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미경 / 농부

 

살구나무를 찾아서 살구나무 동산을 만들고 있다. 올해는 살구나무 마을을 만들려고 한다. 올해 우리 마을에는 많은 살구나무들이 새로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인데, 나는 그것이 북측 회령 백살구나무이기를 바래서, 그것을 구하려 안타깝게 뛰어다니고 있다.
사라진 살구나무를 찾으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살구나무를 잃어버렸듯이 아주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무엇을 위하여 그 많은 것들을 놓아버린 것일까? 여기 연재할 글들은 살구나무처럼 우리가 잃은 것들, 잊은 것들, 두고 온 것들에 대한 진지한 호명이다. / 필자

 

▲ 정현 아저씨가 떼인 밭. 

기나긴 4월이 가다

4월이 가는데도 기온이 오르지 않아 이랑마다 묻은 씨앗들이 잠잠하다. 일찌감치 담아 놓은 모종에서 올라온 싹들도 된서리에 죄다 시들고 장마다 오글오글 나온 채소모종들도 찬 바람에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4월 윤달이 든 해인지도 모르고 부지런을 떤 것이 무참하다. 싹을 기다리는 심정에 매인 기나긴 4월이 간다.

가을 햇빛이 하얀 줄 알았더니 봄볕도 하얗다. 오랜만에 잠풍한 날이어서 물 속같이 조용한 밭에 하얀 햇볕이 쏟아진다. 곡우에 내렸던 하루 단비에 연두빛으로 물든 세상의 빛깔이 하루하루 푸르름을 더해가고, 이랑마다 풀들이 키를 높이고 꽃을 피운다. 구경이나 하자면 예쁘다 하겠지만 파종하는 손에는 성가신 훼방꾼이다.

봄이 가져오는 땅의 변화는 경이롭다. 해마다, 아니 해가 갈수록 놀라운 눈으로 봄을 바라본다. 도시에서는 결코 알 수 없었던 봄을 시골에서 만난다. 그것은 이제 때가 되었다는 소식, 자연의 운행에는 예외가 없으며 자연은 인간과 논하지 않는다는 묵직한 조언이기도 하다.

다시 오지 않을 봄의 한 복판이다. 미친 것 같은 바람이 숲을 뒤흔들어도 봄이 오는 길을 막을 수 없지만 인간사에는 복병이 있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짓는 것이 농사라 한다. 하지만 땅을 갈고 씨앗을 뿌려야 시작되는 것이 농사이니, 대개는 사람의 일이다. 땅을 갈았는데 씨앗을 뿌리지 못한다면 농사는 없는 거다. 그런 일이 일어났다.

정현 아저씨의 스타일

정현 아저씨는 뽑아버린 사과밭 2천평에 내가 말한 특용작물을 심고 싶어 했다. 지난 가을에 처음 하는 얘기도 지나가는 얘기처럼 듣고, 겨울을 나며 몇 번 하는 얘기도 흘려 들었다. 그것은 무슨 계획이라든가 작심이라든가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말하자면 그냥 한 번 심심풀이로 해보는 소리 같았던 것이다. 그게 정현 아저씨 스타일인 줄을 내가 알게 뭔가.

처음 내가 그 작물을 심는다고 했더니 “그게 돈이 되남유?” 하며 시답잖아 하더니, 필시 나름대로 이것저것 찾아보고 계산도 해보았던 게다. 두 해가 지나고야 하는 말이 “사과나무 뽑은 디다 그거 심을라는디…” 그리고는 “씨나 쩜 뫄바유.” 였다. 그것이 같이 해보자고 하는 말인 줄을 안 것이 봄이 막 들어서던 우수 경칩 즈음의 일이다.

그 다음 대목은 청명이 막 지난 때다. “씨 많이 뫄놨시유?” “심을라먼 포크레인 작업하고 트랙터로 로타리도 함 쳐얄낀데…” 그제서야 정현 아저씨가 진짜 작물을 심으려는 작정이란 걸 확실하게 알았다. 언제언제 작업하고 로타리 쳐놓을 테니 씨 좀 뿌려달라고 해서 그러마고 했다. 그것으로 정현 아저씨와 나는 특용작물 농사를 함께 짓는 동업자가 되었다.

두 가지 기대

그 일에 나선 것은 무슨 큰 소득을 바래서가 아니다. 그건 그냥 기대 같은 거다.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는 것이 꽤 해 볼만한 일이라는 것을 아저씨가 알게 되기를 바라는 기대 같은 것 말이다. 그것은 생판 연고없는 뜨내기로 마을에 들어온 나에 대해 정현 아저씨가 보여준 한 자락 믿음 같은 것이기도 했으니까.

