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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의 창궐과 「기생충」의 성공 사이에서<연재> 주미경의 ‘살구나무를 찾습니다’ (22)
주미경  |  indeej@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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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3.05  14: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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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미경 / 농부

 

살구나무를 찾아서 살구나무 동산을 만들고 있다. 올해는 살구나무 마을을 만들려고 한다. 올해 우리 마을에는 많은 살구나무들이 새로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인데, 나는 그것이 북측 회령 백살구나무이기를 바래서, 그것을 구하려 안타깝게 뛰어다니고 있다.
사라진 살구나무를 찾으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살구나무를 잃어버렸듯이 아주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무엇을 위하여 그 많은 것들을 놓아버린 것일까? 여기 연재할 글들은 살구나무처럼 우리가 잃은 것들, 잊은 것들, 두고 온 것들에 대한 진지한 호명이다. / 필자

 

   
▲ 영화 「기생충」의 포스터


좋은 영화, 나쁜 영화

경칩이 되었는데도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날이 따뜻해 어린 쑥들이 지천으로 고개를 내민 것이 벌써 언제인데, 매년 악마구리 끓듯 소란하던 개구리 울음소리가 올해는 들려오지 않는다. ‘춘래불사춘’이라는 말이 이렇게도 실감나는 해가 있었던가 싶다. 

박쥐인지 실험실인지 근원을 알 수 없는 ‘기생충’의 창궐이 봄을 묻어버린 현장에서 홀로 도드라졌던 것은 영화 「기생충」의 성공이다. 본질적으로 같은 두 기생충의 부상을 바라보며 느낀 깊은 열패감은 필시 얼마 전 푸른 기와집의 오찬에 넘쳐나던 낭자한 웃음이 불쑥 들씌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화에 대해 가끔씩은 생각하고, 더 가끔씩은 쓰기도 하지만, 그것은 다 영화광이나 영화전문가가 아니라 관객으로서의 생각일 뿐이다. 한국영화에 대한 나의 관심은 「반칙왕」에서 시작되어 「올드보이」에서 끝났으니, 관객이라 해도 열렬한 축에는 들지 못한다. 그런데도 좋은 영화와 그저 그런 영화와 나쁜 영화를 가지런히 분별해내는 것은 소설이나 시, 또는 만화를 보고 그것들을 분별하는 습관에서 오는 것이다.

사람과 사회를 지탱해왔던 모든 기준과 경계가 허물어지고 해체되는 ‘포스트모던한’ 시대에 와서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가 어디 있냐, 재미있는 영화와 재미없는 영화가 있을 뿐이라고 말들을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어긋난 믿음조차도 실상은 영화가 앞장서 만들어왔으며, 재미있는 영화와 재미없는 영화가 있듯이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가 있다는 고전적인 인식을 여전히 버리지 않는 쪽에 속한다.

좋은 영화가 어떤 영화인가에 관해서는 간단하게 말하기가 곤란하지만, 나쁜 영화에 대해서 만큼은 별 주저없이 말하게 된다. 나쁜 영화란, 인간이 인간에 대해 갖고 있는 근본적인 믿음을 무너뜨리고 파괴하는 영화라고 말이다. 인간에 대한 믿음의 파괴는 경험된 것이기보다는 조장되고 주입된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기생충」은 어디에 속한 영화일까? ‘기생충’이라는 제목은 어디서 온 것일까?

국내에서도 화제작인데다 국제적으로 큰 상을 두 개나 받은 영화여서 수많은 사람들의 감상과 평과 분석이 찬사와 함께 쏟아졌다. 수수께끼를 풀 듯이, 숨은 그림을 찾아내 듯이 영화 속의 여러가지 소품과 장치들이 내포한 상징과 암시와 비유들을 집어내는 사람들의 예리한 눈이 도처에 가득했다. 하지만 영화를 제대로 솔직하게 자기의 느낌대로 분석해낸 글을 나는 단 하나 보았을 뿐이다.

가난을 다루는 일

영화가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가난’이다. 영화에서 가난은 부분적인 배경이나 주변적인 장치가 아니라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를 깡그리 포괄하는 모든 사건의 핵심 축이다. 영화는 매우 고전적인 방식으로 가난을 부와 노골적으로 대비시킨다. 가난을 등장시킨 영화는 많지만 가난을 이만큼 직접적으로 다룬 영화는 드물 게다. 자수성가의 입지전적 이야기를 열외로 하면, 가난을 다룬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일정한 수준의 사회의식과 문제의식을 내포한다.

