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전쟁 파시즘 체제와 강제동원

이광수는 ‘민족을 지키기 위해서’ 친일행위를 했다고 주장했고, 서정주는 ‘일본이 망할 줄 몰라서’ 친일했다고 ‘변명’했다. 그러나 이들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독립운동가들은 옥사하거나 사형장에서 생을 마감하거나 감옥과 예방구금소에 갇혀 있었다. 국내에서는 비밀리에 반일 활동을 벌였고, 해외에서는 총을 들고 일제와 직접 무력투쟁을 벌이며 해방의 날을 준비하고 있었다. 소극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일제말기 군국주의 정책의 등쌀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깊은 산골에 숨는 사람들도 있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일제의 지배체제를 벗어나 탈출을 선택한 사람들도 있었다.

일제 말기 학병에 끌려갔던 이들 중 적지 않은 숫자가 일본군 부대를 탈출해 독립운동 진영으로 넘어갔다. 이들은 식민지 조선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은 지식엘리트였고, 사회·경제적으로도 지주, 부농이나 부유한 상공인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일제의 전시 파시즘 체제가 아니었다면 이들은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모험을 감행하지는 않았을 사람들이다.

일제의 전쟁 파시즘 체제가 가동되기 시작한 것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부터였다. 일제는 임시자금조정법(1937), 국가총동원법(1938) 등을 제정하고, 사상범을 탄압하기 위해 대화숙(1937),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1938) 등을 조직했다. 민족개량주의 단체였던 흥업구락부(1937)·수양동우회(1938) 조차도 강력한 탄압 대상이 되었다. 일제 말기 민족개량주의나 자치주의를 표방했던 인물들 대부분이 친일파로 전향했다.

1937년 이후 황국신민화·내선일체를 내세우며 ‘황국신민의 서사’ 낭독과 천황궁을 향한 동방요배를 강요하는 등 민족말살정책을 추진했다.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1938), 시국대응 전선(全鮮)사상보국연맹(1938), 국민총력조선연맹(1940) 등의 친일동원단체가 조직되어 전면적인 강압정책이 실시되었다. 창씨개명(1939)이 강요되었고, 조선어학회 탄압 사건(1942)이 일어났으며 우리말(조선어) 사용이 전면 금지(1943) 되었다.

중일전쟁을 앞두고 사상 통제를 위해 공포된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1936)은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1941)으로 강화됐다. 1941년 3월 치안유지법이 전면 개정되어 ‘재범의 우려가 현저한 사상범’, 즉 전향을 거부하는 사상범을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예방구금이 가능해졌다. 이에 따라 전향하지 않은 사회주의자들이 감옥과 예방구금소에 수용되어 해방 후에야 풀려났다.

일제의 전시 통제 경제체제 전환과 함께 자원수탈이 심화되었다. 1939년부터 공출·배급제가 실시되었고, 1943년에는 이를 위해 조선식량관리영단이 설립되었다. 지하자원의 약탈, 공업부문 통제, 강제 저축운동 등 조선인의 피땀을 짜내는 수탈체제가 강화되었다. 인적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징용·징병·위안부 명목으로 강제연행이 실시되었다. 1938년부터 이른바 ‘특별지원병’ 제도를 시행해 1938〜43년 사이 최소 2만5천명의 조선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1944년 4월부터는 징병제가 실시되어 1944〜45년에 육해군을 합쳐 21만여명의 조선청년들을 강제징집했다. 국민징용이라는 이름으로 1939〜45년 동안 일본 등지의 탄광·광산·토건현장 등에 100만명 이상의 조선인 노동자를 강제동원했다. 1939년 이후 한반도 내에서 650만명, 일본에 152만명, 군대요원으로 20〜30만명, 군위안부 14만명 등 총 780여만명의 조선인이 강제동원되었다.(주1)

이를 두고 ‘강제’동원이 아니라 ‘노무’동원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강제성’이 없이 조선인들이 돈을 벌기 위해 탄광이나 징용에 갔고, 자의로 군대에 갔으며, 일본군이나 관이 개입한 ‘위안부’의 동원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에 비해 차별대우를 받지도 않았다고 주장한다. 극히 단편적인 사례를 들어서 일제의 ‘강제’동원을 부정한다.(주2)

▲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결성식(매일신보, 1938년 7월 25일자)

학병-조선 최고 고등교육인력의 ‘강제’동원

학병의 경우에도 이름은 ‘특별지원병’이었지만 실제로는 강제징병이었다. 일제는 1943년 6월 25일 ‘학도전시동원체제 확립요강’을 제정한 후 동년 10월 20일 ‘육군특별지원병임시채용규칙’을 공포했다. 10월 25일부터 11월 20일까지 ‘지원자’ 접수 기간이었는데, 전문대학 재학이상의 조선인 청년이 그 대상이었다. 말이 ‘지원’이었지 실제로는 부모, 형제, 처자에 대한 위협과 공갈이 뒷받침되었다. 조선총독은 ‘전원 지원을 믿는다’고 공개적으로 협박했으며, 조선주둔군 사령관을 비롯한 총독부 고위관리들도 ‘전원 지원’하라고 강요했다. 조선총독부는 당시 조선청년들에게 영향력이 컸던 여운형·안재홍의 이름을 도용해 이들 명의로 학병권유 권고문을 『경성일보』에 조작게재하는 바람에 큰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주3) 학병에 응하지 않은 사람들은 ‘비국민’으로 매도되었고, ‘응징사’(膺懲士)라는 이름으로 강제징용으로 끌고 갔다. 지원거부로 강제징용된 이들은 가혹한 작업 환경 속에서 힘든 강제노동에 혹사당했다.(주4)

