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미경 / 농부

 

살구나무를 찾아서 살구나무 동산을 만들고 있다. 올해는 살구나무 마을을 만들려고 한다. 올해 우리 마을에는 많은 살구나무들이 새로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인데, 나는 그것이 북측 회령 백살구나무이기를 바래서, 그것을 구하려 안타깝게 뛰어다니고 있다.
사라진 살구나무를 찾으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살구나무를 잃어버렸듯이 아주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무엇을 위하여 그 많은 것들을 놓아버린 것일까? 여기 연재할 글들은 살구나무처럼 우리가 잃은 것들, 잊은 것들, 두고 온 것들에 대한 진지한 호명이다. / 필자

 

▲ 모내기하는 논에서

 
쌀을 먹고 사는 사람의 미학

비가 한 번씩 올 때마다 필름을 빠르게 돌린 영화처럼 풍경이 바뀌어 간다. 어제와 오늘의 빛깔이 다르고 살구나무가 지어내는 그늘의 크기가 다르다. 밑동만 남은 벼 그루터기 사이로 풀들이 제멋대로 자라나 했더니 어느새 물이 채워지고, 물 위로 송화가루가 노랗게 뜨더니 어린 모들이 가지런히 꽂혔다.

한 해 내내 자리만 차지하던 이앙기가 반짝 겨불내나게 일하는 때다. 농기계임대사업소의 이앙기도 시종 논판에 나가 들어올 새가 없다. 다랑이 하나가 넓어 봐야 대개 서 마지기를 넘지 못하는 산골 논판에서 이앙기는 김씨 네 논에서 이씨 네 논으로 옮겨 다니느라 더 바쁘다. 

이앙기가 모포기들을 물 속에 꽂아 넣는 광경을 만나면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을 앉아 서 바라본다. 시골 와서 본 아름다운 것 중의 으뜸이 막 모내기한 논이라는 사실을 또 되새긴다. 쌀을 먹고 사는 사람의 어쩔 수 없는 미학이다. 이앙기가 쩔걱거리며 굴러가고, 뜨거운 여름을 향해 이제 막 성장을 시작하는 어린 모들이 잔바람에 흔들리는 논에는 투명한 산과 하늘이 담겼다.

농로에서 만난 트럭

그 일은 두 번째 마을을 향해 가는 좁은 농로에서 일어났다. 여기서는 드물게도 들판이라고 할 만큼 꽤 넓은 논판 한 가운데를 꿰지르는 농로다.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지나는 농로, 1년내내 사람이든 차든 여간해선 구경도 할 수 없는 길이다. 마주 오는 차라도 만나면 하나는 후진할 수밖에 없는 좁은 길에서 차를 만난 적은 한 번도 없다.

사람들을 발견한 건 직선으로 1km를 뻗은 농로의 반 이상을 지나온 때였다. 저만치 보이는 길 끝,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모퉁이 주변에 사람들이 여럿 어른거린다. ‘갈이도 안 한 논에서 뭘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크게 궁금한 건 아니었다. 사람들 사이에 트럭이 한 대 서 있었지만 그것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 도착해 차를 멈추었다. 대부분 할머니들에다 할아버지 두세 분, 모두 열댓 명쯤 되어 보이는 분들이 일에 몰두하고 있을 뿐 돌아보지도 않는다. 그들은 못자리에 모판을 깔고 있었고, 길을 차지하고 서있는 트럭 때문에 더 이상 갈 수가 없었다. 비켜주겠거니 생각하고 차에서 잠시 기다렸으나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차에서 내렸다.

“수고하시네요. 차 좀 지나가야 되겠는데요…” 그제서야 할머니 몇 분이 돌아보고는 고개를 외로 돌려 논에서 모판에 물을 뿌리고 있는 할아버지를 바라본다. “여게 차 지나간디야~!” 할머니 한 분이 소리를 쳤으나 할아버지는 갓귀로 들은 기미도 없다. 할머니가 무안해선지 미안해선지 한 마디 한다. “우린 못햐. 저 냥반이 와야 허는디…” 그리고는 모두 다시 원위치다.

