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늘 내 안의 한 생각이다! (라마 크리슈나)

 

 나는 사람인가 간다인가? 
 - 최승자 

 한 사람이 앞으로 간다.
 두 사람이 뒤로 간다.
 세 사람이 옆으로 간다.
 네 사람이 돌아간다.

 사람은 행위인가 존재인가?
 사람이 간다인가, 간다가 사람인가

 ................................
 
 간다가 간다. 간다가 간다
 간다가 간다 간다가 간다.
 간다가 간다 간다가 간다


 최승자 시인은 어느 날 시내로 나들이를 했나 보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망연히 바라본다.
 
 ‘한 사람이 앞으로 간다.
 두 사람이 뒤로 간다.
 세 사람이 옆으로 간다.
 네 사람이 돌아간다.’ 

 그러다 인간의 존재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한다.

 ‘사람은 행위인가 존재인가?/사람이 간다인가, 간다가 사람인가’

 하지만 답을 얻지 못한다. 

 ................................

시인은 눈앞을 어른거리는 ‘사람들의 간다’를 볼 뿐이다. 
   
 ‘간다가 간다. 간다가 간다/간다가 간다 간다가 간다./간다가 간다 간다가 간다’

 석가는 ‘사람은 오로지 행(行)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우리가 당연히 실체로 존재한다고 믿는 자아(自我)는 ‘허상’이라고 했다. 

 최승자 시인이 꿈결처럼 본 ‘간다’가 인간 존재의 실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나’라고 생각하는 자아를 실체로 생각한다. ‘사람’ ‘나’라는 언어가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하이데거)’인 것이다.  

 우리가 ‘사람’이라는 말을 하면,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당연히 사람 중의 한 사람인 ‘나’도 당연히 있는 것 같다. 

 나를 실체로 생각하는 순간, 사람은 자기 몸뚱이만큼이 된다. 자기 몸뚱이 외에는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 몸뚱이 하나를 위해 한평생을 바치게 된다. 좀비가 된다. 

 좀비가 된 자아가 힘을 갖게 되면 세상을 다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리려 한다. 게르만족 번영이라는 허울을 내걸고 유태인을 학살하고 2차 대전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히틀러가 된다. 그는 파멸할 때까지 ‘간다’. 

 우리는 지금 수많은 히틀러들을 보고 있다. 정의의 이름으로 법의 칼날을 마구 휘두르는 망나니들을 본다. 그들은 한 때 총칼을 휘둘렀다. 남의 나라에 마구 폭탄을 터뜨린다. 택시 기사의 귀를 마구 물어뜯는다.  

 그래서 원시인들은 수 만년 동안 온갖 사회, 문화적 장치를 써서 자아가 힘을 갖지 못하게 했다. 무언가를 잘한 사람을 비웃어주었다. 왕따를 시키기도 했다. 아무리 공을 세워도 절대 인정해 주지 않았다. 잘난 사람이 없게 했다. 그래서 누구나 잘난 사람이 되었다. 부자들은 자주 잔치를 열어 가난하게 되었다. 부자가 없었기에 가난한 사람도 없었다. 모두 부족함이 없었다.   

 그렇게 아름답게 살던 인간이 8천여 년 전에 농업혁명을 일으켜 땅을 소유하고 생산물을 저장하게 되면서 사람의 자아가 급작스럽게 팽창하게 되었다.

 이제 인간은 다른 사람과 다른 생명체들, 온 우주를 소유하고 지배하겠다는 오만방자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제2의 석가라고 불리는 용수보살은 ‘비가 온다. 꽃이 핀다. 사람이 간다.’는 말들은 틀린다고 했다.

 사실 내리는 것이 비인데, 비가 내린다고 하면 틀리지 않는가? 우리는 흔히 꽃이 핀다는 말을 쓰지만, 피어있는 게 꽃인데 어떻게 꽃이 필 수 있겠는가? 사람도 가고 있거나 밥 먹고 있거나 하는 움직이는 사람이 있을 뿐이지, ‘사람’이라는 무언가는 없지 않는가? 

 그런데 언어가 있으면 언어가 지칭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착각이 일어난다. 우리는 허상에 빠진다. 한 번 허상에 빠지면 우리는 그 허상의 감옥에서 빠져 나오기 힘들게 된다.  

 사람이 ‘간다’가 될 때 사람은 무한히 확장된다. 아이가 간다, 개가 간다, 돌멩이가 굴러간다. 차가 간다. 구름이 간다, 물이 흘러간다, 세월이 간다...... 사람은 사람을 넘어 삼라만상과 하나로 어우러진다. 세상 전체가 하나의 춤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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