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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초여담(白樵餘談)<칼럼>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김동환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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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4.22  07:4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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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사람이 죽는 것이지 죽은 사람이 사는 이치는 없다. 물론 의학적·생물학적 이해다. 그러나 죽었다는 사람이 살아있다면 생각 뒤숭숭해진다. 근자에 필자의 머리 역시 한 동안 어수선했다. 1909년 2월경에 죽었다는 인물이, 적어도 1912년 8월(음력)에도 살아 활동했기 때문이다. 바로 백초(白樵) 유완무(柳完茂)의 행적이다.

백초를 언급할 때는 늘 백범(白凡) 김구를 떠올린다. 살인죄를 쓰고 인천감리서 감옥에 갇힌 백범을, 모든 것을 걸고 구출하려 했던 인물이 백초였다. 백범의 본명인 김창수(金昌洙, 혹은 金昌巖, 혹은 金斗來)란 이름을 김구(金龜)라 고쳐준 인물도 백초다. 후일 백초를 찾은 백범이, 용두사미에 불과한 자신의 거사에 백초께서 너무 크게 마음을 써주었다고 하자, “뱀의 꼬리를 붙잡고 올라가면 용의 머리를 볼 터이지요”라고 격려한 인물이 백초였다.

백초는 1900년 전후로 국내에서 비밀결사 활동을 도모한 인물이다. 이후 1900년대 초에 북간도와 연해주 지방으로 망명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는가 하면, 서북학회를 비롯한 애국계몽활동에도 열정을 쏟았다. 특히 백초는 간도에서 민족운동을 도모할 시기에 이미 간도영유권 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드러냈다.

그는 한국의 모든 산천이 백두산을 조종(祖宗)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북간도의 간동(幹東)‧해관(奚關)‧남경(南京) 세 지역도 우리 성조(聖祖)의 발상지(發祥地)였다는 주장을 폈다. 그가 막역지우인 장지연의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를 읽고, 장지연에게 그 부분적 내용의 수정을 요구한 일화는 유명하다. 백초 자신이 직접 답사하여 목도한 선춘령비가 두만강 너머 700리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을 장지연에게 각성시킨 것이다.

그의 사상적 천이(遷移)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일각에서는 백초의 행적을 위정척사파와는 다른 개신유학적 행동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또 한편에서는 김창숙(金昌淑)을 중심으로 파리장서운동을 이끌어 낸 재경유림(在京儒林) 활동의 전사(前史)로서, 백초와 그 동지들의 행적을 이해하려는 측면도 있다. 백초가 북간도와 연해주로 망명하여 성태영(成泰英)이나 이승희(李承熙), 김창숙 같은 유학자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활동했다는 점에서 추론되는 것일 듯하다.

그러나 백초의 치열한 행적을 개신유학적 울타리 안에만 가둬둘 수 없다. 백초는 1906년 초여름 이회영‧이상설‧여준‧이동녕‧장유순 등과 서울에서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는 모임에 가담했다. 만주의 독립운동기지 설치와 서전서숙(瑞甸書塾) 설립에도 백초는 동참했다.

공교롭게도 이들 모두가 후일 대종교로 들어와 핵심이 된다는 점이다. 대종교는 탈유교적·탈식민지적 정체성의 각성과 뗄 수 없는 집단이었다. 백초 역시 개신유학을 넘어 우리의 근원적 정체성 문제로 고민했을 가능성이 대두되는 부분이다.

그 동안 백초의 행적은 1909년 2월 비운의 죽음을 맞은 것으로 알려져 왔다. 혼춘경무국(琿春警務局)의 「경무국비밀조사안」을 토대로 『권업신문』(1912년 8월 25일자)에 실은 「유백초의 해골」이라는 기사가 그 주요 근거다. 백초와 구국의 동지였던 이범윤의 사주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것이 골자다. 문제는 그 기사의 내용이 시기도 헷갈리고 백초의 주검 역시 확인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제 백초의 남은 이야기를 해 보자. 백초의 주변 인물로 백농(白農) 조창용(趙昌容)이라는 인물이 있다. 당시 백초는 긴 안목 속에 국민교육사업을 블라디보스토크 동포들의 호응을 얻어 추진하던 중이었다. 그 과정에서 대구협성학교 교사 출신인 조창용의 블라디보스토크 망명을 주선하게 된다. 그리고 백초는 1907년 5월 17일 신한촌(新韓村)에 설립된 계동학교(啓東學校)의 교사로 조창용을 부임시켰다.

또한 조창용은 백초의 뜻에 따라 장지연과의 연락을 도모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백초는 1908년 초 조창용에게 자신의 명함을 주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는 장지연과 동행시키기도 했다. 이후 백초와 장지연 사이에 늘 조창용이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1912년 조창용의 ‘북간도시찰기(北墾道視察記)’라는 일기 내용이다. 그 기록은 1912년 3월 24일(이하 음력)을 시발점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진주 경남일보사를 출발하여 만주 화룡현 청파호 대종교시교당에서의 대종교 포교 활동을 거쳐, 그 해 11월 3일 다시 진주로 돌아오기까지를 적어놓은 내용이다.

