에 배치되었고, 1939년 상반기 후난성(湖南省) 북부 일대에서 무장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그해 말에는 후베이성(湖北省)의 제2구대로 옮겨 중국군 제5전구와 시안(西安) 일대에서 항일활동을 폈다. 1940년 11월에는 후베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대 주력부대가 북상 항일을 결정하고 황허강을 건너 태항산 팔로군 해방구로 이동하게 되었다. 조선의용대의 이동과 함께 태항산 항일근거지로 간 김학철은 조선독립동맹 선전부에서 활동하며 신문편집, 연극 극본, 가사 집필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김학철은 1941년 여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제2분대장으로 활동하였고, 12월에는 허베이성(河北省) 원씨현(原氏縣) 호가장(胡家庄) 전투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그는 석가장(石家庄) 일본 총영사관 경찰서 유치장에 5개월간 갇혔다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942년 5월 일본의 나가사키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1943년 4월 29일 나가사키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45년 10월 6일 석방되었다. 그는 전투 중 입은 부상을 제대로 치료 받지 못해 1945년 2월 감옥에서 한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다.(주12)

해방 후 김학철은 북한에서 <노동신문> 기자, 외금강휴양소 소장, <민족군대>(인민군 기관지) 주필 등으로 활동하다가 1950년 중국 북경 중앙문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하게 되었고, 1952년부터는 옌벤지역에 정착해 전업 작가가 되었다. 그는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를 비롯해 다수의 작품을 펴냈으나 1957년 중국의 ‘반우파투쟁’ 과정에서 ‘우파민족주의자로’ 지목되어 탄압을 받았다. 특히 1966년부터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옌벤의 민족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이 수난을 겪게 되는데, 김학철도 ‘우파반동’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혀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는 1967년 마오쩌둥의 우상화와 ‘반소 히스테리’, ‘경제파탄’ 등을 비판한 미발표 『20세기의 신화』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어 10여 년 동안의 감옥에서 복역했다.(주13) 1980년 복권된 김학철은 1989년 12월 중국공산당적을 회복하였으며 이후 항일투사로 대우받고 창작 활동에 전념하다가 2001년 사망했다.

▲ 김학철의 <격정시대>, <최후의 분대장>

정치적 격변 속에서 험난한 삶을 살았던 김학철은 끝까지 창작에 대한 열정을 불살랐고, 『항전별곡』 『격정시대』 『최후의 분대장』 『20세기의 신화』 등 많은 작품을 창작했다. 그의 작품은 남한에도 소개되어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고난과 어려운 삶 속에서도 언제나 ‘혁명적 낙관주의’를 잃지 않았으며 기개와 지조를 잃지 않았다. 그를 만난 많은 한국인들은 70대의 나이에도 숱한 고난의 역정을 겪은 그가 기개와 기품을 잃지 않고 있는 모습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 그의 작품에는 번뜩이는 ‘재치’와 ‘해학’이 담겨 있고, 혁명적 열정과 낭만이 넘친다. 그의 문학은 중국 옌벤 조선족을 넘어 넓게 보면 한국 민족문학의 한 부분이다.(주14)

김학철은 한반도에서 태어나 17세의 청소년으로 중국으로 망명해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군)에 참여해 항일투쟁의 최일선에서 활동하였고, 일본군 포로가 되어 일본에서 감옥살이를 했다. 그는 독립투사이자 사회주의 혁명가였고,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견지한 작가였다. 일제 말기 그의 삶에는 광복군, 동북항일연군과 함께 3대 무장세력의 하나였던 조선의용군의 흔적이 고스란히 스며있다.

▲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SBS 뉴스 캡쳐)

「연안행」의 주인공 김태준

학병 출신 외에도 일제 말기 식민지 조선을 탈출해 새 길을 찾은 김태준과 김사량 같은 지식인도 있었다. 이들은 학자, 작가로서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동원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을 탈출해 조선의용군이 활동하고 있던 옌안(延安)으로 갔다. 이들의 탈출 과정은 김준엽·장준하의 그것 못지않게 극적이고 흥미진진하다. 김태준과 김사량의 경우, 역사나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그렇게 친숙한 이름은 아니다. 이들은 사회주의자로서 해방 후 월북(김사량)하거나 남로당에서 활동하다가 처형당했기에(김태준)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 금기시되었던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김태준(金台俊)은 1905년에 평안북도 운산에서 태어나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혼란기를 한국학 연구자이자 사회주의 혁명가로 살다간 사람이다. 천태산인(天台山人)이란 호를 가졌던 그는 조윤제와 더불어 일제 강점기 국문학 연구를 개척한 대표적인 국학자이다. 그는 한문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듣고 자랐다. 15세 때 운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년 동안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고 연변공립농업학교에 입학, 3학년 때 공립이리농림학교로 전학했다. 1926년 뛰어난 한문 실력으로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해 1928년 졸업했고, 1931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중국문학과를 졸업했다.(주15)