▲ 야마다 신이치(山田新一)의 ‘조선학도병’(1939)

일제의 강제동원 중에서도 학병이 갖는 의미는 각별한 면이 있다. 학병에 동원된 이들은 당시 2500만명의 조선인들 가운데 최고의 고등교육을 받은 조선인 중 극소수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학병의 대상이 되었던, 일제 말 대학을 다니고 있던 연령층은 위로는 1917∼18년생부터 아래로는 1922∼23년생까지 1920년을 전후하여 약 5년에 걸쳐 태어난 이들이었다. 1944년 당시 고등교육을 받는 조선인 학생의 숫자는 약 7천2백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주5) 이 숫자에서 학병징집 대상이 아니었던 사범계, 이공계(의학부 포함)는 제외하고, 만주·지리산 등지로 도피하거나, 징집을 거부하여 강제‘징용’된 학생들을(주6) 뺀 나머지 학생들이 학병으로 나갔다. 조선인 대학·전문학교 학생 4,385명이 일본군에 ‘특별’입영한 것은 1944년 1월 20일이었다.(주7)

학병의 숫자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일본군측 자료에 의하면, 1944년 학병으로 동원된 조선인 청년은 현역병 3,457명, 제1보충병 436명을 합해 3,893명이었다. 이 중 조선 내에서 동원된 인원은 총 3,117명이었다. 전체 대상 3,366명의 90%가 넘는 수치다. 반면, ‘제84회 제국의회 설명자료’에 의하면 조선인 학병 적격자 6,203명 중 입대자는 4,385명이었다. 이는 1944년 8월 제작된 것으로 학병동원의 최종 현황으로 볼 수 있는 수치이다.(주8) 반면, 정안기는 1944년 일본 정부 자료에 근거해 학병 적격자 6,101명 중 4,610명이 지원하고, 1,491명이 지원을 회피했으며, 실제 검사를 받은 사람은 4,217명 중 합격자는 3,117명인데 정식 입영자는 질병 및 기타 사유 67명을 제외한 3,050명이었다고 주장한다.(주9)

친일에서 자유로웠으나 반공주의에 갇힌 ‘학병 세대’

▲ 학병출신들의 집단기억 ‘학병사기’ 1권

학병에 동원된 이들은 당시 조선 최고의 고등교육을 받은 최고의 엘리트였다. 그들은 조선인 중에서 극소수에 속했다. 이들은 해방 후 한국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김수환(천주교 추기경), 민병권(육군중장, 국회의원), 민충식(호주대사), 박동운(한국일보 논설위원), 신상초(중앙일보 논설위원), 이병주(작가), 임원택(서울대 법대 교수), 장도영(육군참모총장), 장준하(사상계 발행인, 재야 지도자), 김준엽(고려대 총장), 한운사(작가), 현승종(고대 교수), 황용주(MBC 사장), 강영훈(국무총리), 이철승(국회의원), 윤천주(문교부장관), 이일규(대법원장), 박동진(외무부장관), 이동찬(코오롱 회장), 최영희·장도영·김종오·민기식·김용배·김계원(육군참모총장), 한신(육군대장), 박병권(합참의장), 김형일(참모차장), 김익렬·박경원(육군중장), 김웅수(육군소장)같은 이들이 대표적이다.(주10)

‘학병세대’로 불리는 이들은 대부분 친일의 경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들은 한 사회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자부심이 있었다. 작가 이병주는 1987년에 발행된 학병들의 자기기록인 『학병사기(學兵史記)』 1권 간행사에서 “우리는 그곳에서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면 우리 스스로가 조국의 희망이어야 한다고 깨달았다”라고 썼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학병세대는 자신들이 새로운 사회 건설의 주체로서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해방 후 남한 사회에서는 오랫동안 친일파 또는 부일협력자들이 활개를 쳤으나 학병출신들은 친일의 전력을 갖지 않았고 ‘식민지 전락의 책임’도 없었다. 장준하, 김준엽, 신상초 등 『사상계』 편집위원들이 이러한 학병세대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주11)

그러나 남한에 자리를 잡은 학병출신들(세대)은 ‘친일’ 문제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지만,(주12) 반공과 냉전이라는 새로운 굴레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장준하다. 장준하의 경우 1960년대 중반 이후에야 함석헌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비로소 우익 반공주의라는 이념의 우산 아래서 점차 벗어나기 시작했다.(주13) 북한에 자리를 잡은 학병출신들은 반공과는 다른 반자본주의 또는 반미의 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남북 분단이 모든 인간의 사상적 선택을 강제할 수는 없었지만, 학병세대들은 대체로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 따른 냉전의 굴레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렇게 본다면 과연 그들이 한 사회를 대표하는 지성이며 정신적 순결성을 가진 존재라는 자부심이 과연 타당한가에 대해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집단기록과 개인수기 등 다수기록을 남긴 학병세대

