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0.6.4 목 22:41
홈 > 특집연재 > 연재
풍산개 이야기② 풍이와 동무를 만나다<연재> 주미경의 ‘살구나무를 찾습니다’ (19)
주미경  |  indeej@daum.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승인 2020.01.02  12:21:58
페이스북 트위터

주미경 / 농부

 

살구나무를 찾아서 살구나무 동산을 만들고 있다. 올해는 살구나무 마을을 만들려고 한다. 올해 우리 마을에는 많은 살구나무들이 새로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인데, 나는 그것이 북측 회령 백살구나무이기를 바래서, 그것을 구하려 안타깝게 뛰어다니고 있다.
사라진 살구나무를 찾으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살구나무를 잃어버렸듯이 아주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무엇을 위하여 그 많은 것들을 놓아버린 것일까? 여기 연재할 글들은 살구나무처럼 우리가 잃은 것들, 잊은 것들, 두고 온 것들에 대한 진지한 호명이다. / 필자

 

   
▲ 풍이와 동무가 처음 만날 때. [사진제공-주미경]

 

눈이 맞은 강아지, 풍이와 동무

풍산개를 구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풍산개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 이미 20년이 훌쩍 넘었고 길러본 사람들에 의해 명견이라는 평가가 정착되어 전문적으로 풍산개를 분양하는 사람들과 농장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뒤지면 풍산개 강아지분양에 대한 정보를 심심찮게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암수 한 쌍을 들이려고 마음먹은 나의 관심은 자연히 풍산개를 ‘오래’ 그리고 ‘많이’ 기르고 있는 전문농장으로 향했다.

오로지 풍산개만을 기르고 있는 그 농장에서는 언제든지 강아지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풍이와 동무가 단번에 만나진 것은 아니다. 인연 없는 시골에 내려오자마자 겪어야 했던 몇 가지 곡절 덕분에 처음에 데려왔던 암수 한 쌍의 강아지들을 두 주만에 되돌려 보내고, 근 한 해가 지나서야 다시 데려온 것이 지금의 풍이다. 게다가 동무는 풍이와 함께 데려온 강아지에게서 문제가 발견되어 반납하고 다시 데려온 강아지이다.

농장주인은 처음 데려왔던 강아지를 되돌려 보냈을 때는 흔쾌히 받아주었지만, 다른 강아지로 데려갈 때에는 이미 커버려 분양순위에서 밀려나버린 강아지들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처음에 데려왔던 강아지들보다 좀더 자라 있던 강아지 둘, 벌써 커버려서 강아지를 구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배제되는 시기에 들어가 있던 강아지 둘, 그 둘이 풍이와 동무다.

동무가 낳은 강아지들이 각각 서로 다른 기질로 자라나는 것을 보면 강아지를 처음 데리러 갔을 때 당황했던 생각이 난다. 농장주인은 나에게 여덟 아홉쯤 되는 여러 마리의 강아지를 보여주었는데, 아뿔싸, 하나같이 비슷비슷한 강아지들을 보며 그제서야 내가 강아지를 고르는 방법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거니와 개 자체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니 풍이와 동무는 내가 고른 강아지라기보다는 나와 눈이 맞은 강아지라 할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풍이와 동무는 데려올 때 이미 자기 기질과 성격이 드러나고 있었다.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려올 때 두 강아지는 자신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지금 같으면 그걸 확연히 알아볼 것이지만 그 때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태어난 지 석 달 정도 된 강아지가 낯선 사람의 손에 넘겨져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릴 때 그것들이 느끼는 것은 무엇일까? 호기심일까? 아니면 공포감일까? 개들의 성격은 낯선 것에 대한 태도에서 우선적으로 구별되는 것 같다.

장난기 많고 붙임성 있는 동무는 별일없이 무사히 그 낯선 이동을 마쳤지만 순하고 우직한 풍이는 심한 멀미로 초죽음이 되었다. 휴게소마다 들러 쉬고 다독이면서 2시간 길을 4시간을 넘게 왔지만 토하고 또 토하면서 늘어지는 강아지를 추스르는 방법을 알 수 없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겁먹은 눈을 들여다보면서 내가 이 녀석을 이대로 죽이는 게 아닌가 노심초사했을 밖에.

