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구촌에 창궐하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지금 전 인류를 비웃고 있다. 세계 초강대국, 핵무기를 수 만기 가지고 있는 미국이 코로나 앞에 휘청거리고 있다. 자가 격리를 해제 시키라고 시민들이 총기까지 들고 나와 시위를 할 지경이다. 이렇게 일 못하고 굶어 죽으나 코로나 때문에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라는 듯이 최후 막다른 선택을 하겠다는 것이다.

백신이 곧 개발될 것이라고는 하나 성공을 하는 순간 예산 만 낭비하고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다. 더 강한 변종들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내년 겨울에는 또 다른 신종이 나타나 지금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앗아 갈 것이라고 한다.

서양의학에서 ‘치료’를 의미하는 말은 고침을 의미하는 ‘curing’이다. 이 말은 병균을 적대시하고 그것을 박멸하거나 제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병균 역시 더 강한 자세로 인간에 대결자세를 갖춘다. 페니실린의 발명으로 이제 병균은 지구상에서 영원히 박멸될 줄로 만 알았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아무리 강한 신약을 발명해도 더욱 균들은 창궐하고 있다.

이러한 서양 의학의 악순환의 고리는 기독교 구약 성서를 해석하는 신학 안에 이미 들어 있었다. 즉, 인간의 타락으로 죄가 들어 왔고 죄를 박멸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 자체가 바이러스를 죽이면 치료가 된다는 것과 하나 다른 것이 없다. 그래서 서양 의학의 악순환은 기독교 신학의 성서 해석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할 수 있다. 그래서 의학의 ‘치료’라는 말은 신학의 ‘구원’이라는 말과 하나 다른 점이 없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의 문제는 앞으로 우리 경전 부도지를 보면 더 근본적인 데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코로나19 이후 가장 달라져야 할 것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신학일 것이다. 우주관과 세계관이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할 것이다. 무엇이 어떻게 달라져야 할 가를 찾기 위해 유독 눈길이 가는 한권의 책이 있다. 그것은 지금 강단 사학자들이 위서라고 팽개쳐 놓고 있는 ‘부도지符都誌’이다.

들뢰즈라는 철학자는 어떤 문헌이 언제 누구에 의하여 써졌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도외시 하라고 했다. 문장의 맥락과 의미만 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학계는 문헌의 하드에 집착한 나머지 귀중한 사서들의 가치를 다 망각하고 있다. 촌스럽고 때 늦은 주장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부도지에는 태초에 우주와 세계가 어떻게 창조 되었는가와 이 세상에 질병이 어떻게 유래 했는가를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세계 어느 문헌 치고 이만큼 심각한 수준에서 질병의 유래를 다른 문헌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작금의 ‘코로나19’와 그 이후에 우리 아니, 인류 전체가 주의 깊게 읽어야 할 가장 귀중한 자료라고 본다. 우리나라가 ‘코로나 키트’를 발명해 지금 전 세계에 보급하고 있는 이상으로 ‘부도지’를 소개해 알려야 할 것이다.

부도지에 의하면 “태초에 율려律呂가 있었다. 율려가 천지를 창조했다”고 한다. ‘율’이란 ‘양’을 ‘려’란 ‘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태초에 음양이 있었고 음양으로 우주가 창조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도지는 인간 세상에 병이 들어 온 이유는 율려의 파괴, 다시 말해서 음양의 균형이 깨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율과 려는 양과 음의 음악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 성서 같이 신이 먼저 있고 천지가 창조된 것이 아니고, 율려가 먼저 있었고, ‘마고麻姑’라는 여신도 율려에 의해 생겨났고, 그 다음 마고가 마고성, 실달성과 허달성 같은 땅을 지었다. 율과 려가 몇 번이고 반복하여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별들이 생겨났다. 이 때를 ‘짐세朕世’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율려가 지배하던 시대이다.

짐세에서는 오직 온 우주에 율려 만 가득 차 있었으며 율려에서 ‘다섯 가지 음과 일곱 가지 곡조’가 생겨나 온 우주에는 곡조만 울려 퍼지니 율려가 조화롭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천자문은 ‘율려조양律呂調陽’이라고 한다. 이런 짐세에는 질병이 없었다. 그 이유는 인간들이 땅에서 나는 젖 즉, 지유 地乳를 먹고 살았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 같이 젖만 먹으니 이빨이 있을 이유가 없었다.