학병세대 중에서 목숨을 걸고 일본군을 탈출해 광복군에 참여한 이들로는 고대 총장을 지낸 김준엽, 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 투쟁의 선봉에 섰다가 포천 약사봉 등반도중 의문의 죽음을 당한 재야인사 장준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돈(큰아들 김홍일의 장인)으로 광복회 회장을 지낸 윤경빈, 독재정권 시절 조작간첩 사건의 변호를 도맡았던 강골 변호사 태윤기 등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일본군 부대를 탈출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 광복군이 되었고, 광복군의 미군과의 합동작전 계획에 따라 미국 OSS(전략첩보국, CIA의 전신) 특수훈련을 받고 한반도 침투작전을 준비했다. 이들은 『나의 독립군 시절-장정』(김준엽), 『돌베개』(장준하), 『회상의 황하-피어린 독립군의 항쟁수기』(태윤기)와 같은 체험기록을 남겼다.(주14)

▲ 학병세대를 대표하는 작가 이병주의 ‘관부연락선’

일본군 부대를 탈출한 뒤 가까운 곳에 있었던 중국 팔로군으로 넘어가 결국 연안의 조선의용군에 참여했던 신상초, 엄영식도 기록을 남겼다. 이 두 사람은 해방 후 중국 국공내전에 참여하기 않기 위해 조선의용군을 탈출해 북한으로 갔다가 다시 월남했다.(주15) 조선의용군에서 활약한 학병출신으로는 해방 후 중국에 남은 정철수도 있다. 그는 중국 제남에서 탈출하여 조선의용군에 투신, 항일 투쟁을 전개하다 해방을 맞았으며, 연길현 정부 교육과장, 길림중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고 연변대학교 일문과 교수로 재직하였다.(주16) 이외에도 학병을 탈출해 조선의용군에 가담해 활동한 사람들이 많지만 남한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주17)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하준수, 윤재현, 김이현,전상엽,박순동, 이가형, 유재영, 김문택,최홍희, 손종영, 장도영 등이 수기를 남겼고,(주18) 이병주, 이가형, 한운사 등은 소설을 남겼다.(주19) 학병을 피하기 위해 만주로 도망간 김수영, 학병대상자였지만 학병에 가지 않은 손창섭, 학병대상이었지만 사범대생 예외조항 때문에 합법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극소수의 행운아 중 한명인 선우휘 등의 글에도 학병세대의 경험이 녹아 있다.

하준수는 학병거부자로 덕유산, 지리산, 쾌관산 등에 숨어서 ‘보광당’을 조직해 반일 활동을 벌이다가(주20) 후에 남로당의 유명한 빨치산 대장 남도부(南道富 또는 南到釜)로 활약하는 인물이다.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의 주인공 하준규의 실제모델이기도 하다. 윤재현·김문택은 장준하·김준엽 등과 함께 광복군에서 활동했고, 유재영은 중국군에서, 김이현은 하얼빈 독립운동단체에서 활동했으며, 전상엽·최홍희는 평양학병동맹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해방 후 풀려났다.(주21) 박순동은 버마전선에서 탈출해 영국군 포로가 되었다가 미국의 한반도 침투작전인 ‘냅코(Napko)작전’ 요원으로 선발되어 특수훈련을 받았다.(주22) 이가형은 버마전선에서 종군하다가 연합군 포로가 되어 싱가포르 포로수용소에서 1년간 생활했다. 장도영과 손종영은 일본군 장교로서 해방을 맞았고,(주23) 이병주는 문학평론가 김윤식에 의하면 학병간부후보 출신으로 장교로 근무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주24) 이처럼 학병출신들은 각자 다른 경험을 바탕으로 학병 생활과 탈출, 그리고 그 후의 경험을 각기 다른 각도에서 기록하였다.

학병 출신들의 집단적인 증언도 있다. 1946년에 학병동맹이 『학병』 잡지를 2회 발간했고, 1962년에 만들어진 ‘1.20동지회’가 『청춘만장』(1973, 1.20중앙동지회)과 『학병사기(學兵史記)』(전4권, 1987〜1998)를, 그리고 한광반학병동지회가 『장정육천리』(1979)를 펴냈다. 1.20동지회는 학병으로 끌려간 1944년 1월 20일에서 따온 것으로, 청춘만장이나 학병사기는 학병에 간 모든 사람들의 체험을 기록한 것이다. 반면에 한광반학병동지회는 일본군 부대를 탈출해 광복군 장교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체험(한광반 교육, 탈출과 장정, 그리고 임시정부와 광복군 체험) 기록이다. 전자가 학병출신 전체의 체험기록이라면 후자는 한광반 출신들의 기록이다.(주25) ‘한광반 출신 33명’은 학병에 동원된 4천여명, 그중에서도 중국전선에 파송된 3천여명의 1%에 해당하는 수치다. 그들은 당시 ‘조선의 정화’였던 지식청년(4천여 명) 중에서, 다시 중국전선으로 파송된 3천여명 중에서, 그리고 일군에서 탈출한 수십 명 중에서 33인, 즉 소위 ‘1%라는 의식’이 만들어낸 집단성을 뒷받침하는 구별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기록에는 대민국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다는 강한 자부심이 드러나고 있다.(주26)

▲ 일제의 조선 청년 강제동원(EBS ‘역사채널 e’ 캡쳐)