할아버지의 배짱

차 좀 비켜달라고 할아버지한테 두어 번 소리를 쳐 보았지만 쳐다보지도 않는다. ‘이런, 이게 뭔 상황인가.’ 금쪽 같은 시간이 자꾸 가는데 앞으로 갈 길이 난망하다. 할머니들은 부지런히 모판을 만들어 쌓고, 할아버지 몇 분이 날라다 논판에 깔고, 저만치 건너편에서는 양수기가 왕왕 돌아가고 그 할아버지는 깔려있는 모판에 조리개로 물을 뿌리고 있다. 일판이 돌아가는 걸 보니 저 할아버지가 조리개를 놓고 논판에서 나와 차를 비켜줄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 알려진다.

상황파악이 되자 어물어물 할 것이 없다. 논판에 내려서서 할아버지한테로 다가갔다. “할아버지 제가 물 뿌릴 테니 차 좀 비켜주세요.” 가까이 가서 물조리개를 잡을 듯이 손을 내밀며 말하는데, 이 할아버지 확 뿌리치며 대뜸 버럭 소리를 지른다. “안뒤야, 돌아가든지 치우구 가. 일허는 거 봄서 왜 들와~!”

깡마른 체구에 주름투성이의 강퍅한 얼굴, 논판이 아니라면 적반하장이라고나 해야 할 할아버지 말투나 행동이 옹골차고 사나워 예기치 않게도 발끈 오기가 솟아오른다. 하지만 여기는 논판이고 내 일보다는 논일이 우선이다. 

“제가 못 봤어요. 뒤로 가려면 너무 멀고 트럭 운전을 못해요. 제가 물 뿌리고 있을 테니 좀 치워주세요.” 오기를 꾸욱 누르고 울기라도 할 듯이 다시 부탁을 하는데도 요지부동이고 아예 사람을 싹 무시한다. “이건 아무나 못햐. 안뒤야.”

얄팍한 모판에 물뿌리는 일에 조심성이 필요한 건 사실이다. 뿌린 물이 넘치지 않고 얌전히 잦아들도록 골고루 펴가며 뿌려야 한다. 자칫 물이 넘어버리면 얕게 담겨있는 볍씨가 흘러나와 유실된다. 하지만 이 할아버지 막무가내 배짱이 하도 등등하여 이왕에 솟아올랐던 오기가 ‘어디 누가 이기나 해보자’는 임전태세로 넘어간다.

“할아버지 제가 할 줄 알아요. 잘 뿌릴 테니 걱정 마세요.” 하며 할아버지 움직이는 대로 붙어가며 계속 종용해 본다. 하지만 험한 말만 멈췄을 뿐 천연스레 일을 계속하는 모습이 좀체 넘겨줄 잡도리가 아니다. 결국 ‘그냥 1km를 후진해서 돌아갈까’, ‘트럭을 움직여 볼까’, 다른 방법을 떠올리며 포기를 점치고 있을 때였다. 둑 위에서 일하던 할머니 한 분이 손을 앞자락에 문지르며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할머니의 등장

30도로 굽은 허리, 꽃무늬 장화를 신고, 양 팔을 휘저으며 부지런히 다가오느라 역시 꽃무늬 울긋불긋한 해가림 모자가 바람에 펄럭인다. 할머니는 놀랍게도 웃고 있었다. 눈 깜빡할 새에 할아버지 손에서 물조리개를 낚아채더니, “가서 점 빼주셔. 내가 할텡게.” 한다.

물조리개를 졸지에 빼앗긴 할아버지는 순간 머쓱한가 보다. 할머니한테 한 소리 하려던 것을 짐짓 누른 듯 화살을 내게로 돌린다. “이거 할 줄 안다는 사램이 여길 들어서?” 젖은 손을 바지가랭이에 닦으며 차를 빼러 가면서 할아버지가 던진 마지막 말이다. 끝끝내 못마땅한 표정이지만 말투만은 한결 누그러졌다. 

하지만 그 말이 목에 걸렸다. 일단 차를 빼놓고 다시 내려서 고맙다고 인사를 한 건 그 말 때문이었을 거다. 인사하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휑하니 바람을 일으키며 가버리는 할아버지 뒷모습이 산처럼 커 보였던 것도 그 말 때문이었을 거다. 그 말은 앞에 했던 말들과는 다른 차원의 말이었다. 앞에 말과 행동들이 이기적인 고집불통 늙은이의 강짜였다면 그 말은 농사일을 아는 사람이 모름지기 지녀야 할 도리에 대한 가르침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발견이었다. ‘저 할아버지 진짜 농사꾼이군’, ‘저 정도로 배짱 두둑한 농사꾼이 다 죽지는 않았군’ 하는 것. 그것은 오랫동안 볼 수 없었던 것, 그러나 언젠가 한 번은 보기를 기대했던 것을 마침내 만난 기분이었달까.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앤 카메론