김태준은 대학시절 잡지 『신흥(新興)』에 관계했으며, 1931년 조윤제·이희승·김재철·이재욱 등과 함께 조선어문학회를 결성했다. 그 뒤 최초로 향가와 이두를 연구한 오쿠라 신뻬이(小倉進平) 밑에서 국문학의 유산을 발굴·정리하는 데 힘썼다. 동료였던 김재철이 요절하자 1939년 그가 지은 『조선연극사』를 펴냈다. 명륜학원 강사를 거쳐 1939년 경성제국대학에서 다카시 도오루(高橋亭)의 후임으로 조선문학을 강의했다.(주16) 1939년 김삼룡 등이 결성한 경성콤그룹과 연결되어 조직원으로 지하활동을 시작하였고, 1940년 8월에는 박헌영을 만나 기관지 「코뮤니스트」의 편집 작업을 함께하였다. 1941년 1월 9일 이관술, 김삼룡, 이현상 등과 함께 검거되었고 1943년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주17)

1944년 같은 사건으로 복역하고 출소한 박진홍과 재혼한 뒤,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중국 공산당의 수도 옌안으로 탈출, 조선의용대에 참여했다. 1945년 11월 귀국한 김태준은 1945년 12월 경성대학 초대 총장에 선출됐으나 미군정청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해방 후 옌안 탈출 경험을 바탕으로 「연안행」을 <신천지> 잡지에 연재하였으나 미완으로 끝났고, 1933년에 출간한 『조선소설사』의 증보에 손을 대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주18) 그는 1946년 11월 남조선노동당 문화부장에 임명되어 ‘빨치산’ 지원 활동을 하던 중 1949년 7월 경찰에 체포되어 11월 수색에서 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했다.(주19) 이런 까닭에 김태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금기시되어 연구가 이뤄지지 못했다. 1988년 해금과 함께 김용직 교수가 『김태준 평전』을 펴내면서 그의 생애와 저술, 학문과 사상 세계가 알려지게 되었다.(주20)

▲ <신천지>에 연재된 김태준의 ‘연안행’
▲ 1936년 명륜학원 강사시절의 김태준(사진=김용직, 『김태준 평전』)

 

 

 

 

 

 

 

김태준이 ‘연안’으로 탈출한 것은 극한적인 상황에서 마지막 활로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경성콤그룹의 일원으로 체포, 투옥되어 있는 동안 노모와 아내, 어린아들 등 세 가족을 모두 잃었다. 그에 남은 것은 일제에 대한 적개심과 조국 해방에 대한 열망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활동하고 있던 공산주의자협의회에서는 소련과 옌안에서 무장투쟁을 하고 있던 김일성, 김두봉 등을 만나 국내에 대한 군사정책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김태준은 중국 공산당의 해방구였던 옌안으로 가기로 했다. 그의 ‘옌안행’에는 박진홍이 동행했다.

박진홍은 일제 강점기 여성 사회주의운동가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명이다. 그는 모두 다섯 차례 체포되어 네 번에 걸쳐 10여년간 감옥살이를 한 대단한 투사였다. 18세 되던 1931년 12월 경성시내 각 학교의 동맹휴학을 이끌던 ‘경성학생알에스(RS)협의회’ 주모자로 연행된 이래, 1934년 1월에는 ‘이재유 사건’으로, 1935년 1월에는 ‘용산 적색노동조합 사건’으로, 1937년 12월에는 ‘조선공산당 경성준비그룹 재건사건’으로, 1941년 8월에는 ‘경성콤그룹 사건’으로 연행되었다.(주21)

▲ 일제 강점기 주요 감시대상 인물 카드 박진홍 앞뒤면(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일제 강점기 한국공산주의운동사의 ‘신화적 인물’ 이재유 인물카드(사진=국사편찬위원회)

 

 

 

 

 

 

 

 