평양 학병동맹 사건과 국내의 소규모 비밀결사 조직

학병에 동원된 사람 가운데 흔쾌히 응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일반지원병 중에는 일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회적 지위 상승이나 입신출세의 기회로 보았던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학병 출신들은 굳이 목숨을 걸지 않더라도 잘 살 수 있는 지위에 있던 이들로 침략 전쟁의 총알받이로 동원되는 것을 원할 이유가 없었다. 그 때문에 학병에 동원된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훈련거부나 탈출 등의 방법으로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했다. 학병에 동원된 이들 중에서 정확히 몇 명이 탈출했는지에 대한 통계는 없다. 조건은 “확인된 수치만을 기준으로 패전 때까지 예상 탈출 인원을 추정하면 일본군을 탈출한 한인 학병의 규모는 최소 150명을 넘어설 것으로 판단된다”고 했다.(주27) 행정안전부에 연구용역 자료에 의하면, 학병 동원 인물 중 광복군에 투신한 인물은 43명, 독립유공자 포상수여자는 71명이 확인되고 있다. 학병 탈출 정황이 구체적으로 기술된 40명의 명단이 기록된 자료도 발굴되었다.(주28) 엄영식은 조선의용군에 있었던 탈출학병이 20여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주29)

집단적인 학병저항사건으로는 평양학병사건이 유명하다. 1944년 학병으로 징집당해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제42부대에 배속된 김완룡(金完龍)·박성화(朴性和)·최정수(崔正守) 등은 일본군을 탈출하여 항일전선에 참가하기로 하고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이들은 ‘①사상을 초월해 조국의 독립 쟁취 위해 투쟁 ②군부 내부에서 교란, 일본군 패망 추진 ③무장봉기하고 백두산으로 잠입 ④최종 목표는 오직 독립 쟁취’ 등의 행동강령을 정했다. 김완룡이 총책, 박성화가 참모장, 참모로 전상엽(全相燁)·최홍희(崔泓熙)·이도수(李道秀), 부대조직책으로 최정수가 결정되었다.(주30)

이들은 같은 부대에 배속된 학병 30여 명을 규합하는 동시에, 이웃 일본군 제47포병부대·제44보병부대·제48공병부대·제50치중병부대로 조직을 확대시켜 동지를 포섭했다. 이들은 일단 부대를 탈출하면 산악지대에 근거지를 설치한 뒤 일본군과 유격전을 전개할 것을 목표로 설정했다. 그들은 소총·대검·실탄·의약품·식량 등을 사전에 비축하고 11월 1일로 거사일로 정했다. 그러나 이들의 거사는 한국인 헌병보조원의 밀고로 발각되어 70여 명의 주동자가 붙잡히고 말았다. 1945년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최고 8년에서 3년까지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8·15광복과 동시에 출옥하였다.(주31)

이들의 최종 목적지는 함경북도 혜산군 보천보였다. 보천보는 1937년 6월 김일성의 항일빨치산부대가 국내진공작전을 펼쳤던 바로 그곳이었다. 이들은 김일성부대를 찾아서 평양사단을 탈출해 북상하려 했던 것이었다.(주32) 일제 말기 김일성부대를 찾아가기 위해 준비하다가 발각된 사건이 종종 발생하는데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가 국내의 청년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따라서 이 평양 학병 사건은 학병탈출 사건임과 동시에 일제 말기 국내에서 준비되고 있던 해방에 대비한 ‘무장투쟁’ 또는 ‘봉기준비’의 성격도 갖고 있었다.(주33)

▲ 보천보 전투를 다룬 동아일보 호외.

변은진의 연구에 따르면, 일제 말기 국내 각지에서 조직된 소규모 비밀결사는 수는 100여개를 훨씬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소규모 비밀결사들의 주요 활동 내용 중 하나는 민족적으로 각성하지 못한 조선민중을 계몽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이었다. 이들은 중일전쟁 말기부터 조선의 독립방도는 무장투쟁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 김일성 등의 만주 항일무장투쟁이었다. 이를 테면 ‘신동아동지회’는 만주의 ‘김일성 부대와 연락·합류하려’ 했고, 1940년 평양의 민족노동당은 “완전한 독립국가인 공화국 조선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합법적 점진주의를 채용하면 도저히 성공할 수 없으므로 단연 무력에 의한 폭력혁명으로 해결을 기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단정하고 무장폭동을 준비하기도 했다. 비밀결사에 참여한 청년·학생들은 만주로 건너가 무장부대에 합류하려는 의지를 보이는 경우가 많았고, 국외 무장세력이 국내로 진경하는 ’결정적 시기‘가 오면 민중봉기를 일으켜 그들과 함께 일제를 타도할 것을 고민했던 것이다.(주34)

일제 말기로 갈수록 대다수 비밀결사의 성격 또한 민족적 경향이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화녕회(和寧會), 태극단(太極團), 무등회(無等會), 무궁단(無窮團), 근목당(槿木黨), 순국당(殉國黨), 백의동맹,(白衣同盟), 화랑회(花郞會) 등 조직 명칭만 보아도 그런 경향을 쉽게 알 수 있다. 비밀결사 내에서 사회주의 학습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에도 인민전선전술의 영향 등으로 민족적 성격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했다. 많은 경우 사상적 지향에 대한 고민은 있었으나 ‘독립 쟁취’라는 민족적 요구가 주된 것이었다.(주35)

‘냅코작전(Napko Project)’의 주인공 박순동

학병에 갔다가 탈출해 광복군이 된 이들의 이야기는 이제는 널리 알려져 있다. 1971년 장준하가 『돌베개』를 출간하면서 탈출학병들의 광복군 참여 활동이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개인차원의 활동에 머물렀다. 80년대 이후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독립운동사 연구가 진전되면서 탈출의병의 광복군 활동은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반면 2000년대 이후 미국 자료들이 확보되면서 알려진 인물들의 이야기도 있다. 학병탈주자들이 태평양 건너 미국 땅에서 목숨을 걸고 항일투쟁을 위해 헌신한 이야기다. 장준하·김준엽이 중국대륙에서 일본군을 탈출해 광복군을 찾아갔을 때 버마전선에서도 일본군을 탈출한 3명의 조선인 학병이 있었다. 박순동·박정무·이종실은 버마에서 인도-이집트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OSS의 한반도 침투작전에 참가했다.(주36)

