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반민족적 친일행위에 대한 연구 성과들

새벽이 오기 전 한반도와 아시아 전체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전쟁으로 암흑 속에 놓였을 때, 민중들은 일제의 패망을 기원하며 새벽을 기다렸다. 그 어둠 속에서도 항일투사들은 목숨을 걸고 일제와의 싸움을 이어갔다. 그러나 일제의 지배가 영원할 것으로 믿었거나 그러기를 바랐던 일제의 앞잡이들은 민중을 일제의 침략 전쟁에 동원하는 데 앞장섰다. 이들 친일파에 대해서는 상당히 연구가 진행되어서 거의 그 전모가 드러나 있다.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한국 정부 수립 후 탄생한 반민특위에서 적지 않은 친일파들을 조사, 기록 자료로 남겼다. 이후 학자들의 일제 강점기 연구, 임종국 선생에서 시작된 친일 전문 연구자들과 민족문제연구소 등의 연구와 자료 발굴 및 대중적 홍보 노력, 그리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2005〜2009)의 활동 등으로 친일파의 행적과 죄상들이 대부분 드러났다. 그렇게 해서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 및 사료집, 그리고 많은 친일파 관련 단행본 등이 발간되었고, 친일파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대중적으로 알려지는 성과를 거두었다. 따라서 이 자리에서 친일파들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문인들의 행태를 중심으로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갈까 한다. 

먼저 이광수의 이야기로 시작하려 한다. 나는 중학교 때 국어시간에 국문학사를 배우면서 이광수를 처음 알았다. 지금은 약간 다르게 평가되고 있지만 당시에는 이광수를 ‘한국 근대문학의 개척자’로, 그의 장편소설 『무정』을 ‘최초의 한국 근대소설’로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농촌의 면단위 신설학교 1회생이었던 탓에 중학교에는 도서관도 없었다. 그런데 마침 옆자리에 앉았던 짝궁이 도시에서 전학을 온 친구여서 그가 어디서 이광수의 『무정』을 가져와 읽었는데, 그 바람에 나도 그 책을 빌려 읽을 수 있었다. 지금은 너무 오래 지나서 그 내용조차도 잘 떠오르지 않지만 그 때는 수업시간에도 책상 밑에 놓고 읽었을 정도로 너무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남아 있다. 국민(초등)학교에는 작지만 교실 한 칸 크기의 도서관이 있어서 동화책이나 위인전 따위는 제법 볼 수 있었으나 본격적인 문학작품은 사실상 처음이었는데, 그 후로 나는 소설 읽는 재미에 푹 빠졌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광수는 오랫동안 내게 좋은 인상으로 각인되었다. 어린 나이지만 이광수의 글재주가 대단하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 대학교를 가면서 이광수가 어떤 인물인지 알게 되었다. 이광수는 ‘조선의 3대 천재’(최남선, 이광수, 홍명희) 중 한명으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의 행적은 결코 명예롭지 못하다. 그는 친일문인 중에서도 가장 죄질이 무거운 축에 속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변명, 옹호하려는 사람도 적지 않다. 아마도 그의 재능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싶지만, 재능은 재능대로 평가를 해준다고 하더라도 그의 반민족적 행위에 대해서는 엄중한 심판이 필요하다. 

▲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 발간)(사진=유투브 캡쳐)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전25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발간)(사진=알라딘)
▲ 친일반민족행위관계사료집(전16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발간)

이광수의 『나의 고백』, “민족 위해 친일했소”

이광수의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이광수가 구체적으로 어떤 친일행위를 했으며 그의 친일 글이 어떤 내용들인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것은 그가 해방 후 반민족행위에 대한 단죄를 제대로 받지 않았기 때문이고, 이는 반민특위의 실패와 무관하지 않다. 

이광수는 해방 후인 1948년 12월 자신의 친일행적 경위와 친일의 ‘역사철학적 맥락’을 전면적으로 밝힌 『나의 고백』이란 책을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민족의식이 싹트면서부터 일제 말기까지의 행위를 모두 민족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서술했는데, 특히 일제 말기의 친일행위 역시 애국자로서의 명예를 희생하더라도 민족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었다고 강변했다. 이 책에는 자신의 친일행위를 변호하는 글 외에도 ‘친일파의 변’이라는 부록이 들어 있다. 여기에는 「홍제원 목욕」, 「삼학사」, 「관공리는 반민족자였던가」, 「미국인의 친일파관」, 「대한민국과 친일파」 등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이 글들에서 이광수는 병자호란 당시 끌려갔던 여성들을 홍제원 목욕이라는 지혜를 통해 감싸 안았듯이 친일 행위를 했던 사람들을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주1)

▲ 이광수의 『나의 고백』(춘추사 발간, 1948년 12월)(사진=한성대학교 미디어위키)

반민족적 행위를 근본적으로 속죄하고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는다는 자세가 필요했지만 이광수는 변명으로 일관했다. 이러한 이광수의 변명을 보고 있으면, 그가 단순히 어쩔 수 없이 상황에 밀려 친일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친일 확신범이었음을 느낄 수 있다.  

