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다시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 이야기를 다시 하려고 합니다. 잠시 쉰다는 것이 1년을 넘겨 버렸습니다. 그 동안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세상은 많이 변한 것 같은데 어찌 보면 완강하게 버티며 변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변한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그보다도 변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소소한 일상을 통해 그려 보고자 합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과 질책을 부탁드립니다. / 필자

 

▲ [삽화-백소(白笑)]

4시 조금 넘어서 집에서 출발했다. 신돌석씨는 검찰개혁 촛불집회가 열리는 서초역으로 향했다. 5시 반에 서초역에 도착해서 7번 출구로 나왔는데 사람들이 꽉 막혀서 조금밖에 나아가지 못했다. 나가자마자 오래 전에 같은 공장에 다녔던 후배를 만났다. 이렇게 낯모르는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모여 있는 가운데 아는 사람을 만나니 반가웠다. 그 친구는 아는 사람들과 함께 온 듯하였다. 잠깐 같이 서 있다가 옆으로 빠져 나왔다.

6시가 넘어도 집회는 시작되지 않고 성조기 부대의 악 쓰는 소리만 들렸다. 젊은 여자인 듯한데 문재인 사퇴 조국 구속이라는 구호를 성능 좋은 마이크로 계속 떠들어댔다. 이에 맞서서 시민들이 문재인 최고 조국 수호를 외쳤다. 그 상태에서는 누가 누군지 어느 쪽이 더 많은지도 확인하기 어려웠다. 다시 빠져나와서 법원 사거리로 가니 촛불 시민들이 1번 8번 출구 쪽 길을 점거하고 연좌하고 있었다. 아무 프로그램도 없이 그냥 있는 것이었다 대법원 쪽이나 2번 출구 쪽도 드문드문하지만 앉아들 있었다.

대법원 쪽으로 갔다가 법원행정처 쪽으로 가다 윤명식을 만났다. 신돌석씨가 사는 지역의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오늘 집회 현상을 말하니 지도부도 소통이 잘 안 된다고 한다. 그는 성조기 부대들이 촛불 시민들에게 시비 걸 때마다 혼을 내서 쫓아버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와 헤어져서 좀 더 가니 경찰들이 오고 가는 것을 막았다. 알고 보니 성조기 부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궁금하기도 해서 경찰에게 건너편 갈 거라고 하면서 울타리 안으로 들어갔다. 끽해야 2-300정도였다. 다시 나와서 건너와서 골목으로 해서 전진해 가니 빠져나오는 사람들이 있어 들어갈 만했다. 시간이 흐르니 사람들이 조금씩 빠져 나오는 것 같았다.

길을 건너서 대검찰청 쪽으로 가니 거기서 집회를 하고 있었다. 전직 민주당 국회의원이 연설하는 것 같았다. 거기도 사람이 빽빽하게 들어차서 앞으로 나가는 것이 무척 더뎠다. 목소리는 들리는데 전면을 볼 때까지 한참이 걸렸다. 대검찰청 앞에 무대가 있고 서초경찰서까지 꽉 차 있었다. 신돌석씨가 거기 도착한 시간이 9시가 다 되었을 때였다. 구호는 전반적으로 조국 수호였다. ‘이제는 울지 않는다.’ ‘이번에는 지킨다.’ ‘우리의 사명이다.’ 이런 것들이 주요 구호였다. 집회는 흡사 민주당 집회 같아서 신돌석씨는 별로 같이 하고 싶지는 않았다.

도중에 혹시 아는 사람이 있을까 해서 올 만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했는데 전화 자체가 잘 안 터졌다. 그나마 터진 사람은 받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어쩌다 통화가 된 사람들은 이제 뒤풀이하러 식당에 간다고 했다. 다른 일행들이 있는 것 같아서 그냥 알았다고만 했다. 터미널 쪽으로 걸어 내려갔다. 거기에도 집회가 있었는데 두 군데나 되었다. 성조기 집회였다. 이들은 왜 집회를 따로 하는지 모르겠다. 이들은 아무래도 촛불시민보다는 나이가 많이 든 6-70대였지만 간혹 4-50대도 보였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하게 하는지 의아했다.

더 내려갈까 하다가 다시 서초역으로 갔다. 10시가 다 되니 법원 사거리에는 차가 다니고 있었다. 촛불 집회에 거의 빠짐없이 참가했지만 오늘처럼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찬 것은 처음 겪는 것 같았다. 신돌석씨는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게 민심인가? 처음에는 뭐가 뭔지 모르다가 세 시간 넘게 돌아다니다 보니 주최 측은 대검찰청 앞에 자리를 잡고 집회를 했는데 그들의 예상보다 훨씬 뛰어넘는 사람들이 모여서 결국 거기 모인 압도적 다수는 주최 측과는 무관하게 움직인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그냥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두 시간 넘게 아무 통제도 없이 앉아 있거나 혹은 서 있었던 것이다.

