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코로나19’와 함께 인류의 임종이 가까워 오지 않나 하는 우려와 두려움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고 있다. 엘리자벹 큐버러스가 주도하는 인간의 ‘죽음학 thanatology’ 혹은 ‘임종학’을 학문적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이란 죽음의 침상에서 환자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를 관찰하는 것 정도라고 한다. 지금 지구촌 70억 인구가 거의 모두 지구의 종말과 함께 죽음의 침상에서 임종을 기다리는 환자들이라고 한 번 생각해 보자. 죽음학이 그러하듯이 죽음의 침상에서 인간들이 보이는 태도와 반응을 관찰하는 것이 할일일 것이다.

46억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 지구의 암석층에는 그동안 수많은 생명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멸종한 기록들이 남겨져 있고 이러한 층을 연구하고 거기에 이름을 매기는 학회를 ‘국제층서학회’(혹은 층서학회)라고 한다. 층서학회에 의하면 지금 우리는 과거 일만 년 동안의 살기 좋던 홀로세 holocene를 끝내고 다른 세로 접어들고 있는 데 크뤼천란 학자는 이를 ‘인류세 anthropoocene’라 불러야 한다고 한다. 이에 클라이브 해밀턴은 『인류세』(이상북스, 2018)에서 한 개인이 아닌 인류 전체의 임종학을 다루고 있다. 

해밀턴은 인류의 임종을 막으려는 네 부류의 운동을 말하면서 ‘신인간중심주의’를 제시한다. 신인간중심주의가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지만 지금 전개되고 있는 다른 세 가지 운동들의 과오를 지적하는 데서 해밀턴의 주장이 분명해진다. 물론 해밀턴이 그렇게 연관시키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신인간중심주의가 그 내용면에 있어서 주체사상의 그것과 같다고 보아 인류세에 대한 ‘주체세 Juchecene’라는 층서명을 독자적으로 여기에 소개하려고 한다. 

인류세가 인류가 멸종한 다음 미래의 암반에 기록될 명칭이라면 주체세는 다가올 임종을 막아보자는 처방전이라는 점에서 인류세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해밀턴은 자기 책의 마지막 끝 단어를 ‘두 번 다시 아니어야 never again’로 끝내고 있다. 지구에 두 번 다시 이런 재앙이 오지 않게 하는 처방전은 과연 무엇인가? 

‘인류세’란 무엇인가?

‘에를레프니스 erlebnis’란 말은 ‘갑자기 우연히 생긴 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말로 ‘별안간’으로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생각해 온 방식대로는 지구와 인간의 역사에 별안간 나타난 엄청난 균열의 규모를 포착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20세기와 21세기 초의 특정한 사회현상을 뛰어 넘어 인간의 조건과 지구상에서 인간의 위치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을 촉구한다.”(해밀턴, 102쪽) 

이제 겨우 5000여 년도 안 되는 인간의 역사를 말하기엔 간에 풀칠 할 정도라고 봐야 한다. 삼국시대, 고려시대가 아닌 층서학자들이 지구의 지질을 연구할 때 사용하던 절age, 세epoch, 기period, 대era, 누대eon 같은 용어들이 더욱 실감나게 되었다. 코로나가 인류 대멸종의 전조가 아닌지 지구촌이 함께 공포에 떨고 있다. 그러나 코로나의 가장 큰 원인이 지구의 기후 변화에 있다면 질병의 원인을 지방, 인륜, 세회(사회), 세시(우주변화)의 네 가지로 분류한 이제마에 귀를 기울일 때이다. 인간의 질병이 오존층 파괴에 의한 기후변화와 코로나19가 무관하다 할 수 없게 되었다.

오존층 파괴 연구로 노벨 화학상을 받은 바 있는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의 파울 크뤼천 박사는 2000년 "인류 전체가 지구에 큰 영향을 미쳤으므로 현 지질시대를 ‘인류세(人類世·Anthropocene)’라고 불러야 한다"고 했다. 지질시대의 가장 큰 단위가 신생대, 중생대 같은 대(代)이고, 중간이 페름기, 쥐라기 같은 기(紀)이고, 가장 작은 단위가 홀로세, 플라이스토세 같은 ‘세(世)’이다.