이 같은 변명에도 불구하고 이광수는 1949년 2월 7일 반민특위의 반민족행위자 2차 검거 첫날 반민행위자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광수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1차 심문을 받았는데 이때 조사관과 친일고백서를 작성하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고백서는 같은 죄목으로 같은 날 검거된 최남선이 “민족의 일원으로서 반민족의 지목을 받음은 종세에 씻기 어려운 대치욕”이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자열서(自列書)」를 쓴 데 비해 이광수는 시종  『나의 고백』에서 보인 자세를 견지했다. 

이광수는 자신이 태평양 전쟁 무렵 협력을 주장한 것에 대해 “일제에 협력하면서 참정권과 평등권을 얻어 민족을 보존하면 독립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했소. 내가 걸은 길이 정경대로(正經大路)는 아니오마는 그런 길을 걸어 민족을 위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오”라고 변명하였다.(주2) 심지어 그는 “일본 관헌이 작성한 3만8천 명의 조선 지식인 살생부와 자신을 바꾸려했다”고 항변하기도 했다.(주3) 그러나 그가 주장한 살생부의 근거는 어디서도 나오지 않고 있다. 당시 이광수는 “지금 소감이 어떠냐?”고 묻는 정철용 조사관에게 이렇게 말하며 자신의 행위를 옹호했다고 한다.

“해방이 1년만 늦었어도 조선 사람들은 황국신민의 대우를 받았을 것입니다. 창씨개명 안한 사람, 신사참배 안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됩니까? 우리 국민은 문맹자도 많고, 경제자립도 어려워 일본과 싸워 이길 힘이 없습니다.”(주4)

정말 어이없는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반민특위 내에서 조사위원들 사이에 논란 끝에 불기소하기로 결정되어 석방되었다. 반민특위의 이러한 불기소 결정은 6월 6일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 사건으로 사실상 반민특위가 와해된 가운데 일어난 일이었다. 반민특위 활동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면 그는 기소되어 엄중한 처벌을 받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광수의 친일 행적은 세상에 자세하게 밝혀졌을 것이고 그의 친일 작품들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을 것이다. 

“외아들을 전쟁터에 내보시오”

이제 이광수의 친일 행적을 약간만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그는 『삼천리』 1940년 7월호에 쓴 글 「어머니, 누이, 아내(母, 妹, 妻)에게」(주5)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머니. 아들이 있습니까. 그러면 지원병으로 보내시오. 그 아들이 소중하십니까. 그러기에 더구나 지원병으로 보내시오. 외아들밖에 없습니까. 그렇더라도 지원병으로 보내시오. 누이들. 오라비들이 지원병으로 가도록 권하시오. (중략) 또 젊으신 아내들. 남편더러 병정 가라고 하세요. (중략) 당신의 오빠는 임금님의 것입니다. 당신의 남편은 임금님의 것입니다. 당신의 몸은 임금님의 것입니다. 이것이 일본정신입니다.”(주6)

『삼천리』는 이광수와 더불어 대표적인 친일문인이었던 김동환이 발행한 잡지였다. 1929년 6월에 창간한 이 잡지는 취미, 생활 등을 다루는 대중지였으나 문예작품이나 비평 등도 실었다. 초기 창간 때는 민족적 입장을 나타냈으나 1937년 이후부터 친일적 경향을 띠기 시작했다. 1942년 3월에는 일제의 이른바 ‘대동아 전쟁’에 호응하여 『대동아』로 개명까지 했으나 3월과 7월 두 호를 내고 폐간되었다. 