강아지가 아프다는 것은

처음 데려올 때 애를 먹였을 뿐, 풍이는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다. 대신 동무는 와서 한 달도 못되어 뱀에게 물리는 바람에 보름 넘게 사경을 헤매다 겨우 살아나는 곤욕을 치렀다. 명랑하게 마당을 뛰어다니며 놀던 강아지가 먹지도 않고 누워만 있는데 어디가 아픈지 알 도리가 없으니 그런 답답한 일이 없다.

   
▲ 앓고 있는 동무. [사진제공-주미경]

강아지가 아프면 가만히 있는다. 먹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다. 울지도 않고 칭얼대지도 않고 신음소리조차도 없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엎드려서 그저 가만히 있는다. 그렇지만 절대 엎드린 자리에서 똥오줌을 싸지는 않는다. 다 죽게 되어도 똥오줌을 쌀라치면 비틀거리며 일어나 움직인다. ‘말 못하는 짐승’이라는 말이 어떤 건지 알게 되는 때다.

강아지 몸을 살펴보니 앞다리에 상처가 있어 처음에는 그것이 원인인 줄로만 알았다. 아까징끼 바르고 붕대를 쳐매놓고 시간이 지나면 낫겠지 하며 태평하던 것이 닷새째가 되니 평정심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병원은 물론 약 먹는 것도 꺼려하여 죽게 생기지 않았으면 병원에는 안가는 것이 내 사는 방식이지만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닷새를 꿍꿍 앓고 있는 강아지를 어쩌겠나. 결국 들쳐 안고 여기저기 병원들을 전전하면서 동물병원이라는 데에 대해서도 대충 알게 되었다.

큼직하게 간판을 걸고 잘 차려놓은 병원을 세 군데나 갔지만 검사를 여러 가지 하고서도 시원한 소리가 없다. 한 군데에서는 엑스레이를 찍어보더니 장이 파열되어 수술을 해도 살기 어렵고, 이제 다 죽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오늘을 넘기기 힘들거라나? 이상한 건 수의사가 그렇게 심각하게 사망선고를 하는데도 그 말이 안 믿어지더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 말 때문이었지 싶다. 만난지 한 달인 강아지의 생사에 대해 그토록 간곡하고도 절실한 마음이 되어버린 게 말이다. 강아지 엑스레이 파일을 굳이 받아 챙긴 것도 그래서였을 거다. ‘죽어도 할 수 없지’ 하던 마음이 꼭 살려야겠다는 의지로 돌변했다. 강아지를 안고 나오면서 했던 생각이 “웃기지 마라, 얘가 왜 죽냐? 절대 안 죽는다” 였다.

다음 날 마지막으로 찾아간 병원은 도시취향의 세련된 동물병원이 아니라 시골에만 있는 소나 돼지를 보는 허름한 가축병원이었다. 나이든 수의사와 중년의 수의사가 함께 있었다. 두 사람은 증세를 자세히 듣고, 갖고 간 엑스레이 파일을 열어보고, 강아지를 세심히 살피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더니, 뱀 같은 거에 물린 것 같단다. 항생제 주사 몇 개를 챙겨주면서 맞히고 변화가 없으면 전화를 하라고 한다.

첩첩산중에서 허연 수염의 도사를 만나면 그런 느낌이 아닐까? 나이든 수의사가 보기에 강아지보다도 속이 새까맣게 타들은 내 꼴이 애달팠든 모양이다. 강아지를 안고 나서는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개한테 너무 빠지지 말아요. 개가 사람마음을 다 읽어요.” 한다.

상황이 상황이었으니 만치, 그것은 참으로 마음에 고스란히 새겨지는 말이었다. 개에 대해서 너무나 모른다는 생각이 다시금 고개를 들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개에 대한 탐구는 아마 거기서 시작되었을 거다. 사람과 개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도 그 때부터였을 거다.

동무, 일어나다

개를 기르는 일에 대한 부담을 생각해본 적도 없고 개를 기르는 일을 별치 않게 여긴 것은 뭘 알아서가 아니라 반대로 개에 대해 도무지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강아지를 데려다 마당에 풀어놓고 밥이나 주면 거기서 저절로 자라나는 줄 알았다. 어렸을 때 마당에 있던 개들도 다 그랬으니까.

