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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약(强弱)의 단편(斷片)<4월혁명을 증언한다④> 이윤 사월혁명회 대외협력위원장
이윤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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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3.24  17: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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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 4월혁명을 증언한다>

올해는 4월혁명 60주년입니다.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하고”라는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헌법의 첫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4월혁명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합니다. 특히 민족민주운동단체들도 매년 수유리 4·19묘역에서 합동참배식하는 일회성 행사로 알고 있습니다.

사월혁명회(연구소)는 창립선언에서 “4월혁명은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독재와 싸워…독재의 쇠사슬로부터의 해방을 구가하였고, 또한 외세에 의해 분단된 조국의 통일문제를 구체적으로 제기하여 민족자주이념을 올바로 세우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고 천명하였습니다.

4월혁명은 1960년 4월에 완결된 것도 아니며 오늘의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고, 민족통일이 달성되는 그날 비로소 그 이념이 정립되는 현재 진행형의 혁명입니다.

사월혁명회는 올해 4월혁명 60주년을 맞이하여 지난 1월15일 민족민주운동단체들과 함께 “4월혁명60주년행사준비위”를 구성하여 4월혁명의 의의와 과제를 알리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격려 부탁드립니다. /사월혁명회

 

이윤 / 사월혁명회 대외협력위원장

 

머릿글

   
▲ 이윤 사월혁명회 대외협력위원장. [사진제공 - 사월혁명회]

저는 1959년 4월에 청주고등학교에 입학하여 고2로 진급한 1960년 4월에 4월혁명을 맞았습니다. 자유당의 횡포가 기승을 떨치던 시기에 마침 4월 18일 청주시내 전체 학생들이 일어나 3·15부정선거를 규탄하였습니다. 이때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청주농고생들이 학교의 황소를 몰고나온 것입니다.

아래 글은 우리가 도청을 향하다가 경찰에 밀려 인근 와우산에 모여 있을 때의 한 장면을 그 후에 써 본 콩트입니다. 당시에는 지금보다도 신문들의 위력이 대단했는데, 학생들이 여당지와 야당지를 어떻게 보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그러니까 70년 된 원고입니다).

다시 읽어보면 순진하다 못하여 속 좁은 선입관이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판단력을 흐려놓았던 부끄러움이 입니다. 더군다나 ‘조중동’에 겨우 끼어서 수구기득권체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일보’를 그토록 치켜세우다니!

저는 그 이듬해인 고3 시절에 5·16을 겪음으로서 민주주의가 이 나라에서 어떻게 피어났다가 스러졌는가를 생생히 체험한 역사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콩트>

그 날―.
보기만 하여도 저주스럽고 치가 떨리는 경찰의 몽둥이에 쫓기어 와우산 중턱으로 뛰어오른 우리들이었다. 아랫길에서는 경찰백차가 왔다 갔다 하고 경찰들은 총을 메고 몽둥이를 들고 길목에 버티어 있었다. 우리들은 앞에는 기어오르기조차 힘든 가파른 산을 맞대고, 뒤에는 부정과 부패 투성이인 자유당의 앞잡이와 다름없는 경찰들에게 나갈 길을 차단당한 ‘독 안의 쥐’ 같은 처지였다. 이런 처지에서 우리 어린 학생들은 더욱 더 흥분이 되어 격동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우리들 어느 누구의 심장에서나 악을 증오하고 정의를 되찾으려는 진지한 피가 끓고 있었다. 비록 사회의 일부에서는 우리들의 행동을 경솔한 짓이라고 깎아 내리고, 혹자는 민주당의 사주를 받아 벌리는 짓이라고 악의적인 왜곡을 일삼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학생들의 데모 배후에는 공산당이 있다고까지 망발을 일삼는 간신들까지 있었으니 그저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갑자기―.
어떤 사람이 카메라를 들고 우리들이 있는 산언덕으로 달려 올라왔다. 우리들은 직감적으로 그가 우리를 취재하러온 신문기자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막 수첩을 꺼내는 일면 카메라의 핀트를 맞추려고 하였다. 이 때 우리는 그를 제지하면서 무엇보다도 그의 소속사를 물었다. 여당지 기자냐. 그렇지 않으면 야당지 기자냐? 이것이 모든 것에 앞서 우리가 알고 싶은 요점이었다.

지금까지 취재준비에만 열중하고 있던 그 기자는 갑자기 낯을 붉히면서 어쩔 바를 몰라 했다. 어떤 친구가 그에게 “야, 당신 ○○신문(당시의 여당지) 기자지?”라며 시비조로 질문을 던졌다. 그가 우물쭈물 대답을 못하자 모두들 그에게 덤벼들 듯 한 험악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 찰나에 그가 느닷없이 아래쪽 길로 쏜살같이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모두들 코웃음을 치면서 “와아하하”하고 웃어댔다.