이광수는 어머니, 누이, 아내 등 조선의 여인들을 향해 자신의 아들, 오빠(또는 남동생), 남편을 일제의 침략 전쟁에 ‘지원병’으로 보내라고 선동하고 있다. 그가 이 글을 썼을 당시는 아직 ‘징병제’가 시행되지 않아서 ‘지원병’이란 이름으로 조선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끌고 가기 시작할 때였다. 모든 조선 사람이 ‘일본 천황(임금님)의 것’이므로 ‘천황을 위해 죽는 것은 당연하다’는 이야기다. 봉건 왕조시대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했던 사고 그대로다. 다만, 그 임금이 조선의 임금이 아니라 일본의 ‘천황’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광수의 ‘황국신민’으로서의 정신무장이 뼈에 사무치게 느껴지는 글이다.

▲ 김동환이 발행한 잡지 『삼천리』 창간호(1929). 성인, 생활, 오락 종합대중지로 창간했으나 1937년 이후 친일 경향을 띠기 시작했다. 이광수는 이곳에 친일시를 실었다.(사진=디지털만화규장각)

이광수는 『신시대』 1942년 6월호에 쓴 「징병과 여성」에서는 “내후년부터 조선사람의 아들들은 징병이 되게 되었습니다. 사나이의 할 일이 두 가지 있으니 하나는 농사나 공장이나 기타 여러 가지 직업으로 나라를 돕는 일이요, 또 한 가지는 병정이 되어서 나라를 돕는 일입니다. 그동안 조선 사람 남자들은 병정이 못 되었으니 반편 국민 노릇을 한 세음이었습니다. 내후년부터야 옹글은 국민이 되는 것”이라며 징병에 갈 것을 독려했다.(주7)

그런데 이광수가 일본군 병사로 지원하라고 선동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한번 생각해보자. 일본의 침략 전쟁에 총알받이가 되라는 이야기다. 일본군이 적개심을 돋우던 ‘영미귀축(英米鬼畜)’과의 성전에 앞장서라는 것이다. 한편, 이는 일제가 ‘불령선인’, ‘비적’으로 부르던 독립군, 항일유격대를 토벌하는 일본 군인이 되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해방 후 이광수는 이와 같은 일본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선동한 자신의 행위가 ‘민족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것이었다’고 강변했다.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인가.
 
‘친일 확신범’이었던 이광수

이광수의 친일행위는 산문, 소설, 시 등의 문학 작품 뿐만 아니라 시국좌담회, 대중강연, 방송 출연, 그리고 친일단체 임원 및 일본군 위문단 활동 등 실로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그는 친일매체를 통해 일제의 침략 전쟁에 참여하기를 독려, 선전·선동하는 산문이나 시를 썼고, 신문과 방송에 직접 출연해 내선일체, 황국(일본)정신, 전쟁참여 등을 선전했으며, 학생들을 향해 지원병으로 참여하라고 독려했다. 

이광수의 친일 행위는 1922년 5월 『개벽』지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할 때부터 사실상 시작되었지만, 초기에는 민족개량주의에 입각한 민족자치론의 수준에 머물렀다. 민족개량주의나 민족자치론을 독립운동노선의 하나인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명백히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받아들이고 그 범위 안에서 자치를 하겠다는 것이므로 독립운동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이는 또한 노골적인 친일행위로 보기에는 어려운 점도 있다.

이처럼 자치론과 민족개량주의를 주창하고 있던 이광수가 본격적으로 친일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은 1937년 이후이다. 이광수는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6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출감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1938년 3월 10일 정신적 스승이었던 안창호가 사망하자 큰 충격을 받았고, 11월 3일 수양동우회 사건의 예심을 받던 중 전향을 선언했다. 이후 이광수는 조선신궁을 참배하는 등 본격적인 친일행위의 길로 들어섰다. 

▲ 제1회 수양동우회 기념사진(1931)(사진=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1938년 3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된 ‘정신적 스승’이었던 도산의 사망 이후 이광수는 노골적으로 친일의 길을 걷는다. 