하지만 사람이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야 부모의 노고를 비로소 알게 되듯이, 어렸을 적 마당의 개들도 그냥 제절로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어머이의 손길과 보살핌아래 있었고, 철없던 나는 그것 또한 내 손으로 개를 기르면서야 알게 된 것이다. 동무의 병앓이는 강아지들이 처음으로 그 존재감을 나에게 드러낸 혹독한 사건이었다 할까.

처방대로 주사를 맞히면서 하루가 지났다. 차도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분간이 안 되는 와중에 병원의 수의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강아지가 어때요? 차도가 있나요?” 그 목소리에 목이 꺽 메인 건 그것이 평범한 일이 아님을 말해준다. 의사가 일부러 전화를 걸어 전날 진료한 강아지의 병증을 물어주다니, 이런 일이 아무 데서나 일어나는 일일까?

동무가 살아난 건 그 다음 날이었다. 수도가에서 물을 먹는 강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가슴 아래쪽에서 앞다리로 무슨 액체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정체를 확인하려고 다가가 강아지의 몸을 두 손으로 들어올리는데 배쪽이 물큰 하면서 물이라도 틀어놓은 듯 액체가 쿨럭쿨럭 쏟아지기 시작한다. 고름이었다.

엑스레이에서 배 전체에 퍼져 있던 정체불명의 뿌연 부유물들이 모두 고름이었던 것이다. 맙소사, 도시의 수의사는 그걸 보고 장이 파열되었다고 했고, 죽는다고 했었다. 믿을 수없이 엄청난 양의 고름이 나오고 가슴 아래 커다란 구멍이 뚫렸는데 거죽이 너덜너덜하다. 두 손을 흥건히 적시면서 고름을 훑어내며 가슴 속에 차오르는 것이야말로 위기를 막 넘긴 것 같은 안도감이다. ‘이 녀석 이제 살았구나.’

수의사에게 전화를 걸어 상태를 설명하니 해야 할 나머지 처치를 일러주었다. 배에 뚫린 너덜너덜해진 구멍에 거즈로 심지를 만들어 박아넣고 붕대를 둘러주니 강아지는 언제 아팠었냐는 듯이 활기를 되찾고 마당을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참으로 놀라운 생명력이다.

사람이 그 정도로 심각한 종처를 갖고 있었다면 그냥은 회복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니 뱀에게 물린 순간 이미 중독되어 쓰러졌겠지. 동무가 사경을 헤매다 살아난 보름 동안은 개라는 동물이 갖고 있는 신비한 해독능력과 놀라운 회복력을 실제로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큰 개라면 독사에게 물려도 아무렇지도 않다고 한다. 동무는 아직 어린 강아지여서 맹독을 이겨내기가 힘들었으리라.

   
▲ 한 살 반이 되었을 때의 풍이. [사진제공-주미경]

개를 먹이는 일이란

살아 돌아온 동무는 아무 탈없이 건강하고 우아한 개로 자라났다. 언제 한 번 말썽부리는 일없이 건강한 풍이도 늠름하고 잘 생긴 개로 자라났다. 풍산개는 중대형견에 속한다. 진돗개보다 몸집이 크지만 진돗개보다 순하다. 그것들이 그렇게 보기좋게 자란 것은 공짜로 된 일이 아니다. 개를 먹인다는 것은, 그것도 큰 개를 먹인다는 것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공장에서 나오는 사료들이 종류별로 천지인데 뭔 소리냐고 하겠지만 내가 떠올린 개밥은 ‘어머이의 개밥’이었다. 무작정, 개를 먹이려면 모름지기 어머이처럼 먹여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개밥을 그렇게 마련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풍이와 동무가 강아지꼴을 막 벗어나면서부터 알게 되었다. 어디를 가든 개밥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세월이 시작된 것이다.

