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우 / 6.15남측위 언론본부 정책위원장, 언론사회학 박사

 

들어가며

사회과학, 인문학, 철학의 기본은 인간학이다. 인간에 대한 정확한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해서 만든 학문이야 말로 보편적이면서 미래 예측력이 있게 된다. 인간학은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과학적 지식이다. 이는 유사 이래 많은 탐구가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규명중이다. 인간이란 사실 매우 복잡한 존재이고 따라서 그의 선택이나 행동을 정확히 분석하거나 추정하기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인간의 사회성에 대한 고찰학문인 사회학의 이론이나 방법론 또는 그 연구 배경 등도 다양하기 짝이 없다.

사회과학의 원조라 하는 사회학도 그 창시자는 혼란한 프랑스 사회를 치유할 수 있는 해법으로 제시했다.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흔히 구도자, 예언가적 태도를 갖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사회학 창시자도 마찬가지였고 그는 말년에 신흥종교를 만들어 그 교주가 되었다. 미국식 기능주의도 사회주의 등장에 따른 공포가 그 배경으로, 미국 사회가 완결된 형태로 혁명 등의 변동이 발생할 가능성이 적다는 동서 이념대결적 저의가 감춰져 있었다.

그렇다 해도 사회과학을 폄훼해서는 안 되며 사회과학자들의 연구결과가 일정 부분 인간의 삶과 사회를 윤택하고 행복하게 만드는데 기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인간을 대상으로 한 사회과학 분야가 광범위한 것은 인간이 그만큼 복잡다단한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참고로 사회학을 잠깐 소개하면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파악하기 쉽지 않은 존재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우선 인간과 사회를 총체적으로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협동적 관계, 또는 갈등 관계로 보거나 사회라는 구조를 특정하지 않고 개인 간의 상호관계로 보는 등 다양하다.

사회학은 사회 현상을 분석할 때 관점을 선택하게 되는데 이는 사회가 모든 요인이 뒤섞인 상태라는 점에서 자의적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그 사례의 하나로 정당의 여야를 보면 어떤 때는 타협 협조하지만 몸싸움과 같은 심각한 갈등으로 가기도 하고, 개인플레이를 하면서 외로운 늑대처럼 굴기도 한다.

사회학적 방법론도 통계적인 방식 등 숫자로 결론을 내는 계량적 방법, 숫자가 아닌 서술적 방법이 있고 집단 속에 들어가 주관을 완전 배제하고 관찰해서 기술하는 방법 등으로 갈린다. 이러니 사회학이 내놓는 사회분석 결과가 얼마나 현실에 부합하느냐 하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크다.

그래서 사회학 분야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 종류가 다양해지고 자꾸 세분화되고 있는데 정치, 범죄, 문화, 경제 사회학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이유는 특정한 학문 분야가 정립이 되면 거기에다 사회학을 붙여 별개의 사회학 분야로 삼는 식이다. 인간이 상황에 따라 여러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사회학의 분야도 다양하기 짝이 없다. 이러다보니 사회학의 정체성이 혼란스러워져서 오늘날 미국 등의 대학에서는 사회학과가 아예 간판을 내릴 지경이 되었다.

사회학의 예에서 보았듯이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이란 존재가 너무 변화무쌍하고 또한 새로운 분야를 창출하면서 진화하고 있다. 오늘날 인간은 인공지능이나 빅 데이터 처리 기법 등을 개발하면서 그 미래가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튈지 짐작키 어려운 지경이 되었는데 이는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미래의 인간은 인공지능 등을 훨씬 뛰어넘는 더 고도의 과학과 기술을 개발하면서 우주를 개척해 인간 연구에 대한 폭과 깊이를 확대 심화할 능력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이상과 같은 관점으로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의 ‘민족주의적 통일담론’에 대해 생각해 보는 만용을 부리고자 한다.

우선 ‘담론’에 대한 것으로 이의 의미도 많은 학자들이 다양하게 말하고 있는데 푸코에 의하면 그것은 사물을 체계적으로 형성하는 사회적 실천을 담보한 서술을 의미한다. 담론은 그 분야가 다양하다. 예를 들어 법률적 담론, 의학적 담론, 종교적 담론 등이 있는데 이들 담론에는 해당 분야의 전문성은 의사소통이 가능한 개념으로 일반화되어 있다. 개개 분야 별로 그것을 접하는 구성원들이 공감할 수 있는 개념에 대한 합의가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면 동일한 현상에 대해 판이한 설명이나 의미부여가 발견되는데 이는 담론이 다양하다는 사례의 하나다. 시대마다 주류적인 담론과 그렇지 않은 담론이 있기 마련이고 이는 권력과의 관계 때문이다. 즉 권력을 가진 자의 담론이 주류 담론으로 강요 또는 강조되는 일이 흔하다. 하지만 새롭고, 더욱 공익적이며 공공성이 강한 담론은 초기에는 비주류의 것이라 해도 시간이 지나면서 주류의 그것이 되기도 하는 것은 역사에서 확인된다.