그래서 가난을 다루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다. 부자들은 가난을 보고싶지 않고 가난한 자들은 가난을 노출시키고 싶지 않다. 그래서 가난을 다루는 방식은 지나치게 많은 것들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영화를 만든 자의 세계관과 인간관, 그의 철학과 사상은 물론 그가 살아온 궤적에다 그가 포착한 영감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영화에서 가난은 반지하라는 장소, 100% 세트로 만들어졌다는 반지하라는 장소에만 박제처럼 붙박여 있다. 천정에 바짝 올라 붙은 창 밖으로 사람들의 다리만 보이는 곳, 바닥에 있어야 할 양변기가 머리 꼭대기 쪽에 올라앉은 곳, 억수로 내린 비에 사람 목까지 물에 잠기는 곳에 말이다. 

가난은 물건으로 전시되어 있을 뿐, 가난을 보여주어야 할 등장인물들에게는 가난이 붙어있지 않다. 등장인물들은 그 장소를 살아내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장소에 임시로 배치된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래서 고안해낸 것이 냄새일까? 관객들에게는 도저히 맡아지지 않는 냄새? 

   
▲ 조지 오웰 작, 위건부두로 가는 길 표지.


냄새 1

언젠가, 어느 글에선가 썼던 것처럼 후각은 인간의 감각이라기보다 동물의 감각이다. 냄새를 결코 풍길 수 없는 영화는 냄새조차도 으레 시각적으로 처리하게 마련이지만, 숨길 수 없는 가난의 징표로 냄새를 선택하고 그에 천착한 것은 매우 괜찮은 착안이다.

영국사람 에릭 블레어는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이라는 첫 작품을 통해 조지 오웰이라는 작가로 등장한다. 그것은 3년 후 탄광생활 속에서 쓴 「위건부두로 가는 길」로 연결되면서 ‘오웰문학’의 백미를 이룬다. 두 작품 속에는 하층 부랑인들과 노동자들의 밑바닥 생활이 주거지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와 함께 매우 자세하게 빼곡히 서술되어 있다.

오웰이 두 작품에서 빈민들의 주거지 묘사에 그토록 공을 들인 것은 비인간적 사회를 고발하려는 작가적 의무에서 였겠지만, 그것은 1차적으로는 중산층에 속해 있는 그에게 들이닥친 충격이었을 것이다. 빈민들이 사는 집들의 외부와 내부에 대한 오웰의 꼼꼼한 묘사를 보며 우리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시각적 묘사는 아무리 자세해도 평면에 머물러있다. 평면에 머물러있던 묘사가 3차원의 입체로 일어서면서 비로소 읽는 이에게 실감을 전달하는 것은 냄새다. 오웰은 냄새에 대한 묘사를 빠뜨리지 않음으로써 고발문학으로서의 르포르타주를 사실적으로 탄탄하게 완성해냈다. 그의 작품에는 가난에 대한 분노와 가난한 이들에게서 발견한 따뜻함이 짙게 배어들어 있다.

냄새 2

「기생충」의 감독이 ‘냄새’를 떠올린 영감을 오웰에게서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두 가족이 조우하고, 전 가정부 문광이 찍은 동영상으로 인해 위치가 뒤바뀐 거실 장면에서는 다른 짐작이 떠올랐다. 동영상 전송버튼을 가리키며 근세가 말한다. 북의 미사일 발사버튼 같다고. 그러자 문광은 우람한 목소리로 북의 아나운서 흉내를 내며 기고만장에 빠진다.