집에서 먹는 밥상에서는 두 녀석이 먹을거리가 나오지 않았다. 비상용으로 사료를 한 포대씩 사놓고, 시장에 가든 식당에 가든 개밥을 챙겨 쓸어 담는 일에 체면을 차리지 않았다. 그 열성이 통했는지 한 군데 식당에서 탕을 고고 남은 뼈다귀들을 가져가도록 약조를 해주었다. 그것이 운수대통한 일이었는지 고생문이 열린 일이었는지는 나중에나 알 일이었지만 말이다.

마당 화덕에 큰 솥을 걸어놓고 여름이나 겨울이나 장작을 때서 며칠에 한번씩 식당에서 얻어온 뼈다귀들을 다시 푹푹 끓여서 개들을 먹였다. 식당 주방장 아줌마가 통이 커서 좀 오래된 고기덩이들도 심심찮게 주었으니, 친구들이 와서 보고는 ‘이 개들 소 뼈다귀만 먹으니 완전 상위 1%’라고 감탄을 하곤 했다.

내 몸통보다 큰 식강에 뼈다귀들이 담기면 그 무게가 얼마나 될까? 그걸 옮기는데 너무나 무거워 쩔쩔매면서도 고생스럽다는 생각을 안 했었나 보다. 한 여름에 장작을 때느라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힘들다는 생각을 안 했었나 보다. 오죽하면 형제들이 와서 보고는 ‘농부가 아니라 개 집사’라고 했겠나.

하지만 모든 일에는 끝이 있는 법이다. 뼈다귀를 나르는 일은 꼬박 한 해 동안 계속되었는데, 주방장 아줌마가 그 식당을 그만두면서 끝났다. 절묘한 것은 그 시기가 풍이와 동무의 가장 중요한 성장기였다는 것이다. 풍산개는 다른 개들보다 좀더 늦게까지 계속 자란다. 개들은 보통 1년이면 성장을 끝내지만 풍산개는 1년 반에서 2년까지 계속 성장한다고 한다. 과연, 풍이와 동무도 풍성한 뼈다귀의 성찬 속에서 1년 반을 넘겨 튼튼하게 자라났다.

사라진 동무

강아지들을 힘들여 먹이고 강아지들이 개로 자라나면서 개에 대한 의문도 함께 커져갔다. 개란 도대체 어떤 동물인가? 풍산개란 어떤 개인가? 하지만 의문은 자라나도 그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낸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집을 지어가며 밭을 개간하고 농사일을 하는 꽉 짜인 일상 속에서 개들이 내 관심의 중심에 위치했던 적은 없다. 그것들은 항상 내 시야의 언저리에 머물러있었고 때론 기특하고 반갑지만 때론 귀찮고 걸리적거리는 존재들이었다.

그렇지만 모든 존재는 그것이 사라졌을 때 역설적으로 자기의 존재를 드러낸다. 이 녀석들도 ‘사라짐’으로써 자기들의 존재를 나에게 단단히 각인시켰다. 그 녀석들을 잃는다는 것이 그토록 가슴 철렁한 일인 줄을 그 때 적나라하게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아직 집이 다 지어지지 않아 마을의 빌린 집과 농장을 왔다갔다 할 때다. 녀석들은 일이 끝나면 줄에 묶이고 아침에 내가 나오면 풀려 돌아다니는 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아마 녀석들이 온 지 한 해쯤 되었을까? 집 내부에 단열재 설치작업을 하고 있었던 날이다.

언니와 동생이 와서 작업을 도와주고 있었는데, 오후가 지나면서 동무가 안 보인다는 말을 두 번 하는 것이었다. 작업에 쫓겨 그 때마다 그저 “올 거야” 하는 말로 넘겼는데, 해가 뉘엿해지고 세 번째로 동무가 안 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정신이 차려졌다. 불안해진 마음에 얼른 일손을 놓고 나가 소리쳐 부르면서 있을 만한 곳을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았지만 동무는 도통 나타나지 않았다.

“동무가 안보인 게 몇 시간이나 됐지?”  “오후 내내 안보였어.” 그러면 지금 5시가 넘었으니 최소한 5시간 동안 사라진 것이다. 그런 적은 없었다. 5시간은커녕 1시간 동안 안보인 적도 없었다. 녀석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긴 하지만 아무리 길어봐야 30분 정도였다. ‘이건 사고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가슴이 철렁하면서 머리가죽이 꽉 조여들기 시작했다.