인류세가 다른 세와 다른 점은 세의 주인공인 인류가 스스로 붙인 이름이란 점이다. 충적세와 홍적세 그리고 홀로세 등이 있지만 공룡이 자기 살던 세에 이름을 붙인 것은 아니다. 인간들이 그렇게 이름 붙인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류세는 스스로 인류 자신이 ‘인류세’를 만들었고 이름마저 스스로 붙여 보았다. 그리고 자기의 이름대로 임종의 침상에 지금 누워 있다.

크뤼천 박사가 ‘인류세’란 명칭을 붙인 다음 이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클라이브 해밀턴은 ‘인류세 시대의 인간의 운명’을 단행본으로 논하고 있다. 과학은 물론 철학과 신학을 망라한 시각에서 멸종 앞에 선 인류의 미래에 관해서 치밀한 언급을 하고 있다. ‘인류세’에 대하여 반론으로 ‘인간세’, ‘자본세’ 등 다른 이름을 거론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글에서는 인류세 대신에 ‘주체세’를 논해 본다. 그것도 해밀턴이 말한 신인간중심 사상이 주체사상의 ‘사람중심’과같이 들리기 때문에. 

1945년과 인류세의 시작

역사시대가 아닌 지질시대 구분법에 따라 인류문명사를 구분하면 우리가 사는 시대는 신생대 Cenozoic 제4기에 속하는 홀로세 Holocene이다. 신생대가 시작된 지는 6600만 년밖에 되지 않았고, 그 가운데 제4기가 시작된 지는 고작 258만 년 전이다. 그리고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1만 년 전부터 홀로세에 들어섰다. 그런데 바야흐로 그 홀로세가 우리 인간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끝나고 인류세도 인위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크뤼천이 1945년을 찍어서 인류세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이유는 원자폭탄이 투척된 이래로 지구촌 곳곳에서 핵실험의 결과로 10만 년이나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 방사성 동위원소가 거의 영구적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말름(Andreas Malm) 같은 사람은 인류세는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와 함께 시작되었기 때문에 ‘자본세 Capitalocene’라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한다. 여성해방 운동가 해러웨이(Donna Haraway)는 자본주의란 궁극적으로 부유한 백인 남성중심 문화의 결과이기 때문에 인간 자체와 대척점에 있는 술루(Chthulu)를 따와 ‘술루세(Chthulucene)’라 하자고 한다. 

지금까지 인류세를 정의하는 제 관점에서 볼 때에 인류세는 우리 한반도의 운명과 어느 하나 연관되지 않는 것이 없어 보인다. 1945년과 자본주의, 그리고 백인 남성 문화가 인류세 정의의 중심에 등장하는 용어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남북이 같이 인류세보다 더 적합한 용어를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 한민족의 관점에서 홀로세 다음에 급격하게 다가오는 새로운 세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와 이에 대처하는 방향은 무엇인가?

지구과학자들이 홀로세가 끝나고 인류세가 시작되었다고 믿는 주된 이유는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의 급격한 증가와 그로 인한 지구 시스템 전반에 미치는 연쇄적 영향 때문이라 한다(해밀턴, 16쪽). 1945년 제2차 대전이 끝나고 한반도는 분단되었고 지구 시스템에는 급격한 혼란이 조성되었다. 변화의 속도와 파급력이 인류 역사상 전체를 통해 볼 때에 전에 없던 일들이 벌어졌다. 그래서 이 시기를 ‘거대한 가속도의 시대’라 부른다. 100만 년 이래의 암석 기록들을 보면 1945년 원자폭탄 피폭 이후 지표면에 퇴적된 방사능이 급작스럽게 쌓이게 되었고 이를 ‘밤 스파이크 Bomb spike’라 부른다.

