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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셋째 이야기, 아름다운 황혼을 위하여(2)<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28)
정해랑  |  jhr137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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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5.16  09:3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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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다시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 이야기를 다시 하려고 합니다. 잠시 쉰다는 것이 1년을 넘겨 버렸습니다. 그 동안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세상은 많이 변한 것 같은데 어찌 보면 완강하게 버티며 변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변한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그보다도 변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소소한 일상을 통해 그려 보고자 합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과 질책을 부탁드립니다. / 필자

 

신돌석씨는 욕창보다도 고모의 깡마른 다리가 안타까웠다. 누워 있기만 해서 그런지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 팔도 그랬다. 얼굴은 반쪽이 되어 있고, 머리는 새하얗다. 얼굴에는 검버섯이 여기 저기 피어 있다. 어느 정도 회복된다고 해도 다시 일어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아니 회복이 되기는 할까?

어찌 보면 요양원 같은 곳에서 생명을 연장시켜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살아서 무엇 하나? 들어오다가 어느 방에서는 콧줄이란 걸 끼고 있는 어르신도 있었다. 일어나지도 못하고 누워 있는 상태에서 생명만 연장된다고 좋은 건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생명연장에 관한 법률이 만들어져서 정신이 멀쩡할 때 자기 의사를 분명하게 밝히는 절차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또 다시 생각해 보면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을 자기에게 죽음이 조금 멀리 있다고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아무리 고통스럽고 힘들더라도 조금이라도 더 살아보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반대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함부로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 아닐까? 살아있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더 살아야 하는 것, 옆에서 조금 더 사시게 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고 올바른 일이 아닐까? 이런 저런 생각들이 머리를 혼란스럽게 하였다.

고모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실까? 어디선가 읽은 글이 생각난다. 외국인들, 주로 유럽이나 미국인들을 말할 텐데, 죽을 때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 죽고 싶어 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식에게 폐 끼치지 않고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한다. 외국인들이 그런지는 신돌석씨가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모르겠고, 한국 사람들이 그런 소원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자식에 대한 애착이 강한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이리라.

자식에 대한 애착 하면 고모 이상 가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 신돌석씨의 생각이었다. 그와 관련해서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일이 있다. 신돌석씨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놀 때 고모네 가게에 가서 일을 도와주었던 일이 있었다. 그때 현규는 전문대에 들어갔고, 현주는 고2, 현철이는 중1 때였다. 고모네는 가게에 딸린 방에서 살고 있었다. 그래서 현규는 주로 나가 있었고, 잘 때만 들어왔다.

고모, 현주, 현철이와 함께 둘러앉아서 저녁을 먹는데 텔레비전에서 ‘113수사본부’라는 드라마를 하고 있었다. 이 드라마는 간첩을 잡는 정보경찰들 이야기를 다루는 반공드라마였다. 그 드라마에서 남파된 공작원이 어떤 사람에게 접근해서 공작금을 주면서 포섭하는 내용이 나왔다. 포섭 대상인 사람이 공작금을 받느냐 마느냐를 두고 망설이다가 경찰에 의해 일망타진되면서 감옥에 간다는 내용이었다.

드라마를 보면서 고모가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했다. 저 돈을 왜 안 받냐는 것이었다. 자기 같으면 받는단다. 받아서 숨겨 놓고 자식들이 쓰게 한다는 것이었다. 자기만 감옥에 가고 애들한테 돈을 물려주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한다. 아니면 간첩인 걸 알자마자 신고해서 포상금을 받는다고 하였다. 그 당시에는 깜짝 놀랄 이야기였다. 물론 지금도 대부분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 다 있다고 쳐다볼 일일 것이다. 그런데 현주와 현철이는 엄마의 그런 성격을 잘 알아서 그런지 웃기만 했다.