이광수는 한국 근대 소설의 개척자로 대중적인 인지도와 명망이 높았고, 때문에 그의 행동거지는 조선의 청년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는 일찍부터 집요하게 이광수를 회유하려 했고 일제의 공작은 결국 성공했다. 이광수는 일제의 공작에 끌려 들어간 측면도 전혀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스스로 친일파가 된 ‘확신범’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친일 확신범’으로서의 이광수의 증거는 많다. 그가 남긴 너무나 많은 시와 소설, 산문, 좌담회, 강연 내용 등이 그 점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광수의 친일론은 상당히 논리적인 면이 있다. 감성적으로 접근하는 시가 아니라 산문, 대담 등을 통해 자신의 내선일체론, 대동아공영론, 일본의 승리에 대한 확신 등을 논리적으로 전개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1944년 1월 『朝鮮畫報』에 실린 최남선·가야마 미쓰로(이광수)·마해송의 「동경좌담」에서 이광수(가야마 미쓰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한때는 조선인은 늙은 민족이라고 느끼고 있었지요. 노쇠민족이라 하여 비관적으로 보고 있었지만, 오늘은 노쇠하지 않고 아직 어린이라고 나는 느끼고 있습니다. 금세계는 구세계의 파괴와 신질서의 건설이라는 것은 동서양을 말할 것 없이 누구나 승인하는 사실이라 생각합니다. 이익과 욕심의 세계가 파괴되고 도의의 세계가 세워지고 있습니다.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대동아전쟁이라는 것은 바로 이를 이루느냐 아니냐를 맡은 전쟁이겠지요. 조선의 청소년은 지금까지 조선반도만을 위한 사소한 것에 ‘끙끙대는 상태’를 멈추고 일본 전체의 무거운 사명, 대동아 전체를 껴안는다는 커다란 기분이 되어 신질서 건설의 주역을 연출한다는 정도의 야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멋대로의 생각이겠지만, 이것은 하나의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이번 전쟁은 ‘야욕과 탐욕’과 ‘도의’와의 전쟁이라 말해지고 있습니다. ‘법(法)문명’과 ‘영(靈)문명’의 싸움 ‘법의 문화’와 ‘영의 문화’의 싸움입니다. 이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일본의­인용자) ‘영의 문화’입니다.”(주8)  

이광수의 대동아공영에 대한 공감은 진정성이 느껴진다. 그는 ‘어쩔 수 없이’가 아니라 ‘정말로’ 일본이 주창한 대동아공영의 논리에 공감한 것으로 보인다. 이광수는 1941년 8월 25일 『삼천리』의 발행인 김동환의 초청으로 각계 인사 120여명이 부민관에 모여 결성한 친일단체 ‘조선임전보국단’에 참여했으며, 그해 11월 『삼천리』에 기고한 「애국자와 금일」이란 글에서 이렇게 썼다. 

“금번 지나사변(중일전쟁-필자 주)에 전지에서 산화된 전몰장병이 10만6천명이나 된다고 군으로부터 발표가 있었는데, 내선(內鮮)의 인구비례로 보아 내지인이 10만6천명이 전몰했다면 그 중 조선인이 3만명은 같이 전사했어야 옳을 일이요 또한 공평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조선인이 몇 사람이나 피를 흘려 죽었는고 하니 중위 1인, 병졸 2인, 도합 3인이 전사했다는 것은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외다.

그러나 몸을 나라에 바쳐서 피 흘릴 수 있는 병역의 의무가 조선인에게 아직 허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몸을 나라에 바치는 일에 있어서는 그와 같이 엄청나게 적은, 부끄러운 숫자를 가지고 있다고 합시다. 그러나 우리가 능히 할 수 있는 채권을 사는데 있어서는 4년간 국채 발행에서 조선인이 소화한 것이 8.63%라 하니 이 또한 조선 내에 있는 내지인보다 40배나 되는 인구를 가진 우리로서는 부끄러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주9)

나는 이광수의 이 글을 읽으면서 전 서울대 교수 이영훈의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 서문의 다음과 같은 글이 떠올랐다. 둘 다 수치를 들이대며 일본과 비교해서 한국인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점이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거짓말 문화는 국제적으로 널리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2014년에만 위증죄로 기소된 사람이 1,400명입니다. 일본에 비해 172배라고 합니다. 인구수를 감안한 1인당 위증죄는 일본의 430배나 됩니다. 허위 사실에 기초한 고소, 곧 무고 건수는 500배라고 합니다. 1인당으로 치면 일본의 1,250배입니다.”(주10)

김동환, 주요한, 모윤숙, 노천명, 그리고 서정주

정말이지 진심을 다해 일본의 신민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일본인의 사망 비율만큼 조선인도 전쟁에서 죽어야 마땅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게 도대체 제 정신으로 할 소리인가. 우리가 볼 때는 ‘미친 소리’, ‘정신병자’가 내뱉는 저주처럼 들리지만 그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 내선일체와 관련한 다음과 같은 글도 그의 일관된 주장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내선일체란 조선의 황민화를 말하는 것이지 쌍방이 서로 접근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천황의 신민이 되겠다, 일본인이 되겠다고 힘차게 나아가는 조선인 쪽의 기백에 의해서야말로 내선일체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내선일체의 열쇠는 조선인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중략)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오늘부터 국어(일본어)를 배우자. (중략) 국어 다음으로, 아니 그와 동시에 오는 것은 일본정신의 학습이다. (중략) 조선인이 이 황도정신, 즉 일본정신을 자기의 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국사(일본사)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문학(일본문학)도 공부해야 한다. 신도나 무사도도 공부해야 한다. 예의작법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보다도 군대에 가지 않으면 안 된다.”(주11)