마고는 ‘궁희’와 ‘소희’라는 두 명의 여자만 낳는다. 두 딸을 낳는 방법도 ‘율려’ 라는 바람을 하늘로부터 몸에 받아서 이다. 궁희와 소희라는 두 여인 역시 율려를 받아 네 명의 남자와 네 명의 여자를 낳아 땅에 인종이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클라이브 해밀턴이 말하는 ‘인류세人類世’가 시작된 것이다. 홍적세도 가고 인류가 지구를 지배하는 세대가 열린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인간들이 지유가 나오는 샘으로 가니 지유가 나오지 않았다. 지유가 나오는 샘터에 사람들이 줄지어 서 기다려도 지유는 나오지 않는다. 마치 이 장면은 입마개를 구하려고 약국 앞에 줄지어 서 있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배고픔을 참지 못 한 인간들은 넝쿨에 달린 포도를 따 먹기 시작한다. 그런데 젖은 아무 맛도 없고 비린내 만 나는 데, 포도는 오미五味의 맛 즉, 신맛, 단맛, 짠맛, 쓴맛, 떫고 매운 맛이 다 나니 인간들은 신기하고 좋아서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간이 이런 오미를 혀에서 느끼는 순간이 바로 질병이 이 짐세에 퍼지는 순간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마고성 인간들은 들판에 나와 포도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호탕하구나 천지여,
내 기운이 율려를 능가하는구나
이것이 도대체 어떤 도인가?
오호라, 포도의 힘이로다.”

라고.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오미의 감촉이 있은 다음부터는 지유에 식상하기 시작했으며 오미의 맛에 중독이 들기 시작했으며 이빨이 숭숭 나오기 시작했고 인간의 얼굴 모양 자체가 사나와 지기 시작했다.

그 동안 짐세 동안 마고성에는 오직 한가지 ‘자재율’만 있었다. 타율이 아닌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율적으로 운용되었다. 그 자재율이란 율려에서 나온 음과 성에 의한 조율이었다.

인간이 가장 자연스럽게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것은 그것도 땅에서 흘러나오는 젖뿐이라는 것이다. 가이아 어머니 몸에서 나오는 젖만이 인류세의 유일한 음식이란 것이다. 지금 같아서는 먹어도 아무런 죄책감이 없을 포도를 먹는 것마저도 살아있는 한 생명이 다른 생명을 죽이는 것으로 보는, 죄악으로 본 것이 짐세의 생명관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과연?

포도를 먹기 시작하자 인간들은 처음으로 병이 몸에 생기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변에 아픈 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피와 살은 탁해지고 마음은 독해져서 유순하고 맑은 성질은 잃어가기 시작했다. 수명은 짧아지기 시작하니 포도를 처음으로 먹게 한 지소씨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죽은 시체가 산천에 버려지는 모습도 보이기 시작했다.

마고의 짐세에서 지금 우리는 얼마나 먼 곳에 와 있는가? 한갓 열매에 불과한 포도를 먹은 것이 이런 후과를 가져 왔다면 지금 소와 돼지 그리고 닭을 길러 그것을 도축해 푸줏간에 사각으로 각을 떠 토막내 먹는 정도라면 우리는 지금 너무 먼 곳에 와 있지 않는가? 포도 먹은 것이 원인이 돼 질병이 처음 들어와 사람들이 병들고 죽기 시작했다면, 이런 짐세에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곳에 인류세는 지금 와 있다.

자, 우리의 부도지를 유대인의 창세기와 한 번 비교해 읽어 보자. 아예 창세기는 신이 내놓고 인간들로 하여금 중앙의 나무 실과와 주변의 실과나무를 분리해 전자 만 따 먹지 말고, 후자는 마음껏 따 먹게 했다.

신약 성서에 보면 예수는 부활할 후에 해변 가에서 생선을 같이 구워 나누어 먹는 장면이 있다. 물론 ‘오병이어’에서는 두 말 할 것 없고.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는 어부들이 있었고 예수는 너희들은 고기잡는 어부 같이 전도하라고 했다. 기독교는 포도로 술을 만들어 성만찬용으로 사용까지 한다.

기독교에 앞 선 불교에서는 육식만 제외한 채식은 허용한다. 유교는 아예 제삿장에 포육을 진상할 정도이다. 우리 부도지를 어떤 다른 경전에 앞서 읽어야 할 이유가 분명해졌다. 인간 질병의 근본적인 유래가 무엇인지 언제부터인 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분명히 말 해둔다. 창세기는 짐세를 훨씬 지난 후에 쓰인 것이 분명하다고. 불교와 유교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그 어떤 경전도 이 코로나 시대에 돌아가 생각해 보아야 할 기준이 될 수 없다고. 에덴 동산 보다도 더 오래된 과거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지금 지구촌 초강대국 미국과 중국이 서로 코로나19에 대한 책임전가 하기에 영일이 없다. 미국과 중국이 가지고 있는 어떤 무기도 감당할 수 없는 인류의 최대의 적, 아니 앞으로 더 무서운 적이 나타날지도 모르는 짐세에서 한 참 떠난 지점에서 우리는 어떤 상념에 젖어야 할 것인가?

