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사실 서른 살이 넘으면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다 (괴테)


 참 우습다
 - 최승자

작년 어느 날
길거리에 버려진 신문지에서
내 나이가 56세라는 것을 알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아파서
그냥 병(病)과 놀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내 나이만 세고 있었나 보다
그동안은 나는 늘 사십대였다
 
참 우습다
내가 57세라니
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
소녀처럼 포르르포르르 할 수 있는데
진짜 할머니 맹키로 흐르르흐르르 해야 한다니


 오래전에 모 지역신문의 편집국장을 한 적이 있다. 어느 날 군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가 사는 마을에서 막걸리 한잔 하자는 거였다. 도토리묵 집에서 만났다.

 술잔을 기울이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마을 이장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조아렸다. 그 후 이장은 내게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마을 일을 의논하기도 했다.

 내게 주어진 자그마한 권력, 누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달콤했다. 그리고 익숙해져갔다. 아마 내가 꿈꾸는 삶을 살지 않았다면, 그 작은 권력 맛에 취해 살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다 만약 누가 내가 가진 기득권을 조금이라도 침해한다면 나는 길길이 날뛰며 기득권 사수에 온몸을 던졌을 것이다.

 단편적인 지식위주의 공부만 하여 사법시험을 통과하는 순간, 젊은 나이에 일약 ‘영감’이 된 검사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엄청난 특권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조선 시대만 해도 관료가 되기 위해서는 경전을 공부하고 시를 썼는데, 지금은 인문학에 대한 소양이 전혀 없어도 고위 관료가 된다. 그들은 자신들을 성찰할 힘이 있을까?

 프랑스에서는 1968년 5월에 혁명이 일어났다. 모든 기득권에 저항하는 혁명이었다. ‘예술은 똥’이라며 기존의 예술을 전복했다. 대학에서는 교수들의 일방적인 강의에 저항해 학생들이 교수에게 질문하는 수업을 했다. 68혁명의 정신적 토대를 제공한 라울 바네겜은 외쳤다. ‘우리가 얻는 것은 즐거움의 세계요, 잃는 것은 권태 뿐!’ 저항의 정신은 전분야로 퍼져나갔다. 

 그 당시 기득권에 취해 살던 예술가, 교수, 정치인, 관료들은 맨붕에 빠졌을 것이다. ‘어떻게 개돼지들이 저럴 수 있지?’ ‘하늘의 도’가 무너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기득권이 파괴되었기에 프랑스는 철학, 예술 등 정신적인 면에서 일류국가가 되어있지 않은가?

 지금 우리나라는 프랑스의 68혁명을 겪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기득권에 취해 살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겠지만, 그런 껍데기들이 깨져야 새살이 돋고 건강한 사회가 된다.  

 사람들은 똑똑히 보았다. 검찰이 기득권을 가진 자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개혁의 입장에 선 사람들에게는 가혹하게 법의 칼을 휘두르는 것을. 이걸 그들은 정의라고 부르고 언론인들은 그대로 받아쓰고 교수라는 자들은 옹호하는 선언을 하고 대학생들도 그들을 지지하는 집회를 하니, 상식을 가진 보통 사람들이 분노할 수밖에 없다.

 기득권을 오래 누리다 보면 벌거숭이 임금님이 옷을 입은 것처럼 보이게 된다. 그냥 보면 아는 것을 그들은 지식의 안경을 썼기에 헛것이 보이는 것이다.

 빌헬름 라이히는 ‘우리의 생(生)의 에너지는 사랑으로 가지 못하면 권력욕으로 간다.’고 했다.

 권력의 탑을 촘촘히 쌓으며 사는 사람들은 사랑을 모른다. 남과 비교하며 남을 짓누르는 쾌감으로 산다. 그래서 삶이 헛헛하다. 만성 우울증에 걸린다. 그들의 표정은 늘 굳어있다.

 어느 날 최승자 시인은 자신의 나이를 알고 화들짝 놀란다.

 ‘작년 어느 날/길거리에 버려진 신문지에서/내 나이가 56세라는 것을 알고/나는 깜짝 놀랐다/나는 아파서/그냥 병(病)과 놀고 있었는데/사람들은 내 나이만 세고 있었나 보다/그동안은 나는 늘 사십대였다’

 ‘참 우습다/내가 57세라니/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소녀처럼 포르르포르르 할 수 있는데/진짜 할머니 맹키로 흐르르흐르르 해야 한다니’

 공자는 공부하는 게 좋아서 나이 드는 것조차 몰랐다고 한다. 공자의 공부는 자신을 가꿔가는 공부다. 자신을 가꿔가는 사람들은 안다. 언제나 자신 안에 ‘아이’가 산다는 것을.

 ‘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소녀처럼 포르르포르르 할 수 있는데’

 이런 인간이 어른들 중 얼마나 될까? ‘내 나이가 어때서’하고 비명 지르는 것과는 다르다. 순수한 것과 유치한 것은 다르다.

 거대한 권력의 성(城)에 사는 사람들은 마음속의 ‘아이’를 잃어버렸기에 신나게 살줄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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