정수일 소장의 ‘민족주의적 통일담론’은 가시화되고 있는 한반도 통일시대에 대비해 가장 생산적이고 모범적인 통일방안 수립에 큰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박수갈채를 받을만하다. 정 소장은 “분단국의 통일은 거역할 수 없는 역사적 당위이며 분단민족의 절박한 시대적 요청이다. 그것은 통일이야말로 분단의 고통과 부담에서 벗어나 인간의 기본권과 사회적 정의가 보장되는 새로운 민족공동체 속에서 질 높은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밝히면서 한반도 통일의 절대적 당위성을 제시했다.

정 소장의 4회에 걸친 ‘민족주의적 통일담론’에서 필자가 특히 주목한 부분은 마지막 회에서 기술된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

--남북한을 막론하고 이 민족사적 의제를 다루는데서 사회학적 접근방법에만 집착하고, 민족의 역사문화와 전통에 바탕한 인문학적 접근방법은 거의나 소외되고 있다. 분단과 통일의 주역은 어디까지나 한민족일진대, 민족을 배제한 민족공동체의 복원이나 재통일은 결코 성사 불가능하며, 민족론(민족과 민족주의에 관한 이론)을 무시한 통일담론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민족주의적 통일담론’이란 제하에 나름대로 통일담론의 접근방법으로 사회학적 접근방법과 인문학적 접근방법을, 통일담론의 체제와 틀로 국가중심패러다임과 민족중심패러다임의 유기적 배합을 동시에 제시하면서, 이 모든 방법과 체제의 공통분모가 되는 것은 민족주의라는 지론을 개진하였다. 그러면서 민족주의의 3대 근본속성인 연대의식과 민족수호 의지 및 발전지향성을 통일담론의 3대 철학적 기조로 자리매김해 본다. 이 대목에서 특기할 것은 통일담론의 3대 철학적 기조는 필자의 협애한 두뇌에서 억지로 짜낸 개념이 아니라, 그 동안 남북 간에 진행된 숱한 통일담론 결과로 맺어진 일련의 협약서 가운데서 남북 정상 간에 합의되어 발표한 6건의 주요한 공동성명이나 선언 및 합의서 내용에서 그 고갱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통일의 궁극적 목적은 정치적 체제통합을 기제로 한 민족공동체의 복원과 부흥이다. 따라서 이 모든 문제의 해명과 제시에는 민족의 연대의식과 민족수호의지 및 발전지향성의 속성을 기조로 한 민족주의 철학이 온축되어 있음을 새삼스러이 강조하는 바이다.

정수일 소장의 ‘민족주의적 통일담론’은 민족주의가 출발점이다. 모든 이론이나 학설이 그렇지만 그 출발선이 가장 중요하다. 정 소장의 이론을 접하면서 생각한 점은 민족주의에 대한 개념부터 현실에서는 십인십색이라는 점이다. 민족도 그렇지만 민족주의는 더더욱 그 설명이 간단치 않게 된다. 이런 점에서 ‘민족주의적 통일담론’은 민족에 대한 과학적 규명이 첫 출발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업도 복잡해서 필자의 글은 민족에 대한 것으로 국한한다.

민족은 인종과 혼용되기도 하지만 문화적 공통성에 따른 공동체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민족을 한민족의 경우처럼 혈연적 측면에서도 접근할 수 있는데 이를 현실 속에서 살피면 역시 그 개념이 모호해진다. 한국은 다문화 사회가 되면서 백의민족이라는 용어조차 사용치 않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 점을 고려할 경우 그러하다.

