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미 최재영 목사가 지난 9일 저녁 전태일기념관에서 <통일뉴스> 독자를 대상으로 '약산 김원봉의 북행 이후의 행적'을 주제로 한 강연을 진행했다. [사진-조천현]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통합의 역사적 사례로 언급한 이래 아직도 논쟁의 와중에 있는 약산 김원봉의 북행 이후 행적을 더듬어 보는 강연이 최근 진행됐다.

재미 목사인 최재영 NK VISION 2020 대표는 지난 9일 저녁 서울시 종로구 청계천로 전태일기념관에서 <통일뉴스> 독자들을 대상으로 최근 북에서 입수한 1948년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영상자료와 함께 '약산 김원봉의 북행 이후 행적과 현재적 의미'를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영상과 강연을 통해 다시 확인된 김원봉의 마지막 공식행사는 1958년 6월 9일 최고인민회의 제2기 제3차회의에 대의원으로 참가한 것. 그리고 그해 9월 10일 조소앙 선생 장례식에 참석한 것이 공개된 행적의 마지막이다.

김원봉의 정치가 막을 내리는 장면은 지난 2013년 정창현 <민족21>기자가 알렉산드르 푸자노프 평양주재 소련대사의 일지를 입수해 공개하면서 구체적으로 알려졌다.  

1958년 10월 1일자 '푸자노프 일지'는 김원봉에 대한 보직 해임과 체포, 조사가 이루어졌다며, 그의 혐의내용과 죄목에 대해서 이렇게 적고 있다. 

▲ 국가검열상 김원봉의 사진.  [최재영 목사 동영상 촬영 사진]

"최고인민회의 정기회의에 참석하였다. (중략) 회의에서는 상(각료)들의 이동에 대한 정령과 옛 중앙통신사 사장 박무, 옛 강원도인민위원회 위원장 문태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김원봉(옛 남조선인민공화당 위원장) 등을 반국가적 및 반혁명적 책동의 죄를 물어, 그들의 대의원 권한을 박탈한다는 정령을 비준하였다." 

'반국가적 및 반혁명적 책동'의 죄를 물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권한을 박탈'했다는 것.

20여일이 지난 10월 24일자 일지에는 "(김달현 천도교청우당 위원장은) 미국인들과 연결이 되어 있고 최근의 체포 직전에 남쪽으로 도주하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한 전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 김원봉과 교류하였다"라는 기술이 있다.

푸자노프 일지는 북 고위 당·군·정 인사를 자주 만나 내부 상황을 청취하면서 본국에 보고하기 위해 북한 정계 동향을 꼼꼼하게 일기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10월 1일 기록은 남일 외무상이 불러 만난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최 목사는 이 기록에 대해 "천도교청우당에 대한 (북 당국의)조사가 이루어졌다. 천도교청우당은 해방 직후부터 지주 및 자본가, 정권의 수립을 목적으로 여러 차례에 걸친 조직적 시도를 비롯해 전쟁시기 이승엽 등과 결탁하여 일명 비상조치집행위원회를 통해 노동당 파괴 활동 및 정권획득을 위한 봉기조직 활동을 벌였으며, 김원봉은 천도교청우당 당수인 김달현에게 개별지역간 인민봉기를 위한 조건 조성을 지시했다가 상황이 불리해지자 남한으로 도피를 계획했다는 것"이라고 풀어 설명했다.

또 '반혁명적 책동'이라는 엄청난 표현에 비해 처벌의 내용은 '대의원 권한 박탈'에 불과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푸자노프 일지를 처음 공개한 정창현 기자도 일지에 함께 거론된 박무, 문태화 등의 인물들이 연안파를 숙청한 1956년 8월 종파사건과 직접 연계되어 있지 않다는 점, 그리고 '반혁명 분자'가 아니라 '책동'이라고 규정한 것 등으로 보아 김원봉에게 '해임' 정도의 아주 무겁지 않은 처벌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 바 있다.

김원봉과 김달현, 천도교청우당은 어떤 관계였을까? 

최 목사는 김원봉과 김달현 등은 이른바 '제3당 사건'에 연결되어 퇴출, 해임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조심스럽게 내놓았다.

'엄항섭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제3당 사건은 1958년 9월 조소앙, 엄항섭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주를 이루고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재북통협) 상무위원들을 중심으로 당을 결성하여 통일 이후를 대비해 통일 정부 수립을 주도하려했던 엄항섭, 명재세, 노일환 등을 북 당국이 반혁명분자로 연행한 사건.

숙청설, 은퇴설, 자살설 등 김원봉의 노후와 죽음에 대한 억측에 대해서는 모두 제대로 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며 배척하고 김원봉의 명예로운 은퇴설을 주장하는 일본인 학자 가지무라 히데키(梶村秀樹)의 손을 들어주었다.

전 북한 최고검찰소 검사 김중종 선생이 '북한현대사의 증언'에서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에서 해임된 뒤 김원봉이 대동강에서 낚시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 증언도 덧붙였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중요한 김일성의 김원봉에 대한 평가는 어떠했을까?

