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모」의 심리

 

생의 욕구의 적극적 표현

객관적인 정당성 인정될때 성공

 

임석재

 

4.19학생「데모」는 너무나 위대한 성과를 올렸다. 우리나라의 모든 사회악의 근원인 이정권의 서투른 정치적 내지 행정적 포치를 헝클어 놓고 맥을 쓰지 못하게 하고 드디어는 이정권을 손쉽게 꺼꾸러뜨렸기 때문이다. 이 학생 「데모」는 질식할 것 같은 정치적 악기류를 뽑아내는 환기기의 작용을 하였고 절망에 빠진 국민의 사기에 새로운 희망을 비쳐주는 횃불이 되었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모든 사회적 옹색은 소통시키고 사회적 장애를 제거시키는 마술은 「데모」속에 잠겨 있는 것 같은 관념을 가지게 했다. 해방 전서부터도 그랬지마는, 해방이후에 쌓이고 쌓인 여러 가지의 사회적 적폐는 가지가지로 굉장히 많았다. 이런 것을 싹 쓸어내버리고 좋은 세상을 이룩하자는 의욕은 국민의 가슴마다에 상승할대로 상승하였고, 이런 것을 송두리째 없애버려야겠다는 열심스럽고도 성급한 노력은 별의별스런 「데모」로 표현되었다. 

그리하여 「데모」의 범람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어떠한 「데모」가 되었든 신기하게도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데모」를 감행하는 자들은 일종의 영웅으로 대접받고 「데모」하나 못하는 부류의 인간은 못난이로서 천시당하는 기풍까지도 생겼다.
 
우리는 단시일 내에 가지가지의 「데모」를 경험했다. 그리고 가지가지의 기술과 방법도 훌륭히 익힌 명수가 되었다. 「데모」하면 우리는 먼저 수많은 군중이 구호를 외치면서 시가를 행진하는 광경을 눈앞에 그려본다. 그리고 반무장한 경관들이 큰일이나 처리하려는 듯이 긴장해서 매서운 눈초리로 좌왕우왕하면서 「데모」군중에게 어떤 위압을 가하여 「데모」행동을 제어하려고 하는 광경도 덧붙여 본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자면 거기에는 반드시 지배부류와 피지배부류로 갈라지게 된다. 이렇게 해서 각각 그의 위치에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사회체제가 건실하고 그 기능이 순조롭게 운행될 때에는 이 두 부류의 집단은 서로 의존하여 아무런 마찰이나 지장도 없다. 그러나 현실의 사회는 양 부류 간에는 어떠한 의미에서 이해가 상반되고 그리하여 대립하게 된다.

지배부류의 집단은 그 지배력을 유지하고 공고히 하기 위하여서는 그에 필요한 법과 제도와 집행기관을 갖추어 어느 모로나 우세자로서 있게 된다. 우세자가 취하는 모든 조치는 피지배자부류에 대하여서는 그의 자유롭고 평화스러운 생활을 위협하고 압박하고 구속하는 것으로써 있게 되는데 그들은 이로 말미암아 열세자로서 있게 된다. 열세자는 우세자에게서 유형무형의 제약을 받게 되므로 그 제약을 완화내지 제거의 의욕을 잠재적으로도 갖게 된다.

그런데 우세자의 존재방식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엄연한 존재로서 있게 될 때에는 열세자는 이에 대항하지 못한다. 그런데 우세자 집단에 어떠한 결함결핍이 있고 열세자 집단이 그의 권리를 신장시키고 그의 생을 제약하는 모든 부조리를 개변시킬 자각이 있게 되는 때에는 이것의 실현을 기도한다. 그 기도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마는 감각에 호소이서 즉각적으로 효과를 노리게 하는 것은 다수인의 군집으로써 하는 「데모」이다. 

이런 「데모」는 다수의 당 인원라든가 수많은 입에서 나오는 아우성이며 울부짖고 강력을 노출하는 수족 등의 움직임에 상대 입장에 있는 자에게 위협과 공포를 준다. 이런 위협 공포는 사람의 정서를 불안케하여 지적 작용을 방해하고 이성적인 조치를 마비시킨다. 조그마한 자극도 과대시하고 자기의 의사와는 반대의 행동을 하게 된다. 이성과 합리를 기조로 해서 이루어진 여러 가지 법령 명령계통질서는 이로 말미암아 헝클어지고 마비되어 그 기능을 발휘 못하고 드디어 지배력을 잃는다.