마스크 두 장을 사려 동네 약국 앞에 줄지어 서 있는 장관을 볼 때에 인류가 종말을 얼마 안 두고 서로 살아남으려는 마치 짐세의 말기 같이, 최후의 몸부림치는 것 같이 보인다. 인류가 다 사라진 다음 다시 말해서 ‘인류세’가 다 지난 다음에 다음 세대의 어떤 생명체가 나타나 인류라는 종들의 마지막 장면을 기념으로 남겨 두기 위해 스마트폰 카메라에 기념으로 남겨 두기라도 한다면 다음 세가 인류세의 종말을 역사에 기록할 것이다.

영국의 정치철학자이자 작가인 존 그레이(John Grey)는 지금의 위기는 “안정된 균형이 일시적으로 무너진 상태가 아니라 인류가 역사의 전환점에 직면한 것”이라고 했다. 그레이에 따르면, 사람들이 자신의 건강을 위해 국가의 개입이나 사회적 감시체제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세계 각국이 장벽을 높인 채 안보와 과학연구, 기술혁신에 이전보다 더 주력함으로써 자유주의와 세계화는 머지않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전망이라 한다.

긴급재정 지원 같은 것을 평상시에 지급하려 했다면 당장 좌파 빨갱이 짓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야를 막론하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지원 자체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있다. 이 말은 사회주의가 일정정도 옳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포르투갈 같은 나라는 사회 약자를 먼저 처방하는 것이 바로 사회를 가장 안전하게 만드는 길이라고 공언하고 있다. 이는 마르크스의 혼령을 코로나가 불러 오는 것이나 무엇 하나 다를게 없다. 큐바가 전 세계적으로 모범 칭송 국가로 변한 것을 보면 미국의 속이 뒤집힐 노릇이다. 그렇게 자랑하던 자본주의가 일개의 균 앞에 무참히 그 위세가 꺽일 전망이다.

영국 작가 토비어스 존스(Tobias Jones)는 <가디언> 기고를 통해 “노숙자들이 호텔에 수용되고 아이들은 시험을 치지 않으며 각국 정부는 일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고 스페인의 개인병원이 국유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바틀코 돌고래와 백조, 물고기떼가 돌아오고 공기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해졌다”면서 코로나19가 가져온 긍정적 변화를 먼저 언급했다. 바닷가에는 거북과 돌고래가 수 만 마리 올라오기 시작했고, 들판에는 야생동물이 스멀스멀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오래된 고사서 부도지를 다른 어느 책 보다 우선적으로 꺼내 읽어야 할 순간이다. 설령 지금 우리가 짐세로 되돌아 갈 수는 없어도 우리의 본향이 어디이고 그 곳에서 누가 무슨 일을 했고 무슨 가치가 지고의 가치였는지는 반드시 한 번 생각하고 넘어 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부도지 하나로 코로나 키트 이상으로 우리가 세계 역사를 주도해야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저 촌스럽고 무지몽매한 강단 사학자들은 지금 위서 운운 하며 이를 가로 막고 있다. 그러나 코로나가 부도지를 새삼스럽게 불러내고 있다.

신도 인간도 그리고 다른 어떤 만물도 있기 전에 율려가 있었다는 생각으로 반드시 되돌아가야 한다. 지금까지 기성 종교와 사상이 범한 가장 큰 오류는 사람과 같은 어떤 인격체가 우선이고 먼저라는 생각 때문에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이다. 어떤 인격체도 먼저 있기 전에 거기에는 율려가 있었고, 율려에서 소리가 나와 이 소리가 조율되니 신도 인간도 땅도 하늘도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인격체를 먼저라고 우선시 하는 어떤 이념도 사상도 현재의 코로나 위기를 극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창세기와 기독교 신학만 하더라도 부도지의 시각에서 바라보았을 때에 근본에서 멀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늘도 이 사실을 망각한 기독교는 하나님이 코로나에서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라 외치면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외면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 그 자체가 코로나 확진자들을 양산하는 본산지가 되고 있다는 이 엄연한 현실 앞에서 자기들의 신관을 다시 재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도, 우주도 그 어느 것 앞에 율려가 있었다는 부도지에 귀를 기울일 때가 아닌가 한다.

신약을 개발하는 이상으로 새로운 가치관과 종교 그리고 철학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가치관이 새로운 것이 아니고 오래 된 미래의 책 부도지 안에 들어 있었다.

부도지에 의하면 코로나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율려’와 ‘시’와 ‘노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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