고모는 아버지 못지않게 반공의식이 투철한 사람이다. 그 사연을 신돌석씨로서는 어렴풋이 알지만 자세히는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이런 경우에서 보듯 자식들을 위해 악착같이 살아야겠다는 생각에서는 이념도 초월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어쩌면 고모에게는 그런 이념이란 것이 없는지도 몰랐다. 자신이 살아야 하고, 자식들 살려야 한다는 생각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 생각이 그런 반응을 낳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렇게 살아온 고모가, 모진 풍파세월을 이겨온 고모가, 지금 병상에 누워 계신다. 목소리도 잘 안 나오고, 걷지도 못하신다. 이제 일어난다는 보장도 없다. 그나마 돌봐 주는 아들, 며느리가 있고, 요양원이 있어서 하루하루를 연명해 나가신다. 고모는 죽을 때 자식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싶다는 한국 사람의 보편적인 인식, 그리고 자식을 위해 산다는 이전의 생각과는 달리 이제 자식을 불편하게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왠지 짠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11시 반 쯤 되니 점심시간이라면서 밥이 왔다. 고모는 엉덩이에 욕창이 생겨서 옆으로 누워 있었다. 반듯하게 누워 드리고 일으키려고 하니 아프다고 하였다. 어디가 아프냐고 현철이가 물어도 그냥 ‘아파, 아파’만 반복하였다. 현철 처는 많이 해본 솜씨로 고모의 머리를 감싸 안고는 천천히 반듯하게 눕히고는 침대를 반쯤 올려서 일어나 앉게 하였다. 그리고는 침대에 붙어 있는 식탁을 펼쳤다.

식사는 죽이었다. 그리고 몇 가지 밑반찬이 있었다. 고모와 한 방에 있는 분들은 일어나서 걸어 다니므로 식사도 밥으로 하셨다. 그리고 장조림 등을 먹었다. 고모가 죽을 직접 먹다가 속도가 늦어서 그런지 요양보호사가 먹여 주었다. 현철이 말로는 죽을 직접 먹는 것도 최근에 와서나 있는 일이라고 한다. 얼마 전까지 아무것도 안 먹어서 참 힘들었다고 한다. 그래도 식욕이 돌아온 것은 정말 다행한 일이었다.

죽을 먹은 뒤 현철 부부가 갈아가지고 온 과일주스를 마셨다. 빨대로 빨아서 마시는데 바닥이 날 때까지 열심히 빨았다. 현철이 말로는 수분 섭취가 부족해서 오줌이 잘 안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주스를 갈아준다고 하는데 자주 못 오니 그냥 형식만 갖춘 셈이라고 한다. 그래도 주스를 마셔서 다행이라고 한다. 팩으로 된 음료수를 갖다 놓는데 요양보호사들이 제 때 주지는 못한다고 한다.

식사를 마치신 뒤 현철이와 현철 처가 찬송가를 불러드리겠다고 하는데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고모도 젊은 날에는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그런데 눕고 난 뒤에는 찬송을 불러드리거나 성경을 읽어드려도 싫다고 한단다. 요양원 들어오기 전에 혼자 있을 때도 그랬단다. 텔레비전만 보는데 ‘가요무대’ 같은 게 나오면 그렇게 좋아한단다. 알 수 없는 일이다.

   
▲ [삽화-백소(白笑)]

고모가 있는 방은 장미방이라고 붙어 있는데, 세 분이 함께 있었다. 90이 넘은 할머니가 있었는데 아직 정정하다. 자식들이 텔레비전을 갖고 와서 탁자 위에 놓고 보고 있다. 문간에 있는 침상에 있는데 텔레비전을 혼자서 보는 셈이다. 현철이가 고모도 볼 수 있게 조금 돌리면 안 되냐고 했더니 그러라고 하고는 다음에 가 보면 다시 돌려놓았단다. 또 이야기하기도 그래서 그냥 뒀다고 한다.

또 한 할머니와 고모가 나란히 안쪽 침상에 있었다. 그 할머니는 80을 갓 넘겼는데 치매가 있다고 한다. 그냥 보기에는 멀쩡한데 자꾸 나가려고 한단다. 들어올 때 자동문이었는데 나갈 때는 비밀번호를 눌러야 나갈 수 있다고 한다. 이전보다 시설은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갇혀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랴? 영원한 난제인 듯하다.

