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일 / 전 한신대학교 교수

 

몇 년 전에 일본의 한 교수가 한국은 앞으로 세 가지 문제로 나라가 망할 수도 흥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 세 가지는 통일, 부동산, 그리고 기독교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 세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그리고 동시에 직면하고 있다. 통일 문제는 풀리지 않고, 부동산 문제 역시 최고조의 수준으로 열악해지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인구의 절반에 육박하는 기독교의 안팎은 신천지 문제로 사정이 최악이다. 유례없는 교회 문을 닫고 주일 예배마저 보지 못할 형국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자기를 경배하는 예배마저 보지 못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말인가? 그러면, 기독교의 신은 절대적인 무소부재 전지전능한 분이 아니라는 말인가? 기독교 신학에서 이런 주제를 다루는 것을 두고 소위 ‘신정론theodicy’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신은 과연 의로운가?” 유대인들은 독가스실에서 죽어가면서 전지전능하신 신개념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를 다룬 소설이 ‘밤Night’이 아니던가? 한국의 기독교는 지금 코로나 앞에서 신천지는 이단이야 우리와 달라 하고 침을 뱉고 면피할 수만은 없는, 기독교 역사상 그 어떤 유례가 없었던 신정론의 문제 앞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그 답이 쉽지 않을 것이다. 교회는 지금 성소유자 문제로 목을 매고 있지만, 신은 왜 이 코로나를 막지 못하고 교회가 스스로 문을 닫고 예배까지 볼 수 없는가에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전지전능한 신이 있다면 말이다. 한번 예배에 수십억의 헌금이 들어오는 대형 교회들은 온라인을 통해 헌금을 하라고 독려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앞으로 기독교가 한국의 운명을 판가름한다고 할 때에, 그 이유는 바로 이 지경에 온라인 헌금까지 걷겠다는 이 황금 우상 숭배주의 때문일 것이다.

기성교회는 신천지에 손가락질을 하면서 우리는 신천지가 아니니깐 하지만 유사 한국 기독교 종파가 왜 이렇게 독버섯처럼 생기고 퍼져 나가는가? 그것은 바로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그러한 신관 그 자체 때문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이렇게 절대자로 자처할 때에 신천지와 오대양 등 그 이름을 헤아릴 수 없는 코로나 종교가 바이러스처럼 생기고 퍼질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전진전능하다고 할 때에 예비 교주는 얼마든지 양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천지 교주 이만희는 ‘코로나는 마귀의 짓’이라고 했다. 신천지가 잘되는 것을 보고 마귀가 시기한 것이라고 했다. 신정론 즉, 과연 신은 정의로운가? 나아가 신은 과연 전지전능 무소부재한가 라는 질문 앞에 기독교는 그 내놓은 답 가운데 하나가 인간의 불행 즉, 오늘날 코로나 같은 괴질은 모두 ‘악마의 짓’이란 그것이 답이다. 그래서 중세기 때 괴질이 돌자 마녀들이 괴질을 불러들인 것이라 하여 마녀들을 잡아 사형에 처한 적도 있었다. 가장 둘러대기 쉬운 신정론에 대한 기독교의 해답이다. 그렇다면 전지전능한 신이 왜 이 마귀를 퇴치하지 못하고 교회 문까지 잠그고 예배마저 볼 수 없는가? 그렇다면 교회는 자기들의 신이 마귀보다 힘이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 되지 않는가?

신의 화신으로 자처하는 이만희가 만약에 구속까지 된다면 신천지 사람들은 자기들의 교주가 마귀보다 힘이 모자란 자로 여기게 될 것이고, 교리 상에 큰 자기모순에 직면할 것이다. 이런 신흥 유사 종교들이 직면하는 가장 큰 고민이 여기에 있다. 영생교 교주 조희성은 죽지 않고 영생한다고 했는데 죽었고 이만희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영생교는 어떻게 되었는가?

