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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과 ‘민생단’<기고> 김상일 전 한신대 철학과 교수
김상일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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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2.18  11:5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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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1932년 일제는 동만 일대에서 조선인들의 민생을 도모한다는 의미의 ‘민생단’이란 단체를 조직하였다. 그러자 조선의 식자들은 쌍수로 환영했지만, 중국인들은 조선 사람들을 일본에 기생하는 말 그대로 기생충과 같은 존재 ‘소귀자’라고 보았다. 조선을 일제의 앞잡이로 보기 시작한 중국 공산당은 조선 사람들을 수천 명 잡아 죽이는 사태가 벌어졌다. 오늘 기생충을 반지하에 살고 있는 계급이라고 할 때에 우리 민족 전체가 이런 기생충 취급을 받고 숙주 일본의 앞잡이란 처지에 처한 적이 있다. 샌프란시스코 평화 회담에 우리가 참가하지 못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조선을 일본의 앞잡이로 연합군에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민생단’과 ‘기생충’을 겹쳐 본다.

신자유주의 후유증으로서의 ‘기생충’

자기 영화에 대해, 봉준호 감독은 영화 비평잡지 필로(Filo)와의 면담에서 “극과 극의 삶을 살아가는 두 가족의 만남이 빚어낸 이야기로서, 공생이 어려워진 각박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풍자한 영화”, “인물들이 의도했건 아니건 타인의 사생활을 엿보게 되고 거기에 개입함으로써 일어나는 비극을 담은 영화”라고 했다. 이 말이 영화에 대한 감독이 가지고 있는 생각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봉 감독의 생각을 어느 정도 정리한 말이라고는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바로 보자면 신자유주의가 실패로 접어든 지금의 현주소를 얼마나 영화가 잘 집어내고 있는가를 목격하지 못한다면 이 영화의 가치는 반감하고 말 것이다.

1960년대 뉴에이지 운동과 함께 탈현대주의 광풍은 사고방식과 생활 습관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주었다. 연전에 미국에서 제작된 전위영화 YTIMROFNOC를 거꾸로 읽으면 ‘조화’와 ‘순응’을 의미하는 CONFORMITY로서 모든 것이 거꾸로 가는 것, 즉 부조화와 비순응을 묘사하고 있다. 주인공이 어느 날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과 동물과 차들이 모두 자기와는 반대로 뒷걸음쳐 오는 것을 발견하고 주인공 자신도 뒷걸음친다. 비정상적인 사회에 살다 보면 자신도 비정상이 된다는, 그래서 비정상이 일상생활에서 익숙해졌을 때에 거기에 얼마나 인간자신은 잘 순응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이다. 역설에 익숙해지면 그 역설이 조화로 보이고 거기에 순응하면 역설이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기생충’을 영어로 'Parasite'라 한다. 접두어 'para'는 말을 의미하는 ‘doxa'와 결합이 되면 ’Paradox'가 된다. ‘역설’이란 의미가 된다. 그러면 영어는 왜 ‘기생충’을 ‘parasite'라고 했는가. 'site'는 인터넷 시대에 흔히 사용되는 말이기 때문에 여기서 구태여 설명을 할 필요가 없다. ‘para-site'의 사전적 의미는 ‘역설적 존재’란 뜻이다. 그 이유는 ‘기생충 寄生蟲’은 자기 자신이 숙주에 대해선 객체인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이런 역설적인 것을 '파라para'라 하고 ‘말doxa'과 결합될 때엔 ‘역설’이라고 한다.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주체도 되고 객체도 되는 것을 ‘자기 언급 self-reference’이라고 한다. 기생충이나 바이러스는 모두 이런 역설적 존재이다. 박멸하다보면 숙주 자신도 죽는다는 역설이 발생한다.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것이 기생충(바이러스)의 역설적 속성이다. 그래서 우리 민속에선 기생충을 ‘손님’이라고 하여 잘 대접해 내 보내야 한다고 한다. 병에 걸리면 굿거리를 먼저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무리 미신이라 하지만 기생충에 대하는 태도만은 서양에 앞서 있다. 기생충의 역설적 성격을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앞서 있다. 항생제를 제조하는 순간 기생충들은 인간들보다 먼저 알고 대처한다. 기생충들은 역설을 알고 대처를 할 줄 알지만 인간들은 이에 서툴기 때문이다. YTIMROFNOC는 역설에 대처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세 가족이 어떻게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보자.