정현 아저씨는 한 마디 말로 동업의 약정을 마감했다. “장비대나 나올라나 몰러유.” 그래, 그것이 기준이다. 한 여름 땡볕에 노동을 바쳐 나오는 소득이 장비대금 떼일 정도만 아니면 해보자는 거다. 처음 해보는 작물을 놓고 정현 아저씨의 기대는 딱 그만큼이다.

그는 다른 이들처럼 대박을 꿈꾸지 않는다. 얼마나 나올지 알 수 없는 소득에 대해 김치국부터 마시는 일이란 없다. 그러니 동업자와 이익금을 어떻게 나누고 자시고 의논할 것도 없다. 필시 일 되어가는 거 봐서, 소득이 생기는 거 봐서 적당히 나누면 된다고 생각했을 거다. 나 역시 거기에 십분 동의한다.

정현 아저씨는 로타리 친 밭 사진을 보내왔고 씨를 언제 뿌리느냐고 물었다. 비 오기 전 날 뿌리자고 대답하고 비를 기다리는 며칠 사이에 그 소박하기 짝이 없는 기대가 그만 휑뎅그레 날아갔다. 왜냐고? 한 마디로 말하자면 정현 아저씨가 땅을 떼였으니까.

땅을 떼이다

장비 들여 정비하고, 씨 뿌릴 수 있도록 로터리까지 쳐 놓은 밭에 땅주인이 와서는, 임대기간이 끝났으니 농사를 더 짓지 말라고 했단다. 내막이야 내가 다 알 수는 없지만, 그 말을 전하는 정현 아저씨의 얼굴은 겸연쩍기도 하고 곤혹스럽기도 했으며 뭐랄까… 울면서 웃고 있거나, 웃으면서 울고 있는 그런 표정이었다. 미안해하는 정현 아저씨 대신 내가 미안해져 버렸다.

정현 아저씨는 농사짓던 땅과 장비대가 날아갔고 나는 작년 가을내내 품 들여 꼼꼼하게 모아 자루를 채운 씨앗이 갈 데를 잃었다. “뫄논 씨를 어떡한대유? 올해 못뿌리면 못쓰게 될낀디…”, “장비대랑 어떡해요? 꽤 많이 들어갔지요?” 정현 아저씨는 씨앗을 걱정하고 나는 장비대를 걱정했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 나는 그것이 생계가 걸린 땅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정현 아저씨도 그랬을까?

그럴 리가 없다. 정현 아저씨도 그랬을 리가 없다. 당사자가 아닌 나도 그 일로 해서 땅을 떼인다는 것이 무언지, 그게 어떤 기분이고 어떤 적막감을 몰아오는지 알아버렸다. 아직 남아있는 사과밭이 있고 가외로 부업도 하고 있지만 제 손으로 개간해서 25년을 일궈온 땅이다. 이제 제 손을 떠난 땅 옆에서 정현 아저씨는 올해도 여전히 사과농사를 지어야 한다. 울면서 웃고 있던 얼굴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알아질 것도 같다.

부재지주의 존재감

빌려 짓는 땅을 갖고 싶은 것은 모든 농사꾼들의 꿈이다. 정현 아저씨는 25년을 그 땅에서 사과농사를 지었지만 땅을 제 소유로 할 수는 없었다. 사과값은 25년 동안 제자리인 사이에 땅금은 다락같이 올랐다. 앞으로 25년을 더 바친다 해도 땅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25년간 땀을 바친 농부의 몫은 갈수록 쪼그라드는데 땅주인의 몫은 앉아서도 천지를 모르게 부풀어 난다.

정현 아저씨네 땅주인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여기 사는 사람도 아니고 농사짓는 사람도 아니라 한다. 이름하여 ‘부재지주’다. 그 사람뿐이 아니다. 마을에 풀만 자라 을씨년스럽게 묵어있는 땅들이 거의 부재지주의 것이다. 마을 살다 떠난 사람들의 소유이기도 하고, 상속받은 자식들의 소유이기도 하며, 혹간은 영판 알 수 없는 외지인의 소유이기도 하다.

마을 복판을 점령한 그런 땅들로 해서 마을 꼴이 폐허처럼 보일 정도로 말이 아니지만 그건 마을을 사는 사람들의 사정일 뿐이다. 폐허가 되든 말든, 마을 사람들의 주거환경을 해치든 말든 땅금만큼은 착실히 오른다. 사람이 ‘부재’해도 소유관계는 엄정해서 허락 없이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으니, 피해를 보는 마을 사람들이 오히려 땅을 지켜주는 형국이다.

