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일 / 전 한신대학교 철학과 교수
 

1986년 2월 아직 눈바람이 매섭게 불던 어느 날 저녁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신입생 환영회 자리에 당국에 수배를 받고 있던 4학년 이재호 군이 나타났다. 그는 “새내기 후배들을 만나고 싶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참석했다”고 짤막한 인사말을 마친 후 중국집 앉은뱅이 탁자 위로 올라가 노래를 선창하기 시작했다. 부른 노래는 남진의 ‘님과 함께’였다. 서글서글하게 잘 생긴 서정적 얼굴을 한 이재호는 그때로부터 두 달 후인 1986년 4월 26일 아침 신림동에 있는 가야쇼핑 건물 3층에서 “광주학살의 원흉 전두환을 처단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온몸에 불을 붙이고 건물 아래로 뛰어 내렸다. 

1986년 그 해도 4월은 잔인했다. 사방에 온갖 꽃들이 만발한 4월, 전태일에 이어 서울대생 김상진 군, 김세진 군, 이재호가 갔다. 그 이후 1987년 박종철과 이한열, 1991년 강경대, 같은 해 김기설이, 강경대의 장례식이 있던 바로 그날 연대 앞 철길 다리 위에서 투신자살한 무명의 노동자, 이 땅의 4월은 젊은 피만 빨아 먹는 흡혈귀와 같았다. 그 잔인한 4월이 다시 왔고 코로나란 불청객과 함께 4월 15일 21대 총선을 코앞에 두고 있다. 

그 날 이재호가 부른 ‘님과 함께’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년 살고 싶어/봄이면 씨앗 뿌려 여름이면 꽃이 피네/가을이면 풍년 되어 겨울이면 행복하네/멋쟁이 높은 빌딩 으스대지만/유행따라 사는 것도 제멋이지만 반딧불 초가집도 님과 함께면 나는 좋아 나는 좋아 님과 함께면, 님과 함께 산다면”

이상의 글은 당시 신입생 환영회에 신입생으로 참가했던 이상갑 인권 변호사님의 저서 『이변은 있다』(2012년)의 첫 쪽의 글을 그대로 소개한 것이다. 필자는 재호의 소식을 들으며 그 날도 강의한 무기력한 교수였다. 무기력하고 무능했던 나 자신을 자책하며 그 날도 강의를 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살고 싶다’던 소박한 꿈 밖에 없었던 재호는 끝내 그 꿈을 다 이루지 못하고 자신의 몸에 불을 댕겨 한 줌의 재로 사라졌다. 이상갑 변호사님은 “불꽃이 되어 역사 속으로 가버린 재호 선배의 선택은 낭만적인 대학생활을 꿈꾸며 캠퍼스 생활을 시작했던 새내기 대학생인 내게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그 날 이후 ‘님과 함께’는 내게 잊을 수 없는 노래가 되었고 나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묻기 시작했다. 무엇을 공부하여 어떻게 살 것인가. 정치학도였던 내가 배운 정치학은 그렇게 최루탄 연기 속에 뜨거운 사람들을 통해 배운 거리의 정치학이었다”(책, 21쪽) 그 후 변호사가 돼 많은 운동권 학생들을 법정에서 변호하시고 계신다.

재호 열사가 간지 34년 되는 올 해 그 날의 열사들이 바라고 갈구하던 그 꿈과 낭만이 이제 우리는 그것이 실현돼 가는 현실 속에 살고 있다. 미 대사관 앞에는 오늘도 재호와 같은 또래의 대학 청년 학생들이 재호가 들었던 팻말을 들고 시위를 법적으로 할 수 있게까지 되었다. 재호가 한 번 밖에 외치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구호를 광화문 네 거리에서 자유롭게 외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그 때나 지금이나 하나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저 열사들을 죽음으로 내몬 세력들이 변하지 않고 ‘야당’이란 명분을 걸고 과반의석을 목표로 오늘부터 21대 국회의원 선거 운동을 시작하였다.

남진의 대중가요가 재호를 생각할 때에 왜 혁명 가요로 들릴까? 그것은 낭만과 현실의 괴리이기 때문이다. 이재호의 가슴 속에는 혁명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고 낭만이 먼저였다. 체 게바라는 자서전 속에서 가슴 속에 ‘낭만’이 없으면 진정한 혁명가가 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정글 속에서 싸우면서 수많은 시들을 남겼다. 달빛 은은한 남미의 정글을 지나가면서 길가 밭에 핀 ‘감자꽃’을 바라보며 게바라는 시와 혁명과 사랑을 일치시켰다.