이 ‘밤 스파이크’와 함께 일본은 패망하였고 우린 해방과 함께 분단이 되었다. 우리 한반도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에 인류세도 자본세도 술루세도 다 옳다. 1945년이 인류문명사에서 새로운 의의를 갖는 이유는 ‘자연’이란 개념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자연이란 인간이 어떻게 어거할 수 없는 것이라 정의되어 왔는데 1945년 이후부터는 인간이 자연을 만들고 있으며 그 만들어 놓은 자연에 인간 자신이 종속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미세먼지 같은 경우는 인간이 만든 결과이지만 인간 자신도 어쩔 수 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자연, 곧 ‘제2의 자연’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과거 1만년 홀로세 동안 인간은 따뜻한 기후, 그리고 맑은 공기와 물을 즐기며 잘 살아 왔다. 다시 말해서 홀로세가 주는 제1의 자연 속에서 ‘자연으로 되돌아가자’고 구가하면서 잘 살아 왔는데 이제 인류세의 도래와 함께 제2의 자연, 즉 인간이 만들어 놓은 자연을 향해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읊을 수 있겠느냐 이다. 우리에겐 돌아 갈 자연은 없다. 그럼 어디로 가야 하나?

공기도 공기이지만 앞으로 인류에게 있어서 더 큰 문제는 물이다. 인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물이 점점 부족해져 간다는 것이다. 미국 엘에이 근처 빅 베어란 산정에는 산정호수가 있다. 오랜만에 방문을 했을 때에 그 많던 물이 거의 다 사라지고 바닥만 드러나 있었다. 과연 물부족이란 사태가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하늘엔 마실 공기가 없고 땅엔 마실 물이 없다는 것은 멸종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제2자연의 도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세계와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를 전도시키고 말았다. 1세기 전, 아니 30여 년 전만 해도 예측할 수 없었던 일이다. 해밀턴은 경고하고 있다. “지구 경로의 돌이킬 수 없는 위험한 변화가 우리의 미래이며, 역사적 균열이 존재하기 이전 시대에서 물려받은 사고방식들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때이다”(해밀턴, 70쪽).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잘났다고 자랑하던 그러한 관념부터 뿌리째 뽑아버려야 한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GNP나 GDP를 자랑하고 매년 경제성장률이나 각국마다 비교하는 사고방식을 언제까지 더 유지할 것인가?

인류세 앞에 잘못 진단한 운동가들 

그럼 인류가 이 지경이 되도록 만든 책임이 누구에게 있었던 것인가? 당장 1989년 동구 공산권이 무너질 때에 자본주의의 만수무강을 외치고 공산주의의 영원한 패망을 선전하던 사람들이 지금 인류세에 대하여 무슨 언질을 던지고 있는 것일까? 인류가 화석으로 변할지도 모르는 위기 앞에서 지금도 자본주의의 영원한 승리를 부르짖고 있을 것인가? 

‘인류세’의 저자 해밀턴은 인류 멸종의 위기 앞에 임종의 병상에 처해 인간을 진단하고 처방하는 족속들을 네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① 위기는 오직 신의 섭리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인간의 무기력함을 주장하는 ‘종교적 근본주의자들’, ② 이제 인간에게 해결할 능력이 남아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극단적 환경운동가들과 생태학자들-‘포스트휴머니즘’, ③ 인간에게 위기 극복의 강한 가능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 힘을 행사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에코모더니스트’, ④ 인간의 강함과 지구의 강함을 더욱 강화시켜 양자가 맞물리게 해야 한다는 ‘신인간중심주의’가 그것이다. 표로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이들 네 부류의 사람들이 지금 인류의 임종의 침상에 나타나 너도 나도 자신들이 해결사라고 자처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부류의 사람들이 하는 일들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신인간중심주의를 제외하곤 문제를 더 악화시킬 뿐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면서 ④번째로 ‘새로운 인간 중심주의(the new anthropocentrism)를 대안으로 들고 있다. 이 마지막 부류의 주장은 환경 파괴자들이든 보호론자들이든 자기들의 힘을 과신하고 남용해 무절제하게 사용해 왔기 때문에 앞으로 더 힘을 절제 있게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해밀턴은 ‘새로운 인간 중심주의’라고 말하고 있으나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는다. 다만 반자본주의, 반백인남성주의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면서 해밀턴은 서양 철학과 신학 전반에 걸쳐 비판적이다. 서양 철학의 주류가 된 이원론적 사고 구조와 뉴턴-데카르트적 세계관은 인간과 자연을 대립구조를 만들어 결국 환경 파괴 주범이 되었다.