‘산 파블로’의 할머니

그 할아버지가 진짜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당당한 농사꾼인지, 아니면 내가 영 만만해 보였던 것인지 알 길은 없다. 하지만 의심할 수 없는 진짜 발견은 할머니에게로 향한다. 그 일은 오래 전에 읽었던 훌륭한 동화 한 편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앤 카메론이라는 작가가 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머나 먼 과테말라의 산골 ‘산 파블로’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것은 또 열세 살 때부터 매일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산 파블로에서 가장 맛있는 우유쌀죽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살아가는 할머니와, 구두닦이를 하며 스스로 글을 깨우쳐 뒤늦게 학교에 가는 여덟 살 손자 후안의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이 동화에 대해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와 비슷하다는 말들을 하지만, 이 동화와 비교하자면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는 거의 쓰레기급에 가깝다.

그 작품을 손꼽는 수작으로 만든 것은 ‘후안의 할머니’라는 놀라운 인물이다. 글도 모르는 일자무식 할머니, 열세 살 때부터 평생을 우유쌀죽을 만드는 것으로 살아온 할머니가 보여주는 인간의 깊이다. 작가는 작품의 무대에 대한 치밀한 묘사를 통해, 할머니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과테말라의 아름다운 시골 ‘산 파블로’의 산물임을 개연성 있게 보여준다.

‘산 파블로’는 가까이에 세 개의 커다란 화산이 있는 높은 절벽으로 둘러싸인 산골이다. 거기 사람들은 무엇이든 짊어지고 운반하고, 밤에는 놀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며, 길에서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자동차는 그들이 이야기를 다 나누고 흩어질 때까지 서서 기다리는 곳이다. 사실은 이 대목 때문에 농로에서의 사건이 동화와 곧장 연결되어 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작품의 절정은, 후안이 뒤늦게 들어간 학교에서 월반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한다는 선생님의 편지를 받고 할머니가 기쁜 눈물을 흘리는 대목이다. 할머니는 후안이 수도에 있는 대학에 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말한다. 할머니는 그 때까지 얼마나 많은 우유쌀죽을 더 만들어야 할까? 하지만 할머니가 후안을 공부시키기로 하면서 한 말은, 훌륭한 사람이 되어 돈 많이 벌고 출세하라는 것이 아니다.

할머니는 공부를 하면 ‘왜 어떤 사람은 잘 살고 어떤 사람은 못 사는지, 왜 어떤 나라는 잘 살고 어떤 나라는 못 사는지’를 알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할머니는 그런 것들에 대해 많이 생각했지만 결코 알 수가 없었다고 말이다. 이 장면 이야말로 작품의 백미다. 작품에 다른 것들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깊이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이 한 마디의 말이다.

할머니와 손자의 감동적인 연결을 만들어내는 작가의 솜씨는 조금도 요란하지 않다. 시종 차분하고 냉정하고 잔잔하게 믿을 수없이 큰 감동을 만들어낸다. 관광 포스터를 보고 ‘산 파블로’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냐고 묻는 후안의 질문에 할머니는 답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어디라도 될 수 있단다. 네가 떳떳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네가 네 자신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라고.

농로의 할아버지는 길을 막고서도 당당하고 떳떳했다. 그런 할아버지도 여기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생각할까? 글쎄다. 그 할아버지 얼굴에서 그런 기미를 보기 어려웠다는 것만큼은 말해야 할 것 같다. 대신 물조리개를 낚아채고 할아버지 등을 밀어낸 할머니는 좀 다르다. 굽은 허리 때문에 보기에도 고단한 할머니의 몸과는 달리 얼굴은 편안했고 마음 씀씀이는 너그러웠다. 그래, 나는 할머니 편이다.

정기 순례

내가 사람도 차도 안 다니는 농로를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지나는 것은 수도검침을 하기 위한 것이다. 매달 일주일간 수도검침을 하기 위해 내가 사는 면의 모든 마을을 한 번씩 순례를 한다. 자연재배 농사로 일은 무지하게 하면서도 소출이 시원찮은 것을 딱히 여겨 마을 이장댁이 주선하여 준 임시 고육지책이다.