마귀설의 이러한 한계와 자기모순 때문에 신학자들이 내놓은 대타 설은 ‘영혼 성취설’이다. 이 괴질에 걸리는 것은 결국 인간의 심령과 영혼을 훈련하고 단련하기 위한 신의 의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예수도 불행의 원인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 영혼 성취설은 인간이 불행의 터널을 무사히 통과하고 살아남았을 때에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질병 끝에 죽음을 겪게 된다면 성취설이 갖는 의의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유대인들이 가스실 속에서 이것이 영혼 성취를 위한 것이라고 할 때에 그런 신을 과연 얼마나 받아드릴 수 있을까? 영혼 성취설을 강조하는 구약의 욥기는 그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처자식을 열이나 잃고, 욥 자신마저도 악질에 고투를 겪지만 끝내는 욥의 영혼이 더 강건해지고 물질적 축복도 열배나 더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성취설은 문제가 없는가?

과연 지금 코로나가 창궐하는 이 시점에서 기독교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고민을 하고 있는가? 아마도 왜 하필이면 자기들이 미워하는 신천지인가? 틀림없는 하나님의 징벌이라 할 것인가? 공지영이 말한 대로 왜 하필이면 특정지역인가로 관심을 돌릴 것인가?

기독교 신학은 신정론에 대해 이상 내놓은 답에서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앞으로 말할 마지막 해석에 대해선 받아드리려 하지 않는다. 소설 ‘밤’(노벨상 수상)에서 저자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왜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고난을 주느냐고 하자, 아버지는 ‘아들아 지금 끌려가는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했다. 예수가 신의 아들이란 사실을 받아드리려 하지 않던 유대교가 신 자신이 십자가를 졌다고 한 것이다. 공동 번역(1930년대)에 표준 번역으로 바뀔 때(1994년경)에, 이사야 53장 3절에 ‘하나님이 우리의 병을 알고(know) 있고’라고 하자, 구약학자들이 원문대로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앓고(sick) 있고’라고 바꾸려 했지만, 결국 전자의 잘못된 번역을 그대로 쓸 수밖에 없게 되었고, 표준 번역은 이 하나로 교회에서 지금 거의 사용되지 못하고 있다. 성경의 원문 번역마저 거부하면서 ‘전지전능’을 강조하는 한국 기독교는 코로나 사태로 안녕하지 못하게 되었다. 성일이라는 안식일마저 지키지 못하게 될 정도로 참으로 꼴사납게 되었다. 그래도 전지전능을 설교할 것인가? 가장 돈벌이 좋은 설교 주제이긴 하지만 더 이상 아니다. 코로나가 그 경종을 울렸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코로나를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은가? 하나님이 코로나를 ‘앓고 있다’고 하는 게 옳은가? 아마도 기독교 그리고 한국 기독교는 종말의 날까지 결코 신 자신이 앓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이런 주장을 계속하는 한 신천지 같은 집단이 끊임없이 생겨나는 것을 결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신의 전지전능이 코로나 해결의 답인 동시에 원인이 될 것이다. 신은 선한데 악한 마귀의 짓으로 마귀에게 책임 전가를 하면 될 것이다. 그러면 그런 마귀는 왜 전지전능한 자가 처치하지 못하는가? 끝없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악순환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코로나 때문에 한국 교회는 엄청난 헌금의 유혹 앞에 많은 갈등을 겪게 되었다. 헌금을 온라인으로 결제하라고? 이 코로나가 앞으로 한국 대형 교회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하는 동시에 온라인 교회가 아니면 교회 자체가 아예 지상에서 영원으로 사라지게 하는 계기가 된다면 이것이야 말로 신이 한국 땅에 살아 있다는 증명이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기독교의 교리 체계, 즉 전지전능 무소부재, 그리고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란 천재적인 글귀 앞에 참된 신앙이 아닌 공포에 질려 오직 천당 가는 목적만을 위해 교회를 나가고 수십억의 헌금을 매 주마다 쏟아 붓고 있다.