정병준에 따르면, 이들 가운데 박순동은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의 사실상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김범우의 실제모델이라고 한다. 또한 김성종의 소설 『여명의 눈동자』의 주인공 장하림의 모델이기도 하다. 김범우와 장하림은 두 작품에서 다소 다르게 묘사되고 있지만, 같은 한 인물을 모델로 하여 “소설적으로 재형상화한 것”이라는 이야기다.(주37)

▲ 김성동의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한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학병출신과 일본군 ‘위안부’의 경험이 등장하는 이 드라마의 주인들은 실존인물을 모델로 해 재창조되었다.

『태백산맥』의 김범우는 중도파 지식으로 학병동원(1943) 후 탈출, 미 OSS 훈련 참가(1945), 귀국 후 순천 중학교 교사 부임(1946.3), 한국전쟁 시기 빨치산 전북도당 문화선전부 근무, 미군 체포 후 강제징발되어 통역, 미군부대 탈주 후 인민군 투항,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어 귀향한 것으로 그려져 있다. 해방직후 남한 현실에 안주하지도 그렇다고 그 반대편인 좌익의 편에 설 수도 없었던 고뇌하는 지식인 김범우의 모습은 실제 당시 중도파 지식인들의 모습과 닮아서 큰 공감을 얻었다. 김성종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된 MBC 창사 30주년 특집극 <여명의 눈동자>는 일본군 ‘위안부’ 출신의 여옥(채시라)과 학병탈주자 좌익 최대치(최재성)의 비극적 사랑을 근간으로 굴곡진 한국 근현대사의 수많은 사건들을 펼치며 시청자의 큰 사랑을 받았다. 드라마의 장하림(박상원)은 냉정한 현실주의자로 묘사되고 있는데, 학병으로 동원된 뒤 일본군에서 탈주해 미 첩보기관인 OSS에서 특수공작 활동을 했으며, 해방 후에는 미군정에서 일하는 것은 그려져 있다.

김범우와 장하림의 모델이 된 박순동은 일제 말기 학병으로 동원된 후 버마전선에서 일본군을 탈출해 영국군에 투항한 뒤 미 첩보기관 OSS의 ‘냅코작전’(Napko Project)’에 참여했다가 실행되지 못하는 바람에 전쟁포로로 귀국해 순천 미군정청의 통역관으로 근무한 경력을 갖고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박순동이 조정래의 외삼촌이었으며,(주38) 김성종 소설의 주요 모티브가 된 자전적 기록 「모멸의 시대」의 필자였다는 점이다.(주39)

독실한 불교집안에서 태어난 박순동은 만해 한용운과 함께 불교청년회 운동에 참여했던 매형 조종현의 밑에서 승려수업을 받으면서 초보적인 항일의식을 갖게 되었고, 이는 학병 탈출로 이어졌다. 장준하·김준엽이 중국전선에서 탈출해 광복군을 찾아갔을 때 버마전선에서 일본군을 탈출한 조선인 학병 3명이 영국군에 투항했다. 같은 부대에 있었던 조선인 학병 박순동·이종실과 이가형은 처음 함께 탈출을 계획했으나 말라리아에 걸려 병약했던 이가형은 마지막 순간 제외되었다. 일본군을 탈출한 두 사람은 1945년 3월 26일 영국군에 인도되었다. 1주 뒤 일본군 기병대를 탈출한 박형무가 이들과 합류했다. 이들 3명은 포로심문 과정에서 반일감정을 서슴없이 토로했고, 뉴델리 주재 미 첩보기관 OSS(전략첩보국)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OSS가 이들에 관심을 가진 것은 이유가 있었다. 1944년 중반부터 OSS는 한반도 침투계획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945년 1월 ‘비밀정보 수집을 위한 일본적진에 대한 요원침투 특수계획’을 작성했고, 이를 위해 중국전구 OSS 활동을 강화했다. 특히 OSS는 한국인을 활용한 한국·만주·일본 침투계획을 강력히 추진했다. 이런 과정에서 중국전구 OSS는 독수리작전(Eagle Project), 화북작전(North China Project), YENZIG4작전, 불사조작전(Phoenix Project), 칠리미션(Chilli mission) 등을 추진했고,(주40) 워싱턴본부는 냅코작전(Napko Project)을 추진했다.(주41) 이들이 냅코작전에 필요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중국을 통한 침투계획은 김구의 충칭임시정부, 광복군 2지대·3지대와 연계해 진행되었다. 워싱턴본부가 추진했던 냅코작전에는 이승만의 심복이었던 장석윤과 첩보공작의 달인 아이플러가 가담했다. 이승만은 2만5천명 규모의 한인 게릴라부대를 창설하는 것이 가능하다며 미국측에 집요하게 요청했으나 OSS로서는 대규모 부대가 아니라 소수 정예의 첩보공작이 필요했다. OSS는 이승만의 추천으로 10여명 안팎의 한인 요원들을 확보한 상태였다. 이 가운데는 이승만 정권 시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장기영(체신부장관), 이순용(내무부장관), 장석윤(치안국장, 내무부장관), 김길준(미군정 고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주42)