인류세가 반자본주의 그리고 반백인남성주의를 겨냥한다면 미국에 대척점에 서 있는 곳과 나라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고, 그 곳은 ‘북부 조선’ 혹은 ‘북조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 어떤 희망이 있을 것이란 기대를 걸고. ‘인류세’란 말 자체가 인류의 멸종을 전제한 후의 지구과학에 부쳐진 이름이라면 이 시점에서 이 지구를 구제한다는 전제를 할 때에 그 곳은 당연히 자본주의와 백인남성이 지배하지 않는 곳이 될 곳이고, 그렇다면 우리의 눈은 ‘북부 조선’으로 쏠릴 수밖에 없다.

자본세와 인류세

‘자본세’란 말을 만들어 낸 사람은 제이슨 무어이다. 그는 크뤼천의 ‘인류세’란 말에 반기를 들고 ‘자본세’란 말을 만들어 내었다. 층서위원회는 되도록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용어를 선택하려고 한다. 홀로세 다음으로 ‘자본세’가 집중조명 되는 이유는 제2의 자연이 자본주의를 가능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때문에 산업혁명 이후 소비지상주의가 만연했고, 화석연료 생산업체들의 로비의 영향력으로 1945년 제2차 대전 이후부터 놀랄 만큼 지구 온난화가 가속화 되었다. 

1945년, 하필이면 한반도 분단과 때놓을 수 없는 이 기간에 국제층서위원회가 ‘인류세’라고 명명한다면 지구의 종말과 함께 한반도는 지구의 지층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백인남성 그리고 부자 자본주의에 대척점으로 혹자들은 정착토착민(settler colonialism) 즉, 미국 인디언을 손꼽는다. 인류세 담론을 비판하면서 자본주의-백인남성은 1492년 이래로 정착토착민들을 살던 곳에서 추방하고 살해한 후, 거기다 오늘날 자기들 중심의 국가를 건설하여 드디어 인류세를 도래케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세가 말하는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토착민들이 살아 온 방식과 그들의 토착지식과 정신세계를 배워야 한다고 한다. 정착토착민을 강화시켜 다른 백인 남성부류를 약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걸리버 여행기’에서 토착민들이 외래인들을 밧줄로 묶어 두면 힘을 못 쓸 줄 알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외래인들은 밧줄을 끊고 말았다.

토착민들이 백인 부유 남성들과 맞서 싸우기란 바위에 계란 던지기 정도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과연 자본주의-백인남성들에 맞서고 인류세를 대신할 수 있는 정체는 없다는 말인가? 

크뤼천은 책의 결론에서 ‘새로운 인간’ 즉, ④‘신인간중심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신인간상이란 인간의 ‘강해진 힘’과 ‘지구의 강해진 힘’이 결합되는 것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신인간상은 인간의 강해짐이 자연을 약화시켰기 때문에 환경 재앙이 왔다는 ②포스트휴머니즘이나 존재론적 다원주의를 반대한다. 다른 한편 ③인간을 강하게 함으로 지구를 약하게 하려는 에코모더니즘도 부정한다.

크뤼천은 “일부의 철학자의 입장은 지구의 강해진 힘만을, 다른 입장은 인간의 강력한 힘만을 인정한다. 또 다른 일각에서는 두 힘을 모두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④“우리가 지구와 인간의 힘 모두를 인정할 때 우리는 인간이 직면한 새로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이를 두고 인류세의 ‘이율배반’이라고 한다. 인류세의 이율배반이란 “인간은 더 강해졌다. 자연도 더욱 강해졌다”와 같다. 인류 문명사란 인간과 자연 간의 힘겨루기이었으며 인간과 지구가 모두 강해지는(win-win) 것이 새로운 인간상인데, 그것은 이율배반적 혹은 역설적인 것이어야 한다. 

