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보 / 북한학(태권도·체육) 박사. 전 MBC·YTN 기자·PD, 경희대·가천대 등 강사
 

최근 현안이 되고 있는 2032년 서울평양 올림픽을 위해서는 남북 태권도 협력이 필수적이다. 태권도를 민족유산이자 핵심종목으로 중요시하고 있는 북한태권도가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할 경우 공동올림픽 자체가 무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평양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한 차원에서, 남북태권도의 협력 방안들을 정리해 보았다. 이 글은 필자가 민주평통 발간 ‘통일시대’(2020년 2월호)에 기고한 내용을 보완한 것으로, ①남북태권도가 그동안 걸어 온 길, ②교류해 온 내용, ③협력해야 할 사업 중심으로 3회로 나누어 연재한다. / 필자

 

▲ 1940년대 후반 청도관 수련 모습. [사진-국기원 발간 ‘엄운규’]


남북태권도가 걸어 온 길

태권도라는 명칭은 해방 이후 남한에서 다양한 무술 단체들이 통합되는 과정에서 1965년 ‘대한태권도협회’가 출범한 뒤 보편화되었다. 북한태권도는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980년 북한이 남한에서 갈라져 나온 최홍희의 국제태권도연맹(ITF)과 손을 잡으면서 본격화되었다. 

최홍희는 1970년대 초반까지 남한에서 의욕적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당시 ‘공수도, 당수도, 화수도, 권법’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던 무술의 명칭을 ‘태권도’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많은 기여를 했다. 

▲ 1959년 최홍희 주도로 구성된 대한태권도협회. 앞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최홍희, 맨 오른쪽이 엄운규. [사진-국기원 발간 ‘엄운규’]

그러나 1960년대 태권도의 경기화를 두고 최홍희, 황기 등 1세대들은 ‘무도성(실전성) 상실’을 우려하며, ‘스포츠를 통한 대중화’를 주장하는 이종우, 엄운규 등 2세대들과 대립했다. 

결국 1966년 대한태권도협회장에서 축출된 최홍희는 국제태권도연맹(ITF)을 만들어 사범의 해외파견, 단증발급, 형(품새)보급 활동을 계속했지만, 1968년 대한태권도협회로부터 청산 통보를 받게 된다. 

▲ 2005년 국기원이 주최한 태권도인의 밤 행사에서 당시 국기원장이었던 엄운규가 친구 이종우에게 상을 수여하고 밝게 웃는 모습. [사진-국기원 발간 ‘엄운규’]

대한태권도협회는 1971년 김운용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1972년 중앙도장인 ‘국기원’ 개관, 1973년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서울 개최, 세계태권도연맹(WTF) 출범 등 경기화에 집중했다. 

WTF 총재를 겸직한 김운용은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공식종목, 1988년 서울올림픽 시범종목 등으로 태권도의 경기화를 주도했다. 

▲ 제7대 대한태권도협회 집행부. 가운데가 김운용 회장. [사진-국기원 발간 ‘엄운규’]

<남한에서 근거지를 상실한 최홍희는 1972년 캐나다로 이주했고, 1974년 제1회 ‘태권도세계선수권대회’를 개최했지만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1980년 북한의 초청으로 방북한 최홍희는 평양에서 태권도 시범을 선보였고, 이듬해 지도사범을 파견해 북한의 군사무술인 ‘격술’ 유단자 중심으로 44명의 1기 수련생들을 배출했다. 

▲ 박정태 사성, 창헌 최홍희, 최중화 사성[캡쳐사진-(사)ITF 태권도협회 홈페이지]

한편 북한은 최홍희의 ITF태권도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북한식의 운영체계를 구축했다. 국제적인 고립과 심각한 경제난 속에서 우리식 사회주의와 조선민족 제일주의를 표방했는데, 민족체육으로 태권도를 집중적으로 육성한 것이다. 

1992년 김일성의 ‘태권도 과학화와 생활화’ 지침을 김정일이 ‘ITF태권도와 건강태권도’ 프로그램으로 구체화했다. 이를 계승한 김정은은 2015년 태권도를 전략종목으로 지정하고 ‘온 나라를 태권도화’하도록 했으며, 국가무형문화유산으로도 지정하는 등 태권도를 중시하고 있다. 

▲ 2015년 5.1절 125돌 경축 수도건설자들의 체육경기가 열린 김일성경기장에서 진행된 ‘건강태권도’ 시범경기 모습. [캡쳐사진 - 노동신문]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남북태권도는 현재 아래 표와 같이 기술체계가 유사하지만 운영방식에서는 적지 않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 남북 태권도 특성 비교 [정리-홍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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