박진홍은 1944년 10월 9일 네 번째 옥살이를 마치고 출소한 뒤 운동을 재개하기 위해 동지들을 찾았으나 만나기가 힘들었다. 동지이자 ‘연적(戀敵)’이었던 이순금은 광주의 벽돌 공장 노동자로 숨어 있던 박헌영과 연락하고 있었지만 일제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은신하고 있어서 연결이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박진홍은 경성콤그룹에서 함께 활동했던 김태준을 찾아갔다. 김태준은 아직도 얼굴이 붓고 다리가 부어 있는 치안유지법 4범의 경력을 가진 그녀가 아직도 투지가 왕성한 데 놀랐다. 김태준은 「연안행」에서 “여자의 몸으로 그렇게 용감하게 싸워왔다는 데서 무한한 존경을 하게 됐고 그 후 몇 차례 접촉하는 동안에 그 존경은 사랑의 감정으로 변질됐다”고 기록했다.(주22)

박진홍이 김태준과 만나 앞날을 의논하기 시작한 며칠 뒤 그녀의 남편이자 일제하 한국공산주의 운동의 신화적 존재였던 이재유가 청주예방구금소에서 4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1944년 10월 26일). 이재유와의 사이에 생긴 아들은 1935년 6월경 옥중에서 낳았으나 2년을 채 지나지 않아서 죽은 상태였다. 두 사람 모두 가족을 모두 잃은 상태였고, 이 원수의 땅에서 더 이상 지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고, 탈출을 결행했다.

1944년 11월 27일 김태준은 대학병원 조수로 변장하고 위조한 신분증을 휴대한 다음 서울역에서 북행열차를 탔다. 하루 먼저 떠난 아내 박진홍을 비현역에서 만나 신의주로 갔고, 김태준의 책을 처분하고 받은 각자 200원씩의 여비를 갖고 국경을 넘었다. 그 뒤 두 사람은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1945년 4월 마침내 옌안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허정숙, 최창익 등의 조선독립동맹의 환영을 받았고 조선혁명군정학교에서 활동했다. 8월 일제의 패망 후 두 사람은 조선독립동맹과 함께 귀국 길에 올랐다. 출발할 때 만삭의 몸이었던 박진홍은 귀국 도중 러허성(熱河省) 람핀에서 건강한 아들을 출산했다. 김태준과 박진홍, 그리고 갓난아이 세 사람은 3개월여의 귀국길을 거쳐 1945년 11월 초 서울로 돌아왔다.(주23)

그러나 해방된 조국에 돌아온 이들의 앞날은 순탄치 않았다. 귀국 후 김태준은 조선공산당 서기국원 및 민주주의민족전선 문화부 차장을 맡아 활동했고, 박진홍은 조선부녀총동맹 문교부장을 맡아 활동했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직전 북으로 넘어간 박진홍은 제1기 최고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이후의 행적은 더 이상 확인되지 않는다. 남한에 남았던 김태준은 남로당 문화부장으로 활동하다가 1949년 7월 26일 서울시경에 체포되어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1월에 사형이 집행되었다.(주24)

『노마만리』의 작가 김사량

김사량은 1914년 평양에서 태어나 일본 사가고등학교를 거쳐 동경제국대학 독문학과를 졸업했다.(주25) 1936년 동인지 <제방(堤防)>에 일본어로 쓴 처녀작 「토성랑(土城廊)」을 발표했고,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에 가담해 활동하다가 사상불온으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석방 후 <문예수도> 동인으로 「기자림(箕子林)」, 「산의 신들」 등의 일본어 소설을 통해 한국 농촌의 하층민 생활을 생생하게 그렸다. 1940년 <조광> 잡지에 장편소설 ‘낙조’를 연재하기 시작했고, 같은 해 재일조선인 교사와 조일혼혈 조선인 소년의 정체성 찾기 과정을 그린 단편소설 「빛 속으로(光の中に)」가 일본의 ‘아쿠타가와상(芥川賞)’ 후보에 올랐다. 그의 문학적 기량이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주26)

▲ 도쿄제국대학 독문과 대학원 시절의 김사량(사진=한겨레, 2017.5.3.)