이를 ‘이중진리’라고 한다. 인간과 자연은 지금까지 대립 구도이거나 어느 하나가 다른 것에 예속 내지 종속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낡은 인간상이다. 그래서 인간과 지구가 모두 동시에 강해지도록 하는 것이 신인간상이라고 한다. “신인간 중심적 자아는 근대의 주체처럼 자유로이 부유하지 못하며 항상 자연에 엮인 채 자연의 구조 안에서 매듭을 이룬다.”(91)

인간이 자연과 매듭같이 맞물린다는 것은 ‘국지적 local’이기도 하고  ‘보편적 global’이기도 한 ‘glocal’이다. 자연에서 벗어나 있지만 자연에 의해 제약받고 있으며, 힘과 자주성을 누리고 있지만 그 자주성이 방종에 쓰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신인간중심적 자아이다.  

신인간중심주의와 다른 견해들의 비교 

해밀턴은 인간과 지구(자연)에 ‘약해진 힘’과 ‘강해진 짐’을 적용하여 위의 표와 같이 네 가지로 지금까지 나타난 이론 혹은 운동을 분류한다. 지구에 살고 있는 인류의 임종을 앞두고 임종의 침상에서 보이는 네 가지 종류가 일목요연하게 표로서 제시되었다. 우측 하단의 ④신인간중심주의는 인간의 힘도 지구의 힘도 모두 강해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다른 세 가지 이론과 운동 차원에서 볼 때에 모두 비판의 대상일 수 있다. 

①은 종교적 근본주의적 입장으로 인간도 자연도 모두 무기력하여 오직 신의 섭리만이 답이라는 주장으로 신천지를 비롯한 기독교의 빛바랜 주장으로서 제일 처음으로 폐기처분 될 수밖에 없다. ③에코모더니즘 운동은 잘 알려진 대로 인간의 기술이 갖는 힘을 휘두르거나 강화시켜서 지구 자연을 더 제어해 나가야 한다는 모더니즘을 더 강화시키자는 운동이다. 

②포스트휴머니즘은 신인간중심주의와 인간의 힘을 강화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지구를 인간이 제압해 약화시켜야 한다는 점에서는 다르다. 이들은 마치 에덴동산을 거니는 아담과 하와가 신으로부터 자연을 잘 다스리라고 부탁 받은 청지기와 같이 지구상에서 행세하려 한다. 그러나 이 지구상에는 노예에 대한 착한 주인이 없듯이 착한 청지기는 없었다. 에코모더니즘은 이렇게 아직도 홀로세에 인간이 살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②포스트휴머니즘은 신인간 중심주의 강한 지구 그리고 약한 인간을 대망하는 주장을 하고 있는 영향력을 가장 많이 끼치고 있는 조류이다. 오늘날 위기가 인간의 힘이 비대해지고 지구가 약해진데 그 원인이 있기 때문에 역으로 지구(가이아)에 힘을 실어 주고 인간을 약화시키자는 주장이다. 신유물론이라고도 하며 인간의 청지기 직분을 박탈해 자연에 돌리려 하나 역설적이게도 이 운동은 오히려 인간의 힘을 더욱 강화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오늘날 주변의 페미니즘과 생태철학 그리고 포스트 식민주의 운동이 모두 포스트휴머니즘 운동에 해당한다. 

신인간중심주의는 포스트휴머니즘이 자연을 약화시키는 것을 반대한다. 서로 맞물리자면 인간과 지구(자연) 간에는 서로 균형이 같거나 맞아야지 어느 하나가 약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최근에 와서야 자기 당착에 직면하여 인간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기울고 있다. 신인간중심주의가 주장하는 인간과 자연 간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요즘 페미니즘이나 생태환경론자들의 주장을 보면 교모하고 공허한 말장난으로 자가당착적 모순에서 벗어나려하는 모습을 여실히 발견할 수 있다.