‘냅코작전’의 좌절과 ‘모멸의 시대’

1944년 7월 OSS 부책임자 굿펠로우는 책임자 도노반에게 한인들을 훈련시켜 공중 혹은 잠수함으로 한국에 침투시키는 방안을 제안했다. 이후 굿펠로우의 잠수함을 이용한 한국 침투 방안은 냅코계획의 핵심 침투방법으로 부각되었다. 이런 가운데 1945년 4월 26일 OSS 인도지부의 월킨슨으로부터 OSS 워싱턴의 아이플러에게 영국군에 투항한 2명의 한국병사(박순동·이종실)가 적극적인 반일의지를 표명하며 연합군측 작전에 동참하기 원한다는 내용의 전문이 도착했다. 이들은 동경을 떠난지 불과 18개월밖에 되지 않아서 일본에 대한 최신 정보를 갖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4월 28일 OSS 워싱턴본부는 이들을 냅코작전에 참가시키기를 원한다며 필요한 조치에 대해 문의했다. 이 와중에 박형무의 탈주도 발생했다.(주43)

영국군은 이들 3명의 포로를 미국으로 보낸다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제네바협약에 따르면 포로를 전쟁목적에 이용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영국 포로들을 미국으로 데려가 특수작전에 투입하는 것은 국제협약 위반이었다. 미국무부는 국제협약을 위반하며 이들을 입국시킬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박순동 등의 항일의지가 완강한데다가 OSS 또한 대일전 승리를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을 때였다. 우여곡절 끝에 5월 17일 미 국무부가 3명에 대한 비자면제를 허가했고, 이들은 5월 22일 뉴델리의 OSS 인도지부로 인도되어 워싱턴행 비행기를 탑승하게 된다.(주44)

▲ 냅코프로젝트(‘KBS 역사채널 그날’ 화면 캡쳐)

박순동, 이종실, 박형무 3명이 인도에서 워싱턴으로 향하던 1945년 5월 하순, 미국 본토에서는 이들이 참가할 OSS의 한반도 극비침투작전인 ‘냅코프로젝트’가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 이 냅코작전 계획이 본격화 될 수 있었던 것은 장석윤의 역할이 컸다. 만 40세의 그는 사이판·괌 등지에서 포로가 된 한인노무자 100여명이 수용되어 있던 위스콘신 맥코이 포로수용소에 잠입해 필요한 정보를 획득하기도 했다. 냅코작전에 참가할 한인요원 19명이 결정되었다. 김강(金剛)(주45), 김필영(Pil Young Kim), 김현일(Hyen Il Kim), 박기벽(朴基闢)(주46), 박순동(朴順東), 박형무(朴亨武), 변일서(邊日曙), 변준호(卞埈鎬), 유일한(柳一韓)(주47), 이근성(李根成), 이종실(李鍾實), 이종흥(Chong Hung Rhee), 이초(李超), 이태모(李泰摸), 장석윤(張錫潤)(주48), 차진주(車眞宙), 최진하(崔鎭河), 최창수(Staley D. Choy), 하문덕(Harr, Moon Duck) 등이었다.(주49)

냅코작전에 참가한 한인들의 연령대는 20대 3명, 30대 8명, 40대 6명, 50대 2명이고, 미혼 6명, 결혼 13명이었다. 한인요원들은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로스앤젤레스 연안에 위치한 산타 카탈리나 섬에서 1945년 6월부터 9월까지 외부와 격리된 채 고된 유격훈련, 무선훈련, 폭파훈련 등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의 침투작전은 실행되지 못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된 상태에서 일본은 항복을 선언했고, 이들의 임무도 종결되었다.(주50)

일본이 패망하자 상황은 급변했다. 미군은 완전히 안면을 바꾸었다. 미군에 입대했던 재미한인들은 1945 9〜10월에 제대했다. 그러나 맥코이 포로수용소 출신 3명과 버마에서 탈출한 학병 3명의 운명은 달랐다. OSS와 미국 군부는 냉정하고 단호했다. 이들을 모두 하와이 포로수용소로 보내버린 것이다. 한때는 목숨을 걸고 일본과 싸울 ‘전우’였으나 일본이 패하자 하루아침에 ‘포로’ 취급을 한 것이다. OSS와 미국은 제네바 협약을 무시하고 한인포로들을 전쟁에 동원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 고심했을 뿐이었다. 의리도 무엇도 없었다. 한인포로들에게는 냅코프로젝트 실무책임자 아이플러가 발급한 감사장 한 장 뿐이었다. 이들은 P.M.(Prison of War: 전쟁포로) 마크가 찍힌 포로복을 입고 하와이 포로수용소에 갇혔다. 그야말로 ‘모멸의 시대’였다.(주51)

박순동은 포로수용소에서도 적극적으로 한인들의 권리를 위한 일을 했다. 박순동 등은 포로 신분으로 갇혀 있으나 조국해방을 위해 전선에 싸운 투사라는 자부심을 갖고 활동했다. 포로수용소장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이들의 활동을 물심양면 지원해주었다. 이들은 모두 1945년 12월 21일 하와이를 출발해 1946년 1월 11일 인천항으로 귀국했다. 귀국 후 이들은 평범한 삶을 살았다. 박순동은 귀국 직후 순천주둔 미군정청 통역관을 거쳐, 제지회사 사원, 순천공업중학교·벌교중학교·문태중고등학교 교사 생활을 했다. 1965년 신동에 ‘냅코프로젝트’ 참여를 바탕으로 한 논픽션 「모멸의 시대」가 당선된 이후 논픽션 작가로도 활동했다. 작가 조정래는 외삼촌 박순동의 이야기를 토대로 『태백산맥』의 김범우를 창조해냈다. 박순동이 쓴 「모멸의 시대」를 바탕으로 김성종이 『여명의 눈동자』의 장하림을 만들어냈다.(주52)