“중간에 잠깐도 안보였어?”  “응 한 번도 못 봤어.”  “그런데 아까 너 일할 때 풍이가 자꾸 들어와서 너한테 가려고 했어.”  “언제?”  “아까 동무 안 보인다고 하기 전에. 자꾸 너한테 가려고 해서 저리 가라고 내쫓았는데도 또 들어오고 그러더라구.” 그 말에 두 말할 것 없이 나가서 풍이를 찾았다.

풍이의 방법

풍이는 현관 옆에 혼자 엎드려 있었다. 다짜고짜 풍이한테 “풍, 동무 어딨어? 동무 어디 갔니?”하고 물었다. 느닷없는 추궁에 풍이가 일어서더니 멀뚱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풍, 동무, 동무 어딨어?” 몇 번을 거듭해 물으니 심드렁하게 나를 쳐다보던 풍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어슬렁 어슬렁 집 뒤쪽의 골을 향한다. 일단 갈 길을 잡자 풍이의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하는데, 나는 선뜻 길도 없는 골 안으로 내려가지 못한다.

“풍 어디가?” 하면서 부르는 소리를 듣고는 풍이가 멈추더니 나를 돌아본다. 나를 보고 반대쪽을 보고 하더니 다시 가기 시작하는데, 그 몸짓이 마치 ‘따라오세요.’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을 보고 무엇에 홀린 듯 허둥지둥 따라가기 시작했다. 여우한테 홀리면 딱 그렇게 되어질 거다. 풍이가 골을 지나 건너편 능선으로 오르면서 가다가는 서서 뒤돌아보고, 또 가다가는 서서 뒤돌아본다. 마치 내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건너편 능선 위는 아주 큰 인삼밭이다. 잡목과 덤불을 헤치고 능선에 올라서니 풍이는 인삼밭 가장자리를 따라 마을 쪽으로 가고 있었다. 가다가는 서서 뒤돌아보기를 반복하며 풍이는 마을 쪽에 붙은 밭들을 지나 인삼밭 반대쪽 가장자리를 돌더니 인삼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풍 안돼 거기 들어가면 안돼.” 가장자리에 서서 아무리 소리쳐도 소용없다. 풍이는 금방 인삼목과 차광막들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낙심천만이다. ‘저 미욱한 것을 따라 여기까지 오다니…’ 해는 자꾸 기울어 산그림자가 덮쳐오는데 동무는 찾을 길이 없고, 풍이마저 사라진 거대한 인삼밭을 바라보며 가슴이 까맣게 타들어간다. 결국 포기하고, 그래도 혹시 지금쯤 동무가 집에 돌아왔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까지는 버리지 못하고, 인삼밭 사이 둑을 횡단해 집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갑자기 위쪽에서 풍이가 나타났다.

“풍, 집에 가자.” 소리치면서 손짓하여 불러도 풍이는 따라오지 않고 인삼밭으로 다시 올라간다. 돌아오라며 부르는 소리를 무시하고 올라가던 풍이가 멈춰서서 뒤돌아보더니 차광막 사이로 사라진다. 순간 딱히 뭔가 알 수 없는 예감과 기대가 갑작스럽게 솟아난다. 다시 허겁지겁 풍이가 간 쪽을 향해 가는데 차광막 사이에서 풍이가 다시 나타나더니 내가 오는 것을 확인한 듯 다시 뒤돌아간다.

풍이의 그런 행동은 예감과 기대를 대번에 확신으로 바꾸었다. 뛰듯이 풍이를 따라가면서 동무를 소리쳐 불렀다. 키를 넘는 차광막 사이에서 풍이가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기를 두어 차례 하더니 무언가 기척이 들려온다. 풍이가 사라진 마지막 차광막을 돌아가니 거기에 개 두 마리가 서로 반가움에 날뛰며 엉기고 있었다. 동무였다.