포스트휴머니즘은 뉴턴-데카르트적 이원론을 비판하는 데서 출발했지만 결국 자기 자신들이 인간과 지구를 이원론적으로 대립시키는 오류를 범했다. 이에 ④신인간중심주의는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을 극복하나 정신과 물질의 상호 맞물려 있음을 인지하고 인간도 지구도 상호 강화되어야 한다고 한다.

주체사상과 신인간중심사상 

지금까지 신인간중심주의를 기준으로 다른 세 가지 견해들을 각각 비교해 볼 때에 해밀턴이 말하고 있는 신인간중심주의는 주체사상에 많이 접근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과 자연의 상호 맞물림 그리고 뉴턴-데카르트적 세계관의 극복이란 관점에서 볼 때에 두 개의 사람중심 사상은 멀지 않고 가깝다.

주체사상이 해밀턴의 인류세의 새인간중심주의와 일치하는 면은 유물론과 관념론 이원론의 극복이라 할 수 있다. 포스트휴머니즘이 갈망하는 대단원이 이원론의 극복에 있었지만 오히려 더 균열을 강화시킨 면이 있다면 주체사상은 이에 적절히 대처했다. 중국과 구소련이 낫과 망치(유물론)를 당 마크로 삼은 데 대하여 ‘북조선’은 거기에 붓을 넣었다. 이는 상징적으로 유물론과 관념론의 통일이라 할 수 있다.

인간과 지구의 힘을 모두 강화시켜야 한다고 할 때에 그것은 궁극적으로 관념론과 유물론의 통일이라 할 수 있다. 인간중심의 세계관의 논리에 의하면 세 가지 생명력인 물질적 생명력, 정신적 생명력, 사회협조적 생명력에 의하여 추동된다. 그래서 인간의 3대 생명력의 발전수준에 알맞게 인간의 자주적 지위와 창조적 역할의 수준이 결정된다. 이것은 주체사상이 인간을 자주성, 창조성 그리고 의식성으로 정의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그래서 주체사상을 인간중심 세계관에서 보면 객관적 존재성의 측면만을 물질세계의 본질적 특징으로 보는 유물론이나 주관적 측면만을 본질적 특징으로 보는 관념론은 모두 배격된다.

즉, 김정일의 「주체사상에 대하여」에서 “역사에는 여러 가지 유형의 세계관이 있었지만 사람을 중심으로 세계에 대한 관점과 입장을 밝힌 것은 없었습니다. 세계를 관념이나 정신의 세계로 보는 관념론자들은 더 말할 것이 없고(세계관 1), 지난 시기 세계를 물질의 세계로 본 유물론자들도 사람을 중심으로 세계에 대한 관점과 입장을 밝히지는 못하였던 것입니다(세계관 2). 주체사상은 사람을 단순히 세계의 한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세계를 지배하는 주인으로 내세움으로써 종래와는 달리 세계의 주인인 사람을 중심으로 세계와 그 발전에 대하는 새로운 세계관을 확립하였습니다(세계관 3). (괄호 안은 필자의 것임)

그러면 유물론과 관념론을 조화시킬 존재는 무엇인가? 주체사상은 그것이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주체사상에서 말하는 ‘사람’의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히 파악하게 된다. 사람을 관념으로만 파악하려는 세계관1과 물질로만 파악하는 세계관2의 한계와 잘못을 극복하고 그것을 종합시켰을 때에 사람 그 자체가 떠오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주체사상의 세계관3이다. 여기에 독특한 사람의 의미가 있다. 이러한 주체사상에서 말하는 사람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서 주체사상에 대한 온갖 오해와 곡해가 발생하게 된다. 