인종은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그 뿌리가 다른 것으로 주장된 황인종, 흑인종, 백인종과 같은 구분이 존재한다. 그러나 오늘날 인종이라는 개념은 그 과학적 실체가 불분명한 것으로 이런 용어부터 폐기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넓어지고 있다. 이런 연유로 인종이나 민족이라는 개념은 혼란스러워 차라리 인간이라고 통칭하는 것이 그나마 공감대를 넓히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인간에 대한 규명을 시도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인간은 인종, 민족에 대해 시대와 장소에 따라 자의적인 의미부여가 이뤄진 것처럼 현실적으로 그 개념이 단일한 것은 아니다. 국가 간에 선진, 후진국으로 구분하면서 그 소속원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평가가 내려지는 것이 지구촌의 현상이다. 또한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의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는 크게 다르다.

예를 들어 인도와 같은 전통사회의 계급개념이 엄존하는 사회에서는 혈액형이나 유전적 요인이 대동소이한 동시대인이라 해도 귀족과 천민으로 구분되는 고정관념이 여전하다. 인간이라는 개념도 인종, 민족에 대한 개념이 혼탁하거나 다양한 만큼 그런 영향을 받았고 지금도 마찬가지라 하겠다. 이런 점을 감안해 인간에 대한 과학적 규명 작업 결과를 소개하고자 한다.

인간에 대한 과학적 연구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 오늘날 지구상의 70억 인류는 모두 20만 년 전 아프리카의 한 어머니의 후손이다. 5대양 6대주의 모든 거주 인들이 그 조상이 동일한 형제자매고 친척이라는 것이다. 현존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은 찰스 다윈이 1871년 ‘인간의 유래(The Descent of Man)’라는 책에서 처음 기술한 이후 1980년대까지 근거가 모호한 추론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 후 인류의 DNA 미토콘드리아 연구와 고대 인류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그 타당성이 인정되었다.

유전자 및 화석 연구를 통해 고대 인류는 10만~20만년 사이에 남서 아프리카의 나미비아와 앙골라 해안 지방에서 살던 단일 조상으로 해부학적으로 진화했으며 그 후손이 6만 년 전 아프리카를 떠나 타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네안데르탈인과 같은 고대 인류를 대체했다.

동부 아프리카에서 현존 인류가 출현했다는 단일 기원설은 오늘날 과학계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다. 단 유전학적 연구 결과 현존 인류는 네안데르탈인의 게놈이 일부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학자들은 현존 인류는 자연도태의 원리에 의해 지난 5천~1만5천 년 전 사이에 맛과 냄새를 분간하는 감각, 소화, 뼈 구조, 피부 색, 뇌 기능 등에서 진화가 진행된 것을 밝혀냈다. 인류의 복수지역 기원설은 고대 인류가 250만 년 전 홍적세(洪積世) 시기부터 진화를 시작해 오늘날과 같은 호모사피엔스 인종으로 진화했다고 주장 한다.

70억 현존 인류가 아프리카의 한 조상이라는 과학적 조사 결과가 나온데 이어 유럽의 남성 절반은 4천 년 전 청동기시대 이후 남자의 후손이라는 것이 최근 밝혀졌다. 유럽에 여러 민족이 있지만 4천년부터 한 조상의 후손들이 염색체의 변화, 돌연변이 등을 통해 오늘에 이르렀다고 Wellcome Trust Sanger Institute라는 연구단체가 과학전문지 < Nature Genetics > 2016년 4월 마지막 주 발행호를 통해 발표했다. 26개 민족의 1,200명 남자에 대한 y염색체 조사 결과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이처럼 현존 인류는 인종, 국적, 종교 등에 관계없이 약 20만 년 전 아프리카의 한 여인의 후손이라는 것은 1990년대를 전후해서 밝혀졌고 이는 오늘날 가장 그럴싸한 정설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상태다. 아프리카의 동일한 조상에서 출발한 오늘의 인류는 동서양,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지에서 각각의 민족으로 진화하면서 독특한 문화를 창조했다. 그 작업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이런 자질을 지닌 인간이 기록을 남긴 이후의 기간 동안 인간의 이성과 감정 능력은 아주 미세한 변화에 그쳤다. 뇌의 크기가 청동기 시대 이후나 지금이나 동일하다고 고고학자들은 말한다.

인간사회는 인간의 유전적 자질의 범위 내에서 형성되고 변화하고 있다. 인간의 음악, 미술사가 역사를 통해 다양한 형식으로 이어져 오듯 인간 사회도 그런 면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과거나 현재나 국가나 지역 간 경쟁과 약육강식이 벌어지고 있고 같은 공동체 내의 개인 간에도 서로가 경쟁관계이거나 갈등의 혼란 속에 있다.

