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진영에 돌려준다 2


박윤희


한국의 반동적보수진영은
전시대의 폐물적 군상들의 집단

 
(4) 수구할 것이 없는 보수주의자들

한국의 보수정객들은 민족주의자로 자처하며 남에게도 그렇게 불리기를 좋아하며, 또 그렇게 생각해 주고 있는 백성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거짓의 베일을 벗길 때는 온 것 같다.

굳이 서양 사람들의 평을 빌릴 필요도 없이, 이 나라의 자칭 보수정객 또는 민족주의자들은 – 그 소속이 자유당이거나 민주당이거나 또는 공화당이거나 - 이어받은 것이(전통) 아무것도 없으며, 따라서 그들이 수구해야 할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한마디로 이들은 전시대의 「법통」을 이어받은 적자나 계승자가 아니라, 오직 폐물적 군상들의 집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선 일제 36년간의 역사가 이 사실을 무엇보다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물론 정치적 상부구조를 이룩하고 있었던 것은 일본의 총독을 비롯한 일본사람들이었지만, 실질적으로 한국의 백성을 다스린 것은 이조말엽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을 고스란히 간직한 상류계급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용기를 가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해외로 망명해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던 일부 독립투사들을 제외한다면, 이조 때의 귀족계급은 일본천황의 작위를 받았고, 작위를 받을 만큼 친일의 공이 높지 못했던 사람들은 군수나 면장이나 하다못해 면서기라도 지냄으로써 외세의 지배하에서 신음한 그 동족사이에서나마 지배계급 노릇을 했던 것이다.

이 전시대의 폐물들은 8.15해방이후의 미군정시대에나 또는 미국고문들의 지휘 감독밑에 있었던 이승만자유당 독재정권시대나 똑같이 이 나라의 어질기만한 백성들의 머리위에 군림해왔다.


(5) 반민족적 민족주의자들

이들 자칭 민족주의자들이 저지른 가장 큰 반민족적 죄악은 「8.15」해방직후부터 대한민국수립까지의 기간 중에 미・소 양국의 냉전전략에 스스로 영합하는데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그 앞장을 섬으로서 삼팔선을 고정화시켰으며, 이북의 공산주의자들이 또 하나의  「단독괴뢰정부」를 세울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 주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법통」과 명분세우기를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이들은 「8.15」해방이 되자, 중경에 있었던 망명정부를 「받들어 모시자」고 주장했으며, 다음으로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이 발표되자, 『오년동안 참을 수 없으니 즉시 독립을 달라』는 「반탁운동」을 들고 나왔다. 

이들은 또 공산주의자가 아닌 온건한 혁신세력을 도매금으로 「소련을 조국으로 삼으려는」 빨갱이로 몰아서 잡아 죽이거나 병신을 만들거나 그렇지 않으면 일절의 사회참여를 금하고 말았던 것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할 수 있다.

이처럼 임시정부를 받들고 반탁을 하고 관제 빨갱이를 만들고 또 이른바 「가능한 지역만에서라도 독립과 주권과 자유민주를 찾자」는 미명아래 단정수립을 추진해 온 세력이 당시의 한국민주당이었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며, 한민당이 바로 친일파 및 지주들의 집단이었다는 의미에서 일제시대의 폐물이었음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을 줄 안다. 

여기서 한가지 「아이로니알」한 이야기를 한다면 이들이 가진 명분을 내세우고 가진 노력을 다하여 수립한 「3.1정신과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 정부에는 고  김구 씨와 김규식 박사를 비롯한 임정요원들이 거의 다 참여하지 않았으며, 기가 막히게도 한민당간부들은 그들이 「끔찍하게도 모셔오던」 이승만 전대통령한데서도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 한가지 사실만을 가지고도 한국의 자칭 보수정객들이나 민족주의자들의 생리를 이해하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이 땅의 사이비 보수주의자들은 「유엔정신을 받드는 한반도내에서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명분을 계속 고수하기를 잊지 않았으며, 미국의 냉전전략을 충실하게 좆는 것을 유일한 외교정책으로 삼아왔다. 오로지 「가능한 지역에서의 독립과 주권과 민주주의」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 피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도 힘들게」 만들기 위해서(계속)

▲ 보수진영에 돌려준다 2 [민족일보 이미지]

保守陣營에 돌려준다 2


朴允熙


韓國의 反動的保守陣營은
前時代의 廢物的 群像들의 集團

 

(四) 守舊할 것이 없는 保守主義者들

韓國의 保守政客들은 民族主義者로 自處하며 남에게도 그렇게 불리기를 좋아하며 또 그렇게 생각해 주고 있는 百姓들이 많은 것도 事實이다. 그러나 이 거짓의 베일을 벗길 때는 온 것 같다.