집회에서 주로 나오는 구호가 ‘조국 수호’였지만 조국 장관에 대한 수호가 이 많은 사람들의 목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수구세력이 문재인 정권에 대해 공격하는 것에 대해 분노한 시민들이 모였다고 보아야 할 것 같았다. 혼자 갔다가 혼자 돌아가는 귀갓길에 신돌석씨는 흥분을 최대한 가라앉히려고 애쓰면서 이 상황을 분석해 보려고 했다.

집에 도착해 보니 아내가 텔레비전을 보면서 이런 말 저런 말을 했다. 100만이다 200만이다 라고들 한단다. 물론 텔레비전에서는 예전과는 달리 인원 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아내도 흥분해 있었다. 다음 주에는 꼭 가겠단다. 힘찬이와 통화를 했는데 다음 주에 같이 가자고 했다고 한다. 이번에 시민의 힘으로 검찰에 본때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아내는 주먹까지 휘두르면서 외쳐댔다.

그런데 언론의 논조는 좀 이상했다. 서초동과 광화문 양쪽을 비교하면서 세 대결을 했다는 등 하는 것이었다. 신이 난 듯 양쪽 시위를 비교하면서 좌우대결이니 진보보수대결이니 하면서 떠들어댔다. 아내는 저러니까 기레기 소리를 듣는다면서 욕을 해댔는데 신돌석씨가 보기에는 거기에도 적지 않은 수가 모인 것 같았다. 뭔가 이상하고 찜찜했다. 다음 토요일에는 광화문에 들렀다 서초동으로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신돌석씨는 그 다음 토요일인 10월 5일 오후에 광화문에 나가 보았다.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정치 집회를 하는데 공공연히 대통령 탄핵을 외치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청와대로 진출해서 대통령을 끌어내릴 듯 기세가 대단했다. 이들은 서초동에서 시위를 하던 촛불시민들보다 훨씬 더 흥분되어 있는 것 같았다. 증오로 똘똘 뭉친 사람들로 보였다. 그 증오의 대상은 문재인 대통령과 조국 장관이었다. 조국을 당장 구속하라는 현수막이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대체로 70이 넘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4-50대도 좀 있었다. 주로 교회를 통해서 나온 사람들인 것 같았다. 이전의 성조기 부대들과는 달리 돈 받고 나온 사람들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보기에는 사람 수가 너무 많았다. 이들은 자신들이 무척 억울한 경우에 처해 있는 듯이 외쳐댔다. 조국 때문에 자신들의 것을 빼앗겼다는 듯한 투였다.

이제는 신돌석씨도 60이 넘고 머리가 허옇게 세서 그런지 이런 집회에 와도 별로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이런 집회에 올 때마다 부딪히는 사람 중에 ‘빨갱이는 죽여도 돼’라는 섬뜩한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이들은 왜 이렇게 증오에 쩔어 있을까? 그런데 이들의 수가 서초동에 모인 숫자보다 결코 적지 않을 것 같았다. 2시밖에 안 됐는데도 광화문 앞부터 시청 있는 데까지 인파로 북적였다. 물론 서초동처럼 빡빡하지는 않았지만 적다고 하기에는 자신이 없었다.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4시 조금 넘어서 서초역에 도착했다. 지난 번 경험으로 일찍 와야겠다고 생각해서였다. 2번 출구에서 아내를 만났다. 아직 집회가 시작되려면 멀었는데도 서초역 부근은 이미 꽉 차 있었다. 지난번과 다른 것은 무대를 서초역 사거리로 옮겼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앉아 있었다. 신돌석씨 부부도 예술의 전당 쪽으로 난 길에 앉았다. 그런데 그 길은 경사가 져서 앉아 있자니 좀 불편하기도 했다.

태극기 행진 퍼포먼스가 진행되었다. 대형 태극기를 좌우 양쪽에서 들고 집회 참가자들 머리 위로 덮이게 하면서 달리는 것이었다. 중간에서도 태극기를 받칠 수 있도록 공간을 비워 놓았다. 태극기가 성조기 부대에 빼앗겨서 다시 되찾자는 의미에서 기획한 것이라고 한다. 신돌석씨는 좋은 발상이라고 생각했다. 촛불시위 때도 우리도 태극기를 들고 가자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제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었다.