세계사나 역사를 통해 문명의 발상지가 어디이고 서양사, 동양사, 한국사 등을 통해 서로 다른 인종들이 동서양이나 과거 또는 현재에 존재하면서 나름대로의 독특한 문화와 문명을 창조한 것처럼 학습한다. 모두가 한 어머니로부터 비롯된 형제자매, 친인척의 서양사, 동양사, 한국사라는 것과는 거리가 먼 교육이다. 오늘날 지구상의 인구가 70억에 달하면서 인간을 소중하게 여기거나 동반자로 여기는 감정은 매우 희박하다. 오늘날에만 그런 것 같지 않다. 과거에도 그랬다.

고대 사회로부터 등장한 계급제도, 노예제도 등은 같은 인간이 동시대의 동반자인 다른 인간을 착취하고 학대한 끔찍한 사례다. 종교가 다르면 처단하거나 박해했고 이는 오늘날 일부 지역에서 여전하다. 인종이 다르면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으려 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견된다.

모든 인간은 같은 조상의 후손이라서 동일하게 오묘한 존재다. 인간은 하나의 조상에서 출발해 오늘날에 이르렀고 그 유전적 잠재력은 다양한, 또한 찬란한 문화, 언어, 예술, 철학, 제도, 의상, 가구, 건축을 발전시켰다. 이는 동서양에서 고대 이래 국가나 민족의 흥망성쇠 역사에서 발견된다. 국가나 개인은 경쟁 관계 속에서 우열을 나타내고 무한한 잠재력 가운데 우세한 형질이 발현되면 그렇지 않은 국가나 개인을 지배하게 되고 그 반대의 현상도 역시 나타난다.

인종과 민족

오늘날 인종과 민족은 서로 다른 개념으로 사용되지만 여전히 혼동해서 사용되고 있다. 인종은 육체적 특징이 유사하거나 확실하고 문화적 행위도 동일하면서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민족에 속할 경우를 가리키는 말이다. 민족은 동일하거나 유사한 문화를 지닌 집단을 말한다. 사람들은 흔히 주변 사람들과 자신들이 차이가 있다고 여기는데 그런 차이는 흔히 자연적이거나 전통이나 관습 등으로 초래된 것이다.

인류학자나 생물학자들은 생물학적인 분류로써의 인종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사회적 또는 주관적으로 내린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인종을 분류하는 것은 인간을 유적학적 차이로 이해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과학계의 중론이다. 특히 현존 인류의 조상이 하나라는 고고생태학적 연구결과가 정설로 굳어지면서 피부색이나 신체적 특징으로 구분하는 인종이라는 말조차 존재치 않아야 한다는 강한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피부색 등이 다르다는 것에 대한 유전학적인 연구 결과 피부색은 급속히 변화가 가능해 환경적 요인과 함께 1백 세대 또는 2,500년의 기간이면 다른 피부색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종이라는 용어는 16세기 초 영국에서 시작되어 19세기 초까지 유럽 국가들이 식민지 침략을 하면서 자신들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주로 사용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유럽은 18세기 이래 인류는 각 대륙에서 다수의 서로 다른 조상에서 태어나 진화했다는 인류 다원 발생설을 신봉했다. 즉 각 대륙의 인종을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로 분류하거나 코카서스, 몽고, 에티오피아, 아메리카 인디안, 말레이 인종 등으로 나누기도 했다.

각 대륙의 인류는 조상이 서로 다르다는 이 학설은 미국 독립전쟁 등의 시기에 유럽 대륙을 휩쓸었다. 식민지의 주민들을 백인과는 다른 인종, 즉 흑인종, 황인종으로 구분하면서 수탈과 탄압 등을 일삼았다. 나치 독일이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주장하면서 유럽을 침략한 역사적 범죄는 악명 높다. 오늘날에도 인종청소라는 말이 정치, 보도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사람을 지역이나 문화, 피부색 등으로 차별하는 인종주의는 사람의 생물학적, 생리학적 특징에 따라 인종을 구별하는 사상으로 전 세계적으로 고대로부터 존재했으며 특정 인종으로 규정될 경우 편견, 차별, 고정관념의 근거가 되었다. 이는 사회적 행동이나 관습, 정치 제도 등에 나타났으며 오늘날에도 광범위한 지역에서 그 잔재가 남아있다.

