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2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광주 MBC와 인터뷰하는 문 대통령. [사진제공-청와대]

“지금 그때 총학생회장단들의 결정을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매일 서울역에 모여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대적인 집회를 함으로써 결국은 군이 투입되는 빌미를 만들어 주고는 결국 결정적인 시기에는 퇴각을 하는 그런 결정을 내린 것 때문에 광주 시민들이 정말 외롭게 계엄군하고 맞서게 된 것이거든요.”

문재인 대통령이 17일 오전 8시에 방영된 광주 MBC 5.18 40주년 특별기획 「문재인 대통령의 오일팔」에서 이같이 회고했다. “그 사실에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고 저뿐만 아니라 광주 지역 바깥에 있던 당시 민주화운동 세력들 모두가 광주에 대한 부채의식을 늘 가지고 있었고 그 부채의식이 그 이후 민주화운동을 더욱 더 확산시키고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

문 대통령은 “그런 점에서 당시 광주 오월 영령들을 비롯한 광주 시민들은 우리 1980년대 이후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상징과 같은 그런 존재가 되었”다고 강조했다.

“그 때 총학생회장단들의 결정”이란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회군’을 말한다. 전두환 신군부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은 5월 13일부터 학내를 벗어나 거리로 진출했으며, 15일에는 수십만명이 서울역에 모여 밤 8시까지 시위를 벌였다. 

문 대통령은 “그 상황에서 군이 투입될 것이라는 소문이 쫙 퍼졌는데, 그러자 당시 그 집회를 이끌고 있던 서울지역 각 대학 총학생회의 회장단들이 말하자면 해산을 결정했다”면서 “군이 투입될 수 있는 빌미를 줘서는 안 된다라는 명분도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군이 투입되면 아주 희생이 클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 상황이 좋아지고 난 이후에 다시 모여야 한다 그런 의견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밝혔다.
 
이어 “나는 그때 그 결정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나는 그때 경희대 복학생 대표였는데, 나뿐만 아니라 대체로 복학생 그룹들은 말하자면 민주화로 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 군과 맞서는 것이기 때문에 군이 투입되더라도 사즉생의 각오로 맞서야 한다, 그 고비를 넘어야 민주화를 이룰 수 있다 (...)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토로했다.

당시 ‘회군’을 주장하고 관철시킨 총학생회장단에 심재철(서울대), 신계륜(고려대) 등이 있었다. 현재 여당 대표인 이해찬 의원은 서울대 복학생그룹 대표였다.  

▲ 대담자는 광주 MBC 김철원 기자이다. [사진제공-청와대]

1980년 5월17일 전두환 신군부가 비상계엄령을 확대하면서 당시 문재인은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됐다. “청량리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이 되었던 중에 저를 조사하던 경찰관들로부터 그 소식을 들었다”며 “당시 그 경찰관들은 계엄군이 광주에 투입된 그(것)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인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가 3년 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고 취임한 이후 처음 참석한 정부기념일 행사도 ‘제37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이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막았던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이 비로소 이뤄졌다. 유족 김소형 씨를 안아주고, 표정두, 박관현, 조성만, 박래전 열사의 이름을 호명했던 기억도 떠올렸다. 

문 대통령은 지난 12일 활동을 개시한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를 통해 “아직 남은 진실들이 전부 다 밝혀지기를” 기대했다. △발포 명령자, △암매장 시신, △헬기 사격 여부 등을 예시했다. 일부 세력의 ‘5.18 광주 폄훼.왜곡’을 강하게 규탄하고, 헌법이 개정된다면 5.18민주화운동이 전문에 담겨야 한다고 역설했다.

‘5.18 하면 생각나는 인물’로는 “노무현 전(前) 대통령, 그러니까 그 당시의 노무현 변호사가 제일 먼저”라고 밝혔다. 

“80년대 이후의 부산 지역의 민주화운동은 광주를 알리는 것”이었는데, 처음에는 유인물을 배포했고 버스 2~3대를 전세 내서 광주를 참배했으며, ‘광주 비디오’가 나온 뒤에는 성당과 교회, 학생회 등에서 돌려봤다. 

문 대통령은 “6월항쟁이 일어났던 87년 5월에는 당시의 노무현 변호사와 제가 주동이 돼서 부산 가톨릭센터에서 5.18 광주 비디오 관람회를 가졌다 (...) 부산 시민들이 줄을 서서 기다려서 광주 비디오를 보고, 그때 비로소 광주의 진실을 알게 된 분들도 많았다”고 회고했다.

“그런 것이 부산 지역 6월항쟁의 큰 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또 부산의 가톨릭센터가 6월항쟁 때 서울의 명동성당처럼 자연스럽게 부산 지역 6월항쟁을 이끄는 중심지 역할을 했다”며 “그런 일들을 함께 했던 그 노무현 변호사, 광주 항쟁의 주역은 아니지만 그러나 광주를 확장한 분으로서 기억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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