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일 / 전 한신대학교 철학과 교수
 

오늘부터 사전 투표가 시작되었다. 투표장을 향해 가기 전에 이 글을 쓰면서, 영화 ‘기생충’ 세 가족들이 투표장에 나간다면 누구를 그리고 어느 당을 찍을까 생각해 본다. 

기생충에는 세 가족이 한 집에 살고 있었다. 반지하의 기택 가족, 지하의 동광 가족, 그리고 지상의 박 사장 가족이 그것이다. 우리 사회에선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사회구성체들 간에 기이한 증상이 나타나고 특히 그 증상이 선거철이면 더욱 분명해진다.

다른 나라의 경우는 지하와 반지하가 당연히 일체감을 가지고 단결하여 지상의 박 사장 가족에 대결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선 그렇지 않다. 놀랍게도 지하가 지상과 결탁이 돼 반지하를 적대시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장면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 영화이다.

부산의 자갈치시장 그리고 대구의 서문시장, 그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이와 비슷한 사회구성체들 간에 나타나는 현상은 지상의 박 사장 가족과 지하의 동광 가족과는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한국 사회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 아닌가 한다. 그럼 그 이유는?

최근 선거에서 박근혜와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킨 계층는 박 사장과 동광 가족을 대표하는 계층이라 할 수 있다. 박 사장 가족은 재벌로서 재벌의 이익을 도모하는 두 정권에 지지를 보내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가장 낮은 계층인 지하의 동광 가족이 같은 지하의 기택 가족이 아니고  박 사장과 일체감을 갖는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세 가족이 모두 박 사장의 마당이라는 지상에 노출되었을 때에 동광은 기택 가족들(반지하)을 향해 총칼을 겨누어 기택의 딸을 죽인다. 그런데 기택은 총구를 박 사장 가족을 향하게 해 몰살시킨다. 자기를 죽이려 한 것이 동광이 아니고 박 사장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가 갖는 이러한 ‘비결정적 구조’는 여기서 매력을 발휘한다. 지하와 반지하의 두 가족이 지상의 박 사장을 겨냥했더라면 그것은 당연한 ‘결정적 구조’라고 한다. 결정적 구조는 전 세계 사회구성체 간에 평균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하나 이상한 것이 없고 이런 글을 쓸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하의 동광 가족이 지상의 박 사장과 일체감을 갖는 데는 한국 사회의 특별한 정서와 가치관 때문이다. 자갈치시장과 서문시장의 사람들이 이명박을 지지하는 이유는 이명박의 거친 손등과 손수레를 끄는 장면이라 한다. 이명박의 과거 가난했던 장면들 때문이라 한다. 박근혜의 경우는 조실부모하고 결혼도 안 하고 혼자 산다는 데에 대한 한없는 연민의 정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이 두 대통령은 공약 자체가 부자와 재벌 중심이고 지하 계층의 사람들에게는 안중에도 없는 지도자들이었다. 그러나 두 시장의 사람들은 한국인 고유의 온정주의 때문에 두 대통령을 탄생시켰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러나 미국 같은 곳에서는 이런 기이한 온정주의를 찾아보기란 힘들 것이다. 동광과 같은 흑인, 멕시칸 그리고 아시아 소수 민족들은 거의 민주당이고 부유층은 공화당으로 확연히 갈라져 나타난다. 그런데, 한국에서 만은 이런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온정주의와 함께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안보와 색깔론이다. ‘좌파 빨갱이’라는 이념 앞에서는 모든 구성체 의 논리를 덮어 버리고 마는 것이 안보 반공이다. 소위 북풍이라는 것만 부추기면 전 계층의 사람들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이런 안보 틀을 겨우 깰 수 있는 것은 반지하 기택 가족이지 지하의 동광 가족은 아니다. 

드디어 탈북자 태영호가 강남갑에 출마했다. 가장 잘 사는 동네인 박 사장이 사는 동네에 출마했다. 지금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 그럼 한 번 지하 동광 가족과 같은 동네에 태영호가 출마한다고 하자. 신기한 것은 그래도 아마 강남갑과 비슷한 지지를 이곳에서도 받을 것이다. 온정주의와 안보 위기의식이 복합돼 모든 가치관을 쓰나미 같이 삼켜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구성체 간의 문제는 허균이 살던 시대에도 여전했던 것 같다. 조선 중기에 허균(許筠)이 지은  『성소부부고 惺所覆瓿藁』에는 「호민론」이란 글이 실려 있다. 여기서 허균은 백성들을 항민(恒民)·원민(怨民)·호민(豪民) 셋으로 나눈다.

허균에 의하면, ‘항민’은 일정한 생활을 영위하는 백성들로 자기의 권리나 이익을 주장할 의식이 없이 법을 받들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면서 얽매인 채 사는 사람들이다. 지하의 동광과 같은 계급의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 같다. ‘원민’은 수탈당하는 계급이라는 점에서 항민과 마찬가지이나 그러나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윗사람을 탓하고 원망한다. 반지하의 기택의 가족 같은 계급을 두고 하는 말이다. 탁자 밑에 숨어 기택은 박 사장 부부가 소파에 누워 에로틱한 장면을 노출하며 가난의 상징인 몸 ‘냄새’를 말할 때에 감정이 달라진다. 분노 같은 것을 느낀다. 이렇게 분노할 줄 아는 계층을 허균은 ‘원민’이라고 한다. 