그런데 「데모」란 열세자가 다수 통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데모」하는 데에는 「데모」하는 것을 정당시해줄만한 객관적 이유가 있어야한다. 즉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장해제거가 칭찬받을만한 이유가 있어야 그 「데모」가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에 그러한 요건이 불충분할 때는 「데모」의 방법이 아무리 교묘하고 대규모라 하여도 신통한 일은 없다. 지배자 내지 우세자의 나타내는 횡포가 심하여도 피지배자 내지 열세자가 그의 권리를 찾을 만한 자각이 없거나 힘이 없을 때에는 그 중의 선각자나 행동분자는 지배집단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비판하고 그의 제거를 호소하며 선동하여 동조자를 통합하려한다. 열세자의 무기는 다수의 힘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우리는 「데모」로써 빛나는 성과를 거둔 일이 많다. 삼•일운동, 광주학생「데모」 등은 그의 현자한 예이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용인되고 칭찬받을 만한 「데모」이지마는 우세자의 힘이 너무나 강력한 때에는 이에서 얻어지는 성과는 별로 없고 도리어 희생만 크게 남을 뿐이다. 

「데모」는 열세자가 자기들의 권익을 찾으려는 사회행동이기 때문에 우세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달갑지 않은 노릇이다. 그러나 약자가 살겠다고 애쓰는 강력한 생의 욕구의 적극적 표현이란 것을 알아준다면 덮어놓고 부당시하고 억압만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욕구에 부응하는 방책을 마련하여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심리학자 서울사대교수)

▲ 「데모」의 심리 [민족일보 이미지]

「데모」의 心理

 

生의 慾求의 積極的 表現

客觀的인 正當性 認定될때 成功

 

임석재

 

四.一九 學生「데모」는 너무나 위대한 成果를 올렸다. 우리나라의 모든 社會惡의 根源인 李政權의 서투른 政治的乃至 行政的 布置를 헝클어 놓고 脈을 쓰지 못하게 하고 드디어는 李政權을 손쉽게 꺼꾸러뜨렸기 때문이다. 이 학생「데모」는 窒息할 것 같은 政治的惡氣流를 뽑아내는 換氣器의 作用을 하였고 絶望에 빠진 國民의 士氣에 새로운 希望을 비쳐주는 횃불이 되었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모든 社會的 옹색은 소통시키고 社會的 障碍를 除去시키는 魔術은 「데모」속에 잠겨 있는 것 같은 觀念을 가지게 했다. 解放前서부터도 그랬지마는, 解放以後에 쌓이고 쌓인 여러 가지의 社會的 積幣는 가지가지로 굉장이 많았다. 이런 것을 싹 쓸어내버리고 좋은 世上을 이룩하자는 意慾은 國民의 가슴마다에 上昇할대로 上昇하였고, 이런 것을 송두리째 없애버려야겠다는 熱心스럽고도 性急한 努力은 別의別스런 「데모」로 表現되었다. 

그리하여 「데모」의 氾濫을 보게되었다. 그리고 어떠한 「데모」가 되었든 神奇하게도 相當한 效果를 거두었다. 「데모」를 敢行하는 者들은 一種의 英雄으로 待接받고 「데모」 하나 못하는 部類의 人間은 못난이로서 賤視當하는 氣風까지도 생겼다.

우리는 短時日內에 가지가지의 「데모」를 경험했다. 그리고 가지가지의 技術과 方法도 훌륭히 익힌 名手가 되었다. 「데모」하면 우리는 먼저 數많은 群衆이 口號를 외치면서 市街을 行進하는 光景을 눈앞에 그려본다. 그리고 半武將한 警官들이 큰일이나 處理하려는 듯이 緊張해서 매서운 눈초리로 左往右往하면서 「데모」群衆에게 어떤 威壓을 加하여 「데모」行動을 制御하려고 하는 光景도 덧붙여 본다.

