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전한 보수세력의 발전을 바라며=(1)

 

(1) 상식을 거부하는 정치

결론부터 말한다면 건전한 혁신세력의 발전이 필요하듯이 건전한 보수세력의 육성이 무엇보다도 긴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서 「건전한」이라는 형용사적 어휘를 굳이 앞세우는 이유는 첫째로는 진정한 의미의 혁신세력이나 보수세력이 아직까지 한국의 정치적 지평선상에 존재해 본 일이 없었고, 이제 겨우 그 싹이 트기 시작했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이제 막 싹트려는 이 두개의 정치세력에게는 어떤 편견이나 전근대적 폭력주의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평범한 상식 즉 순리에 따라서 사고하고 행동할 줄 아는 슬기가 무엇보다도 아쉽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8.15해방이후 16년간의 정치사가 보여주듯이 순리로울 줄 모르는 즉 「리즈너블」하지 못한 자칭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나 보수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쥔 정치집단들은 이 땅의 남북에서 인간의 상식을 받아들이지 않는 억지와 공포와 물심양면의 굶주림의 사회밖에는 만들어내지 못했다. 

다시 말하자면 조국의 남북을 지배해 온 집권자들은 어느 모로 보거나 정치가라고는 부를 수 없는 좌익소아병자들이 아니면 「테로ㄹ리즘」과 권모술수로만 몸과 마음을 무장한 사이비보수정객들 뿐이었다고 보아도 결코 지나친 표현은 아니라고 본다.

이처럼 상식을 좆아서 일 할 수밖에 모르는 우리네 일반대중에게는 결코 해는 될지언정 이로울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하기 때문에 나는 이 글을 「건전한」 보수세력의 발전을 비는 마음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2) 공산반동과 보수반동

다음으로 한국의 정치적 지평선상에 진정한 의미의 혁신세력이나 보수세력이 아직까지는 존재한 일이 없었고 또 존재할 수도 없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두는 것이 본론을 전개하기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맑스・레닌」주의의 전통적 계승자라고 자처해 온 이북의 공산주의자들이나, 서구식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라고 자부해온 이남의 보수주의들은 미소양국의 냉전전략을 무조건 무비판적으로 추종해왔다는 의미에서, 또 국가・민족의 이익보다는 자파자당의 세력 확장에만 골몰해 왔다는 의미에서 똑같이 「반동」적이라고 규정할 수밖에 없다.

또 이들은 야당(반대파)의 언론・출판・집회 및 정치활동의 자유를 한결같이 억압해왔다는 의미에서 그들 말과는 딴판으로 민주주의의 가장 초보적인 원리조차 실천에 옮길 소양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자기들만이 진정한 민주주의자라고 서로가 고집해온 이들은 오직 나의 신만을-그것도 자기들의 왜곡된 거울에 비친 매우 일그러진 신만을 믿도록 이 나라의 젊은이들에게 강요해 왔다 그러므로 상식마저 용납되지 않는 오로지 「도그마」와 편견만이 지배하는 이들의 사회에서 「제3신」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했겠느냐하는 것을 여기서 새삼스럽게 설명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위에 적은 바와 같은 정치적 풍토위에서 「건전한」 혁신세력과 보수세력이 순진하게 자라날 수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일시적 실패에 ?아 가긴하였지만 「4.19」혁명은 최소한 조국의 남쪽에서만이라도 정치적 기상에 큰 변혁을 가져왔다. 진정한 의미의 혁신세력과 보수세력이 싹만이라도 틀 수 있는 가능성이 「4.19」 이전보다 다소라도 늘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 못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결코 현 보수정권 자체가 「4.19」이전의 집권당보다 그 본질이 민주화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작년 4월에 흘린 젊은 사자들의 피의 덕택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보수진영에 돌려준다 [민족일보 이미지]

保守陣營에 돌려준다

 

=健全한 保守勢力의 發展을 바라며=(1)

 