오늘날 기독교와 회교도 지역 간의 대립이나 충돌이 잦아지면서 특정 인종에 대한 편견이나 공격적 언행이 나타나기도 한다. 인종주의의 사상은, 인류는 그 조상이 서로 다른 부류로 이뤄져 있어 사회적 행동이나 선천적 능력 등이 차이가 있고 특정 인종은 열등하거나 우수하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것은 나치스 독일의 세계관의 기초를 이루었고, 20세기의 파시즘 사상으로 이어진다. 19세기 유럽에서 부상한 인종주의는 백인의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유럽에 의한 식민지주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악용되었고 나치스 독일의 세계관이나, 20세기의 파시즘 사상으로 이어졌다. 나치는 아리안 인종이 최상의 인종이라며 열등 인종으로 낙인찍은 유대인 등을 조직적으로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흑인을 차별하는 정책이 강행되었지만 세계적인 규탄 속에 종식되었다.

인종주의에 따른 차별은 주관적, 독선적인 판단으로 다른 사람을 열등하다고 여기면서 계급화나 계층화를 통한 불평등을 합리화시키고 있다. 인종을 차별적으로 분류하는 경우는 법률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부당한 이익을 챙기려는 의도가 숨어 있어 그것은 부당한 차별이나 편애라는 제도화된 행동의 결과라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인종주의 또한 역사적으로 유럽이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착취하고 정복하는 논리로 악용되었다. 즉 유럽의 제국주의와 식민지 정복의 근저에는 다른 대륙 주민들과의 문화적, 정치적 관습 차이를 우열의 차이로 해석한 일방적 인식이 깔려 있다. 그 결과 특정 인종에 대해 도덕적, 이성적으로 열등하다며 억압하고 박탈을 강요하는 인종 차별이 자행되었다. 인종차별주의는 노예제도나 집단학살과 같은 비극으로 연결되었다. 일부 국가에서는 인종적 편견은 여전히 심각하다.

인종이라는 단어는 특히 서구의 비서구 지역 침략을 합리화시키는 수단의 하나로 악용된 것을 들 수 있다. 인종은 19세기부터 생물학적인 차이나 육체적 행동 특성을 부정적으로 평가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인종을 분간할 만한 신체적 특성 등을 발견하지 못하면서 결국 현존 인류가 동일한 종족에 속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인종 분류 작업은 더 이상 행해지지 않고 있다.

프랑스 같은 나라는 인종에 바탕을 둔 자료 수집이나 보관 등은 법으로 금지 되어 있다. 예를 들어 경찰이 지명수배를 내릴 경우 ‘검은 피부의 얼굴색’과 같이 표현한다. 미국에서도 인종적 특성을 부각시키는 표현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미국 정부 당국 등이 인종이라고 쓸 경우는 생물학적인 특징보다도 외모 등의 차이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인종차별주의는 그 근거가 모호하지만 여러 가지 형태로 미국, 유럽, 한국 등에 존재하고 있다. 유엔 헌장은 인종차별은 과학적으로 오류이고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며 사회적으로 옳지 못하고 위험하다고 규정하고 있다. 지난 수백 년간 지구촌에서는 인류를 여러 인종으로 구분해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 등으로 부르며 생물학적 특성이 있는 것으로 여겼다.

그 결과 오늘날에도 우리는 흔히 지구상에는 여러 인종, 즉 그 조상이 다른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실재하는 것처럼 여긴다. 즉 백인종, 흑인종, 황인종은 그 뿌리가 다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과학자들은 인류를 인종에 따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결론지었다. 즉 피부색과 인체 구조 등은 환경적 요인에 의한 차이 일 뿐 모두 한 지붕 한 가족이라는 것이다.

서구사회의 스포츠나 예술분야에 피부색이 희거나 검거나 누런색의 차이 없이 세계적인 기량을 뽐내는 경우가 허다하고, 이민이나 이주, 또는 입양 등으로 출생지를 바꾸는 경우에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 큰 문제가 생기는 법은 거의 없다. 이런 현상을 보아도 인종이라는 구분은 사라져야 하는데 아직 그렇지 못하다.