실존인물을 바탕으로 문학적으로 재창조되면서 문학작품의 주인공이 탄생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학병출신 이병주의 소설에 등장하는 대부분 주인공도 실존인물이 모델이다. 역사와 시대를 다룬 문학작품의 경우는 모든 등장인물의 모델이 현실에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리얼리즘 문학은 역사, 시대, 현실과 동떨어져 탄생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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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朴慶植, 『朝鮮人强制連行の 記錄』, 未來社, 1965; 강만길, “침략전쟁기 일본에 강제동원된 조선노동자의 저항”, 『한국사학보』 제2호, 1997; 변은진, “일제 침략전쟁 조선인 ‘강제동원’ 노동자의 저항과 성격”, 『아세아연구』 제108호, 2002; 정병준, 박순동의 항일투쟁과 미 전략첩보국(OSS)의 한반도 침투작전”, 지방사와 지방문화 6(2), 2003.11, 225쪽;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지원」 홈페이지 자료실

(http://www.pasthistory.go.kr/cms/CmsPageLink.do?link=/jiwon/about/about_03.do) 참조; 정혜경, 『징용 공출 강제연행 강제동원』, 선인, 2013, 51쪽

2) 이영훈 외, 『반일종족주의』, 미래사, 2019, 67〜113쪽 참조

3) 정병준, 박순동의 항일투쟁과 미 전략첩보국(OSS)의 한반도 침투작전”, 지방사와 지방문화 6(2), 2003.11, 226쪽

4) 배영수, “일제말기 병력동원정책의 전개와 평양학병사건”, 『한일민족문제연구』 3(한일민족문제학회, 2002), 118〜119쪽

5) 김준엽의 『장정(長征)』에서는 ‘7천명’ 가량으로 보고 있고, 『학병사기』(1.20학병시기간행위원회, 1987)

6) 학병 징집을 거부하여 강제 징용된 학생들도 최소 4백 명 이상 된다. 양호민, 한우근, 여석기, 계훈제 등이 대표적이다.(김건우, “월남학병세대의 해방 후 8년-학병세대 연구를 위한 시론”, 『민족문학사연구』 57, 2015, 303쪽)

7) 김건우, “월남학병세대의 해방 후 8년-학병세대 연구를 위한 시론”, 『민족문학사연구』 57, 2015, 303쪽

8) 조건, “일제 말기 한인 학병들의 중국지역 일본군 부대 탈출과 항일투쟁”, 『한국독립운동사연구』 56, 2016. 11, 83〜84쪽

9) 이영훈 외, 『반일종족주의』, 108〜109쪽

10) 학병출신 중에는 특히 군 장성이 된 인물이 많다. 군사영어학교 졸업생 110명중 68명이 학병출신이었는데 이 가운데 대장 4명, 중장 12명이 배출되었다. 그 외에도 7기특별반, 8기특별반, 육사2기 등에 들어가 장성이 되었다. 대장급만 총 6명(민기식, 김종오, 김계원, 김용배, 한신, 백석주)이었고, 중장·소장 등 장성이 수십명이었다.(“제79화 육사졸업생들-학병출신 장군”, 중앙일보, 1982.11.23.)

11) 김건우, 위의 글, 304〜305쪽

12) 학병 출신 중 상당수가 간부후보생으로 지원했고, 일부는 장교가 되었다. 간부후보생을 지원했다는 것은 자발적으로 일본군에 복무할 의사를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어서 친일의 여지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처음부터 일본군 장교나 만주군 장교가 되고자 했던 이들과는 차이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13) 김건우, 위의 글, 311〜315쪽

14) 그들의 책은 『나의 광복군 시절-장정』(김준엽, 나남, 1987), 『돌베개』(장준하, 사상사, 1971), 『회상의 황하』(태윤기, 감은출판사, 1975) 등이다.

15) 그들의 책은 신상초, 『탈출-어느 자유주의자의 수기』(녹문각, 1966), 엄영식, 『탈출-죽어서야 찾은 자유』(야스미디어, 2005)이다. 특히 냉전이 한참이던 때 출간된 신상초의 책은 “강도 높은 공산주의 비판을 통해 자신의 사상검증을 의식했다”고 보이나, 2000년대 출간된 엄영식의 책은 “중국공산군과 의용군 지도자들에 대한 긍정적인 묘사가 나타나는” 등 바뀐 시대의 영향도 작용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노현주, “‘연안’으로 간 학병들; 학병세대와 코뮤니즘”, 열린정신인문학연구(원광대 인문학연구소) 17(2), 2016.8, 221〜222쪽)

16) 정철수 지음, 홍순석 엮음, 󰡔나의 청춘-한 학도병이 걸어온 길-󰡕, 채륜, 2013 참조.

17) 학병을 탈출해 조선의용군에서 활동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정식·한홍구, 『항정별곡』(도서출판 거름, 1986),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중국신문 한국독립운동기사집(1)-조선의용대(군)(2008), 염인호,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53. 조선의용군·조선의용대』(경인문화사, 2009)에도 단편적으로 나온다.