그 일기 속의 어느 날이다. 그날 8월 9일은 맑았다. 용정 국자가(局子街)에 있는 백초와 백순(白純)이 이도구(二道溝)에 유람하러 왔다. 밤에는 나익(羅翊, 그곳에 사는 대종교인)의 집에 묵으며 대종교 시교(施敎)를 하였다.

이게 웬 일인가. 1909년 2월에 죽었다는 백초가 3년 후에도 살아있다니. 그것도 은계(隱溪) 백순과 대종교 포교활동을 하고 있다는 내용은 천만 뜻밖이다. 혹여 또 다른 백초가 아닐까. 아니면 조창용의 착각도 생각해 볼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그 시기 그 곳에 백초라는 호를 가진 또 다른 인물은 없다. 더욱이 조창용은 백초와 뗄 수 없는 인물 아닌가.

그 며칠 후의 기록은 우리를 더욱 의아하게 한다. 8월 12일은 대종교 경배일(敬拜日)로 맑았다. 개회식 원도(願禱)는 박승익(朴勝益)이 하고, 강의(講義)는 백순이 하였다. 근본적인 도덕성을 권면하는 내용이었다. 대종교의 학교(당시 청일학교로 추정됨) 교실을 시급히 새로 건립하는 일이 부득이 정지되자, 백초가 중국인의 가옥을 매입하였다는 내용도 실려 있다.

당시 박승익과 백순은 대종교의 시교사(施敎師)이자 북간도 독립운동의 거물들이다. 백초 역시 연해주와 북간도 독립운동의 대부라 할 만한 인물 아닌가. 그러한 백초가 대종교의 학교 교실 신축이 여의치 않자 중국인의 가옥을 매입하였다는 내용에서, 그의 대종교에서의 위상은 물론 재력 역시 상당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날 경배 이후에는 우리 근대사에서 보기 힘든 풍경도 연출되었다. 백두산 북쪽 기슭인 청파호 대종교시교당에 4명의 거물들이 회합한 것이다. 상해로부터 건너온 예관 신규식, 연해주에서 넘어 온 보재 이상설, 그리고 그곳에 머물던 백초와 백순이 자리를 함께 하였다. 회합의 주된 목적은 대종교를 확장하는 문제였다. 백초는 백순과 함께 교육과 종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대종교 자제에 대한 교육은 청년 중에서 뜻이 있는 사람이 담당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연로한 사람들이 담당할 것은, 사람마다 집집마다 종교적 믿음의 의미로 설명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모두 공감하였다.

공교롭게도 이들 4인이 회합한 3일 후인 8월 보름에는 나철 등이 청파호 시교당의 뒷산에 올랐다. 그 산의 이름은 단산(檀山)으로 대종교에서 명명한 것이다. 당시 호석(湖石) 강우(姜虞)와 백순이 역시 함께 했다. 멀리 백두산을 바라보며 추석날 추원보본(追遠報本)의 감회가 더욱 깊게 묻어났다 한다. 나철과 두 사람은 ‘산(山)’자 운(韻)으로 한시를 주고받았다. 안타깝게도 나철의 글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그 당시 강우가 남긴 칠언절구는 이렇다.

始見平生願見山 평생에 뵙고픈 산 이제야 처음 봅니다
靑天削出白雲間 하늘에 우뚝 솟아 구름 사이 걸렸구려
看看敬愛行行路 공경히 보고 봄이 가도 가도 한없는데
萬事商量三笑還 온갖 일 의논타가 시간 잊고 돌아옵니다

백초에게도 이 백두산은 우리 역사와 정신사의 뿌리와 같은 곳이었다. 유완무의 호 백초도 백산초부(白山樵夫)를 줄인 것이다. 구태여 옮긴다면 백두산에서 열심히 일하는 나무꾼이란 의미일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정체성의 본질을 가꾸고자 했던 백초의 의지이기도 했다. 백초가 백두산 기슭 청파호에 심고자 했던 뜻도 이것과 통했을 것이다.

그 날 회합한 4인 모두 가버렸다. 이상설은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말아달라는 유언과 함께 1917년에 세상을 떴다. 신규식이 임시정부를 걱정하며 운명한 해가 1922년이다. 백순은 1930년 금강산으로 들어가 수도에 몰두했다. 그리고 1937년 외금강 용계리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그러나 백초의 마지막은 아직 오리무중이다. 정확히 언제, 어디서, 어떻게 숨을 거두었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그가 1912년 음력 8월 중순까지도 살아있었다는 데 있다. 그 실마리를 잡고 마무리를 해야 하는 일이 우리에게 다시 남은 일이다.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195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대학에서 행정사를 전공하였고, 한신대학교 강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국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저술로는 『단조사고』(편역, 2006), 『종교계의 민족운동』(공저, 2008), 『한국혼』(편저, 2009), 『국학이란 무엇인가』(2011), 『실천적 민족주의 역사가 장도빈』(2013)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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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보기(1)
굽은소나무 (qnseksrmrqhr) 2020-04-22 11:34:33
소식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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