‘북맹’의 구덩이 속에 들어앉아서 만들어진 이유도 경로도 모른 채, 미사일을 오락영화의 주변적인 소재로 희화화하는 것을 유머라고 믿는 것이겠지만, 그 장면은 냄새에 대한 영감을 「개성공단 사람들」에서 얻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개성공단 사람들」 책은 여러 명의 개성공단 근무자들에 의해 쓰여졌다. 거기에 냄새에 대해 말하는 필자들이 있다. 그들은 냄새 때문에 미칠 뻔했다고 쓴다. 비누나 세제가 없어서, 잘 씻지 못해서, 뭐라 말할 수 없는 냄새가 난다고 말이다. 그런 대목들은 사람이 사람에 대한 혐오감을 표현함에 있어 냄새를 거론하는 것보다 더한 것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것은 사실상 매우 서글픈 장면이다.
냄새에 대해 거론하는 사람이 온 몸으로 보여주는 우월감이란 고작해야 나에겐 그런 냄새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함께 일하면서도 당시 북의 사람들이 혹독한 재제와 재해 속에서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했던 일들에 대해 알지 못한다. 

당시 북의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텃밭을 가꾸고 집집마다 돼지와 토끼를 기르면서 당면한 식량문제를 끝내 스스로 해결했다. 냄새는 자신들의 존엄을 먹을 것 몇 톤과 바꾸지 않으려는 피눈물나는 노력의 흔적이었다. 텃밭을 가꾸고 돼지와 토끼, 염소를 기르는 사람들의 냄새가 혐오의 표적일 수 있는 걸까.

냄새 3

그 필자들이 아낌없이 표현한 냄새에 대한 혐오감을 「기생충」의 감독이 차용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냄새가 경계를 넘나드는 긴장감의 소재로 거듭 사용되는 것을 보면서 김동인의 「태형」을 떠올린 것도 같은 연유이다. 

김동인은 출판법 위반으로 인한 3개월 간의 수형 경험을 소설로 썼다. 그의 감방생활이 하필이면 만세의 함성이 온 나라를 뒤덮었던 1919년이었고, 또 하필이면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항거의 절정이었다. 감방은 만세를 부르다 잡혀온 조선인들로 가득 찼고 마흔 한사람으로 채워진 다섯 평이 못되는 감방의 처절함을 그는 냄새로 표현했다.

사르는 듯한 더위는 등지고 있는 창 밖에서 등을 타치고, 안고 있는 담벽에서 반사하여 가슴을 타치고, 곁에 빽빽이 사람의 열기로 온 몸을 썩인다. 게다가 똥오줌 무르녹는 냄새와 살 썩은 냄새와 옴약내에 매일 수없이 흐르는 땀 썩은 냄새를 합하여, 일종의 독가스를 이룬 무거운 기체는 방에 가라앉아서 환기까지 되지 않는다.

그래도 이들은 만세를 부르다 잡혀온 사람들, 지옥의 감방 안에서도 독립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김동인은 이들을 가리켜, ‘머리에는 독립도 없고, 민족자결도 없고, 자유도 없고, 아내나 아들 부모도 없고, 더위를 깨달을 만한 새로운 신경도 없는’ 자들이라 표현한다. 그리고는 ‘다만 한 가지 바램이 있다면 냉수 한 모금, 나라를 팔고, 고향을 팔고, 친척을 팔고, 뒤에 이를 모든 행복을 희생하여서라도 바꿀 값이 있는 것은 냉수 한 모금’이라는 폭언으로 이들의 바램을 가차없이 막장에 구겨박는다.

소설에서 김동인은 태형 구십도를 언도받고 공소한 칠십 줄의 노인에게, ‘당신 하나 나가면 그만큼 넓어질 자리’를 위해 공소를 포기하고 태형을 감수할 것을 강박한다. 칠십 줄의 노인에게 구십도의 태형은 곧 죽음이다.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그는 노인이 차지한 2척 평방을 40명으로 나눈 10평방센티, 손바닥 반도 안 되는 자리를 비워내기 위한 이기적이고도 추악한 욕망을 관철시킨다.

한 평론가는 김동인의 「태형」을 가리켜 ‘투항과 변절의 서곡’이라 일렀거니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바라보며 「태형」에 뒤이어 같은 작가의 소설 「감자」가 떠오른 것도 과연 우연이었겠나?

같은 것과 다른 것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반복 주입되는 냄새에 관한 암시들로 인해 연달아 떠오른 세 가지의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냄새를 맡는 것은 외부자다. 내부자는 냄새를 맡아내지도 냄새를 문제삼지도 않는다. 또한 냄새를 맡는 세 사람은 똑같이 중산층이거나 인텔리이고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은 빈자이거나 민중이다.

