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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혁명 완성은 완전한 민족자주통일의 날이다<4월혁명을 증언한다①> 전덕용 사월혁명회 공동의장
전덕용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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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3.03  14:4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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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 4월혁명을 증언한다>

올해는 4월혁명 60주년입니다.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하고”라는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헌법의 첫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4월혁명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합니다. 특히 민족민주운동단체들도 매년 수유리 4·19묘역에서 합동참배식하는 일회성 행사로 알고 있습니다.

사월혁명회(연구소)는 창립선언에서 “4월혁명은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독재와 싸워…독재의 쇠사슬로부터의 해방을 구가하였고, 또한 외세에 의해 분단된 조국의 통일문제를 구체적으로 제기하여 민족자주이념을 올바로 세우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고 천명하였습니다.

4월혁명은 1960년 4월에 완결된 것도 아니며 오늘의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고, 민족통일이 달성되는 그날 비로소 그 이념이 정립되는 현재 진행형의 혁명입니다.

사월혁명회는 올해 4월혁명 60주년을 맞이하여 지난 1월15일 민족민주운동단체들과 함께 “4월혁명60주년행사준비위”를 구성하여 4월혁명의 의의와 과제를 알리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격려 부탁드립니다. /사월혁명회



전덕용 / 사월혁명회 공동의장(씨알의소리 전 창간편집장, 소설가)

 

   
▲ 전덕용 사월혁명회 공동의장. [사진제공-사월혁명회]

그동안 너무 많은 세월이 흘렀다.

당시 20대의 시퍼런 청년이었던 4월의 주역들은 백발이 성성한 80대 노인이 되었다. 반세기를 훌쩍 지나 두세대가 이어 태어난 세월이 지난 것이다.

흔히들 4월혁명을 미완의 혁명이라 말한다.

그것은 혁명의 주체가 학생 신분이었고, 정권을 장악 묵은 사회제도를 혁파 개혁하고, 새로운 정책을 시행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음으로는 혁명완수를 위임받은 허정 과도내각이나 민주당의 장면 정권이, 무능하고 혁명의지가 전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세 번째는 박정희 군사 파쇼정권의 4월혁명 왜곡, 폄하, 말살계획에 의한 철저한 억압 탄압의 결과 현상이었다.

사실 그 내용은 이런 내부적 요인이 아니고 대외적인 전혀 다른데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미·소의 첨예한 동서냉전 구조 아래서, 미국의 세계 지배전략에 의한, 대 한반도 정책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4월혁명의 본질을 우리는 깊이 이해하고 직시해야 한다.

겉으로 드러난 구호는, 3·15부정선거 규탄, 이승만 정권 타도, 부정부패 일소 등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남한사회의 모든 바닥민중은 말할 것이 없고, 곧장 학생들 속에서 민족분단문제가 터져 나왔다.

외세 지배 반대와 민족자주통일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드높았던 것이다.

그 동안 금기시 되었던 4·3제주민중항쟁과 여·순봉기, 거창 함평양민학살사건 등이 새롭게 조명되었다.

   
▲ ‘남북학생회담’ 환영 궐기대회를 마친 5만 군중이 서울운동장을 출발, 을지로를 향해 시위에 나서고 있다.(1961.5.13.) [자료사진-사월혁명회]

남북문제에 있어선, 북진통일이나 멸공 승공논리가 아닌, 남북협상, 기자교류, 남북학생면담, 국제경기 단일팀 구성참가 주장이 거세게 일고 있었다.

동학농민혁명 때도 마찬가지였다.

농정개혁이나 신분타파, 탐관오리 징치는 민중봉기의 기폭제가 되었지만 동학농민혁명의 진정한 목표점은, 척양척왜(斥洋斥倭) 보국안민(輔國安民)이었다.

4월혁명의 경우도 혁명의 정점, 진정한 완성점은 외세축출, 민족자주평화통일이었던 것이다. 완전한 민족자주통일, 독립국가 건설이야 말로, 4월혁명이 시도한 진정한 혁명완수의 도달점이었던 것이다.

우리민족의 완전한 자주통일독립국가 건설은, 아메리카 제국주의의 세계정복 야욕에 정면 반대가 되는 것이다. 미국이 어떤 나라인데 이것을 용인하겠는가. 한반도의 자주통일국가 건설은 미국의 대아시아 방어선이 마리아나군도, 괌, 사이판 선까지의 후퇴를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호주, 뉴질랜드가 위협을 받고 하와이가 코앞이 되는 것이다. 미국본토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것을, 서방측 세계전략의 최악의 씨나리오라고 한다. 미국이 악착같이 한반도의 통일독립을 반대하고 75년 동안 남한을 틀어쥐고 있는 속셈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런 판국에 60년대 초반 서슬 퍼런 냉전구도에서 4월혁명의 완수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 이었다. 혁명의 주역인 학생세력이 무장을 갖추고 정권을 장악, 혁명 완수 사업에 착수했더라도, 국군의 작전통수권을 틀어쥐고 있는 미국군대가 이를 그대로 둘리가 없는 것이다. 그들이 사전에 점 찍어놓은 박정희 같은 외세 충성파들을 동원, 학생 혁명정권을 붕괴시키고 말았을 것은 빤한 것이다.