농사지을 땅을 찾아 전국을 헤맬 때 알았던 것이기도 하다. 산골짝마다 쓸모없이 방치된 수많은 밭들을 보며 땅을 얻는 것이 쉬울 줄 알았었다. 웬걸, 버려져 있는 것처럼 보여도 쉽게 얻을 수 있는 땅은 없었다. 방방곡곡을 뒤져 꼬박 한 해 만에 어렵사리 얻어 든 이 땅도 그런 폐허 중의 하나였다.

사람은 떠나가도 소유관계는 남는다. 산이든 들이든, 부피도 면적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금을 경계로 소유관계가 빼곡한 것이 시골 땅이다. 송곳 하나 박을 땅이 없다고 말하지만 송곳이 다 뭔가. 바늘 하나 꽂을 데도 없다.

완벽한 불합리, 완벽한 부조리

예전에는 시골에서 땅을 사는 것은 농토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화수분을 장만하는 일이었고 황금알을 낳는 닭을 얻는 일이었다. 당대에 평생을 뚜져 먹고 사는 것은 물론 후대의 삶까지 보장하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농사를 지으려 땅을 산다는 것은 도무지 계산이 안 맞는 일이 되었다. 사람들 하는 말로 이자도 안 나오는 것이 농사라는 것이다.

도시에나 있는 줄 알았던 땅장사가 시골 구석구석을 점령한지도 꽤 되었나 보다. 시골에서 땅을 사는 것도 농토를 마련하는 일이 아니라 ‘투자’나 ‘투기’가 되었다. 시골 사람들도 그 대열에 합류한지 오래다. 농토가 화수분은커녕 토분도 못되고, 황금알이 아니라 곯은 알도 제대로 못낳는 닭으로 전락한 탓이다. 대신에 땅장사가 잭팟을 터뜨리고 대박이든 돈벼락이든 맞게 해줄 거라고 믿게 되었다.

버려진 농토와 식량자급률 23%, 완벽한 불합리다. 알곡을 내던 농토는 폐허가 되고 농민들도 사라진다. 완벽한 부조리다. 땅은 모든 부와 가치의 원천이라 말하지만, 땅은 그보다 더한 인간 생명의 조건이다. 공기와 물이 인간의 물리적 생명을 담보하듯이 땅에서 나는 것을 먹고 살아야 하는 인간에게 있어 땅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공기와 물이 차별없이 모두의 것 이듯이 땅도 차별없이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4월 23일자 농민신문은 「비농민이 전체 168만㏊ 중 44% 보유…말뿐인 경자유전」이라는 소식을 우울하게 전하고 있다. ‘농지를 농사 짓는 자에게 돌려주자’는 농지개혁의 정신, 헌법의 핵심가치이기도 한 경자유전의 원칙이 가파르게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1995년 이후 비농민의 농지소유를 부추기는 예외조항들이 늘어나면서 부재지주의 농지소유가 전체 농지의 절반에 육박하고 있다고 한다. 신문기사가 전하는 실체를 우리는 마을에서 가감할 것도 없이 고스란히 보고 있다. 이 땅의 마을 하나는 모든 마을의 축약판이다. 이 땅의 농민 한 사람이 모든 농민의 집약판이듯이.

화수분을 깨뜨리고, 황금알을 낳는 닭을 잡고

이렇게 우리는 화수분을 깨뜨리고 황금알을 낳는 닭을 잡게 되었다. 식량위기가 예상된다는 유엔의 경고에도 주목하는 사람이 없다. 우리는 쌀을 자급한다고, 걱정 없다고 거들 뿐이다. 그럴까? 그것이 실로 엄청나게 수입되는 밀과 옥수수에 기대어 있는 자급률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사람은 없다. 밀과 옥수수 수입에 문제가 생겼을 때 이 땅의 사람들과 동물들을 먹일 쌀이 과연 존재할까?

어쨌든 일단은 모아놓은 씨를 뿌릴 땅을 찾아야 한다. 씨앗이 생명을 갖는 건 잘 해야 이태 정도이다. 사람을 먹이는 것은 씨앗이고, 씨앗은 농토에 뿌려져야 한다. 농토가 화수분이면 씨앗은 황금알을 낳는 닭이다. 화수분을 깨뜨리고 황금알을 낳는 닭을 잡는 것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까지도 도무지 어리석은 일이다. 정현 아저씨가 떼인 땅은 농토로서의 수명이 끝난 것일지도 모른다. 거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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