농사꾼이 수도검침 다니는 것을 스스로 열없어 하지만, 한 달에 한 번씩 마을마을 집집을 방문하는 일은 생각지도 못했던 많은 배움을 얻게 한다. 한 해만 하자던 것이 두 해를 넘으니 온 면의 모든 마을들과 모든 길들, 그리고 모든 집들을 다 섭렵했다고 해야 할까? 낮 동안에 대개 집을 비우니 사람들을 다 만나게 되지는 않지만, 그런 중에도 할머니들만은 달이 새롭게 알아가고 있다.

할머니의 발견

시골 할머니들은 대체로 망가져 있다. 허리가 굽고 무릎이 고장나고, 귀도 잘 안 들리고 눈도 잘 안 보인다. 평생 몸이 부서져라 힘든 노동을 하며 살아온 후과인데, 이장 말에 의하면 밭일하다 밭고랑에 엎어져 그대로 돌아간 양반들도 띄엄띄엄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일하는 것을 가끔씩 볼 때마다 “아 좀 살살 허요. 그러다 죽어유.” 하면서 그렇게 돌아간 할머니들 이야기를 꼭 덧붙이곤 하니까 말이다.

마을에 들어서면 나를 보는 할머니들의 얼굴에 궁금함이 한가득이다. 어느 마을이든 예외 없이 시선을 고정한 주름진 얼굴들이 ‘누겨?’ 하고 묻는다. 할머니들을 만나면 무조건 인사부터 한다. 모두 다는 아니지만 할머니들이 가진 친화력은 대단하다. 내가 인사하고 누구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그냥 통로가 뚫린다.  

밥때라면 들어와서 한 술 먹고 가라 하고, 음료수든 과일이든 있기만 하면 그저 먹으라고 내준다. 깨를 볶고 있으면 깨를 한 줌 쥐어주고, 김치를 담고 있으면 속 넣은 노란 배춧잎을 말아주고, 삶은 달걀 두 개를 들려주기도 한다.

운곡마을 막다른 골목 끝집의 할머니는 커피를 먹이고 싶어한다. 커피 타주는 시간과 뜨거운 것을 마시는 시간에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바빠서 사양하면 잠깐 기다리라 하고 요구르트를 한 개 들려준다. 한 번은 집을 나서는 할머니와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엉? 일루 와, 일루 와.” 할머니가 나를 부르면서 골목길 바닥에 그냥 주저앉는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꺼먼 봉지를 주섬주섬 헤쳐 꺼내 드는 것이 커다란 찐빵이다.

봉지에는 찐빵이 세 개 들었다. 그 중에서 하나를 꺼내 나에게 주는 것이다. 어디 가져가시는 거 아니냐고, 나를 주면 모자라지 않겠냐고 사양해봐야 소용이 없다. “이눔 먹고 가두 일읎어.” 하며 그저 앉아서 먹으란다. 김제 사는 아들네가 사다 줬다든가? 골목길에 할머니와 함께 주저 앉아서 주먹 두 개보다도 큰 찐빵을 다 먹었다. 볼이 미어지도록 베어 문 찐빵에 목이 메었던 것일까?

나는 할머니 편이다

처음에 낯설던 심정에서 놓여나기까지 꽤 여러 달이 걸렸나 보다. 지금은 가끔씩 밥도 얻어먹고, 뭐든 주면 고맙게 받는다. 그래도 좀처럼 적응되지 않는 것은 매번 치밀어 오르는 목메임이다. 오랫동안 깊숙이 간직하다가 꺼내주는 꼬깃꼬깃한 지전 한 장을 받아드는 기분으로 그것들을 받는다.

할머니들이 주는 건 인정이다. 몸은 다 망가졌어도 마음은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인정이다. 농로의 할아버지는 몰풍스런 당당함으로 나를 놀래웠지만, 내 마음을 기울게 한 건 물조리개를 빼앗아 들고 할아버지 등을 떠민 할머니였다. 

그런 할머니들을 보면서 관념적으로만 생각해왔던 우리 사람들의 실제 모습을 본다. 그런 할머니들을 보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언지를 알아간다. 요즘 떠들썩한 화제의 주인공인 이용수 할머니도 그런 할머니들 중 한 사람인 것을. 할머니가 토설하는 집회에 나오는 어린 학생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것이 그렇다는 것을 확연히 알게 한다. 그래, 나는 할머니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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