우리의 윤동주 역시 별을 노래하던 낭만가였다. “별하나에 추억과, 별하나에 사랑과, 별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 듯이”(‘별헤는 밤 중에서’) 1941년 동주가 이 시를 쓰던 날로부터 45년이 지난 후 재호는 별을 님으로 바꾸어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님과 함께 살고 싶다고 했다.

체 게바라는 혁명을 하고 쿠바를 떠날 때 누가 게바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씨를 뿌리고도 열매를 따 먹을 줄 모르는 바보 같은 혁명가”라고 하자 게바라는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그 열매는 이미 내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난 아직 씨를 더 뿌려야 할 곳들이 많다. 그래서 나는 더욱 행복한 혁명가” <'행복한 혁명가' 전문>라고 대답했다. “언제쯤이면 꽃처럼 환하게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까. 의약품이 또 부족하다. 피를 토할 듯 밤새도록 기침을 한다. 잠은 별빛처럼 쏟아지는데, 끝내 잠을 이룰 수가 없구나.”<'어머니의 생신' 중>

동주에서 재호까지 그 낭만과 현실 사이는 하늘의 별 만큼 멀고도 멀었다. 다시 34년 지난 총선은 그 사이 수많은 학생, 노동자, 지식인들의 피를 사뤄 먹고 산천의 진달래 같이 피를 토해내고 있다. 선거에서 저 재호를 죽인 세력들을 완전히 청산하지 않고는 결코 혁명은 끝나지 않는다. 

국가보안법에 걸려 모든 공민권의 자격이 박탈당해 있던 나에게도 투표권이 날아올는지? 그러나 우리에게 하늘의 별들은 동주가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 ‘아슬히’ 멀지는 않다. 선거 혁명이라는 희망 때문이다. 별들이 촛불이 돼 우리 앞에 4.15 총선의 이름으로 우리 앞에 다가와 서 있다.  

재호와 같이 혁명을 외치던 자들 가운데는 변절과 변심을 거듭하던 끝에 기회주의자로 둔갑하여 저 재호를 죽인 세력에게 적극 동참해 선거에 출마까지 하고 있다. 이들을 그 누구보다도 심판해야 될 이유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관을 혼동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재호를 죽인 공안 검사 같은 인간들이 지금 버젓이 살아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오늘부터 공식 선거 운동을 시작하였다. 져서는 안 될 반드시 성공하여 촛불 혁명을 성공시켜야 한다.  

34년 전 4월과 함께 재호는 갔다. 그러나 혁명이 간 것은 아니다. 재호는 우리에게 선거 혁명이란 평화를 통한 혁명을 남기고 갔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이상갑 변호사님이 간접적으로 전해 준 것은 ‘저 푸른 초원’과 감자 밭이다. 

“이제 37명뿐만 살아 남아있다. 나무 사이로 감자밭이 보인다. 더 이상탈출구가 없다.”<'달빛' 중> 감자꽃은 열매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 열매를 땅 밑에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혁명가는 열매를 따 먹지 않는다. 그것을 땅 밑에 숨긴 채 둔다. 그래서인지 진정한 혁명가들의 시에는 ‘감자꽃’이 자주 등장한다. 1930년대 항일유격대가 남만 림강 회의를 마치고 백두산으로 진격할 무렵 림강 들판 좌우에는 감자꽃이 내를 이루고 그 위로는 달빛이 교교히 흐르고 있었다. 

“나는 아내와 자식에게 그 어떠한 물질적 부와 명예도 남겨놓지 않았으며, 또한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나는 그것을 행복으로 여깁니다”<'행복' 전문> 게바라의 이 시는 ‘임을 위한 행진곡’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를 연상케 한다.

“밤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모든 민중들이 저렇게 반짝일 수만 있다면”<'별' 전문> 게바라는 일단 별을 잡았다. 혁명 후 그는 쿠바에서 장관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혁명가가 있을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전선으로 다시 나섰다. 감자꽃같이 열매를 땅에 숨기듯 하였다.

이번 선거의 역사적 대의를 저버리고 말 그대로 당리당략에 골몰하는 소위 진보를 자처하는 정당들과 그 안의 군상들, 좀 감자꽃 같을 수는 없나. 그래야 5.18 광주 영령들을 떳떳한 얼굴로 대할 수 있지 않을까? 글을 쓰는 동안 남진의 ‘님과 함께’는 어느 듯 혁명가요로 변한 듯하다. 이 번 선거에서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기’만 한다면 지하의 재호도 비로소 웃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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