1940년 첫 번째 일본어 소설집 『빛 속으로』가 도쿄에서 발간되었고, 1942년 두 번째 일본어 소설집 『고향』이 교토에서 발간되었다. 1941년 일본에서 ‘사상범예방구금법’에 의해 예비 검속되어 50일간 남방군의 종군작가가 될 것을 강요받았으나 거부했다. 1943년 <국민문학> 잡지에 조선 후기 격동기를 배경으로 난리를 피해 화전민이 된 인물들의 삶에 대한 의지와 정의감, 사랑 등을 그린 그의 대표작 ‘태백산맥’을 연재했다. 이 작품은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산중으로 도망한 한 무리의 화전민들이 험준한 태백산맥을 배경으로 삶에 대한 가열한 의지를 불태우며 젊은이의 정의감과 정열, 화적떼의 난무, 사교도들의 음모, 자연의 위력 등과 어울려 민족의식과 향토애를 잘 드러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1942년 <국민문학> 잡지에 발표한 「물오리섬」은 그의 대표 단편으로 꼽히는데, 대동강 유역을 배경으로 벼랑에 내몰린 조선민족의 삶을 역설적 미학으로 승화시킨 작품으로 설화와 민요 등의 전통적 분위기를 살렸다.

김사량은 일본어로 글을 쓰고, 어용문예지였던 <국민문학> 등에 작품을 발표했다. 이것은 그가 일본제국주의 통치 아래서 조선의 현실과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조선인의 감정과 민족 고유의 문화적 전통 등을 알리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일본어 창작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한 것이었다. 또 어용문예지에 글을 발표한 것 역시 민족정신과 민족문화를 알리기 위한 일종의 ‘위장전술’이었다. 당시 조선의 모든 출판물이 일제의 검열과 통제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김사량의 행동은 고육지책이었던 것이다.(주27) 친일문학연구의 첫 걸음을 뗀 임종국도 김사량의 일본어 작품 활동 자체를 친일행위로 보기는 어렵다는 의견을 보였다. 친일행위에 비교적 엄정한 잣대를 들이대는 ‘친일인명사전’에도 그의 이름은 오르지 않았다.

김사량은 1943년 여름 해군견학단의 일원으로 파견되어 르포 「해군행」(매일신보, 조선어)과 수필 「날파람」(신태양, 1943년 11월호), 해군사상의 보급 목적으로 한 「바다에의 노래」(매일신보, 12월, 조선어)를 쓰는 등 한때(1943〜44) 일제의 압력에 굴하고 꺾였으나 그는 ‘민족과 양심의 아픔’으로 처절한 자기반성과 고뇌 끝에 새로운 길을 걷는다. 1945년 5월 그는 일본군의 보도반으로 북부 중국에 파견되었다가 옌안으로 탈출해 팔로군, 조선의용군의 종군기자로 활동했던 것이다.(주28) 그는 탈출 과정에서 국내에서 비밀리에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던 ‘건국동맹’ 조직원의 도움을 받았다.

김사량은 해방 후 조선의용군 선견대가 되어 평양으로 귀국한 뒤 이북에 남았다. 1946년 3월 북조선예술가총연맹의 국제문화부 책임자가 되었고 6월 29일 평안남도 예술연맹 위원장에 취임했다. 1947년 해방 2주년을 기념하여 장편보고문학 『노마만리(駑馬萬里)』(주29)를 평양 양서각에서 발행했고, 1948년에는 조선인민출판사에서 『풍상』을 간행했다.

▲ 김사량의 보고문학 『노마만리』

김사량은 1950년 6·25전쟁에 종군작가로 참가해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왔으며 노동신문에 「종군기」를 연재했다. 그는 인민군의 1차 후퇴 때 소식이 끊겼는데 병사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는 북한에서 한동안 사라졌다가 1970년대 초반 작품집과 평론집 등이 출판되면서 ‘혁명작가’로 복권되었다. 한편, 북한은 2013년 6월 25일 그에게 ‘공화국 영웅’ 칭호를 수여했고, 7월 7일 노동신문은 그의 작품 활동과 행적을 상세히 밝혔다. 그에 의하면 김사량은 1950년 9월 17일 마산 부근에서 종군기 ‘바다가 보인다’를 쓰고 후퇴하던 중 건강이 악화되어 지리산으로 들어갔다가 1951년 6월 23일 그곳에서 최후를 마쳤다고 한다.(주30)

김사량과 김태준·박진홍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조선의용군이 있던 옌안으로 탈출하였고, 17세의 소년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했던 김학철은 조선의용군의 분대장으로 활동하다가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으며, 학병으로 갔다가 탈출한 신상초와 엄영식은 조선의용군에 편입되었다. 해방 후 이들은 남과 북, 중국 옌벤조선족자치주 등으로 각기 행로를 달리했으며, 각자의 곳에서 최선을 다해 살았으나 결코 평탄한 삶을 살지는 못했다. 이는 조선의용군(대)이라는 존재의 남북에서의 위치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이제 남북 어디서도 주류가 되지 못했던 ‘조선의용대(군)’에 대해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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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신상초, 󰡔탈출󰡕, 녹문각, 1966; 엄영식, 『탈출-죽어서야 찾은 자유』, 야스미디어, 2005; 정철수 지음, 홍순석 엮음, 󰡔나의 청춘-한 학도병이 걸어온 길-󰡕, 채륜, 2013.

