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출신 장기수 정관호(96) 선생이 열 번째 시집 『가고파』 출판을 준비 중에 있다. 시집 출간에 앞서 30여 편을 골라 격일(월 수 금)로 연재한다. 정 선생은 <통일뉴스>에 2008년 8월부터 2012년 5월까지 200회에 걸쳐 시와 사진으로 된 ‘정관호의 풀 친구 나무 친구’를 연재한 바 있다. / 편집자 주

 

 

   비오는 날이 좋다

 

 

언제부터인지 딱이는 모르겠지만

저렇듯 비 오는 날 맞기가 좋다

 

 

버드나무 방죽길을 비 맞으며 걷던 일

울분을 삭이지 못해 물초가 되도록

온 밤 거리를 쏘다니던 젊은 날은 가고

잿마루에 올라 비 내림을 보기가 좋다

 

 

님을 기다리는 마음을 식혀주려는가

첫정에 눈 뜨게 한 사람 모르는 행방

고인(故人)의 숨결로 들릴 듯 말 듯

그런 소리들로 내리는 저 비가 좋다

 

 

점점이 뒤로 흘려 온 삶의 궤적

말글로 담지 못한 부끄러운 사연들

잘못한 일이 잘한 일보다 더 많은

굴곡진 고비 고비가 새삼 되새겨진다

 

 

이제 무엇을 새로 시작할 수도 없으면서

새록새록 떠오르는 하고 싶은 일들

그것들을 다독거리면서 적시는 빗소리

이제 그만, 제발 주책 그만 부려라

 

 

감자 뒷그루에 어제 심은 콩 모종

비를 흠씬 맞으며 잘 자라겠구나

내려앉은 저수지까지는 다 못 채우겠어도

쩍쩍 갈라진 논이야 좀 축여지겠지

 

 

장화를 꺼내 신고 출근할 일은 없고

삽 들고 논꼬를 틀 처지도 아니건만

이리 끌어대고 저리 갖다 붙여도 좋은

복비가 이 산천 골고루 적시고 있으니

 

 

빗방울이 튀겨내는 모양이 보기 좋다

창문 열고 그 소리 듣기 마냥 흐뭇하구나.

 

 

 

저자 소개

1925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남. 원산교원대학 교원으로 재직하던 중 6.25전쟁으로 전라남도 강진에 내려왔다가 후퇴하지 못하고 빨치산 대열에 가담. 재산기관지 ‘전남 로동신문’ 주필 역임. 1954년 4월 전남 백운산에서 생포되어 형을 삶.

저서로는 음악 오디오 에세이집 『영원의 소리 하늘의 소리』,『소리의 고향』이 있고, 시집들 『꽃 되고 바람 되어』,『남대천 연어』,『풀친구 나무친구』,『한재』,『아구사리 연가』, 역사서『전남유격투쟁사』, 장편소설 『남도빨치산』 등이 있다. 이외에도 역편저가 다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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