정녕 그는 협잡과 독재의 화신인 자유당의 기관지 노릇을 하는 ○○신문사, 아니면 ◇◇신문사의 기자였을 것이다. 나는 문득 웃음을 그치고 달아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기의 직분이요, 의무인 기사취재를 위하여 이곳 현장에 왔을 뿐이었다. 그런데 우리들은 자유당이나 여당지 신문사 대신에 한 나약한 인간을 미워한 것이다. 그에게는 늙은 어머니와 살림을 하는 아내, 그리고 나이 어린 아이들이 있을 것이다. 힘든 취직난의 시대이기에 휴지쪽 같은 종이를 박아내는 여당지 신문사에라도 들어가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야 했을 것이다.

그는 지금 마음속으로 “왜, 나는 민중이 미워하는 자유당 앞잡이 기자가 되었을까?” 하는 알 듯 모를 듯한 문제를 머릿속에 가득히 품고 있을 것이다. 정말 그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우리가 그에게 퍼부었던 비난은 오직 그의 신문사, 또 이를 조종하는 독재자에게 선사해야할 것이 아니겠는가? 여기까지 생각하니 나는 그 기자에 대한 미안함과 동정심이 뼈 속 깊이 저며옴을 어찌할 수 없었다.

이 때―.
또 다른 기자 하나가 손짓을 해가며 우리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올라왔다. 우리들이 아까와 마찬가지로 그의 소속을 묻자 그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자기 가슴에 붙어있는 △△일보의 배지를 가리켰다. 이 사람은 지금 상황에서 가장 활발하게 부패와 독재를 공격하고 있는 그 반골의 야당지 △△일보의 기자인 것이다.

그는 수첩에다 연신 우리의 이야기를 적으며 일동을 한 데 모아놓고 환호성을 지르는 장면을 여러 장 눌러댄 후에 의기양양하게 저 아래로 내려갔다.(이 사진은 후에 4월혁명 기념사진집에 크게 실려 우리들은 모두 영웅이 되어버렸다)

나는 앞 차례의 기자와 뒤 차례의 기자를 대조하여 곰곰 생각해보았다. 부패를 옹호하고 민중의 의거를 왜곡 보도하는 여당지의 기자, 부패를 폭로하고 정의를 부르짖는 야당지의 기자―. 그들의 인간성 자체에는 그리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소속하여있는 신문사의 상이성에 의하여 우리들에게도 차별대우를 받았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앉아 부정의 약함과 정의의 강함을 대조하여 생각하여본다. 정말로 정의는 총칼보다 강하며, 일시적으로 불의가 기승을 부리더라도 기어코 승리하는 것은 정의라는 것을 새삼스레 확인한다. (1960. 8)

 

추기

저는 4월혁명이 일어난 시점을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자승자박이 된 조기 선거가 4·19를 자초하였습니다!

   
▲ 부정으로 얼룩진 조기 선거가 4·19를 자초했다. [자료사진 - 3.15의거기념사업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제헌국회 이래 역대 총선거와 대통령선거는 항상 5월에 치러졌습니다. 1960년의 제4대 대선도 통상적으로 5월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자유당 정권은 농번기를 피한다는 미명 아래 3월로 선거를 앞당겼습니다. 전 해에 최인규가 내무부장관이 되어 사전 선거 준비를 한 여당에 반하여 야당의 선거운동 준비기간을 주지 않으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3·15부정선거가 치러지고 제1차 마산사태를 필두로 한 데모와 소요사태가 전국으로 확산 파급되었습니다. 대학은 방학기간이었고, 중고교는 학년말 시험 때였습니다. 당시 신학년도 개학은 4월 1일이었는데, 대학은 대개가 1~2주를 넘겨 개강을 했습니다. 학기 초의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의 화제 1순위는 단연 3·15부정선거와 마산사태였습니다. 더구나 3월부터 시작된 시위가 고교생 중심이었음에 대학생으로서의 부채의식이 가슴에 차올랐을 것입니다.

이런 사건들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지방에서 서울로, 고교생에서 대학생으로 혁명의 파도가 확산되었습니다. 자유당 정권이야말로 필히 없어져야할 존재였지만, 만일 5월에 선거가 치러졌으면 6월 혁명이 그리 쉽사리 일어날 수 있었을까?

결국 자유당 정권은 자승자박격인 조기 선거를 강행하여 스스로 제 무덤을 파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그리도 타이밍이 절묘하게 맞춰져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되었는지! 말하자면 제 꾀에 제가 속아 넘어간 꼴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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