굳이 西洋사람들의 評을 빌릴 필요도 없이, 이 나라의 自稱 保守政客또는 民族主義者들은 – 그 소속이 自由黨이거나 民主黨이거나 또는 共和黨이거나 - 이어받은 것이(傳統) 아무것도 없으며 따라서 그들이 守舊해야 할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한마디로 이들은 前時代의 「法統」을 이어받은 嫡子나 繼承者가 아니라 오직 廢物的 群像들의 集團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선 日帝 三十六年 間의 歷史가 이 事實을 무엇보다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勿論 政治的 上部構造를 이룩하고 있었던 것은 日本의 總督을 비롯한 日本사람들이었지만 實質的으로 韓國의 百姓을 다스린 것은 李朝末葉의 生活樣式과 思考方式을 고스란히 간직한 上流階級이었다는 事實을 否認할 勇氣를 가진 사람은 없을 것이다. 

海外로 亡命해서 獨立運動을 계속했던 一部 獨立鬪士들을 除外한다면 李朝때의 貴族階級은 日本天皇의 爵位를 받았고 작위를 받을 만큼 親日의 功이 높지 못했던 사람들은 郡守나 面長이나 하다못해 面書記라도 지냄으로써 外勢의 支配下에서 신음한 그 同族사이에서나마 支配階級 노릇을 했던 것이다.

이 前時代의 廢物들은 八.一五解放以後의 美軍政時代에나 또는 美國顧問들의 指揮 監督밑에 있었던 李承晩自由黨 獨裁政權時代나 똑같이 이 나라의 어질기만한 百姓들의 머리위에 君臨해왔다.


(五)反民族的 民族主義者들

이들 自稱 民族主義者들이 저지른 가장 큰 反民族的 罪惡은 「八.一五」解放直後부터 大韓民國樹立까지의 其間中 에 美・蘇兩國의 冷戰戰略에 스스로 迎合하는데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그 앞장을 섬으로서 三八線을 固定化시켰으며 以北의 共産主義者들이 또 하나의  「單獨傀儡政府」를 세울 수 있는 口實을 만들어 주었다는 事實이다.

이른바 「法統」과 名分세우기를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이들은 「八.一五」解放이 되자 重慶에 있었던 亡命政府를 「받들어 모시자」고 主張했으며 다음으로 「모스크바」 三相會議의 決定이 발표되자 『五년동안 참을 수 없으니 卽時 獨立을 달라』는 「反託運動」을 들고 나왔다. 

이들은 또 共産主義者가 아닌 穩健한 革新勢力을 도매금으로 「蘇聯을 祖國으로 삼으려는」 빨갱이로 몰아서 잡아 죽이거나 병신을 만들거나 그렇지 않으면 一切의 社會參與를 禁하고 말았던 것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할 수 있다.

이처럼 臨時政府를 받들고 反託을 하고 官製 빨갱이를 만들고 또 이른바 「可能한 地域만에서라도 獨立과 主權과 自由民主를 찾자」는 美名아래 單政樹立을 推進해 온 勢力이 當時의 韓國民主黨이었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事實이며 韓民黨이 바로 親日派 및 地主들의 集團이었다는 의미에서 日帝時代의 廢物이었음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을 줄 안다. 

여기서 한가지 「아이로니알」한 이야기를 한다면 이들이 가진 名分을 내세우고 가진 努力을 다하여 樹立한 「三.一情神과 上海臨時政府의 法統을 繼承한」 大韓民國政府에는 故 金九 氏와 金奎植 博士를 비롯한 臨政要員들이 거의 다 參與하지 않았으며 기가 막히게도 韓民黨幹部들은 그들이 「끔찍하게도 모셔오던」 李承晩 前大統領한데서도 버림을 받았다는 事實이다.

이 한가지 事實만을 가지고도 韓國의 自稱 保守政客들이나 民族主義者들의 生理를 理解하기에는 充分할 것이다. 大韓民國 政府가 樹立된 뒤에도 이 땅의 似而非 保守主義者들은 「유엔情神을 받드는 韓半島內에서의 唯一한 合法政府」라는 名分을 계속 고수하기를 잊지 않았으며 美國의 冷戰戰略을 忠實하게 좆는 것을 唯一한 外交政策으로 삼아왔다 오로지 「可能한 地域에서의 獨立과 主權과 民主主義」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 피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도 힘들게」 만들기 위해서(계속)

<민족일보> 1961년 3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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