(一) 常識을 拒否하는 政治

結論부터 말한다면 健全한 革新勢力의 發展이 必要하듯이 健全한 保守勢力의 育成이 무엇보다도 緊要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서 「健全한」이라는 形容詞的 語휘를 굳이 앞세우는 理由는 첫째로는 眞正한 意味의 革新勢力이나 保守勢力이 아직까지 韓國의 政治的 地平線上에 存在해 본 일이 없었고 이제 겨우 그 싹이 트기 시작했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이제 막 싹트려는 이 두개의 政治勢力에게는 어떤 偏見이나 前近代的 暴力主義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平凡한 常識 即 順理에 따라서 思考하고 行動할 줄 아는 슬기가 무엇보다도 아쉽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八.一五解放以後 十六年間의 政治史가 보여주듯이 順理로울줄 모르는 即 「리즈너블」하지 못한 自稱 共産主義者・社會主義者나 保守主義者들이 主導權을 쥔 政治集團들은 이 땅의 南北에서 人間의 常識을 받아들이지 않는 억지와 恐怖와 物心兩面의 굶주림의 社會밖에는 만들어내지 못했다. 

다시 말하자면 祖國의 南北을 支配해 온 執權者들은 어느 모로 보거나 政治家라고는 부를 수 없는 左翼小兒病者들이 아니면 「테로ㄹ리즘」과 權謀術數로만 몸과 마음을 武將한 似而非保守政客들 뿐 이었다고 보아도 決코 지나친 表現은 아니라고 본다.

이처럼 常識을 좆아서 일 할 수밖에 모르는 우리네 一般大衆에게는 決코 害는 될지언정 利로울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明白하기 때문에 나는 이 글을 「健全한」 保守勢力의 發展을 비는 마음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二) 共産反動과 保守反動

다음으로 韓國의 政治的 地平線上에 眞正한 意味의 革新勢力이나 保守勢力이 아직까지는 存在한 일이 없었고 또 存在할 수도 없었다는 事實에 對해서 좀 더 具體的으로 말해 두는 것이 本論을 展開하기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單刀直入的으로 말한다면 「맑스・레닌」主義의 傳統的 繼承者라고 自處해 온 以北의 共産主義者들이나, 西歐式 自由民主主義의 信奉者라고 自負해온 以南의 保守主義들은 美蘇兩國의 冷戰戰略을 無條件 無批判的으로 追從해왔다는 意味에서, 또 國家・民族의 利益보다는 自派自黨의 勢力擴張에만 汨沒해 왔다는 意味에서 똑같이 「反動」的이라고 規定할 수밖에 없다.

또 이들은 野黨(反對派)의 言論・出版・集會 및 政治活動의 自由를 한결같이 抑壓해왔다는 意味에서 그들 말과는 딴판으로 民主主義의 가장 初步的인 原理조차 實踐에 옮길 素養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自己들만이 眞正한 民主主義者라고 서로가 고집해온 이들은 오직 나의 神만을-그것도 自己들의 歪曲된 거울에 비친 매우 일그러진 神만을 믿도록 이 나라의 젊은이들에게 强要해 왔다 그러므로 常識마저 容納되지 않는 오로지 「도그마」와 偏見만이 支配하는 이들의 社會에서 「第三神」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意味했겠느냐하는 것을 여기서 새삼스럽게 說明을 必要는 없을 것이다.

위에 적은 바와 같은 政治的 風土위에서 「健全한」 革新勢力과 保守勢力이 純眞하게 자라날 수 없다는 것은 三尺童子라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一時的 失敗에 ?아 가긴하였지만 「四.一九」革命은 最小限 祖國의 南쪽에서만이라도 政治的 氣象에 큰 變革을 가져왔다. 眞正한 意味의 革新勢力과 保守勢力이 싹만이라도 틀 수 있는 可能性이 「四.一九」 以前보다 多少라도 늘었다는 事實을 아무도 否認못할 것이다. 勿論 이것은 決코 現保守政權 自體가 「四.一九」以前의 執權黨보다 그 本質이 民主化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昨年 四月에 흘린 젊은 師子들의 피의 德澤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민족일보> 1961년 3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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