2) 이정식·한홍구 엮음, 『항전별곡-조선독립동맹 자료1』, 거름, 1986, 46〜47쪽

3) 신상초, 󰡔탈출󰡕, 녹문각, 1966, 111쪽

4) 엄영식, 『탈출-죽어서야 찾은 자유』, 야스미디어, 2005, 100쪽

5) 노현주, “‘연안’으로 간 학병들 ; 학병세대와 코뮤니즘”, 『열린정신 인문학연구』 17(2), 2016.8, 221〜222쪽

6) 노현주, 위의 글, 222쪽

7) 조건, 일제 말기 한인 학병들의 중국지역 일본군 부대 탈출과 항일 투쟁, 한국독립운동사연구 56(2016년 11월), 81쪽

8) 창랑포객, “23대 종손 정철수”(https://m.blog.naver.com/jdmose16/221192244461) 참조

9) 자세한 내용은 김명섭, “정철수의 항일운동과 해방 후 민족교육 활동”, 『용인향토문화연구』 제13집, 2013, 115〜143쪽 참조

10) 김학철, 『최후의 분대장』, 문학과지성사, 1995, 11〜12쪽; 이해영, 『1940년대 연안 체험 형상화 연구- 『항전별곡』, 『연안행』, 『노마만리』를 중심으로』, 한신대 석사학위논문, 2000, 14쪽

11) 이해영, 위의 논문, 14〜15쪽

12) 그의 생애는 김호웅·김해양 엮음, 『김학철 평전』, 실천문학사, 2007을 참조할 수 있다.

13) 김명인, “어느 혁명적 낙관주의자의 초상: 김학철론”, 창작과비평, 30(1), 2002. 3., 238〜239쪽

14) 그의 문학에 대해서는 김명인, “어느 혁명적 낙관주의자의 초상: 김학철론”, 창작과비평, 30(1), 2002. 3.; 최병우, 김학철 소설에 나타난 체험의 형상화 방식 연구, 한국문학논총 제56집(2010.12); 이해영, 김학철의 반제혁명 인식의 발전과 작가적 성장, 민족문학사연구, 71권, 2019 등을 참조

15) 최재목, 김태준의 ‘정인보론’을 통해 본 해방전 위당 정인보에 대한 평가, 『양명학』 210(2008.7.), 95쪽

16) 최재목, 위의 글, 95〜96쪽

17) 장문석, 김태준과 연안행, 인문논총(서울대학교) 제73권 제2호(2016.5.31.), 325〜326쪽

18) “김태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 김성동, “현대사 아리랑/ 조선 국문학계의 큰별 김태준”, 주간경향, 2009.2.3

20) 김용직, 『김태준 평전-지성과 역사적 상황』, 일지사, 2007

21) 김학규, “치열한, 너무나 치열한 삶을 살다간 페미니스트 독립운동가 박진홍”, 매일노동뉴스, 2019.9.16

22) 이철,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 다산초당, 2008, 321쪽

23) 이철, 위의 책, 322〜330쪽; 王媛, 한국작가의 항일근거지 체험 연구-김태준과 김사량을 중심으로-, 인하대 석사학위논문, 2010, 17〜27쪽

24) 이철, 위의 책, 330〜332쪽; 최재목, 위의 글, 96〜97쪽

25) 김사량의 자세한 연보는 이상경 책임편집, 『노마만리-김사량 작품집』, 동광출판사, 1989, 410〜415쪽을 참고할 수 있다.

26) 정가람, 김사량 문학 연구, 연세대 석사학위논문, 2002, 15쪽

27) 정가람, 위의 논문, 16〜17쪽, 24〜31쪽 참조

28) 정가람, 위의 논문, 17〜19쪽

29) 노마(駑馬)는 ‘걸음이 느리고 둔한 말’, 또는 ‘재능이 둔하고 남에 뒤지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30) 이승현, “북 공화국영웅 칭호 받은 종군작가 김사량의 최후는?”, 통일뉴스, 201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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