18) 하준수, 「신판임거정-학병거부자의 수기」(󰡔신천지󰡕, 1946.4~6. 3회 연재); 윤재현, 『사선을 헤매이며』(국제문화협회, 1948); 김이현·최정식, 『학병탈출기』(영웅사, 1948) → 김이현,『멀고 먼 귀로』(베드로서원, 1991); 전상엽,『살아있는 한』(1966); 박순동, 「모멸의 시대』(신동아, 1965년 9월호. 『암태도 소작쟁의』, 2003, 수록); 이가형 「버마전선 패잔기」(신동아, 1964년 11월호); 유재영,『7인의 탈출』(1993); 김문택,『탈출기』/『광복군』(1995, 독립기념관); 최홍희, 『태권도와 나』(전3권, 다움, 1998~2003); 장도영, 『망향』(2001, 송이당); 손종영, 『학병』(2008, 북코리아).

19) 이병주, 『관부연락선』(중앙일보사, 1987); 『지리산』(한길사, 2006), 이가형, 『분노의 강』(경운출판사, 1993), 한운사, 『현해탄은 알고 있다』(정음사, 1961).

20) 하준수, 「신판임거정-학병거부자의 수기」, 󰡔신천지󰡕, 1946. 4~6.(총 3회 연재)

21) 최지현, “학병의 기억과 국가-1940년대 학병의 좌담회와 수기를 중심으로-”, 한국문학연구 32집, 474〜476쪽

22) 정병준, 박순동의 항일투쟁과 미 전략첩보국(OSS)의 한반도 침투작전”, 지방사와 지방문화 6(2), 2003.11, 223〜224쪽

23) 조영일, 학병서사 연구, 서강대 박사학위논문, 2015, 50쪽.

24) 조영일, 학병서사 연구, 서강대 박사학위논문, 2015, 78쪽.

25) 조영일, 학병서사 연구, 서강대 박사학위논문, 2015, 52〜108쪽 참조.

26) 조영일, 학병서사 연구, 서강대 박사학위논문, 2015, 76〜90쪽 참조.

27) 조건, “일제 말기 한인 학병들의 중국지역 일본군 부대 탈출과 항일투쟁”, 한국독립운동사연구 56, 2016. 11., 102쪽

28) 행정안전부과거사업무지원단, 일제의 조선인 학도지원병 제도 및 동원부대 실태 조사 보고서(2017) 참조

29) 엄영식, 『탈출-죽어서야 찾은 자유』, 야스미디어, 2005, 100쪽; 노현주, 위의 글, 225쪽

30) 배영수, “일제말기 병력동원정책의 전개와 평양학병사건”, 『한일민족문제연구』 3(한일민족문제학회, 2002), 133〜135쪽

31) 배영수, 위의 글, 138〜139쪽

32) 정병준, 박순동의 항일투쟁과 미 전략첩보국(OSS)의 한반도 침투작전”, 지방사와 지방문화 6(2), 2003.11, 228쪽

33)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변은진, “일제 말 비밀결사운동의 전개와 성격, 1037〜1945”,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8(2001)을 참조할 수 있다.

34) 변은진, “일제 말 비밀결사운동의 전개와 성격, 1037〜1945”,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8(2001), 281〜282쪽

35) 변은진, 위의 글, 283〜284쪽

36) 정병준, “박순동의 항일투쟁과 미 전략첩보국(OSS)의 한반도 침투작전”, 『지방사와 지방문화』 6(2), 2003.11, 223〜224쪽. 아래의 내용은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정병준의 글을 참조, 요약한 것임을 밝힌다.

37) 정병준, 위의 글, 219쪽

38) 조정래, “발문: 최초이며 가장 탁월한 논픽션 작가”, 『암태도소작쟁의』, 이슈투데이, 2003

39) 정병준, 위의 글, 219쪽

40) 김광재, 『한국광복군의 활동연구: 미전략첩보국(OSS)과의 합작훈련을 중심으로』, 동국대 박사학위논문, 1999; 한시준, 『한국광복군 연구』, 일조각, 1993 참조.

41) 정병준, 위의 글, 232〜233쪽

42) 정병준, 위의 글, 235〜236쪽

43) 정병준, 위의 글, 237〜238쪽

44) 정병준, 위의 글, 239〜240쪽

45) 김강과 변준호는 모두 민족혁명당 미주지부에서 활동했고, 친임정 입장을 취했다. 미주지부가 친임정과 반임정으로 분열하면서 입대했다.

46) 장석윤과 함께 한인 모집에 중추 역할을 담당했다.

47) 유한양행을 창립한 기업인 그 유일한이다.

48) ‘몬태나 장’으로 불리며 이 프로젝트의 성사에 큰 역할을 했으며, 이승만과 OSS의 중재 역할을 맡았다. 해방 후 이승만의 신임으로 치안국장, 내무부장관을 역임했으며 3·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한국전쟁 직전 치안국장을 맡아서 국민보도연맹학살사건에 관여한 책임자 중 한명으로 지목되고 있다.

49) 방선주, “미주지역에서 한국 독립운동의 특성”,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7집, 1993; 방선주, “아이프러기관과 재미한인의 복국운동”,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제2회 한국학국제학술회의논문집: 해방50주년, 세계 속의 한국학』, 1995; 정병준, 위의 글, 243〜250쪽 참조.

50) 정병준, 위의 글, 253〜261쪽

51) 정병준, 위의 글, 261〜262쪽

52) 정병준, 위의 글, 262〜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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