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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선생 순도 98주년, 그의 일생과 남북교착관계 돌파구를 생각한다<칼럼> 이장희 한국외대 명예교수
이장희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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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5.21  12: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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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희 / 한국외대 명예교수, 국제법 


의암 손병희 선생님이 태어난 당시(1861.4.9.~1922.5.19.)의 시대적 배경은 세도정치로 인해 삼정의 문란이 극심하였고, 농촌사회의 피폐가 극에 달하던 때였다. 민심이 흉흉해 각종 종교가 발생하고, 민란으로 왕조몰락의 위기가 도래하던 정치적으로 어려운 시대였다. 국제적으로 유럽의 발칸반도로 비유되는 한반도는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에 의해 중국과 일본의 선점에 이어 영국, 러시아, 미국 등의 각축장이 되었다. 

이러한 외세침략과 조선의 부패한 봉건제도에 항거해 궐기한 것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다. 이와 같은 사회배경, 국제정세 그리고 어려운 가정환경 가운데서 의암 선생이 재가녀의 서자로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서자로써 차별을 받게 되자, 부조리한 사회에  저항하는 의식이 있었다. 
  
선생은 1882년 10월 5일 약관 21세에 조카 손천민의 권유로 동학에 입교했고, 해월 최시형의 수제자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호서동학군 통령으로 직접 참가하였다.  동학이라는 종교적 수련활동을 통해서 시대를 이끌어가는 민족지도자요, 민족의  활기를 심어준 개혁적인 정치사상가요, 애국자 그리고 교육운동가로서 수련을 하였다. 그의 일생은 좌절과 패배 그리고 재기와 극기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삶의 연속이었다. 
    
의암 손병희 선생은 일제 우리 민족의 격동기에서 의연하게 시대적 역할을 충실하게 다하신 큰 종교지도자, 독립운동가 그리고 교육운동가이다. 일제 식민지 침탈 초기와 그 강점기에 종교지도자의 역할이란 쉽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종단조직을 승계하여 지켜야하고, 다른 한편은 민족의 혼을 사수해야하는 양단의 갈림길에 서있는 것이다. 자칫 하면 양편으로부터 비판을 받기 일쑤이다. 그런데 항상 시대적 공적 가치를 최우선에 두면서도, 친일하는 민족 동지들을 설득하고, 또 일제와 힘들게 맞서 싸우는 독립운동가들을 돕고 위로하면서 민족의 큰 혼과 나아갈 오른 방향을 지키려고 큰 지도자로서 역할을 해온 분이다.  

이러한 큰일을 지혜롭게 해온 것은 의암 선생의 인간적 큰 포용력, 대범성 그리고 확고한 종교관, 그리고 민족에 대한 올바른 방향설정은 만민평등과 보국안민에 기반한 동학사상에서 연유한다.  
   
의암 선생은 천도교 지도자로서 항상 매사를  대승적 차원에서 솔선수범하는 대범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1897년 12월부터 최시형의 뒤를 이어 제3대 대교주가 된 이후 3년 동안 지하에서 교세확장을 위해서 힘썼다. 1906년 박인호에게 천도교 대교주 자리를 인계할 때까지 천도교 발전을 위해서 크고 작은 주요한 일들을 처리하였다. 의암 선생은 본시 1894년 동학혁명에서 출발한 동학을 1905년 12월 천도교로 처음 개편하였고, 전국적으로 천도교 교세 신장을 위해서 헌신적 노력을 기울였다.    
   
1898년 최시형이 체포되어 처형되고 난 뒤, 동학재건에도 헌신하는 한편, 일제탄압이 심해지자 1901년에 일본  망명길에 오르면서 나가사키 및 오사카 체류, 중국 상해 등을 방문하고, 국제사회 정세를 몸소 살피고, 동학재건과 민족 근대화에 큰 열의를 가졌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국내 교도들에게 진보회(進步會)를 조직케 하여 문명개화운동을 주도하였다. 진보회는 대동회, 중립회를 거쳐 1904년 8월 31일 조직되었으며, 회원이 11만명에 달하는 단체로 발전하였다. 당연히 당시 대한제국과 일제 양편에서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연계되어 매우 위험한 단체로서 탄압을 받았다.
   