그러나 세 이야기를 서술하는 주체의 입장은 매우 다르다. 오웰이 외부자로서 맡은 냄새에 대해 표한 것은 연민과 연대다. 반면 「개성공단 사람들」의 필자와 김동인이 냄새에 대해 보내는 것은 혐오와 경멸이다. 「기생충」의 감독이 냄새에 대해 영화에서 표시하는 관점은 어느 쪽일까?

나는 영화의 어디쯤에서 그것이 드러날지 내내 궁금했다. 그 궁금증이 영화가 곳곳에서 보여주는 모든 불편함을 참고 참으며 마침내 끝장을 보도록 만들어 주었다. 내가 이해한 영화는 냉소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은 이 영화를 일러 ‘블랙코미디’라고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블랙코미디는 눈물과 웃음으로 버무려진 따뜻한 것이다. 그것은 채플린을 떠올릴 수 있다면 금방 이해되는 것이다. 굳이 한정 짓자면 이 영화는 차가운 코미디다.

영화를 만든 감독은, 기택과 근세가 처한 빈궁의 연유를 IMF나 카드대란이나 금융위기가 아닌 ‘대만 카스테라’로 설정함으로써 영화에서 시대를 제거했다. 그래서 영화의 과거는 텅 비었고, 현재는 창 앞에 매달린 양말 건조대처럼 뿌리도 맥락도 없는 허공이며, 미래는 오로지 ‘돈’만이 만든다는 어긋난 공상으로 달려간다. 그래서 영화는 SF적인 공상영화처럼 느껴지게 된다. ‘가난과 부’라는 가장 잔인하고도 적나라한 현실을 다루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김인성 작, 두 얼굴의 네이버 표지.


깐느가 원하는 것

김인성이라는 작가가 있다. 나는 「두 얼굴의 네이버」라는 책으로 그를 알게 되었지만, 그는 작가로 불리기보다 우리나라 최초로 리눅스 시스템을 구축한 시스템 엔지니어, IT전문가, 디지털 포렌식 전문가로 불린다. 그는 오랫동안 수많은 글을 블로그에 써왔는데, 나는 그의 글에서 종종 번뜩이는 예지를 발견하곤 한다. 「기생충」 영화를 제대로 솔직하게 자기의 관점대로 분석해낸 단 하나의 글을 나는 그의 블로그에서 보았다.

그는 「기생충」 영화가 ‘깐느’의 큰 상을 거머쥐었을 때 그 글을 썼다. 그의 글은 대체로 재미있고 종횡무진한 재기와 촌철살인으로 충만하지만, 내가 그 글에 주목한 건 깐느 영화제 수상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 때문이다. 아무 발설함 없이 머리 속에 차곡차곡 저장해왔던 생각과 꼭 같은 생각을 아무 관계도 없는 다른 사람의 머리 속에서 발견할 때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이 크다. 바로 그 대목이었다.

김인성 작가는 「기생충」 영화를 유럽인의 시각과 관점에 맞추어진 ‘백인취향의 영화’라 말한다. 말하자면 백인들이 좋아하는 아시아 영화라는 말이다. 그의 말을 옮겨보자.

내가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꺈느가 이 영화에 주목함으로써 봉준호의 B급스러운 감각이 더욱 더 뒤틀리게 될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 꺈느의 유럽 귀족들은 정통적으로 아시아 영화에서 뒤틀리고 그로테스트한 요소들에 엄청난 집착을 해 왔다. 올드보이가 그토록 상찬을 받은 이유는 근친상간이 주요한 양념으로 곁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 기생충을 한 사회의 계급 구조에 대한 풍자라고 읽는 것이 가능하다면 좀 더 대상을 넓혀 서구 사회와 그들의 식민지 국가와의 관계에 대한 영화로 볼 수도 있다. 유럽에 무단으로 침범해 들어오는 난민들, 경제적인 침공을 일삼는 아시아인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공포로 읽을 수도 있다. 

착하고 선한 유럽을 더럽히는 아랍 난민들, 유럽 시장을 위협하는 아시아 상품들, 어떤 악성 코드가 심어져 있을지도 모를 화웨이 장비들이 싸다는 이유로 유럽을 초토화하고 있는 중이다. 