동무는 올무에 걸려 있었다. 나를 본 동무는 반가움이 폭발해 펄쩍펄쩍 뛰어오르는데 가느다란 와이어줄이 반짝거리며 동무의 발목을 파고들고 있었다. 풍이는 내가 동무를 찾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나를 데리고 가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잘 들어오지 않던 현장에 들어와 자꾸 나한테 오려고 한 것이 나에게 동무의 사고를 알리려고 한 일일까? 알 수 없다. 진짜 그렇다면 그건 아주 멋진 일이 되겠지만 결론은 유보해두기로 하자.

믿음이 생겨난다는 것

올무를 풀고 함께 집으로 돌아오면서 개 두 마리의 존재가 말뚝처럼 가슴에 박혔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가 네 살 때, 시장에 데리고 갔다가 잃어버리고 끔찍하게 헤매다가 돌아와 아이가 혼자서 집에 와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터졌던 울음이 또 터진 것은 아니지만, 개 때문에도 그런 비슷한 심정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에는 풍이가 인삼밭 올무에 두 번이나 걸렸다. 동무를 앞세우고 찾으러 가면서 동무도 풍이와 똑 같은 방식으로 나를 안내한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처음에 맛보았던 감격이 반복된 건 아니다. 그건 아마도 논리적인 결론을 압도하는 믿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캄캄한 오밤중에 주저없이 동무를 앞세우고 나설 수 있었던 것도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을 거다. 어쨌든 풍이와 동무가 나를 데리고 가는 행동이 우연이 아니라 그것들의 판단과 능력에서 나온 것이라는 결론은 그렇게 내려졌다.

개들이 있어야 할 시간에 없거나 나타나야 할 때에 나타나지 않으면 걱정이 앞서기 마련이다. 개들에게 집중하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있어야 할 시간과 나타나야 할 때를 다 꿰뚫어 아는 것은 어떤 연유일까? 내가 영민하여 집중하지 않고서도 개들의 움직임에 대해 다 파악한 것일까? 그건 아닌 것 같다. 나는 오히려 개들이 나를 가르쳤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풍이와 동무가 가르치는 것들

마을과 동떨어져 자리를 잡은 덕분에 개들을 대개 풀어놓고, 일에 쫓겨 거의 방치하다시피 길러온 까닭에 풍이와 동무는 주변을 별로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한다. 항상 내 곁을 맴돌다가 갑자기 어딘가 사라졌다가는 돌아오고, 돌아와서는 내 곁에 와서 인사라도 하듯이 손과 얼굴을 핥아대는 개들, 세상없이 늘어져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무언가를 향해 쏜살같이 내달려가는 개들, 그것들이 내는 다양하고도 변화무쌍한 소리들, 그것들은 다 무얼까?

풍이와 동무가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거의 짖는 일이 없이 조용하다는 것이다. 여기 농장에 시시때때로 출몰하는 것이 여러 가지 동물들이지만, 동물들에게는 절대 짖지 않는다. 오로지 소리없이 쫓아갈 뿐이다. 마을 개들이 모두 떠나가라 짖어대도 덩달아 함께 짖는 법도 없다. 특히 아는 사람에게 짖는 법이란 없다. 그 사람이 1~2년을 두고 다시 나타나도 알아본다.

나를 보고 짖는 일이야 사전에 없는 일이다. 올무에 걸렸을 때 내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짖어주었으면 대번에 찾았을 테지만, 나에게 짖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갈 수가 없으니 내가 올 때까지 그저 조용히 기다린다. 그러니 나 혼자 가서는 찾을 수가 없다. 풍이와 동무가 짖을 때는 오로지 낯선 사람이 나타났을 때뿐이다. 덕분에 집안에 앉아서 개가 내는 소리만 듣고도 어디에 무엇이 나타났는가를 확연히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이런 거다. 차길에서 집으로 올라오는 길 입구에 차가 와서 멎으면 동무가 짖기 시작한다. 차나 사람이 계속 올라와 중간 모퉁이를 돌면 그때는 풍이도 같이 짖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동무가 짖다 말면 우편물이나 택배가 왔거나 누군가 차를 세웠다가 그냥 간 거다. 풍이까지 짖으면 누군가 여기로 올라오는 것이고, 짖는 소리가 더 세지거나 빨라지지 않으면 길을 잘못 들어선 차가 중간에 돌려 나가는 것이다. 두 마리가 짓는 소리가 마침내 점점 더 빨라지고 세지면 일어나서 나가봐야 한다. 집에 손님이 온다는 신호이니까.