▲ 최재영 목사는 약산에 대해 통일지향적·민족사적 관점에서 거시적으로 평가해줄 것을 당부했다. [사진-조천현]

김일성은 부친인 김형직보다 4살 아래인 김원봉에 대해 연장자로서 존중하였을 뿐만 아니라 항일투쟁 경력에 대해서도 예우하여 월북인사들을 만날 때마다 그가 배석해야만 접견 행사를 진행할 정도로 위상을 인정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를 해임하기 전인 1958년 2월 제324군부대를 방문, 연설하면서 "조선인민군은 항일빨치산에 연원을 두고 그 계통을 이어받았다. 의열단이라든가, 조선의용대, 광복군이 있었는데, 그것은 모두 다 지주, 자본가들을 위한 독립투쟁이었다"는 비판이 시작되었고 해임 후인 그해 10월 30일에는 의열단을 언급하면서 '장개석 앞잡이를 해먹던 전통이 있다'는 혹독한 비판이 가해졌다.

김원봉에 대한 이같은 평가는 최근까지도 바뀌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지금 남에서 갈등상황으로 벌어지는 김원봉 서훈 논란이 북에서도 온전하게 받아 들여지기 어려운 사정이 있다. 이 문제가 분단을 극복하는 과정에 남겨진 결코 쉽지 않은 과제임을 절감하게 된다. 

최 목사는 "김원봉의 삶을 전·후반기로 나누어보면 중국에서 일제와의 투쟁, 북행 이후 미제와의 투쟁. 전체 삶은 제국주의와의 투쟁이었다. 얻으려고 했던 것은 완전한 독립과 통일정부 수립이었다"고 평가하면서 "통일지향적이고 민족사적인 관점에서 김원봉을 역사적인 안목을 갖고 거시적으로 평가"할 것을 당부했다.

▲ 1948년 북행 직후 개성에 도착한 김원봉.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1차 남북연석회의 주석단의 김일성, 박헌영, 김원봉(왼쪽부터).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북행 성공 후 평양에 거처를 마련한 김원봉은 북측 당국과 사전 교감이 없었다면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일들을 짧은 기간내에 진행한다. 북행 직후 1차 남북연석회의가 열리기 전인 열흘에서 2주일 사이에 이미 제헌모임에 옵저버로 참여하는 등 직접 참여하고 1차 남북연석회의에는 '조선인민공화당' 위원장의 자격으로 참석했다. 

조선인민공화당은 1926년 김원봉이 창당하고 1932년 김규식 등과 재창당한 조선민족혁명당이 1947년 김원봉 주도아래  이름을 바꾼 당이다.
 
4월 19일 오후 1시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1차 남북연석회의 첫날 개막식 회의에 참석한 김원봉은 주석단에 선출되어 9명 연설자 중 한명으로 나서 미국과 소련 양국 군대의 동시 철수를 강조한 연설을 8분간 진행했다.

김원봉은 회의 마지막 날인 4월 23일에는 사회를 맡아 앞선 토론에 기초해 '남조선 단선단정반대투쟁 대책에 관한 결정서', '미소 양국 정부에 보내는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요청서',  '남조선 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 '전 조선 동포에게 격함' 등을 만장일치로 채택하는 등 회의를 진행했다.

회의를 마친 4월 25일 오전 11시 김일성광장에서 34만명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열린 집회와 축하행진에 참석하고 그날 오후 5시에는 북조선인민회의 대회의실에서 김일성이 주재한 축하연에도 참석했다.

4월 28일과 29일에는 최고인민회의가 발족하기 이전 입법기관 역할을 하던 북조선인민회의가 개최한 헌법제정을 위한 특별회의에 업저버(방청) 자격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그리고 4월 29, 30 양일에 걸쳐 남측에서 올라간 인사(박헌영을 비롯한 226명-레베데프 소련군정 소장 비망록 기록)들 중 70명의 잔류인원을 남기고 나머지 인원은 귀환하는 결정을 하게 된다.

이때 잔류를 결정한 김원봉은 홍명희, 이극로, 김일청, 장건, 김창준, 유용준, 허성택 등의 인물들과 함께 이후 평양에 체류하면서 북의 공민이 되었다. 

본격적으로 북에 체류하게 된 김원봉은 1948년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제2차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에서 연석회의에 참가한 남측 정당·사회단체 대표로 구성된 360명의 대의원을 선출하여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8월 21~26일)를 결정했다.

김원봉은 이후 7월 9~10일 열린 북조선인민회의 제5차 회의에 헌법제정위원으로 참여하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규정과 중앙선거위원회 조직문제에 관여했다.

당시 최고인민회의 제1기는 남측 360의석, 북측 212석(실제 출마자는 227명) 등 남과 북에 따로 의석을 할당하였으며, 여기서 김원봉은 남측 의석수를 결정하고 출마자를 조정하는 등의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8월 21~26일까지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를 주도하여 1,080명의 남조선 인민대표를 미리 선출해두는 등 은밀하게 회의를 준비했다고 한다.

이 일은 미군정 시기 좌파계열 연합단체로 여운형·박헌영·허헌·김원봉·백남운이 공동의장으로 있던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을 통해서 진행되었다. 