사전공연이 있었다. 무대에 오른 사람들이 격문을 불렀다. 격문은 이번 시위에서 가장 많이 불린 노래이다. ‘조선일보 서정주 박정희까지 일본놈에 충성스런 앞잡이일 때 동상 걸린 손가락을 잘라내가며 해방을 위해 싸웠던 건 백성들이다.’라는 가사인데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신돌석씨는 신이 났다. 친일 적폐와 싸운다는 점에서 시위의 의미가 확실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어서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헌법 제1조’ 등을 불렀다. 모두 2년 전 촛불 시위 때 많이 불렀던 노래들이다. 본 행사 1부에는 주로 연설이 있었고, 2부에는 시민 발언이 있었다. 특이한 것은 검찰 개혁에 대해 서명을 한 교수들이 나와서 연설을 한 것이었다. 꽤 많은 교수가 서명을 한 것 같았다. 또 어느 연사가 자유한국당을 줄이면 자한당이고 빨리 읽으면 잔당이라고 한 부분에서 촛불 시민들의 박수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난주의 시위에 비하면 훨씬 질서정연하였다. 화장실을 가려고 나가서 사방을 다녀 보았다. 지난주보다 영역은 더 넓혀진 것 같았다. 예술의 전당 가까이까지 갔고, 대법원 쪽 길도 더 길게 늘어선 것 같았다. 교대 쪽으로는 교대역까지 인원이 늘어 있었다. 다시 돌아가 보니 태극기 퍼포먼스가 또 한 번 진행되고 있었다. 이어서 이은미의 무대가 마지막을 장식하였다. 오랜만에 보는 대규모 촛불 집회였으나 낮에 본 것 때문에 영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이날 저녁에도 텔레비전은 앞다투어 양쪽을 비교하였다. 그러면서도 욕 먹기는 싫은지 어느 쪽이 더 많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 다음 주에도 양쪽 집회는 대규모로 계속되었다. 태극기 퍼포먼스는 집회마다 진행되었다. 하지만 세 대결로 무엇을 이룰 수는 없는 것 같았다. 결국 총선까지 가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총선 결과가 좋지 않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신돌석씨는 괜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사실 집회 문제라기보다 현안에 대해서 확실한 견해를 갖기가 어렵다는 점이 신돌석씨를 더 괴롭게 했다. 서초동 촛불 집회가 대규모로 벌어지면서 신돌석씨가 처음에 가졌듯이 흥분 상태가 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국민의 뜻이 무엇인지 이제 확실해졌다고 하면서 열을 내곤 하였다. 광화문 집회에 모이는 성조기 부대는 그저 동원된 사람들, 아니면 무시해도 좋을 사람들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서초동 촛불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사람도 신돌석씨가 아는 사람 중에 적지 않았다. 민주당 또는 이른바 친문세력에 의해 선동된 사람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지는 않아도 집회에 아무리 많이 모여도 그것이 선거로 이어질 수는 없는 것이고, 결국 소모적인 일이 된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태극기와 조국기의 대결이라는 식으로 냉소적인 말을 하곤 했다.

다음 주 집회가 있고 이틀 후인 10월 14일에 조국 장관이 사퇴하였다. 이때부터 집회는 여의도로 장소를 옮기었다. 국회를 압박해서 공수처를 설치해야 한다는 뜻으로 옮겼다고 하였다. 그런데 서초동에 그대로 남아서 촛불 집회를 계속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더 친조국이라고 하는 평가가 있었고, 오히려 그 사람들이 대중에게 발언할 기회를 주기 때문에 더 대중적인 집회라고 좋게 보는 견해도 있었다.

여의도로 옮긴 집회는 강 건너에 있는 자유한국당 당사까지 행진을 하면서 마무리하였다. 신돌석씨는 아내와 함께 19일에 여의도로 나갔다. 그런데 11월 초까지 하고 이제 집회를 마무리한다고 한다. 광화문 광장을 되찾아야 한다고 다시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자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여의도 집회를 주최하는 측은 별로 함께 하려는 생각이 없는 듯하였다. 그들은 집회를 소모적으로 계속하는 것보다 총선을 준비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 [삽화-백소(白笑)]

신돌석씨에게 이럴 때 절실하게 그리운 사람이 바로 조철구였다. 하지만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죽기 직전 속초에 있는 그의 누이 집으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의 후배이면서 평생 동지인 장선우가 전화를 했다.