신돌석씨는 언제부턴가 유럽식 복지에 대해 강연을 많이 들었다. 언제는 사회주의국가가 가장 이상적인 사회인 듯 말하던 사람들이 구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국가들이 붕괴된 이후에는 유럽식 사민주의의 복지사회를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였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가 그렇다는 이야기였다. 아는 게 부족해서 딱히 반대할 것도 없지만, 왠지 마음이 개운치는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북유럽 영화를 한 편 보았는데 거기서도 노인들이 요양원에는 가기 싫어하였다. 혼자 사는 노인을 요양원에 데려가려고 하고, 동네 사람들이 막아 주어서 그냥 살게 되었다는 내용이 나왔다. 요양원과는 달리 뭔가 공동체 같은 것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언뜻 언뜻 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난망한 일이었다.

고모에게는 여기가 집일까? 우리나라 사람들의 70% 이상이 의료기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둔다고 한다. OECD 국가 대부분이 50% 내외라고 하는데 우리나라가 비정상적으로 많은 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도 절반 이상이 집에서 죽기를 원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소원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집에서 마지막을 돌보아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누군가 그런 일로 희생해야 된다고 한다면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언젠가 박완서의 ‘해산 바가지’라는 소설을 읽었다. 시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기로 했다가 안 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물론 아들과 딸의 차별 이야기도 나온다. 하지만 인상적인 것은 그 부분인데 읽을 때만 해도 굉장히 감동적이었다. 그런데 그 뒤에 회의적인 생각들이 들었다. 과연 요양원에 모시지 않고 집에서 모시는 것이 인간적인 것인가? 그때 어르신을 돌보는 사람은 누구인가? 며느리나 딸일 텐데 그 사람이 그런 희생을 감수하는 것을 미덕으로 말하면서 사실상 강요해야 하는 것인가?

현철이가 자꾸 고모에게 말을 붙였다. 이 사람 누구냐 라고 묻고 고모가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돌석이라고 하면 크게 말해 보라고 했다. 하지만 고모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신돌석씨도 고모 나 기억나세요 라고 물어 보았다. 고모는 그럴 때마다 눈을 크게 뜨고 쳐다 보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다가 이내 외면하곤 했다.

그런 과정이 몇 차례 반복되다가 고모가 졸리다고 하였다. 그러자 현철이가 이제 그만 가보자고 신돌석씨에게 말했다. 조금 허망하다. 몇 년 만에 와서 제대로 대화도 못 하고, 잠깐 본 뒤 간다는 것이 그렇다. 현철과 현철 처는 별로 이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늘 그렇게 간단하게 만난다는 식이었다. 아들 며느리가 그러는 데야 신돌석씨로서는 뭐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하긴 그 동안 찾아보지도 않은 사람이 무슨 염치로 더 있자고 할 것인가?

하지만 가는 데에도 제약이 생겼다. 나가는 문 앞에 덩치가 큰 요양보호사가 의자를 놓고 앉아 있었다. 그 앞에 할머니라고 하기에는 좀 나이가 적은 듯한 여자가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들어올 때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걸 본 듯한데 그때는 요양보호사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닌 모양이었다. 그 여자가 앉아서 문을 지키는 요양보호사한테 따지듯이 물었다.

“도대체 왜 막는 거야? 집에 간다는데 왜 막아? 무슨 권리로 막아? 내가 무슨 죄라도 저질렀다는 거야?”

치매에 걸린 환자가 나가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현철 처에게 들으니 종종 그런다고 한다. 한번은 진짜 나가서 택시 타고 다니다가 택시 기사 신고로 다시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이도 그렇게 많지 않게 보이는 사람이 어쩌다 그러는지 딱해 보였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그 사람 때문에 붙잡혀 있게 되었다. 고모가 누워 있는 침대 위에 붙여 놓은 표를 보았다. 고모 이름과 나이가 써 있고, 인지기능저하, 우울이라고 써 있었다. 그런데 그 밑에 가면 의식상태에 명료라고 적혀 있었다.