남측 지역에서 비밀투표를 실시하여 해주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 1080명의 대표가 참석하도록 하며, 최고인민회의 제1기 선거가 열린 8월 25일 다음날 별도 투표를 통해 3.8선 이남지역을 대표하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360명을 선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김원봉은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조선인민공화당 당수로서 20석을 획득한다. 당시 북조선노동당은 157석, 북조선민주당이 35석을 차지했으며, 천도교청우당 35석, 민주독립당 20석, 근로인민당 20석, 기타정당 171석, 무소속 114석 등 총 572석이 확정됐다.

최고인민회의 제1기 선거 이후 김원봉은 9월 2~10일 평양에 올라가 최고인민회의 의장단과 내각 구성을 논의하는 후속회의에 참가한다.


-노동당 가입 여부는 확인된 바 없다. 

김원봉의 조선노동당 가입여부는 서훈 문제와 관련해 논쟁이 되는 점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확인한 바로는 당원이 된바는 없다는 것이 결론이다. 그가 조선인민공화당이라는 정당의 당수였기 때문에 노동당원이 되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한국전쟁 당시와 직후에는 조선사회민주당과 천도교청두당의 당수와 고위 당직자들 대부분이 노동당원이기도 했다. 일종의 이중 당적이었다. 조선노동당은 1949년에 출범하게 되는데, 지금까지 김원봉은 조선노동당 당원이 된 바는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김원봉이 맡은 국가검열상은 국방관련 업무를 수행하는 직책이다.

북 초대 내각에서 김원봉이 맡았던 국가검열상은 한직이라는 논쟁이 있었고 심지어 남측 감사원장에 해당한다는 해석까지 있었으나 국방관련 업무를 책임지는 직책이다. 남북의 기록에 차이가 있다. 초대 내각을 보도한 <노동신문> 원문에는 '김원봉-국가검열상'으로만 되어 있다. 남측 조선, 동아, 경향만 '김원봉-국가검열상(국방상)'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남측에서는 국가검열상이라는 직책이 국방상과 같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국가검열상(국방상)이라고 쓴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북은 지금까지 민족보위상, 인민무력상 등 외 한번도 국방상이라는 표현을 쓴적이 없다. 국가검열상은 사상 검열이나 이런 것이 아니라 '군사, 국방, 징집, 무기생산과 관련된 군정, 군령 등 군사사무를 보는 부서의 책임자'라고 보면 된다.

사실상 김원봉은 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1지대 사령관 등을 지냈고 평생 무력과 관련된 일을 했기 때문에 내각 구성을 할 때 안배한 것 같다.

▲1948년 9월 8일 최고주권기관인 최고인민회의를 발족하고 9월 9일 내각을 구성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건했다. 사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초기 내각상(제1열 좌측부터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정준택, 부수상 겸 산업상 김책, 부수상 홍명희, 수상 김일성,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 민족보위상 최용건, 문화선전상 허정숙, 제2열 보건상 리영남, 국가검열상 김원봉, 교육상 백남운, 교통상 주녕하, 상업상 장시후, 재정상 최창익, 내무상 박일후, 제3열 농업상 박문규, 무임소상 리극로, 도시행정상 리용, 체신상 김정주, 사법상 리승엽, 로동상 최성택) [사진-조천현]

-김원봉은 전쟁에서 소극적이거나 제3자적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한 나라의 국회의원이고 국방업무를 담당하는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 전쟁을 하는 데 있어서 소극적일 수 있었겠나. 더구나 김원봉은 미군정에 대한 반감이 굉장히 강했다. 

1948년 11월에는 홍명희 부수상과 함께 '김일성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주한미군 철수를 위해 전민족 차원에서 투쟁하자'는 제목의 성명을 <노동신문>에 투고했으며. 1948년 12월 1일에는 "매국 풍모를 철저히 분쇄하자"는 제목으로 이승만, 김성수 등을 '조국을 미제국주의자들에게 팔아먹으려고 획책하는 민족반역자'로 비판했다.

전쟁에 소극적이거나 제3자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전쟁 1년전인 1949년 6월 25일에는 남과북의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이라는 단일기구로 통합하고 의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1950년 6월 전쟁 발발 직후 '남반부 해방지역 인민위원회' 중앙선거지도부 9인에 선출되었으며, 조선인민공화당 당원들의 월북사업을 지원하고 전시 북 군사위원회 평안북도 전권대표를 맡아 물자보급 등의 업무를 수행, 군인들만 받는 전시 첫 노력훈장 수상자가 되기도 했다.

1952년 7월부터 노동상에 임명된 것에 대해서도 국가검열상과 연결하여 전시 노동력 동원, 무기생산 등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과 관련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당대에 당 부장, 강원도당 김원봉을 비롯해 한자이름까지 같은 4명의 동명이인이 <근로신문>, <노동신문> 등에 기고를 했기 때문에 연구자들에 따라 '김원봉이 확성기 방송을 하고 다녔다'는 등의 잘못된 기록이 퍼져 있기도 하다.

(수정-13일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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