또 산 속으로 가면서 짖으면 반드시 빨리 가봐야 한다. 산을 타는 약초꾼들이 걸려든 것이니까. 사람한테 덤비지는 않지만 개들의 덩치와 소리가 워낙 위협적이라서 사람들이 완전히 공포에 질려있곤 한다. 위축된 사람들이 겁이 나서 혹시 지팡이라도 휘두르면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지 않겠나.

재미있는 것은 낯선 사람에게는 위협적으로 짖어대지만 낯선 사람이라도 내가 아는 사람에게는 곧 짖기를 멈추고 친밀감을 표시한다는 것이다. 마치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다 파악한다는 듯이 말이다. 더 희한한 것은 내가 잘 아는 사람은 사람과 함께 그 사람의 차소리까지 기억하는 것이다. 그래서 잘 아는 사람이 올 때는 차가 집 앞까지 오도록 짖지 않아서 누가 온 줄도 모르고 있을 때도 있다.

동물들에 대한 반응은 좀더 미묘하다. 동물들에 대해서는 개들이 움직이는 속도와 긴장감의 강도로 구별하게 된다. 새를 쫓아가는 움직임과 동물을 쫓아가는 움직임이 다르고, 큰 동물과 작은 동물이 다르다.

새는 까마귀나 꿩같이 큰 새들만 쫓아간다. 새가 땅에 내려앉았을 경우에만 쫓아가는데 별로 긴장감이 없다. 그저 한 번 해본다는 듯이 움직인다. 하지만 온 몸에 팽팽하게 힘이 모이고 나는 듯이 달려가는 경우는 뭔가 큰 동물이 나타났다는 표시이다. 그런 때는 돌아오기까지 꽤 시간이 걸린다.

두 마리 하얀 개가 살구밭을 꿰질러 숲을 향해 나는 듯이 달려가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런 장면을 포착하면 하던 일을 멈추고 넋을 잃고 바라보게 되는데, 개들의 긴장감이 일순 공간을 진공상태로 만들고 대기에 깊은 골이 파이면서 개들이 추격하는 궤적을 따라 공기가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에 멍해지기도 한다.

까마귀와 꿩을 항상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이 놓치면서도 나타나기만 하면 쫓아가는 개들, 쥐를 잡고 닭을 물어오고, 너구리와 고라니를 잡아오고 멧돼지를 추격하는 개들, 그러면서도 사람에게는 너무나 순하고 솟구치는 친밀감을 숨김없이 표현하는 개들, 내가 외출할 때면 줄에 묶여서 내가 진입로를 다 벗어나도록 고개를 하늘로 쳐들고 늑대의 울음을 우는 개들, 그 녀석들은 대체 어떤 존재인가?

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보여주는 그 녀석들의 모습은 모든 개의 일반적인 모습인가, 아니면 다른 개와는 다른 풍산개의 모습인가? 미루고 미루다가 정작 개에 대한 탐구에 들어간 것은 풍이와 동무가 자신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거의 보여준 후의 일이다. 풍이와 동무가 나에게 가르치는 것들을 알아가면서, 한 쪽에서는 ‘저것은 무엇인가?’, ‘저것의 의미는 무엇인가’하는 숱한 질문들이 계속 쌓여가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

 

 

주미경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트위터 뒤로가기 위로가기
댓글
아이디 비밀번호
(현재 0 byte/최대 500byte)
댓글보기(1)
굽은소나무 (qnseksrmrqhr) 2020-01-10 10:19:55
짐승만도 못한....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늘 건강하시길...........
0 0
통일뉴스 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후원하기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당주동 3-2번지 삼덕빌딩 6층 | Tel 02-6272-0182 | 등록번호 : 서울아00126 | 등록일자 : 2000년 8월 3일 | 발행일자 : 8월 15일
발행·편집인 : 이계환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계환
Copyright © 2000 - 2015 Tongilnews. All rights reserved. mail to tongil@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