역병의 주체 기생충을 손님 모시듯 하라는 것은 이 존재가 선도 악도 아니고 숙주가 객체인 동시에 숙주의 한 부분인 역설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선에다 악의 누명을 씌우고, 악을 선으로 둔갑시키는 일은 예사로 벌어진다. 그러나 ‘기생충’엔 선악이 혼재돼 있다 보니 누가 진짜 기생충인지 헷갈린다. 모두가 다 기생충이고 기생의 정도 차이만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점이 영화로서 기생충은 탈현대 시대상의 논리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선악의 소용돌이 속으로 우리를 몰입시키고 말았다. 그리고 이런 논리적 구조는 ‘내부자’를 비롯한 최근 한국 영화 전반에 그대로 노정돼 있었다. 기생충의 논리적 구조가 세계사적 흐름 구조에 적격했던 것이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가 광풍과 같이 노도와 같이 전 세계를 휩쓸었다. ‘노동의 종말’을 쓴 리프킨은 산업사회는 노.사 대립의 시대였지만 앞으로는 노.노 갈등이 도래할 것이라고 했다(리프킨, 1997, 30). 이 말은 노동자들이 사주를 숙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노동자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다시 말해서 노조가 다른 노조에 기생하여 생존하는 기생충 노조 같은 것이 생길 것이라는 뜻이다. 각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 간의 이해대립, 또 새로운 시대에 통할 수 있는 근로자들과 그렇지 못한 근로자들 간의 이해 대립에 의한 사회 갈등이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결말은 우리 사회를 이렇게 ‘사, 노1, 노2’라는 3중 중층 구조를 만들어 버렸다. 1980년대 이전의 노.사 갈등만 하더라도 낭만적이었다. 김민기의 노랫말도 이제 향수와 낭만으로 남을 정도이다. 노.사 그리고 노.노의 갈등은 말 그대로 ‘역설적 상황 para-site'으로 우리를 가져다 놓았으며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결과물이 영화 ’기생충‘이다.

‘기생충’은 그 세트가 3층 구조로 돼 있다. 지상(박 사장 가족), 반지하(기택 가족), 그리고 지하(문광 가족)와 같다. 이 구조는 신자유주의 이후 우리가 사는 사회상의 구조와 같다. 마치 우리 사회에서와 같이, 이 영화는 지상과 지하의 갈등이 주된 배경이 아니고, ‘지하’와 ‘반지하’의 갈등이 영화의 핵심 주제이다. 3층 구조가 모두 지상에 노출되면서 칼부림과 총격전이 벌어진다. 지하(문광 가족)는 반지하(기택 가족)를 적으로 죽이려 한다. ‘노 대 노’의 갈등과 ‘반지하 대 지하’의 결투가 지상에서 벌어지면서 평화롭던 지상의 박 사장의 정원은 피로 얼룩진다. 그런데 지하(문광)가 반지하(기택)를 적으로 증오하는 반면에 반지하는 그 총부리를 지상의 박 사장에게로 돌린다. 막상 기택은 자기 딸이 문광에 의해 살해당했는데도 말이다. 

현대과학은 이러한 3중 구조를 ‘소용돌이’ 혹은 ‘프랙털’이라고 한다. 기생충은 영어제목 그대로 ‘파라-사이트 para-site’이다. 대답을 찾기 힘든 역설적 소용돌이 곤혹스러움 때문에 이 영화는 탈현대적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화평들이 ‘냄새’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이 영화의 의의를 반감시키고 있다. 박 사장(이선균)과 연교(조여정) 사이의 노출된 성적 묘사와 탁자 밑에서 숨죽이며 이 두 부부의 대화를 엿듣고 냄새 때문에 빈부의 신분 갈등을, 영화감독이 마치 블랙리스트에 오를 수도 있다는 듯한 정치적 해석, 그리고 이를 과대 묘사함으로 마치 이 영화가 지상과 지하의 갈등에 있는 것처럼 단편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큰 오류라 아니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선악과 흑백으로 영화를 보려하는 것은 큰 오류이다. 기택이 박 사장을 죽이고도 살아남는 것으로 보면 결코 이 영화가 선악과 사회정의 차원에서 볼 수 없음을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초점은 ‘지하 대 반지하’의 갈등에 있으며 이는 탈현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만국의 노동자들이 뭉칠 수 없는 시대를 신자유주의가 가져왔던 것이다. 산업사회의 시각에서 이 영화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의 아카데미 수상에 대해 보수들은 입맛이 씁쓸할 것이다. 생존전략에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것이 한국 보수들이니 봉준호와 같은 동네에 살았다는 것까지 내세우며 마치 봉준호 모시기에 영일이 없고, 진보는 이 영화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단순히 전근대적인 노.사 갈등 혹은 빈부 갈등의 전형인 양, 이 영화를 다 본 것인 양, 하는 것은 모두 바람직하지 못하다.