30분 가까이 지난 뒤에 나가려고 하는 치매 환자가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나갈 수가 있게 되었다. 갈 때도 고모는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현철이가 손을 흔들면서 손 흔들라고 하니 간신히 손을 들어서 흔들었다. 문을 나서서 복도로 나갈 때까지 신돌석씨는 뒷걸음을 치다시피 하면서 고모를 바라보았다. 별로 아쉬워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을 멍하니 지었다. 복도로 나와서 현관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현철이와 현철 처는 많이 와서 그런지 복도에 나와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 들이나 요양보호사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요양원을 나서면서 현철이가 간단하게 한 잔 하고 가자고 했다. 현철 처가 차를 가지고 가기로 하고, 현철과 근처에 있는 순대국집에 들어갔다. 허름한 곳인데 탁자가 다섯 개가 놓여 있었다. 벽에 붓글씨로 얼마간 긴 글이 쓰여 있었다. ‘노년의 지혜’라는 제목 아래 달린 글이었다. 이런 부분이 눈에 확 띄었다. ‘돈에 매달리지 마라. 나이가 들수록 남에게 돈을 써라. 그러나 그것은 괜히 하는 말이다. 돈에 집착해라. 늙을수록 돈이 있어야 대접을 받는 법이다.’

너무나 솔직한 말이었다. 사실 그랬다. 신돌석씨가 주변에서 봐도 부자간, 모녀간 갈등, 고부간 갈등 등이 심한 곳일수록 돈 문제가 개입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족관계도 다 돈으로 좌우되는 것인가? 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모든 갈등의 저변에 그것이 깔려 있는 것이 분명한 것 같다. 문득 고모는 굉장히 부지런히 열심히 살았는데 돈을 남기지는 않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돌아가실 때 되면 집으로 모시나?”

신돌석씨가 물었다.

“집에서 모시기도 어렵지만, 요양원이 집이라 생각하고 여기서 임종하셔야지요.”

현철이의 태도가 단호했다. 신돌석씨는 좀 놀랐다. 부모가 일찍 돌아가셔서 그런지 그냥 집에서 돌아가시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생각했다가 한 방 먹은 셈이었다. 집에서 돌아가신 어머니와 객사와 다를 바 없이 돌아가셔서 병원에서 임종하신 아버지가 떠올랐다. 노인이 되기 훨씬 전에 돌아가셨으니 신돌석씨는 노인을 모시는 사람들의 정서나 생각을 정확하게 이해한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소주가 먼저 나오고, 이어서 순대가 나왔다. 조금 있다가 순댓국이 나왔다. 소주를 번갈아 따른 뒤 들이켰다. 신돌석씨는 반 잔을 먼저 마셨는데, 현철이는 한 잔을 한 번에 마셨다. 흔히 하는 말로 원샷을 한 것이다.

“현규는 잘 지내냐?”

한 잔을 마신 뒤 한동안 둘 다 아무 말이 없었다.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 같아서 신돌석씨가 현철의 형인 현규의 근황을 물었다. 현규는 홍콩, 싱가폴 등 동남아에서 살다가 언제부턴가 호주에 정착했다고 들었다.

“몰라요. 요즘 서로 연락도 안 해요. 형수와도 헤어졌다고 들었어요. 지현이가 작년엔가 들어와서 말하더라구요. 말도 마세요. 이상한 사업을 한다고 하면서 재산 다 날리고, 그나마 있던 어머니 집도 팔아먹었잖아요. 노인네가 오락가락하면서도 맏아들 말이라면 그저 신주단지 받들 듯하니까요.”

지현이는 현규의 딸이었다. 그러니까 현철에게는 조카가 되었다.

그랬구나. 악착같이 모아서 겨우 집 한 채 마련한 고모의 재산이 그렇게 날아갔구나.

 

필자 정해랑(鄭海郞)

서울에서 태어나 여의도 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노동정책연구소 정책실장, 경희총민주동문회 회장,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재생의 담론 21세기 민족주의>(2010년, 공저), <공주와 도둑들>(201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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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은소나무 (qnseksrmrqhr) 2020-05-17 08:07:16
소식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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