먼저 ‘사람 중심’이란 말이 무슨 새로운 맛과 의미를 갖느냐고 비판한다. 역대 철학으로서 사람을 다루어 그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는 철학이 어디 없었느냐고 비아냥거린다. 한마디로 말해서 진부하다는 것이다. 서양 철학사에서는 르네상스로부터 인본주의 또는 인도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18세기 계몽기에 이르러서는 존 로크, 루소로부터 대표되는 사회정치 철학이 인간의 자유, 평등, 정의, 권리 등에 관한 문제를 다루게 되었다. 

르네상스 이후 서구에 등장한 인간 중심 사상은 거의 기독교적 인간관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도 초기에는 원시 고대의 자연 종교의 신관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면서 등장하였다. 그러나 중세기 스콜라 철학은 인간을 다시 인격신의 예속물로 만들어놓고 말았다. 르네상스 이후 서구 철학은 인간을 신의 복속 상태에서 해방시키려 했으며, 그 결과 빚은 과오는 인간을 너무 개별적이게 했으며 인간을 원시 동물적 형태로 끌고 가고 말았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서구의 인간주의는 신중심 아니면 개인주의적이었다. 그리고 물질 아니면 정신으로 파악했다. 그 결과 인간을 자연과 유리된 존재로 만들고 말았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다윈과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인간관인 것이다. 인간을 경제적 조건과 성적 본능으로만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로크나 밀의 인간관은 인간을 개체적 존재로만 파악함으로써 인간 소외를 초래했고 이 점이 바로 오늘날 자본주의 시민사회가 갖고 있는 인간상의 병폐이다. 이러한 인간관을 형성시킨 데는 라이프니츠의 단자론이 한몫 거들었다고 할 수 있다. 창 없는 단자 windowless monad 는 창살 없는 아파트적 공간 속에 인간을 밀폐시키고 말았다.

위에서 말한 ①종교 근본주의, ②포스트휴머니즘, ③에코모더니즘, ④신인간중심주의를 주체사상적 입장에서 볼 때에 먼저 세 가지는 모두 서양 철학이 범한 과오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해밀턴이 제시한 ④신인간중심주의는 주체사상과 대동소이하다고 본다.

그래서 인류세를 ‘주체세’로 대치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 이유는 해밀턴이 아무리 새인간중심주의를 강조해 말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서구 전통 속에서 그것을 구가하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인류의 종말이란 임종의 침상에서 그 어느 의사도 환자를 바로 진단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명색과 구호는 ‘신인간중심주의’라고 하지만 정치 사회라는 현실 속에서 구가하기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주체사상은 이미 역사의 현장에서 실천을 통해 검증되고 있다. 이를 해밀턴은 ‘자연과정(natural process)’이라고 한다(책97). 필자는 이를 항일유격대원들이 춥고 굶주림 속에서도 왜 야생동물에 손을 대지 않은 데서 찾으려 한다. 회고록(『세기와 더불어』) 전권에는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비록 나중에 전향하기는 했지만 김동하란 남부군이 쓴 ‘노고단은 알고 있다’를 읽던 중에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주인공이 이현상을 만나러 갔을 때에 막사 앞으로 노루가 지나가는 데 총으로 쏘지 않는 것을 보고 의아해 한 동료에게 그 이유를 물은 결과 “우리 항일유격대와 야생 동물은 같은 운명이라네. 서로 돕지 않으면 이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남기 어렵지”라고 말하는 데서 회고록에서 말하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유격대원들은 산속에서 굶어 죽어도 야생동물을 살상하지 않았다. 자연과정을 몸으로 체험한 것이다.

실로 회고록은 많은 사실을 알게 하지만 야생동물과 유격대원들 간의 공동체 운명 정신은 인류세 앞에서 돋보이게 한다. ‘자연과정’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 주체사상이 죽어 멸종돼 가는 인류에 희망을 던져 인류세를 대신하는 주체세로 남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한다.   

그래서 대동강변 주체탑 옆에 서 있는 당마크는 인류가 멸종된 다음에 이 지구에 한 무리의 인간들이 살았다는 한 표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인간과 자연지구의 조화, 궁극적으로는 정신과 물질의 조화, 그것 이외에 인간이 다음 세에 남길 다른 것이 무엇일지 아직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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