인간은 어쩌면 서로 선을 긋고 경계선을 만들어 살고자 하는 유전자가 있는 듯 한데 이는 올림픽, 월드컵 대회 때 국가별로 온통 난리법석일 정도의 현상이 일어나거나 지역감정이 세계 어느 나라에도 존재하는 것 등이 그런 것의 반증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근거 없는 인종주의, 인종차별을 근절하기 위한 교육 등이 철저하게 시행되면 그것은 상당부분 정상화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아직 거리가 멀다. 각급 교육기관에서 현대사를 배울 때 자기 공동체 외의 6개 대륙에 대한 것은 다른 인종의 것인 양 인식 또는 착각을 피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이런 시각과 관점은 이제 70억 인류는 같은 어머니의 후손이라는 생물학적 결론이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즉 인문학의 출발점이 이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제시된 여러 인문학적 관점이나 설명에 이런 과학적인 결론을 바탕으로 한 것은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인간은 오묘한 존재

현존 인류가 한 뿌리라는 관점에서 세계사를 살피면 결론은 인간은 오묘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는 5대양 6개 대륙의 문화와 문명, 예술, 스포츠, 언어, 음식, 관습 등이 다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한 어머니가 물려준 유전적 능력과 잠재력이 지역별로 다양하게 꽃피고 열매를 맺은 것이라고 해석할 때 쉽게 유추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세계사를 살피면 향후 미래 또한 인류의 유전적 능력과 잠재력 등이 전개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즉 인류의 미래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다양하고 알차게 꽃피고 열매 맺을 것이다.

인류의 과거를 살피고 미래를 전망하게 되면 인류는 다른 동식물처럼 규정지을 수 없는 거의 무한대의 능력과 잠재력을 지닌 존재라는 결론을 피할 수 없다. 즉 신비하다고 할 정도의 존재라는 점이다. 어떻게 인간과 같은 존재가 지구상에 존재하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욱 연구할 과제다. 현재 많은 종교 교리나 철학, 인생 지침 등에 단편적으로 인류의 존재 의미에 대한 해답이 주어져 있지만 그것은 앞으로 더욱 탐구하고 완성해야 할 것들이다.

그러나 인류사에서 드러난 것처럼 인간은 선과 악의 요소를 모두 지닌 매우 혼란스런 존재라는 점이다. 성스러운 점과 함께 악마적인 자질은 물론 고결하면서도 악취 나는 그런 존재다. 폭탄테러로 무차별적인 살상과 함께 자신도 죽는 자살테러가 그치지 않는 세상이다. 인류가 제시하는 진리나 정의와 같은 가치에 대해서도 동서양의 정답이 다르다. 상반된 요인들이 유전인자 속에 포함되어 있어 시대 상황에 따라 또는 개인의 선택에 따라 여러 요인들이 구체화된다.

인간의 창의력은 밑바닥이 없는 샘물처럼 솟아난다. 새로운 영화, 노래, 온갖 상품들이 쏟아져 나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이런 창의력은 상한선 없는 욕망, 쉽게 싫증내는 변덕과 어우러지면서 상품 시장 경제, 자본주의 체제의 존속에 기여한다.

인류사 속에서 일관되게 발견되는 것은 인간은 낙원을 꿈꾼다는 사실이다. 어둡고 험한 현실 속에서 밝고 천국과 같은 공상 속의 세상을 그린다. 인간은 상상 속의 현실과는 거리가 먼, 어떤 면에서는 현실과 관계가 없는 그런 멋진 세상을 상상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현실의 고통을 이겨내는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어두운 면도 있다. 현실에 만족치 못하는 것이다. 항상 현실을 불만스러워 하면서 미래의 좀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눈길을 던진다. 현실에 만족치 못하는 것이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발전과 발달의 동력이 된다. 인류의 역사가 진보한다거나 발전한다는 것과 같은 측면이 있는 것은 바로 이 현실에 만족치 못하고 항상 불만스러워 하는 인간의 속성이 만들어낸 결과물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상상과 공상의 능력에 대한 시각차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촉발하는 상상과 공상은 그 상한선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자본주의는 이런 인간의 속성 때문에 끊임없이 신상품이 나오고 소비자들은 과거의 상품에는 싫증을 느끼면서 새로운 상품의 소비를 갈망한다는 점을 중시하다. 이런 인간의 속성을 감안하면 자본주의는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이다.

한편 공산주의는 인간이 지상 낙원인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는다. 노력에 의해 그런 세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작업은 소수의 선각자들에 의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의해 가능하다고 믿는다. 중국이 그런 확신에 차서 정치는 사회주의 체제를, 경제는 자본주의 체제를 채택해 많은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절대 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는 그런 교훈이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에서 목격되고 있다. 인간의 잠재력의 하나가 부패하고 부정을 저지를 수 있다는 점이 엘리트주의에 의해 1%가 99%를 지배하고 선도한다는 발상의 실현에 제동이 걸리는 것이다.