이광수는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 되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창씨개명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香山(가야마)이라고 씨(氏)를 창설하고 光郞(미쓰로)이라고 일본적인 명(名)으로 개(改)한 동기는 황송한 말씀이나 천황어명과 독법을 같이 하는 씨명을 가지자는 것이다. 나는 깊이깊이 조선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끝에 이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한 까닭이다.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아갈 것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 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가 조금 더 천황의 신민답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주12)

이광수의 친일 행위는 확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1937년 7월 7일 중국 대륙 침략 이후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고, 그랬기 때문에 친일행위를 거리낌 없이 했다. 

이광수 외에도 친인문인들은 너무나 많다.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고 선동하며 온갖 친일행위를 했던 ‘국경의 밤’의 시인 김동환, “반도의 2천4백만은 혼연일체가 되어 대동아 성전의 용사되기를 맹세하고 있다”고 외친 ‘불놀이’의 시인 주요한, 일제의 ‘가미카제(해군특별공격대)에 적극 참여하라’고 독려한(‘어머니의 힘’, ‘내 어머니 한 말씀에’) ‘렌의 애가’/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의 시인 모윤숙, “젖과 꿀이 흐르는 이땅에/ 일장기가 나부끼고 있는 한/ 너희는 평화스러우리 영원히 자유스러우리”라고 노래한 ‘사슴’의 시인 노천명, 그리고 가미카제 특공대에 투입된 조선인 청년을 찬양한 ‘마쓰이 오장 송가(松井伍長頌歌)’를 쓴 ‘국화 앞에서’의 시인 서정주가 대표적이다. 이들 외에도 최남선, 김동인, 유치진, 이무영, 김종한, 이찬, 임학수, 박영호, 이석훈, 정인택, 채만식, 최정희, 함대훈, 정비석, 장혁주, 김용제, 조용만, 송영, 유진오, 곽종원, 김기진, 박영희, 백철, 정인섭, 최재서, 조연현 …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유명 문인들이 노골적인 친일행위를 했다. 

▲ 왼쪽부터 이광수, 이선희, 모윤숙, 최정희, 김동환(사진=위키백과사전). 일제 말기 이선희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친일의 길을 걸었다.

서정주의 친일 행위와 독재자 미화

친일행위를 한 수많은 문인들 가운데 미당 서정주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자. 서정주는 일제 강점기 친일행위를 했을 뿐만 아니라 해방 후에는 『이승만박사전』(1949, 삼팔사)을 썼고, 전두환에게 바치는 ‘송시’(주13)를 써서 독재자를 미화했기 때문에 현재적 의미가 가장 큰 인물이기 때문이다. 

서정주는 김소월, 윤동주, 정지용 등과 함께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표현할 줄 아는 시인으로, “한국어의 영토가 한 차원 확장”하는데 기여했다고 평가를 받는다. 그가 ‘뛰어난 재능’을 보여준 한국 최고의 시인 중 한명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 그가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고 ‘권력자에 아부하는 시’를 쓴 것은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이자 한국 문학사의 비극이다. 그의 뛰어난 재능과 시적 성취 때문에, 그가 한국 문학에 남긴 족적 때문에 그에 대한 변명도 적지 않게 나오고 있다. 이광수는 해방 후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한 반면, 서정주는 오랫동안 한국 문단의 거목으로 활약했고, 동국대학교 교수 등을 지내며 숱한 제자들을 길러냈기 때문에 그를 옹호해줄 사람도 상대적으로 많다. 

그러나 서정주의 문학적 재능과 시적 성취는 그것대로 인정해주더라도 그의 친일행위와 독재권력을 찬양한 행위는 합당한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일제의 침략전쟁을 미화·찬양하고 젊은이들을 사지로 나가도록 선동하는 ‘언어 마술’은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독’이자 ‘반민족적 범죄행위’였다. 광주의 학살을 지시·지휘하고 헌법 질서를 파괴하며 무력으로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을 찬양한 그의 ‘언어 마술’은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서정주의 ‘언어의 마술’이 어떻게 일제의 침략전쟁에 대한 찬양으로 사용됐는지 다음 시를 통해 감상해 보자.
 