우리가 社會生活을 하자면 거기에는 반드시 支配部類와 被支配部類로 갈라지게 된다. 이렇게 해서 各各 그의 位置에서 社會的 機能을 遂行하는 것이다. 社會體制가 健實하고 그 機能이 順調롭게 運行될 때에는 이 두 部類의 集團은 서로 依存하여 아무런 摩擦이나 支障도 없다. 그러나 現實의 社會는 兩部類間에는 어떠한 意味에서 利害가 相反되고 그리하여 對立하게 된다.

支配部類의 集團은 그 支配力을 維持하고 鞏固히 하기 爲하여서는 그에 必要한 法과 制度와 執行機關을 갖추어 어느 모로나 優勢者로서 있게 된다. 優勢者가 取하는 모든 措置는 被支配者部類에 對하여서는 그의 自由롭고 平和스러운 生活을 威脅하고 壓迫하고 拘束하는 것으로써 있게 되는데 그들은 이로 말미암아 劣勢者로서 있게된다. 劣勢者는 優勢者에게서 有形無形의 制約을 받게 되므로 그 制約을 緩和乃至 除去의 意慾을 潛在的으로도 갖게 된다.

그런데 優勢者의 存在方式이 强力한 힘을 가지고 엄然한 存在로서 있게 될 때에는 劣勢者는 이에 對抗하지 못한다. 그런데 優勢者集團에 어떠한 缺陷缺乏이 있고 劣勢者集團이 그의 權利를 伸張시키고 그의 生을 制約하는 모든 不條理를 改變시킬 自覺이 있게 되는 때에는 이것의 實現을 企圖한다. 그 企圖는 여러 가지 方法이 있지마는 感覺에 呼訴이서 卽刻的으로 效果를 노리게 하는 것은 多數人의 群集으로써 하는 「데모」이다. 

이런 「데모」는 多數의 當 人員라든가 數많은 입에서 나오는 아우성이며 울부짖고 强力을 露出하는 手足 等의 움직임에 相對 立場에 있는 者에게 威脅과 恐怖를 준다. 이런 威脅 恐怖는 사람의 情緖를 不安케하여 知的作用을 妨害하고 理性的인 措置를 痲痹시킨다. 조그마한 刺戟도 誇大視하고 自己의 意思와는 反對의 行動을 하게된다. 理性과 合理를 基調로 해서 이루어진 여러가지 法令 命令系統秩序는 이로 말미암아 헝크러지고 痲痹되어 그 機能을 發揮못하고 드디어 支配力을 잃는다.
 
그런데 「데모」란 劣勢者가 多數 統合하기만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데모」하는데에는 「데모」하는 것을 正當視해줄만한 客觀的 理由가 있어야한다. 即 社會的으로 容認되고 障害除去가 稱讚받을만한 理由가 있어야 그 「데모」가 成功할 수 있는 것이다.

萬一에 그러한 要件이 不充分할 때는 「데모」의 方法이 아무리 巧妙하고 大規模라하여도 神通한 일은 없다. 支配者乃至 優勢者의 나타내는 橫暴가 甚하여도 被支配者 乃至 劣勢者가 그의 權利를 찾을 만한 自覺이 없거나 힘이 없을때에는 그 中의 先覺者나 行動分子는 支配集團의 不當性을 指摘하고 批判하고 그의 除去를 呼訴하며 煽動하여 同調者를 統合하려한다. 劣勢者의 武器는 多數의 힘이기 때문이다.

過去에 우리는 「데모」로써 빛나는 成果를 거둔 일이 많다. 三•一運動 光州學生「데모」 等은 그의 顯者한 例이다. 그런데 客觀的으로 容認되고 稱讚받을 만한 「데모」이지마는 優勢者의 힘이 너무나 强力한 때에는 이에서 얻어지는 成果는 別로 없고 도리어 犧牲만 크게 남을 뿐이다. 「데모」는 劣勢者가 自己들의 權益을 찾으려는 社會行動이기 때문에 優勢者의 立場에서 보면 이는 달갑지 않은 노릇이다. 그러나 弱者가 살겠다고 애쓰는 强力한 生의 慾求의 積極的 表現이란 것을 알아준다면 덮어놓고 不當視하고 抑壓만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慾求에 副應하는 方策을 마련하여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心理學者 서울師大敎授)

<민족일보> 1961년 3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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