인간의 잠재력이 지대한 탓인지 동서고금의 모든 사회를 설명할 수 있는, 즉 도깨비 방망이 같은 사회과학 이론은 존재치 않는다. 사회과학은 특정 시대, 특정 사회에 대한 설명에 국한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국의 정치, 경제학이 미국, 북한에서 통용되지 않는다. 같은 과학이라는 이름이 붙지만 사회과학이 자연과학과는 크데 다른 점이다.

다양한 사회 현상은 인간의 DNA적 속성의 구속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인간의 역사는 인간DNA의 발현의 역사라 하겠다. 오늘의 현실이 그렇듯 미래도 인간의 잠재적 자질의 표출일 것이다. 오늘날 과학 기술이 발달하면서 미래학자들은 3년 뒤의 미래 예측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는 인간이 지닌 잠재력의 깊이와 폭에 대해 인간이 아직 파악치 못했다는 것과 같은 말이 아닐까.

인간의 잠재력에는 상반된 속성 즉 선과 악, 좋음과 나쁨, 인내심과 성급함, 사랑과 증오 등이 다 포함된다. 신을 경배하면서도 신처럼 군림하려는 속성을 지녔다. 인간은 그 잔인성이 그 한계가 없을 정도이면서도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존재다. 인간은 전쟁을 하면서도 평화를 사랑한다. 전쟁, 평화, 조화와 갈등 등 상반된 모든 요인들이 인간 유전 인자 속에 담겨 우성과 열성으로 발현한다. 진보, 보수로 구분되지만 그들의 2세는 반대의 성격을 지니고 태어나는 경우도 흔하다. 인간과 우주의 관계를 추정할 때 우주의 속성이 허용하는 그런 존재라는 점은 확실한 듯하다. 인간의 속성 가운데 우주의 그것과 대립되는 것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주에 대한 탐구는 결국 ‘알 수 없어요’라는 불가지론의 늪에 빠지게 되는데 인간의 잠재력 등이 지닌 신비함도 탐구할수록 ‘알 수 없어요’라는 미궁으로 빠지는 듯하다. 인간이 우주 탐사를 열심히 하고 있으나 과학자들은 인간은 우주에 대해 5% 정도밖에 알지 못한다고 추정한다. 인간에 대한 과학적 탐구도 육체와 정신 두 분야 등에서 이뤄지지만 깊이 들어갈수록 ‘왜 이렇게 됐지?“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깊이 볼수록 아리송해지는 인간, 그 집단인 민족 등에 대해 계속 탐구하는 것이 당연하다. 인간의 지식이 축적되면서 인간의 시야는 더욱 넓어지고 깊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어느 한 개념이나 관점이 마치 도깨비 방망이 같은 해석력이나 설명력이 있다는 생각은 설자리가 없어진다.

글을 맺으며

유토피아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이상향, 더할 나위 없이 모든 것이 만족스런 지상낙원, 천국과 같은 의미다. 그러면서 현실 속에 존재치 않는 그런 세계를 가리키기도 한다. 인간이 꿈꾸지만 결코 도달 할 수 없는 상상 속의 세계라는 것이다. 유토피아는 상상 속의 세계다. 그것은 달성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달성되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유토피아가 아니다.

인간은 상상의 노예다. 언제, 어느 곳에서나 상상할 수 있다. 공상의 세계 속으로 도피도 가능하다. 물론 그것은 관념 속의 도피이지만. 유토피아는 더 이상 상상력이 필요치 않을 만큼 완전하다는 의미인데 인간처럼 욕망의 상한선이 없고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존재에게 그런 세계가 가능할 것인가는 의심스럽다.

인간은 작은 우주라 한다. 우주를 살피면 태양계의 여러 행성은 내부 온도, 토질, 기압 등에서 큰 차이가 난다. 우주 속에 수많은 개성을 지닌 별들이 존재하고 불랙홀 등이 존재해 어떻게 이런 다양성이 존재하게 됐는지 과학자들을 놀라게 한다. 우주는 빅뱅에 의해 생성된 것으로 밝혀졌지만 아직도 빛보다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우주가 왜 생겼는지, 그리고 그 미래는 무엇인지, 우주 종말 뒤에 어떤 일이 왜 생기는지에 대해서는 인간의 탐구 영역을 벗어난다.