1906년 천도교 대교주를 박인호에게 인계하고, 일제의 수많은 박해와 갖은 탄압 속에서도 천도교의 기본사상에 근거하여 교육사업, 언론사 설립, 출판사 설립에 큰 앞장을 섰다. 의암 선생은 일제의 민족사학 탄압에 강하게 저항하여, 경영난에 허덕이는 보성학교와 동덕학원을 인수하여 민족사학을 굳건하게 지켜주었다. 
   
이러한 큰 어른이기에, 1919년 3.1운동 혁명 선봉장으로서 민족 종교 지도자 33인을 규합하여 자주독립의 3.1혁명의 횃불을 지켜들고, 이것을 국내외적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갈 수 있게 성공시켰다. 그는 1919년 들어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에 따라 제기된 민족자결원칙과 파리강화회의의 개최를 앞두고 일대 독립운동을 펼치기로 결심하였다. 

1919년 1월 20일, 3.1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바로 직전, 손병희 선생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독립운동에 대하여 세 가지 원칙, 독립운동의 대중화, 독립운동의 일원화 그리고 독립운동의 비폭력을 결의한 것은 선각자적인 지혜이다. 이것은 동학농민전쟁의 폭력적 항쟁이 실패하고, 갑진년 혁신운동이 과격했다고 판단해 민족내부의 역량결집 등 새로운 방식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3.1 독립혁명은 농민, 노동자 등 계급적 이해를 대표하는 인사를 제외한 종교계 인사를 중심으로 민족대표 33인이 구성되는 한계점을 보였다. 이들 민족대표들은 타협적 자세를 보이기는 했으나 만해 한용운 선생 등 굳은 신념을 지닌 민족주의자들이 주도하기도 하였다. 이는 식민지화 이후 10년 동안 이루어진 인재양성과 역량축적이 이를 계기로 결집한 것이다. 

3.1혁명운동은 세계 식민지 국가에서 가장 강력하고 규모가 컸으며 영향력이 널리 끼친 독립운동으로 평가된다. 일제 당국도 매우 놀란 거대한 민족 독립운동이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항일 전선에서 최초로 폭력적 방법을 추구했다면, 3.1운동은 비폭력적 독립운동이었다. 그 운동은 국내만이 아니라 만주와 러시아 땅 연해주와 미주지역으로 퍼져 나갔고 마침내 상해 임시정부를 발족시키는데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냈다. 특히 국제적으로 중국 5.4운동, 인도, 필리핀, 이집트 등 식민지열강 피압박민족의 독립운동에 큰 동력을 부여했다. 

2020년 5월 19일 의암 선생 순도 98주년을 맞이하는 이 시점, 조국은 여전히 한일 과거사 미청산, 분단 70주년, 한국 정전협정 67주년을 맞이하고 있다. 작금 한민족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 체제라는 냉전체제에 갇히어 1965년 한일협정체제 및 1953년 정전체제를 청산하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다. 일제식민지로부터 독립된 지 어언 75주년 된 독립된 나라로서, 경제력 10위, 교육 수준 최상위인 대한민국에서, 이 땅의 지도자들은 과연 민족의 시대정신, 제2의 독립인 민족통일사업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냉정하게 자성해야 할 것이다.   

2020년 5월 19일 98주년 순도일을 맞는 이 순간, 아직도 제2의 독립인 민족분단은 70년이나 지속되고, 남북 대화는 모두 두절되어 있고, 일제는 과거 식민지 범죄를 조금도 사과하지 않고, 미국과 중국은 동북아 패권경쟁을 대한제국 말처럼 벌리고 있다. 장기적 일제침탈과 민족분단은 일차적으로는 외세의 큰 책임이지만, 안으로는 민족 자주와 평화의 정신을 굳건히 지켜나가지 못한 것은 당시 역사의 주인공의 책임이 크다. 

