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은 새로운 자아를 발견한 시간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미 느끼고 있었던 것을 새삼 확인했다고 해야 할까. 두 가지였다. 생각보다 뒤끝이 센 사람이었다는 것 그리고 눈물이 많다는 것.

점점 더 하루가 짧아진다. 무엇을 했는지, 하고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후다닥거리다 벌써 새해를 맞았다. 어쩐지 한 해의 어느 귀퉁이를 나도 모른 사이 빼앗긴 것 같다. 정말 한 해를 온전히 보낸 것이 맞을까?

어쩔 수 없이 지난 시간을 돌아본다.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살천스레 대한 적은 없었는지, 무람없이 다른 이의 허물을 부르대지는 않았는지, 삶을, 시간 속 나의 흔적과 행동을 곱새기지 않고 그저 제 잘난 맛에 엉뚱한 것을 두남두지는 않았는지. 생각할수록 그저 남세스럽다. 여전히 옹글지 못한 녀석이다.

뒤끝이 세다는 것은, 흘려보내는 것에 여전히 서투르다는 것이다. 어차피 돌아보면 상대방과 나 모두 어금버금하기에 벌어진 갈등이고 미움일 텐데, 순간 치밀어 오르는 울뚝밸을 참지 못하고, 그것을 시간이 지나도 계속 마음속에 무장 쌓아두는 어리석음이다. 여전히 삶의 고갱이를 찾지 못하는 어리보기인 셈이다.

지난해 12월 10일 파주 오두산 통일전망대를 찾았다. 마치 안개처럼 뿌연 미세먼지가 가득했던 날. OECD 국가 중 공기 질이 꼴찌에서 두 번째인 나라다웠다. OECD 회원국 중 32개국 3,000여개 도시 가운데 ‘공기 질 최악의 100개 도시’에 한국 도시 44곳이 포함됐다는 기사가 문득 떠올랐다.

일터에서 펴내고 있는 책에 <우표로 보는 남과 북> 연재를 하고 있는 이상현 체육교류위원이 이곳에서 남북우표특별전을 열고 있었다. 30여 년 동안 남북의 우표를 수집해 온 그는 우표를 통해 남북의 동질성을 재확인하는 소중한 ‘만남의 장’을 만들었다. 전시를 둘러보다 기념품점에서 생뚱맞게 건빵과 전투식량을 사고 밖으로 나왔다. 마침 군 장병들이 단체로 전망대를 찾아 마주칠 수 있었다.

남북관계가 딱 이날의 미세먼지만큼 뿌연 상황. 하지만 장병들의 얼굴은 밝았다. 군복이 아니라면 대학생 혹은 고등학생들이 단체 견학 온 것이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군기를 유지하면서도(!) 저렇게 편안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니, 대한민국의 안보는 굳건하구나, 느끼면서 북녘 땅을 바라보았다.

평화학자 요한 갈퉁은 “안보를 통한 평화보다 평화를 통한 안보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분단 이후 남북은 주로 안보를 통해 평화를 얻으려 했다. 지금도 큰 틀에서는 다르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차츰 차츰 평화를 통한 안보의 길로도 가고 있다. 조금은 불안해보일 수도 있고, 못미더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시나브로 평화를 끌어안고 또 한 해를 보냈다.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길, 자유로를 달리다 별안간 울컥했다. 왜 이러나 싶었지만, 그냥 그러게 두었다. 2019년은 우리의 평화를 위협하는 부라퀴들이 그야말로 매섭게 날뛴 시간들이었다. 그 사이 사람들은 서로 증오했고, 그 증오의 힘으로 다시 제 편의 세를 늘리기 위해 언구럭거렸다. 평화를 말하는 이들을 언죽번죽 조롱하고, 남북의 화해를 위해 애면글면 헌신해 온 이들은 윤똑똑이들 앞에서 무참했다.

그렇게 한 해를 보냈다. 새해의 희망을 담아야 할 텐데, 부디 큰 사달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다. 2018년 평창 이후 사라졌던 무력함이 다시금 고개를 쳐들고 나선다. 눈물이 흐르게 그냥 그렇게 두었다.