북한의 대외선전매체가 사회 양극화를 풍자한 영화로 ‘기생충’을 소개하며 자본주의 제도를 비판했다. 즉, 북한의 <조선의 오늘>은 1월 18일 영화 ‘기생충’을 거론하며 “남조선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한 편의 영화는 사람들에게 자본주의 제도야말로 부익부 빈익빈의 악성종양을 안고 있는 썩고 병든 사회이며 앞날에 대한 희망도 미래도 없는 사회라는 것을 다시금 똑똑히 깨닫게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러한 평가 역시 이 영화가 신자유주의의 후유증과 신자유주의에 대처하지 못한 결과물이란 것을 제대로 보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민생단’과 ‘para-site’

북 매체가 기생충을 남한의 전근대적인 노.사 갈등 차원에서 보았다면 영화를 바로 볼 수 있는 좋은 역사의 한 장면을 놓치고 있는 것이 될 것이다. 기생충과 현대사와 겹쳐지는 부분은 1930년 초반에 있었던 ‘민생단’ 사건이다. 일제가 1932년에 동만 일대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의 복지와 민생을 돌본다고 하면서 만든 위장 단체가 민생단民生團이다. 간도 땅을 찾아준다는 민족주의까지 고취하자 이광수와 최남선 같은 지식인들마저 일제에 속아 민생단을 환영하고 친일행각을 시작한다.   

‘민생단’이란 일제를 숙주로 한 ‘기생단 para-site’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가해자가 마치 보호자 노릇을 벌리는 실로 기생충의 역설적 성격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대부분의 조선 사람들이 속아 넘어갔다. 막상 민생단은 생긴지 1년 만에 사라지고 말았지만 그 후유증은 심각했다. 다시 말해서 중국공산당은 조선인들을 ‘불령선인’이라 하면서 일본에 기탁해 사는 기생충으로 자기들에게 해악적 존재로 본 것이다. 이에 중국 공산당은 조선 공산당원들을 수천 명 일본의 앞잡이로 몰아 죽인 사건이 바로 민생단 사건이다.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과 애국지사 이찬의 부부 등이 모두 민생단으로 몰려 희생당했다. 지하의 문광이 범한 우를 중공당이 범한 것이다. 김연수의 소설 ‘밤은 울고 있다’가 이 민생단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중공당의 종자운과 동장영 등이 주도하여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과 이찬이 모두 이에 희생당한 사건이다. 김일성 사령 부부도 민생단으로 몰릴 지경이고, 체포 구금될 뻔 했었다. 회고록 4권은 이 민생단 사건에 대한 기록이라 할 수 있으며 회고록 전권에 걸쳐 가장 많이 언급되는 사건이 민생단이다. 숙주에 빌붙어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기생충과 같은 운명은 중국에서 뿐만 아니라 동남아 일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아직 남아 있는 조선인에 대한 모습니다. 일본에 기생하여 앞잡이 노릇하는 존재로 20세기의 우리 역사는 얼룩져 있다. 영화 ‘기생충’을 보면서 사회상을 보는 동시에 서글픈 우리 민족 현대사를 함께 읽는다. 

김일성 주석도 일제와 싸우는 것보다 이 중공당과의 싸움이 수십 배 힘들었다고 한다. 공산당이 공산당을 죽이는 사건, 이것이 민생단 사건이다. 일본이라는 지상, 조선이란 반지하, 그리고 중국이란 지하, 3중구도가 민생단 사건의 전모이다.  

영화에서는 지하도 죽고 지상도 다 죽고 반지하의 기택의 딸을 제외한 가족들만 살아남는다. 중국 공산당이 조선 공산당을 공격하고 죽이려 할 때에 조선 공산당의 수장은 1933년 다홍훼에서 열린 회의에서 중공당을 설득하여, 즉 우리의 공동의 적은 일제라는 것을 설득시켜 두 사이트가 같이 공생하게 된다. 이로써 민생단 사건의 대단원은 막을 내린다. 중공당이 설득을 당하고 인정을 했을 땐 이미 수많은 조선 사람들이 죽고 사라진 다음이었다.

영화 ‘기생충’을 계급의 문제로만 보아서는 알 될 이유를 민생단과 연관하여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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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은소나무 (qnseksrmrqhr) 2020-02-19 10:40:09
숲과 나무를 동시에 볼 수 없는 한계점을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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