현재 우리 남북은 2018년 남북이 합의한 4.27판문점선언과 9.19평양공동선언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 눈치 보지 말고, 국내외  NGO와 남북 당국이 힘과 지혜를 합한다면 UN안보리 제재 및 미국국가 단독 제재를 포함한 외세의 방해도 무력화할 것이다. 우리 남한정부 스스로 할 수 있는 대통령 훈령에 불과한 5.24조치조차도 폐기 못하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세계정세가 급변하는 언택트 사회(Untact Society)에서, 남북당국의 교류협력이 전혀 없는 이 시점에 출구전략이 무엇인지 의암 선생께 혜안을 묻고 싶다. 100년 전 자립정신, 공정사회구현, “사람이 곧 하늘이다”이라는 동학사상이 한민족과 지구촌의 정신적 물리적 병을 치유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는 없을까? 여야가 지난 20대 국회에서 당리당략으로 민생, 민족 그리고 과거사에 관한 주요한 법안을 제때 통과시키지 못하고 4년을 흘려보내는 못난 20대 국회에 따끔한 충고를 의암 선생께 바란다. 

남북한이 모든 교류접촉이 막힌 작금 상황에서 동학에 뿌리를 둔 천도교청우당의 재건과 이를 통한 남북한의 교류접촉 문을 열어 보는 것도 생각해 볼 수도 있다고 본다. 현재 북측 천도교청우당은 조선노동당의 우당으로서 통일전선부의 활동을 주로 하는 위성정당인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우당의 뿌리는 1919년 9월 2일 김기전을 당수로 일제강점기 일제탄압에 맞서 세워져서 일제에 의해 다시 해체되었던 우리 민족정신에 기반한 핵심정당이자 천도교청우당의 후신이다. 

창당 초기부터 민족자주의 이상적 민주국가의 수립, 인내천(人乃天)의 사상에 맞는 새 윤리 수립, 회귀일체(回歸一體)의 신생활 이념에 맞는 경제제도의 실현을 당강령으로 수용하였다. 1945년 8.15 해방 후 1946 2월 1일 김달현에 의해 다시 창당해, 1950년 천도교청우당과 합당해 오늘에 이른다. 남측 청우당은 6.25를 계기로 이승만에 의해 1960년에 해체된다.  

어떻든 민족분단 그리고 냉전이데올로기 경쟁을 거쳐 오면서 남북이 청우당을 이념적,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은 양편 모두 책임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의 청우당이 교류협력 하는 것을 장기적 목표로, 청우당의 당초 공동 뿌리를 복원하고, 해체된 남측 청우당 복원운동부터 다시 시작해서 북측에 접근해 보는 것도 조심스럽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의암 선생 98주년 순도일을 맞이하여 21대 새 국회는 ‘만민평등과 보국안민’이라는 동학사상을 제대로 깨우쳐 시대와 국민이 바라는 평화통일시대를 활짝 열기 위하여, 민족자주, 인내천,  민생경제를 두루 살피는 성숙된 국회가 되길 바란다. 

이장희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고대 법대 졸업, 서울대 법학석사, 독일 킬대학 법학박사(국제법)

-한국외대 법대 학장, 대외부총장(역임)
-대한국제법학회장, 세계국제법협회(ILA) 한국본부회장.
-엠네스티 한국지부 법률가위위회 위원장(역임)
-경실련 통일협회 운영위원장, 통일교욱협의회 상임공동대표,민화협 정책위원장(역임)
-동북아역사재단 제1대 이사, 언론인권센터 이사장 (역임)
-민화협 공동의장, 남북경협국민운동 본부 상임대표, 평화통일시민연대 상임공동대표
-동아시아역사네트워크 상임공동대표, SOFA 개정 국민연대 상임공동대표(현재)
- ‘남북평화기원 강명구 유라시아 평화마라토너와 함께하는 사람들’(평마사) 상임공동대표
-한국외대 명예교수, 네델란드 헤이그 소재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 재판관,
-대한적십자사 인도법 자문위원, Editor-in-Chief /Korean Yearbook of International Law(현재)

-국제법과 한반도의 현안 이슈들(2015), 한일 역사문제 어떻게 풀 것인가(공저,2013), 1910년 ‘한일병합협정’의 역사적.국제법적 재조명(공저, 2011),“제3차 핵실험과 국제법적 쟁점 검토”, “안중근 재판에 대한 국제법적 평가” 등 300여 편 학술 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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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보기(1)
굽은소나무 (qnseksrmrqhr) 2020-05-22 10:29:17
소식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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