헌시 獻詩
- 반도학도 특별지원병 제군에게

정면에서 눈을 돌릴 수는 없느니라 
그리움에 젖은 눈에 가시를 세워 
사랑보단 먼저 오는 원수를 맞이하자

유유히 흐르는 우리의 시간이 
이제는 성낸 말발굽 뛰듯 하다 

벗아 하늘도 찢어진 지 오래여라 
날과 달이 가는 길도 비뚜른 지 오래여라 
거친 해일이 우리와 원수의 키를 넘어선 지 
우리의 뼈와 살을 갈기 시작한 지도 벌써 오래여라 

지극히 고운 것이, 벗아 
우리 형제들의 피로 물든 꽃자줏빛 바다 위에 
일어나려 아른아른 발버둥을 치는도다. 
우리 혼령으로 구단(九段) 위에 짙푸를 
사랑에, 사랑에 목말라 있도다 

정면에서 눈을 돌릴 수는 없느니라 
그리움에 젖은 눈에 가시를 세워 
사랑보단 먼저 오는 원수를 맞이하자 
주사위는 이미 던지어졌다 
다시 더 생각할 건 절대로 없었다 

너를 쏘자, 너를 쏘자 벗아 
조상의 넋이 담긴 하늘가에 
붉게 물든 너를 쏘자 벗아! 
우리들의 마지막이요 처음인 너 
그러나 기어코 발사해야 할 백금탄환인 너!

교복과 교모를 이냥 벗어버리고 
모든 낡은 보람 이냥 벗어버리고 

주어진 총칼을 손에 잡으라! 
적의 과녁 위에 육탄을 던져라! 

벗아, 그리운 벗아, 
성장(星章)의 군모 아래 새로 불을 켠 
눈을 보자 눈을 보자 벗아……
오백 년 아닌 천 년 만에 
새로 불을 켠 네 눈을 보자 벗아……

아무 뉘우침도 없이 스러짐 속에 스러져 가는 
네 위엔 한 송이의 꽃이 피리라 
흘린 네 피 위에 외우지는 소리 있어 
우리 늘 항상 그 뒤를 따르리라 

확실히 시적 언어의 구사력은 이광수보다 서정주가 뛰어나다는 걸 알 수 있다. 이광수는 ‘뛰어난’ 소설가, 산문가이지만 서정주는 ‘뛰어난’ 시인이다. 이광수는 노골적인 선동을 시의 이름으로 하고 있지만, 서정주는 똑 같은 선동을 훨씬 시인다운 방식으로 하고 있다. 노천명이나 모윤숙, 주요한 등도 ‘뛰어난 시인’의 재능을 친일 시에서도 발휘하고 있다. 그래서 고규태 시인은 그들의 행위를 이렇게 비판했다. 

“유능한 은행원은 돈을 잘 안다. 유능한 장교는 총을 잘 쏜다. 유능한 시인은 시를 잘 쓴다. 유능한 은행원은 고객을 속여 거액의 돈도 빼먹는다. 유능한 장교는 상관을 속여 쿠데타도 일으킨다. 유능한 시인은 언어마술로 젊은이 속여 불을 향해 돌진하는 불나방도 되게 한다. 은행원이 잘 아는 돈으로, 군인이 잘 쏘는 총으로, 시인이 잘 쓰는 시로 범죄를 저지르면 그 죄질이 가장 나쁘다. 그런데 보라. 시를 아주 잘 쓴다는 모윤숙, 노천명, 서정주 등속-. 축약하여 ‘모․노․서의 무리들’은 앞에서 보았듯 너무나 잘 쓴 시로 반민족 범죄를, 민족반역을 저질렀다. 잘 쓴 시여서, 월등 탁월한 친일시여서 이 겨레 젊은이들이 깜빡깜빡 속았다.”(주14) 

1937년 중일 전쟁 이후 일제의 전쟁에 적극 협력한 대부분의 지식인, 친일파들은 아마도 한동안은 일본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1943년 이후 일본의 승리에 대한 꿈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입을 다물고 물러나 앉아 있든가 아니면 내친 김에 계속 설쳐대든지. 하지만 그 어느 쪽이든 “눈치를 보는 일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 돌아설 길이 없는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었다.” 이광수를 비롯한 모윤숙, 노천명, 서정주 등은 그런 인물들이었다. 