때문에 그들이 아시아의 영화에서 보고자 하는 것은, 아시아인들은 도덕률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인륜을 파괴하며 돈 밖에 모르는 인종들임을 아시아인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며, (2018년 꺈느 황금종려상, 일본 영화, 어느 가족),

…. 그들은 아시아 인종들이 아무리 기어올라오더라도 온몸에서 내뿜는 더러운 냄새는 결코 없앨 수 없는 열등한 존재라는 사실을 아시아인의 입을 통해 확인받고 싶어서 기생충에게 최고상을 주었을 것이다.

그들은 아시아 영화에서 기가 막히게 동성애와 근친상간 코드를 발견함으로써 유럽의 퇴폐적인 전통이 인류의 보편적인 문화임을 인정받으려는 욕구를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그들이 근친상간 코드를 발견하는 것일까? 그들을 위해 아시아의 예술 영화인들이 근친 상간을 소재로 삼고 있는 것일까? 나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꺈느가 이런 그로테스크한 부분에 열광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봉준호의 영화는 불편함을 특징으로 한다. 봉준호의 영화는 악취미가 가득함에도 낄낄거리며 볼 수 있는 재기발랄하고 재미있는 영화이다. 하지만 내가 불편한 것은 또다시 이런 불편함을 굳이 꺈느가 선택했다는 점이다. 꺈느 이후 봉준호의 영화는 어떻게 변모할까? 나는 봉준호의 영화가 꺈느의 귀족 노친네들의 노리개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당신이 정상적인 아시아인이라면 꺈느가 선택한 아시아 영화들에게서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정상이다. 봉준호 영화 또한 마찬가지이다. 당신이 정상적인 사회인이라면 봉준호 영화를 불편해하지 않고 즐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출처: https://minix.tistory.com/795 [미닉스의 작은 이야기들]

내가 이러한 생각을 했던 건 「올드보이」에서였고, 거기에서 한국영화에 대한 나의 관심은 끝장이 났으며, 아마도 ‘가망없다’는 생각까지 했던 것 같다. 「기생충」이 ‘깐느’에 더해 ‘아카데미’의 선택까지 받은 영화가 되었으니, 김인성 작가의 바램은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다.

반전, 그리고 죽음을 읽는 방법

그는 시종일관 「기생충」 영화를 불편함으로 가득한 B급 오락영화로 이야기하지만, 나는 좀 다른 것을 봤다. 그것이 제거된 시대와, 개연성 없는 수많은 작위적인 설정과, 관객을 조롱하는 특별한 악취미들로 점철된 영화라 해도, 그 모든 것을 뒤엎고 ‘좋은 영화’의 반열에 진입할 수 있는 기회는 분명 있었다.

클라이막스였다. 정원에서 벌어진 생일파티가 순식간에 죽고 죽이는 칼부림으로 바뀌는 장면에서 감독은 그 기회를 잡았다. 모르긴 해도, 죽고 죽이는 그 관계의 방정식은 매우 정교하게 설계된 것이라 여겨진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첫번째 죽음, 근세는 기택의 딸인 기정을 죽인다. 기정은 가난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 오히려 커다란 저택과 부에 어울리는 인물, 기정은 가난에서 탈출하여 부의 세계로의 진입로를 열어주는 인물이다. 그런 기정의 죽음은 진입로의 차단, 욕망의 좌절을 의미한다.

두 번째 죽음, 기정을 죽인 근세가 충숙의 손에 죽는다. 근세는 비루하고 저열한 현실안주형의 인물,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 말며, 세 끼가 제공되는 한 언제까지라도 지하에서 살 용의가 있는 인물, 일용할 양식을 제공하는 분에게는 무조건적인 최고의 존경심을 지녀야한다고 믿는 인물이다. 

충숙은 온통 기괴하고 뒤틀린 등장인물 속에서 유일하게 씩씩하고 정상적이며, 지하의 부부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 줄 생각까지 하는 따뜻한 체온을 가진 인물, 따라서 충숙이 근세를 죽이는 것은 딸을 살해한데 대한 복수심의 자연스런 폭발이고 가족을 지키고자 하는 모성의 출현이다.