허균은 「호민론」에서 ‘천하에 두려워 할 바는 백성뿐이다’라고 전제한 후에 항민은 ‘자신의 권리나 이익을 주장할 의식이 없는 백성’을 말하며, 원민은 ‘정치가로부터 피해를 입고 원망만 하지 스스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백성’으로 지금의 개념으로는 나약한 지식인을 뜻한다. 이와는 달리 호민은 ‘자신이 받는 부당한 대우와 사회 모순에 과감하게 대응하는 백성’을 뜻하는 것으로서 시대의 사명을 인식하고 현실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인물이다. 호민의 주도로 원민과 항민들이 합세하여 무도한 무리들을 물리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원민은 원망하는 데에 그칠 뿐이다. 그러므로 항민과 원민은 그렇게 두려운 존재가 못 된다. 참으로 두려운 것은 ‘호민’이다. 호민은 남모르게 딴 마음을 품고 틈만 엿보다가 시기가 오면 일어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가 받는 부당한 대우와 사회의 부조리에 도전하는 무리들이다. 호민이 반기를 들고 일어나면 원민들이 소리만 듣고도 저절로 모여들고, 항민들도 또한 살기를 구해서 따라 일어서게 된다. 그러나 영화에서 지하의 항민에 해당하는 동광은 호민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반지하의 기택은 그렇지 않았다. 박 사장 부부의 ‘냄새’ 한마디에 분노할 줄 알았다. 항민에서 원민을 거쳐 호민으로 진화했다. 그러한 항민인 동광은 그렇지 못했다.

이번 선거에서 시장의 민심이 변할까? 과연 항민에서 호민이 될 수 있을까? 소박한 연민의 정과 안보 불안 그리고 지역감정은 여전히 하나도 변하지 않고 투표장으로 가는 것 같다. 적어도 지금까지 여론조사에 나타난 결과로 보아서는 그런 것 같다. 

동학농민전쟁도 항민이 원민으로 그리고 원민이 호민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진(秦)나라가 망한 것은 진승(陳勝)·오광(吳廣) 때문이고, 한(漢)나라가 어지러워진 것은 황건적(黃巾賊)이 원인이었다. 당(唐)나라도 왕선지(王仙芝)와 황소(黃巢)가 틈을 타서 난을 꾸몄다. 끝내 이 때문에 이들의 나라는 망하고 말았다. 이들은 모두 호민들로서 학정의 틈을 노린 것이다.

허균(許筠:1569~1618)은 말하기를 “우리나라에는 호민이 없다”고 한탄했다. 당시의 사회에서 허균의 사상은 불온한 것으로 취급되었고, 허균은 사회의 안정을 해치는 위험인물로 지목되어 1618년 역적혐의를 받고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허균은 천지 사이의 한 괴물입니다. 허균이 진 죄명(罪名)이야말로 오늘날 신자(臣子)된 입장에서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것이었는데, 신들은 이런 죄인의 이름이 있으니 그 몸뚱이를 수레에 매달아 찢어 죽이더라도 시원치 않고, 그 고기를 씹어 먹더라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하략)”라고 했다.
   
1980년대 유행하던 민중신학이 허균의 호민론을 부각시켰지만 우리 사회가 변한 것은 하나 없다. ‘호민론’에 나오는 조선 민중의 모습과 오늘날 민중의 모습은 본질에서 얼마나 다를까? 항민과 원민의 자리에, 침묵하는 정규직 노동자와 일터에서 죽어간 비정규직 노동자를 대입해 보면 어떨까? 최근 문제가 됐던 “민중은 개돼지”, “민주주의 자체가 천민민주주의” 등의 망발은, 예외적 소수의 일탈적 인식이라기보다 중세 봉건사회와 다를 바 없는 오늘날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더 큰 절망감을 준다. 민주주의의 본질인 ‘민중의 힘’을 업신여기며 “중세로 돌아가자”고 거리낌 없이 떠들어대는 오늘날의 귀족들을 두렵게 만들 호민의 외침이 절실하다. (최원형 여론미디어팀 기자 circle@hani.co.kr)

영화 ‘기생충’은 현재 진행형이다. 단순히 영화가 아니고 변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오늘 투표를 하는 나의 앞줄에는 유권자들이 코로나 마스크를 쓰고 투표를 기다리며 줄지어 서 있다. 이들이 세 가족 가운데 어느 계층의 사람들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들이 ‘기생충’ 코로나는 그렇게 무서워하면서도 막상 자기 자신들이 기생충인지도 모르고 숙주에 빌붙어 살려는 항민인지 아니면 원민으로 깨어나는 호민인지 궁금해 하다 보니 어느듯 내가 투표할 순간이 되었다. 호민으로 자처하는 것은 객기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행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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