▲ 서정주가 칭송한 ‘마쓰이 오장’(<마쓰이 오장 송가>)을 찬양하는 글들이 친일잡지 <신시대> 1944년 12월호에 실렸다.(사진=오마이뉴스)

역사의 심판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런데 친일행위에 대한 서정주의 변명이 놀랍다. 그는 “일본이 망할 줄 몰라서 그랬다”고 변명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이야긴가? 그럼 일본이 망하지 않았으면 친일 행위를 했어도 잘못된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의 말은 일본의 앞잡이 노릇이 문제가 아니고 일본이 망했기 때문에 문제되었다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식의 변명이 해방 후 한국 사회에서 먹혀들었다는 점이다. 

역사학자 김기협은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는 이른바 ‘승리지상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갑자가 ‘해방’이 찾아왔다는 ‘신화’라는 것이다. 일본이 이길 것 같아서 그 쪽에 붙었다는 이야기에는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어?”라는 질문이 함축되어 있고, 우리 사회에는 “그럴 수 있지. 인간적으로 이해가 돼!”라고 대답할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역사 인식의 허점이다. “일본이 그렇게 갑작스레 망할 줄 몰랐다”는 서정주의 변명에 대해 웬만큼 역사학의 훈련을 받은 사람이 아니면 “그 무슨 말도 되지 않는 황당한 말씀!”이라고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아, 정말 너무 갑작스런 사태 앞에서 ‘저 순결한 영혼의 시인’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다.(주15) 

▲ 미당 서정주는 한국 최고의 시인 중 한명이지만, 뛰어난 시적 재능을 친일과 독재 미화에도 사용했다(사진=나무위키). 반성과 사과가 필요했으나 변명으로 일관했다. 역사의 심판이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다. 

그런데 ‘일본이 패망할 줄 몰랐다’는 서정주의 변명은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서정주가 ‘일본이 패망할 몰랐다’고 보기도 어렵다.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일본군은 한동안 주도권을 쥐고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1942년 8월부터 1943년 2월 초까지 전개된 콰달카날 섬 전역에서 패배한 이후 일본은 계속해서 수세에 몰렸다. 특히 일본군은 1944년 4월 중순부터 12월 초까지 중국 대륙에서 ‘이치고 작전’(一号作戦: 중국 대륙 관통작전)을 펴 장제스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려 했으나 실패했고, 이 무렵부터 버마 전선에서도 영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1944년 6월의 사이판 전투와 10월의 필리핀 레이테만 전투에서 일본 해군이 궤멸하는 등 태평양 전선에서도 패배를 거듭했다. 어지간한 정보와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일본의 패망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1945년 2월부터 미군 B-29 폭격기가 일본 본토를 폭격하기 시작했고, 3월 9일 335대의 대규모 비행대가 출격해 1700톤의 폭탄을 떨어뜨려 1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도쿄 대공습’이 있었다. 누가 보아도 일본의 승리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4월 초부터 6월 말까지 전개된 오키나와 전투에서 7만 7000명의 일본군 전사자와 12만 명의 주민 사망자를 내면서 패배함으로써 일본은 돌이킬 수 없는 궁지로 내몰렸다. 일본군은 오키나와 전투에서 주민들을 방패막이로 내세워 소모전을 펼치며 일본 본토 방위작전의 예행연습을 폈으나 전세를 역전시키거나 만회할 길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1943년 이후 일본 중국 전선, 동남아 전선, 태평양 전선에서 패배를 거듭했고, 1944년 패배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1945년 5월 추축국의 핵심이었던 독일마저 항복한 뒤 일본에게는 더 이상 역전의 길이 없었다. 일본으로서는 버티면서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항복 조건을 내걸 수 있는 기회를 찾는 것이 최선의 길이었다. ‘야마도 정신’을 외치며 ‘장렬한 산화’를 준비하는 광신도들도 없지 않았으나 일본의 지배층 중에는 냉정한 계산으로 그들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1937년 이후 노골적으로 일제에 협력한 자들의 경우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뒤늦게라도 조용히 은신해서 훗날에 대비하려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차피 망가진 몸 더 이상 숨어봐야 다른 피신 수단도 없었던 이들은 그냥 끝까지 갔고, 해방 후에도 말도 되지 않는 논리로 자신을 변명했다. 결국 이들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형벌이 주어져야 했으나 ‘반민특위’가 종이호랑이가 되면서 이들은 끝내 반성을 하지 않았다. 변명으로 일관해도 한국 사회가 이들을 용납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들은 한국 사회의 주류로 남아서 큰 소리 치며 살았다. 현재 이들을 현실에 법정에 세울 수는 없다. 하지만 역사의 법정에 세울 수는 있다. 역사의 법정에서는 이들에 대한 단죄가 계속되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이들이 조선의 젊은이들을 전장터로 보내어 총알받이로 삼는 민족반역행위를 저지르고 있을 때에도 나라의 독립과 민중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흔히 ‘해방이 갑작스럽게 온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해방이 연합국에 의해 일방적으로 그냥 주어진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비록 일제의 패배에 결정적인 힘이 된 것은 연합국의 공격이었지만 한국인의 독립을 향한 투쟁, 민족해방을 위한 끈질긴 투쟁이 없었다면 일본의 패배가 곧 한민족의 해방, 독립으로 이어졌다고 단정할 수 없을 것이다. 친일파에 대한 비판은 결국 이들 애국투사들을 기억하는 일과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려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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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인명사전-이광수』, 754쪽 

