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 4월혁명을 증언한다> 올해는 4월혁명 60주년입니다.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하고”라는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헌법의 첫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4월혁명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합니다. 특히 민족민주운동단체들도 매년 수유리 4·19묘역에서 합동참배식하는 일회성 행사로 알고 있습니다. 사월혁명회(연구소)는 창립선언에서 “4월혁명은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독재와 싸워…독재의 쇠사슬로부터의 해방을 구가하였고, 또한 외세에 의해 분단된 조국의 통일문제를 구체적으로 제기하여 민족자주이념을 올바로 세우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고 천명하였습니다. 4월혁명은 1960년 4월에 완결된 것도 아니며 오늘의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고, 민족통일이 달성되는 그날 비로소 그 이념이 정립되는 현재 진행형의 혁명입니다. 사월혁명회는 올해 4월혁명 60주년을 맞이하여 지난 1월15일 민족민주운동단체들과 함께 “4월혁명60주년행사준비위”를 구성하여 4월혁명의 의의와 과제를 알리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격려 부탁드립니다. /사월혁명회 |
박홍섭 / 사월혁명회 공동의장, 전 마포구청장
1960년 2월말로 기억한다.
한성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박동조 형이 학교로 찾아왔다. 나는 다음 달이면 고3으로 진급하는 상황이었다. 마침 수업이 끝나는 시간이어서 우리 둘은 자연스럽게 교정 뒤에 있는 노고산으로 올라갔다.
당시 노고산(지금의 서강대학교 후문 방향)은 동기생끼리 싸움 아니면 담배를 피우는 곳이었다. 동조 형과는 1959년 가을, 영남권을 강타한 사라호 태풍 때문에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수재민들을 돕기 위해 한성고와 숭문고가 연대해 위문품과 위문금을 걷어서 경북 영양까지 직접 다녀온 것이 인연이 돼 잘 아는 사이었다.
노고산에 오르는 동안, 동조 형의 표정이 밝지 않아 보였다.
우리는 사람들의 시야를 벗어난 후미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얼마 후 동조 형은 입을 열었다. “이승만 독재정권이 3.15 부정선거를 획책하고 있으며 청년들이 민주주의를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는 요지였다.
나는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이승만 자유당 정권이야말로, 부패 무능한 독재정권이라고 하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일이 아닌가?
노고산에는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무겁게 한마디씩 하는 그의 억양과 표정에는 굳은 의지가 배어 있는 것 같았다. 동조 형은 이미 서울 시내 고등학교 학생들의 동향에 대해 상당한 정보를 알고 있었다.
나는 점점 긴장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정의감도 솟았다. 처음 듣는 이야기도 많았고, 앞으로 닥칠 상황에 대한 두려움도 커져 갔다.
그날 이야기의 요지는, 서울 시내 대학교와 고등학교가 동시에 봉기해야 한다는 것과 이를 위한 준비가 현재 진행되고 있어서 한성고, 경기공고, 숭문고가 합세해 아현동 경기공고(지금의 아현중학교) 옆 삼거리에서 마포경찰서 진압경찰의 시내 진입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현 삼거리에 위치한 경기공고를 반드시 가담하게 하고 경기공고 학생회장 김용길을 빨리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얼마 후 김용길 군을 만나 이야기했고 그도 쾌히 동참하기로 했다.
당시는 학도호국단이라는 관제 조직이 있어 필요할 때면 관제 데모나 행사를 자주 하는 시절이었기에 학생대표들은 서로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해 서울 운동장에서 개최된 3.1운동 41주년 기념식에도 학생들이 동원되었고 이승만 독재정권을 규탄하는 유인물이 뿌려졌다. 순간 청년을 덮친 것은 사복 경찰관이었고 팔을 뒤로 돌려 뒤틀린 채 끌려가는 모습을 모두는 지켜보아야만 했다.
청년들의 분노는 점점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동조 형은 연락이 없었다. 동조 형은 이미 졸업을 했고 집도 몰라 초조했다.
3.15 부정선거가 기어코 획책되었다.
4할 사전투표, 올빼미 투표, 피아노 투표, 3인조, 5인조, 9인조, 공개투표 등이 전국적으로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사람들이 수군수군했다. 겉으로 침묵하는 민중들의 불만은 결국 학교 교실에까지 옮아 붙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고등학교 3학년 1반 교실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토론이 벌어졌다. 그 열기는 급기야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학생들의 행동으로 이어져 우리는 광화문 경기여고 앞으로 몰려나갔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나서 각자 흩어져 나갔지만, 이미 정보를 입수한 서대문서 경찰관들이 마치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이 잠자리 낚아채듯 우리들을 붙잡아 서대문 경찰서로 끌고 갔다.
준비 없는 행동이 얼마나 무모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절실하게 체험했고 결과를 가늠하지 못한 경솔한 행동에 후회했다.
학우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컸다.
다행히 그날 밤 모두 훈방 조치돼 귀가할 수 있었다. 당시만 해도 마포는 시내 중심부에서 떨어져 있는 외진 곳이어서 정보가 느렸다.
4월 19일 오후 옅은 구름이 깔려 있었지만 날씨는 좋았다.
나는 시청 앞 데모 군중 속에 끼어 있었다. 후에 사람들은 이날을 가리켜 ‘피의 화요일’이라고 말했다. 반공청년단(정치깡패 본부)이 들어있는 반공회관도, 서울신문사도 불길에 휩싸였다.
이 무렵 태평로 파출소에서 데모대에 총격을 가하고 달아나는 경찰관을 누군가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 그를 때려죽이는 광경을 목도했다. 곳곳에서 총성이 울리고 부상자를 태운 찦차가 질주했다. 그래도 시위군중들은 물러서지 않고 “경무대로, 경무대로”를 외쳤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사월혁명회 몇 분들과 함께 담소를 나누는 중에 4·19 당시의 행적들이 거론되었다. 누구는 문리대, 누구는 경무대, 누구는 해무청 앞, 광화문 시청 앞, 퇴계로 등이 거론될 때 전덕용(사월혁명회 공동의장)형과 나는 태평로 파출소 앞에서 투석하며 싸운 것이 확인돼 함께 웃었다.
그 후 60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4·19를 바라보는 시각이 같을 수는 없겠지만 5·16 군사 쿠데타 세력과 같은 4·19를 비하하고 부정하는 세력도, 협잡하는 부류도 있었다.
4·19를 깎아내리건, 추켜세우건 아무런 상관없이 4·19는 그 자체로 오늘도 역사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당시 우리들이 순수했기 때문이다.
4·19혁명은 고등학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대학생과 대학교수들이 마무리를 지었지만 시작은 고등학교 학생들로부터였다. 2월 28일 대구 경북고등학교, 3월 8일 대전고등학교 학생들을 비롯한 산발적인 시위는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확산되어 나갔다.
군사용 최루탄이 눈에 박힌 마산 상고 김주열 군의 시신 발견이 4·19의 기폭제가 된 것도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당시 언론에 보도된 4·19혁명의 희생자 진영숙(당시 14세. 한성여중 2학년) 학생의 유서로 그 시대적 상황이 이해되면 좋겠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부정선거 데모로 싸우겠습니다.
지금 저의 모든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어머니,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구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저의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간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님,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 주세요.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 있습니다.
너무도 조급하여 손이 잘 놀려지지 않는군요.
부디 몸 건강히 계셔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상 이만 그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