물론이다. 아직 우리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다시 북과 바투 앉아 평화를 만들어내고, 함께 잘 살 수 있는 지혜를 짜내야 한다. 그렇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다. 올해를 가득 채웠던 우리 안의 불신과 증오의 벽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서초동의 국민과 광화문의 국민이 다르지 않듯, 여당의 지지자와 야당의 지지자가 다르지 않듯, 진보와 보수 역시 우리의 진보이고 우리의 보수다. 평화의 열매는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두에게 전해질 것이다. 물론 그 반대의 상황 역시 우리를 차별하지 않을 것이다.

남북의 화해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주변국가의 시선은 우리의 갈등과 분열에 주목하고 있다. 부당한 요구를 하는 동맹이나 이웃국가 역시 우리의 분열과 갈등, 증오를 밑절미 삼아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 북한 역시 다르지 않다.

변명 삼아 말하자면, ‘뒤끝’이 온전히 나쁜 것만은 아니다. 부당한 처사를 끝까지 잊지 않고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 최소한 반성과 성찰의 기회를 주는 것은 정당한 뒤끝이 될 것이다.

지난 해 국민들은 너무 바쁘고 힘들었다. 생업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국민의 역할을 다하느라 노고가 적지 않았다. 생각과 노선의 차이를 떠나 모두들 고생하셨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새해에는 부디 덜 바쁘고 덜 힘들고 대신 더 많이 행복하시기를 함께 기원하고 싶다.

티베트 격언 중 “지혜로운 사람은 백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있다. 새해엔 더 많은 눈을 가졌으면 좋겠다. 오직 나만 옳다는, 나만 잘 났다는 아집에서 벗어나 다양한 눈으로 다양한 시선들과 만나고 싶다. 우리안의 통일부터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자칫 우격다짐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안의 조화와 상생은 가능하지 않을까.

▲ 김남섭 외,『꿈은 소멸하지 않는다 - 스파르타쿠스에서 아옌데까지, 다시 보는 세계의 혁명가들』, 한겨레출판, 2007. 11. [자료사진 - 통일뉴스]

책은 ‘혁명가’들의 이야기다. 실패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이들도 많다. 이들의 불꽃같은 삶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또 얻을 수 있을까. 사람마다 모두 다를 것이다. 비관이 트렌드인 지금, 이들의 삶 또한 다르지 않아 보일 수 있다.

실패한 이들의 삶은 쉽게 단순화된다. 그리고 쉽게 잊힌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역사의 수레바퀴를 맹렬히 굴려왔던 수많은 실패자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지금 이렇게 미래라는 것을 그나마 꿈꿀 수 있다. ‘꿈꾸는 자는 사라졌지만, 꿈은 소멸하지 않는다!’고 책이 말하는 이유다.

북의 신년사 없이 시작된 경자년, 북은 경제건설 집중노선을 그대로 유지한 채, 미국과의 대결을 장기적 관점에서 인식하고 경제개혁과 대외개방에 더욱 나설 것으로 보인다. 1월이 될지 2월이 될지는 모르지만, 미국과 세계를 상대로 ‘충격적인 행동’에 나설지도 모르겠다. 그 사이 남쪽은 무시하고 있다. 그럴 만 하다는 생각과 그럼에도 섭섭함이 공존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역시 우리는 소멸하지 않는 꿈을 꾸어야 할 것이다.

지난해를 돌아보면 너무나 무력했고, 나태했다. <통일뉴스>의 소중한 지면을 더 이상 어지럽게 만들지 말자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결국 그것 역시 변명이었다. 스스로 글을 쓰는 게 너무나 두려웠다. 그것이 진실이었다.

이제 다시 새해다. 그리고 다시 살아내야 한다. 더욱 더 입을 다물고, 눈을 크게 뜨고 귀를 기울여야 하겠다. 그리고 온갖 좌절과 비관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배워나가야겠다. 그 투쟁의 흔적을 부지런히 남겨야겠다. <통일뉴스> 식구들과 독자들의 건강과 행복을 새삼 기원한다. 열심히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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