2) 허동현, “침략전쟁 참여 독려한 이광수 ‘민족을 위해 친일했다’ 변명”, 중앙일보, 2009.8.21.

3) 승인배, “친일과 애국 사이...춘원의 두 얼굴”, 조선일보, 2000.1.10.

4) “해방이 1년만 늦었어도 황국신민 대우를...”, 오마이뉴스, 2004.9.12.

5) 「君國多事의 秋에 志願兵(志望者) 十萬 突破, 志願兵 母妹에 送하는 書」라는 제목 아래의 여러 글들 중 하나다.

6) 이광수, 「母, 妹, 妻에게」, 『삼천리』, 제12권 제7호, 1940년 7월, 40〜46쪽;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1』, 780〜781쪽 재인용

7) 이광수, 「징병과 여성」, 『신시대』, 1942년 6월호;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1』, 751쪽

8) 최남선·가야마 미쓰로(이광수)·마해송, 「東京對談」, 『朝鮮畫報』, 조선문화사, 1944년 1월;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1』, 2009, 778쪽 

9) 이광수, 「愛國者와 今日」, 『삼천리』, 제13권 제11호, 1941년 11월, 55쪽;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1』, 792쪽 

10) 이영훈 외, 『반일종족주의』, 미래사, 2019, 10쪽

11) 이광수, 「내선일체 수상록」, 중앙협화회, 1942년 5월 10일, 1〜7쪽;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1』, 804〜805쪽 

12) 이광수, 「創氏와 나」, 『매일신보』,1940년 2월 20일 조간 2면;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1』, 804쪽 

13)  처음으로
 - 전두환 대통령 각하 제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1987. 1. 18)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 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와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잘사는 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물가부터 바로 잡으시어

1986년을 흑자기원 원년으로도 만드셨나니
안으로는 한결 더 국방을 튼튼히 하시고
밖으로는 외교와 교역의 무대를 온 세계에 넓히어
이 나라의 국위를 모든 나라에 드날리셨나니

이 나라 젊은이들의 체력을 길러서는
86아세안게임을 열어 일본도 이기게 하고
또 88서울올림픽을 향해 늘 꾸준히 달리게 하시고

우리 좋은 문화능력은 옛것이건 새것이건
이 나라와 세계에 떨치게 하시어
이 겨레와 인류의 박수를 받고 있나니

이렇게 두루두루 나타나는 힘이여
이 힘으로 남북대결에서 우리는 늘 주도권을 가지고
자유 민주 통일의 앞날을 믿게 되었고

1986년 가을 남북을 두루 살리기 위한
평화의 댐 건설을 발의하시어서는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육천만동포의 지지를 얻으셨나니

이 나라가 통일하여 흥융할 발판을 이루시고
쉬임 없이 진취하여 세계에 웅비하는
이 민족기상의 모범이 되신 분이여!

이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14) 고규태, “모윤숙·노천명·서정주의 친일시 너머-미당문학상과 나희덕 등속”, 아시아문화, 2015년 8월호; 한국작가회의(http://www.hanjak.or.kr/2012/idx.html?Qy=board&nid=2069&page=) 

15) 김기협, “일본이 망할 줄, ‘서정주’는 정말 몰랐을까?”, 프레시안, 201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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