외세에 의해 혁명완수가 좌절된 것은 근세에 들어 갑신정변과 갑오동학농민혁명이 대표적인 예였다. 4월혁명 역시 표면으로 나타난 유형은 달랐지만, 사실 내용은 외세에 의한 혁명의 좌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정임시내각과 장면 민주당정권은 외세를 배격하고 혁명을 완수 할 힘도 의지도 없었다. 이들에게는 비무장으로 정권을 잡을 수 없었던 학생들을 대신, 4월혁명을 완수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주어져 있었다.

지금이라고 다를 것도 없지만, 4·19당시의 한국군대는 그 지휘권이 철저하게 미주둔군사령관 휘하에 직속되어 있었다. 미국이 허정임시내각과 장면 정권을 뒷조종하는 것도 모자라, 직접 수하의 군대를 동원 쿠데타를 일으킨 걸 보더라도 이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4월26일 이승만의 하야성명이 나오기 30여분 전, 매카나기 미국대사가 세단을 타고, 학생리더의 길 안내를 받으며, 데모 군중사이를 뚫고 경무대로 직행했다. 매카나기 대사가 들어간 10여분 만에 용산기지를 출발한 헬리콥터 한 대가 데모군중의 머리 위를 날아 경무대로 갔다. 미주둔군사령관 메구르더 대장이 타고 있었다.

이후 외신들은 4·19학생혁명을 ‘매카나기 혁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국내 언론들은 하나같이 4·19를 학생혁명으로 불렀다. 그땐 학생, 대학생신분이 사회적으로 특별한 계층에 속했다. 6·25전쟁 때도 학생은 군대가 면제 될 정도였다. 이 신분 때문에 가짜 대학생이 문제가 되던 시절이었다.

이런 학생우대 현상에 기가 죽어지내던 불우청소년들이, 그해 4월혁명 광장에서 많은 희생을 치렀다. 이들은 이름 없는 전사가 되어 혁명의 최일선에서 전투복의 기동경찰대와 맞섰다. 이승만 타도를 절규하며 민주제단에 거룩한 피를 뿌렸던 것이다.

효자동 종점, 경무대 앞 경찰저지선을 뚫을 때에도 학생이 아닌 작업복의 청장년이 있었다. 쓰러진 시체를 안고 통곡하는데도, 피 흘리는 부상자를 후송하는데도 이들이 있었다. 구두닦이, 넝마주이, 부랑아, 거리의 청소년들이 앞장을 서서 돌을 던지고, 파출소를 습격하고, 몽둥이를 들고 불자동차를 탈취했다. 기름통을 들고 반공회관, 서울신문을 불태우는데도 이들이 있었다.

죽어서도 이들은 학생신분이 아닌 것이 부끄러워 수유리 혁명묘지 맨 뒷자리에 누어있다. 이름없는 4월전사의 묘역에 말이다.

5.18광주봉기의 암매장 실체가 아직도 미궁 속에 있다. 4·19당시 야간데모엔 더 많은 거리의 청소년들이 극렬하게 데모를 주도하였다. 이들 중 상당수의 희생자가 있었다. 해마다 수유리 무명전사 묘역에 서면 죄송스럽고 허전한 마음을 금치 못한다. 왠지 쓸쓸하고 뭐가 모자란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날 총탄에 쓰러진 부랑청소년들의 유해가 제대로 수습되었는지, 쓰러져 죽는 것은 목격하였으나 이 세월이 흐르도록 어떻게 확인할 길이 없었다.

이기붕 일가의 죽음도 세상 사람들의 동정을 살 수 있는 자살극으로만 보도되었다. 비상계엄하의 그 와중에서 그것도 폐쇄된 경무대 경내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사법검사의 검시, 제대로 된 현장검증이 이루어졌는지, 당시의 언론이 제대로 확인 보도를 할 수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국가유공단체, 일제강점기 독립유격투쟁에 관한 사항에서는 옥석을 가리기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천하의 김원봉 사령관의 부관비서가 밀정이었다니, 하늘이나 알지 그 속을 어찌 알겠는가.

4월혁명유공단체도 마찬가지이다. 과거 군사정권하에서 4월혁명정신에 반하는 반민주행위가 있었던 걸 기억한다. 처음 출발은 좋았으나 나중 어용단체화 되어 권력에 굴종하는 모습은, 매우 부끄럽고 치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날 경찰이 쏜 총알은 직선으로 날았다.

비겁해서 뒤쳐져서 안 죽은 것이 아니고, 4월전사로서 부끄럽지 않게 싸웠으나 살아남은 동지들도 있었다. 그들은 60여 년 동안 일생을 혁명전사로서, 4월의 젊은 사자로서 긍지와 지조를 잃지 않고 군사 정권에 매수되지도 않았다. 중앙정보부의 회유, 협박, 체포 고문, 감옥살이에도 굴하지 않았다.

이런 동지들에게서 있어선 아직도 4월혁명은 현재진행형이고 미완의 혁명이 분명하다. 이들은 아직도 팔팔하게 살아서 시퍼렇게 혁명혼을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

외세를 몰아내고 민족자주평화통일, 완전한 통일 독립국가 건설이 이루어지는 날, 아직 살아남은 4월전사들은 혁명완수의 만세를 소리높이 외칠 것이다.

4월혁명 만세!
4월혁명 만만세!


(수정, 4월 6일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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