예를 들면 다른 동물들은 그 유전적 잠재력에 한계가 분명한데 인간만이 그렇지 않은 것은 어떤 원인에 의한 것인가 등은 밝혀지지 않는 수수께끼다. 자연적인 진화의 결과라고 하기에는 다른 동물들에 비교해 유전적 잠재력이 너무 차이가 커 놀라게 된다. 혹시 절대자의 피조물이 아닌가 하는 상상을 하게 되지만 이에 대한 확실한 해답은 아직 없다.

인간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이성과 감정의 동물이라는 점이다. 인류의 지성들은 감성에 좌우되는 것을 피하고 이성적이 되도록 노력했고 후학들을 그렇게 가르쳤다. 이런 후천적 교육 탓인지 오늘날까지 감정에 대한 연구는 이성에 대한 것보다 매우 미흡하다. 감정은 예측 불가능하다. 누구나 경험하지만 사람의 기분은 눈앞의 파리 한 마리에 의해 크게 동요하기도 한다.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리더들의 주요 사안에 대한 결정은 감정에 좌우된 측면이 적지 않다는 것이 조사에서 밝혀지는 등 감정이 일상생활에서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그러면서도 사람은 자신이 감정의 노예가 된 것처럼 보이는 것을 극력 피하려 한다.

인간학의 미래는 감정에 대한 더 깊은 연구를 통해 이뤄져야 할 것이고 이는 인공지능 등의 첨단 과학 개발로 그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고 하겠다.

인간의 잠재력은 천사와 악마처럼 상반된 갖가지 가치판단을 하는 성향이 공존하는 특성을 지녔다. 이런 상반된 요인이 한 인간 내에서 혼재해 있는 것은 인간의 이중성을 다룬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서 잘 표현되어 있다. 인간은 그 내면에 이중성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다양한 성격 등을 지닌 다면적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의 성격은 다면적이고 복잡하기 그지없어 그로 인한 자기모순을 겪는 고통도 심각하다.

이토록 인간의 내적 잠재력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다층적이고 다면적이어서 그것이 과연 축복인지, 저주인지가 애마한 지경이다. 그러나 단순한 것보다 복잡한 것이 더욱 묘미가 있다는 점에서 무한한 내적 잠재력은 축복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긍정, 부정적 측면 가운데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측면이 훨씬 강하다고 보여 진다. 이는 인간 사회가 선과 악, 긍정과 부정 등의 여러 요인이 혼재해 있지만 교도소가 전체 사회의 극히 일부분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인간은 개인이나 그 단체가 유전적 잠재력을 얼마나 환경에 걸맞게 발현하느냐에 따라 세속적인 성패가 결정이 나는데 이는 개인의 평생 삶이나 단체 또는 국가 단위의 공동체에서 입증된다. 즉 인간의 잠재력이 유전적으로 신비하다고 할 만큼 다양한데 그 가운데 어떤 요인을 선택해서 집중적으로 발휘하느냐 하는 것이 역사에서 성공과 실패라는 평가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선택과 집중을 국가 단위로 보면 한국과 중국의 경제발전 등에서도 입증된다. 지구촌은 크고 작은 공동체 단위의 경쟁이 치열해서 30년 전후의 기간이면 크게 발전하기도 하지만 후퇴, 퇴행하는 경우도 흔하다.

인간에게 교육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선택과 집중을 효과적으로 해서 그 결과 생산성이 크게 만들기 위한 지식을 주고 지혜를 개발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분단 해소와 통일, 그리고 통합도 마찬가지라고 할 것이다.

정수일 소장의 ‘민족주의적 통일담론’도 한민족의 통일과 통합을 위해 필요한 지식을 정리한 것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인간이 온갖 상상을 다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공공성과 공익성을 극대화 할 수 있는 이론과 방법론은 복음과 같은 것이다. 정수일 소장의 ‘민족주의적 통일담론’은 분단이후 한민족이 평화통일과 통합을 위해 어떻게 노력해 왔으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제시한 이정표의 하나라 하겠다.

일제 강점 하에서 선각자들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교육이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는 것은 물론 민족이 다른 공동체들과 공존하면서 공동 번영할 수 있는 지식과 지혜를 보편화하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평화통일과 통합도 마찬가지로 대중적이고 집중적인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 통일 노력 자체를 범죄시하고 통일의 상상력까지 처벌하는 국가보안법이 폐기되어야 하고 미국에 예속된 정치, 통일 운동 및 지식인 사회의 허위의식이 깨져나가야 한다. 한반도 전체는 물론 동북아와 전 세계의 행복지수를 높일 수 있는 통일과 통합을 위해 노력하도록 만드는 범사회적 각성과 의식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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