“철구형이 위독하대요. 죽기 전에 한번 가봐야 할 텐데 시간 좀 내주세요. 철구형이 신형을 되게 보고 싶어해요.”

학생 출신들은 학생 때부터 안 선배한테는 이름에 형을 붙여 부르고, 그렇지 않은 연장자들한테는 성에다 형을 붙여서 불렀다. 신돌석씨는 처음에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십 년, 이십 년이 지나도 그런다는 것을 볼 때 왠지 서운한 마음이 들고, 어느 때는 심정이 상당히 상하기도 하였다. 결국 그들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어려운 것인가? 그럴수록 노동자 출신의 친구들과 가까이 지내려고 하다가 그것 역시 속 좁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애써 잊어버리려고 노력하였다.

조철구가 암에 걸려서 요양을 하러 어디론가 갔다는 이야기는 들었었다. 그는 충청도에서 금속노조 활동을 하고 있었다. 아내가 미국으로 간 뒤 불과 몇 년 뒤에 이혼하고, 혼자 살고 있었다. 그를 재혼시키자고 옛날에 한 조직에 있던 사람들이 노력을 했지만 그는 별 관심이 없는 듯하였다. 사람들이 농담식으로 좆이 설 때는 어떡하냐면서 자극했지만 그는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장선우가 모는 차를 타고, 장선우와 동기이면서 조철구의 후배인 김배영과 셋이서 갔다. 그가 요양하러 간다고 한 곳은 누이동생이 살고 있는 동해안이었다. 좀 한적한 곳이었다. 그의 누이동생 집은 바닷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네의 연립주택 2층이었다. 그는 이제 항암치료에 지쳐 있는 상태라고 하였다. 췌장암인데 몸이 좀 이상하다고 느낀 지 불과 석 달 만에 위독해진 것이었다.

누워 있는 그를 보고 신돌석씨는 깜짝 놀랐다. 그의 원래 모습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그는 말라 있었다.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어서 마치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골룸을 연상케 하였다. 그리 큰 키는 아니지만 중키에 건장한 몸이었던 그가 이렇게 되었다는 것이 정말 믿어지지 않았다. 조철구는 간신히 대화를 할 정도였다. 병원에서도 더 이상 치료할 게 없다고 했다는 것이 누이동생의 말이었다.

“신형, 왔네.”

신돌석씨를 보자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와 같이 파업을 하던 날 공장을 들썩이게 할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로 연설을 하던 그가 떠올랐다. 그런 그가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 신돌석씨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쳐다보기만 했다. 그처럼 웃을 수는 없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이제 한 생명이 저물어 가는구나. 불의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고,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살지 않았던 한 사람. 냉철하면서도 뜨거운 가슴을 지녔던 한 인간이 이제 병마에 시달리다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이다. 그의 인생은 한 편의 영화나 드라마 혹은 소설이 되어도 좋을 정도로 극적인 것이었다.

그는 전라남도의 어느 바닷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광주에 사시는 큰아버지가 아들이 없어서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 입양이 되었다. 당시까지는 큰집에 아들이 없으면 제사 모실 아들이 있어야 한다면서 작은집 아들이 입양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때부터 그에게는 어머니가 두 분이었다. 고향에 두고 온 어머니를 항상 그리워했지만 마음대로 가서 볼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술만 마시면 어머니와 관련되는 노래를 부르기를 좋아했다.

불효자는 웁니다, 비 내리는 고모령, 지평선은 말이 없다, 어머니 전상서 등이 그가 잘 부르는 노래였다. 그는 남도 출신답게 뽕짝을 구성지게 잘 불렀다. 그와 같은 공장에 같은 날 입사하고 불과 3일 뒤에 생산 3과에서 회식을 하였다. 생산 3과는 프레스반과 도장반으로 되어 있는 곳이었는데 도장반 반장의 처가가 하는 삼겹살집이 주로 회식을 하는 곳이었다.

프레스반 반장이 새로 들어온 사람 중에 노래 불러보라고 하자 그가 일어나서 부른 노래가 ‘울어라 기탓줄’이었다. 식당 안이 앵콜로 난리가 났다. 그 덕에 그는 학생 출신이라고는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공장 생활을 잘 할 수 있었다. 신돌석씨도 그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학생 출신이라고는 그가 해고되기 직전에 말할 때까지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다. 

 

필자 정해랑(鄭海郞)

서울에서 태어나 여의도 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노동정책연구소 정책실장, 경희총민주동문회 회장,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재생의 담론 21세기 민족주의>(2010년, 공저), <공주와 도둑들>(201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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