세 번째 죽음, 근세의 등 밑에 깔린 차열쇠를 집으며 냄새에 코를 싸쥐는 박 사장을 기택이 죽인다. 여기가 바로 기회다. 영화를 통틀어 무색무취한 기택이라는 인물이 근사하게 채색되고 모든 뒤틀린 관계가 한 방에 바로잡히는 순간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표하는 혐오와 경멸이란, 때론 그것이 죽을 죄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순간, 자신이 서있는 위치와 경멸받지 않아야 할 자신의 존엄을 자각한 순간, 함께여야 할 사람들 사이의 어리석은 적대를 청산하고 순식간에 연대를 회복한 순간인 것이다.

또 한번의 반전, 그리고 추락

그러나 영화를 만든 감독은 그 훌륭한 반전의 순간을 다시 뒤집음으로써 완벽하게 기회를 놓쳤다. 그것은 얄팍한 계산적 심리와 흔들리는 세태영합의 단면을 보여주는 하나의 ‘설정’과, 깊이 있는 생각의 부재를 드러내는 몇 줄의 ‘문장’이 가져온 결과다.

감독은 흉흉한 저택이 정상화되는 역할을 서양인에게 내주었다. 그것으로 ‘백인취향의 영화’라는 김인성 작가의 냉정한 규정은 200%의 설득력과 합리성을 획득했다. 요새 흔히 하는 말로, 그저 많은 모퉁이 중 하나에 불과할 것 같은 하나의 설정이 감독의 심층을 보여주는 중요한 상징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했다면 무능한 것이고 알고도 일부러 했다면 오염된 것이다.

그리고 아들 기우의 편지다. 그는 아버지의 신호를 알아보고 한 장의 편지를 쓴다. “근본적인 계획… 돈을 벌겠다 아주 많이… 그래서 집을 사겠다…” 지하의 계단을 올라온 아버지가 정원 앞에서 아들과 포옹하는 공상… 그리고 다시 반지하방, 비는 눈으로 바뀌었지만 양말 건조대는 여전히 창 앞에서 흔들거리고,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영화를 이렇게 마무리한다는 것이 나에겐 그저 놀랍게만 느껴진다.

‘돈을 벌어 집을 사겠다’는 문장만 아니었다면 정원에 펼쳐졌던 놀라운 반전의 의미는 그대로 살아있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올 자리를 우리 속에 마련하겠다’는 문장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면, 2시간 내내 늘어놓는 온갖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가난을 벼려 부조리한 사회를 향해 들이대는 날카로운 송곳이 되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기차게도 ‘집을 사겠다’고 끝맺음으로써 영화는 깊은 허무의 늪으로 추락했다. 영화는 가난을 조롱하고 경멸하며 비루함의 끝판으로 몰고갔다. 그래서 정원의 활극은 최서해의 「홍염」이 아니라 김동인의 「감자」로 전락했다.

기생충의 창궐과 기생충의 성공

따라서 내내 궁금하던 냄새에 관한 감독의 관점도 드러났다 그것은 오웰의 관점이 아니라 김동인의 관점, 개성공단 사람들의 필자가 가진 혐오과 경멸의 관점인 것이다. 제목이 왜 ‘기생충’인지도 판명이 났다. 누가 기생충인지, 왜 기생충인지, 사람들은 제목에 깔린 복선을 캐내려 설왕설래했지만 복선은 없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지언정 부자집에 취직해 노동으로 먹고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영화는 ‘기생충’이라 호명한 것이다. 결국, ‘돈이다, 돈 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확인하기 위해 관객들은 2시간을 넘게 참아야 하는 것이다.

중국발이라 알려진 기생충의 창궐은 심각하고도 공포스러운 일이다. 사람이 사람을 꺼리고, 사람들의 협력에 의해 유지되는 여러가지 사회적 기능들이 정지하고, 먹고사는 일들이 어려움에 처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라질 때가 온다. 사라지지 않는 것은 「기생충」의 성공이다. 

상은 부추김이다. 그 부추김은 그런 영화를, 그런 아류의 영화들을 계속 줄기차게 만들어내라는 무시무시한 선동이다. 그래서 「기생충」의 성공은 어쩌면 기생충의 창궐보다 더 공포스런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봄이 오지 않는 봄에 떠오르는 우울한 생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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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보기(1)
굽은소나무 (qnseksrmrqhr) 2020-03-06 11:19:04
기생충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늘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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