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마른 농촌에 희망의 횃불=
흙을 지키는 젊은 일꾼들

이젠 클럽 회원(會員)에 장학금(獎學金)
<대평마을엔 밝은 빛있다>
물레방아로 수력발전(水力發電)도


○... 말이나 글로 「농촌부흥」이나 「농촌문화의 발전」을 부르짖기는 쉽다. 또 그러한 사람들은 얼마든지 많다. 「흙과 더불어!」라고 외치며 가장 고귀한 것을 위해 일생을 던져버린 수많은 선각자의 집단을 우리 주변에서는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 거개의 사람들이 흘린 피땀이나 그들이 품었던 웅대한 구도(構圖)-그리고 그들이 지녔던 연륜의 두터움에 비해 그들이 얻을 수 있었던 성과는 너무나 애초의 생각들과 동떨어졌고 그 역정 또한 고달프기만 했다. 그러한 지난날의 모든 일들과 견주어 여기 강원도(江原道) 원주(原州) 교외 어느 조그마한 농촌을 무대로 시도된 몇몇 젊은이들의 이야기는 그들의 나이엔 어울리지 않도록 규모가 크다.

어쩌면 그들이 이룩한 그 방법들이야말로 현대의 입김을 올바로 받아 소화하고 베푸는 새로운 「농촌 부흥」 및 「농촌문화 향상」 방법의 하나가 될는지도 모른다.

원주시에서 서북쪽으로 20리 가량 떨어진 「원성군 판부면 관설리 대평마을」에 있는 「통일4H클럽」이 바로 화제의 젊은이들이 발판으로 삼고 있는 일터다. 이 4H「클럽」은 4년전 어느 여름날 저녁-아직 스무 살 안쪽인 세 사람의 이 마을 소년들이 당장 눈앞에서 쓰러지는 중병환자 같이 앙상하게 거칠어진 그들의 마을을 뒷산에서 내려다보며 「이 죄 없이 매 맞는 우리고장과 농토를 우리 손으로 건져내자」고 서로 손을 굳게 잡은 날부터 생겨났다. 

당시 세 사람 중에서도 나이가 제일 많은 「염준수」군이 스무살-「박찬동」군과 「정효진」군은 열아홉살이었다. 그들은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처음 세 젊은이가 「클럽」의 간판을 송판대기에 써 붙이고 그들의 동지를 모으려 마을로 돌아 다녔을 때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감자밥만 먹고 헛소릴 한다」고 비웃었다. 

그들이 아무리 「힘을 모으면 잘 살게 된다」 「우리도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고 역설 해봐도 마을사람들은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마을사람들에겐 당장 눈앞에 가로막아선 「오늘」이 더 다급하고 지나치게 절망적이었으며, 따라서 「내일」같은 건 기약할 수도 없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세 사람은 처음의 맹세를 버리지 않았다. 모멸과 비웃음과 심지어는 부모에게까지 냉대를 받으면서도 그들은 줄기차게 설득(說得)하고 돌아다녔다. 그러는 한편 밤마다 자정까지 새끼꼬기 짚신삼기 등 공동작업을 했고, 새벽 네 시에는 잠을 깨어 학교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됐다. 낮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기금 모집에 싸다녔으나, 백환짜리 한 장을 선뜻 던져주는 사람은 없었다. 인심이 나쁜 게 아니라 돈이 없었던 것이다.

얼마 뒤 그것을 깨달은 그들은 젊은 육체를 밑천으로 날품팔이를 하기로 마음잡았다. 벼타작과 산나무치기 등 무슨 일이건 덤볐다. 그 결과 어느덧 1만5천환이라는 돈이 그들의 수중에 모였으며 그 돈으로 돼지새끼 두 마리를 샀다. 이듬해엔 이들이 고등학교를 마쳤다.

「흙 속에 뼈를 묻자-」 이렇게 마음먹은 세 젊은이는 다음 해 봄엔 남의 땅 1,200평을 빌어 그곳에서 채소를 가꾸었다. 그 채소들을 지주와 절반씩 나눈 것을 판돈에 이제는 크게 자란 돼지를 팔아 「토끼」 30마리와 「토마토」 모종 등을 샀고 그것들을 길러서 판돈에서 35만환으로 그 1,200평의 정들인 땅을 샀다.

이처럼 이들의 살림이 늘어나고 일에 성과를 얻게 되자 사람들은 하나둘 이들의 「클럽」에 끼어들었다. 제 발로 찾아와서 그 운동이 지닌 뜻을 묻기도 하고 애써 이해하려는 노력도 보였다. 

이 무렵 그들은 2「킬로」짜리 수력발전기를 마련했다. 물레방아를 이용하여 발전기를 설치한 것이다. 이 발전기는 온 마을을 하루밤새에 「문화촌」으로 변모시켰다. 전등불을 본 마을 사람들은 입이 떡 벌어졌다. 그렇게도 못마땅하게 그들을 비방하던 사람들까지도 그들을 칭찬하기에 바빴다.

얼마 뒤 이들이 5「킬로」발전기로 백여호의 마을 집들에 불을 보낼 수 있었던 날 세 사람의 젊은이들은 처음으로 조그마하나마 그들의 노력이 열매 맺힌 기쁨을 함께 나눴다. 이제부터 「클럽」운동도 손쉬웠다. 운동은 마을에서 이웃마을로 뻗어갔다. 얼마 가지 않아서 면내 모든 마을로 이들의 슬기로운 뜻이 꿀물처럼 흘러 배어갔다.

「클럽」이 태어난 지 네 돌을 맞는 해 – 이 「클럽」에서는 또 한 번 놀라운 일을 했다.
그것은 가난으로 타고난 재질을 썩혀 버리게 된 열성 있는 「클럽」회원 20명에게 장학금을 주기로 한 일이다. 고교 5명의 장학생들이 내일의 농촌을 위해 지금 밤잠을 가리지 않고 공부하고 있다.

올해 계획으론 임업시험장을 만드는 것과 양잠업(養蠶業)을 일으키는 일이다. 그들은 이 일도 성공할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세 젊은이의 불꽃같은 농토에의 사랑이 활짝 핀 「대평마을」에서는 이제 4년전까지 뒤덮였던 우울하고 암담한 그림자가 점차 씻겨져 밝아가고 있다. 

사진 = 메마른 농촌을 부흥시킨 「염준기」(우)군과 「박한동」군

[원주지사 김명욱(金命郁) 기자 발」

▲ 흙을 지키는 젊은 일꾼들 [민족일보 이미지]

<민족일보> 1961년 3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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