전지전능한 신은 전지전능하다는 신흥 교주를 끝없이 생산해 낼 것이고, 그러는 한, 앞으로 한국 사회는 코로나 이상의 즉, 나라를 뒤흔들어 존재마저 사라지게 하는 지경이 되게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의 미래를 잘되게도 못되게도 하는 데 ‘기독교’가 손꼽히는 이유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과 같은 교회는 더 이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적어도 신이 인간의 질병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고, 신이 인간의 질병을 앓고 있다는 명제 앞에 기독교가 근본적이 변신을 해야 한다.

이것이 이사야 같은 예언자들의 정신이고 예수 자신의 정신이었다. 도대체 지금같이 축복 위주가 신앙의 본질이라면 가장 복 없이 태어난 존재가 바로 예수 자신일 것이다. 그래서 축복 신앙은 예수 자신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예수는 인간의 질병을 알고 고친 의사가 아니고 인간의 질병을 앓았던 분이시다. 이 단순하고 간단한 사실 하나만이라도 코로나가 던져 주는 교훈이었으면 한다.

지금, 코로나는 거의 신에 가까운 전지전능한 힘을 가지고 사방에 인간보다 더 지혜롭게 대처하면서 퍼져 나가고 있다. 새로운 백신을 아무리 개발해야 바이러스는 인간의 지적 수준을 항상 능가하고 마귀가 만약에 인격적 존재라면 지금 인간들이 대처하는 방식과 계획마저 먼저 알고 그것에 대처하는 것 같다. 여기서 마귀가 인격체같이 여겨지는 이유가 생기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바이러스 병균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신약 개발, 격리, 봉쇄 과연 이것이 답인가?

지금 야당은 호기라도 만난 듯이 정부를 공격하고 있고, 정치적 진영 논리는 증오감에 가득 차 정부를 공격한다. “나는 아직 확진이 아니다”는 안도감에 사로잡혀 인간 마음이 점점 소시민적으로 왜소해져 가고 있다. 이것이 답이 아니다. 바이러스를 준인격체, 아니 인간 이상으로 인간의 말을 지금 다 알아 듣고 있고, 미래 대처 능력마저 인간을 뛰어 넘는다고 할 때에, 우리 인간 사회를 바라보는 바이러스라는 존재는 인간 사회의 약점을 최대한 파고 들 것이다. 그 취약점이란 서로 증오와 불신과 배신일 것이다. 그렇다면 답이 나왔다. 우리 인간들은 바이러스라는 인격체에 대처하기 위해 ‘서로 사랑해야’ 한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유교의 인仁, 불교의 자비慈悲, 그 무엇이든 서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이란 결코 어느 종교의 경구일 수도 없고 윤리일 수도 없다. 사랑이란 생존survival을 위한 유일한 수단이다. 그래서 사랑愛-사람人-살肉은 같은 어원을 갖는다.

서양에서 받아들인 신학과 신앙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이 차제에 근본에서부터 바꾸어야 한다. 닫힌 문이 다시 열릴 것이다. 구태의연한 신학을 가지고 설교하고 아멘 하는 이상 기독교는 이 나라를 통째로 망치게 하는 제일 원인이 될 것이다.

우리는 다시금 배달민족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이 차제에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가 봉쇄하려 한 것이 어제 같은데, 우리가 지금 가는 데마다 봉쇄당하고 있다. 베트남 같은 나라는 지금 아마도 월남파병 그리고 자기들의 딸들이 한국에 시집 와 당한 수모를 모두 생각하며 앙갚음이나 하듯이 유별나게 봉쇄 조치를 취하고 있다. 우리가 만약에 홍익인간 정신으로 살았고 외교를 했더라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겠는가?

배달 단군 민족은 이번 이 차제에 우리가 한번 홍익인간 정신으로 전 세계를 일깨워야 할 것이다. 여기서 증오와 미움으로 일관하는 한 병난 것 이상으로 모든 것을 다 잃고 말 것이다.  

 

(수정-4월2일 오후 4시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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