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공자)


 올페
 - 김종삼

 올페는 죽을 때
 나의 직업은 시라고 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만든 얘기다
 
 나는 죽어서도
 나의 직업은 시가 못 된다
 우주복처럼 월곡(月谷)에 둥둥 떠 있다
 귀환 시각 미정


 내가 가진 첫 번째 직업은 철도공무원이었다. 기관조사. 기관사를 보조하는 자리였다. 그 당시엔 철도고등학교라는 철도공무원을 양성하는 국립고등학교가 있었다. 학비가 무료고 교복과 책도 무료로 주었다. 그래서 주로 가난한 시골아이들이 갔다. 고등학교에 갈 형편이 못되었던 나는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그 학교에 진학했다. 
 
 졸업하면 철도공무원으로 특채되기에 학교에서는 시험문제를 쉽게 내주었다. 공부를 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모여 술을 마시고 영화를 보고 산에 가고 낚시하러 다녔다. ‘축 늘어진 시간- 달리의 <시간의 지속>’은 내게 고역이었다. 집(이모 집에 얹혀살았다)에 와서는 만화방에서 무협지를 빌려보았다. 나는 새벽까지 ‘강호’의 삼매경에 빠졌다. 나는 무림의 고수가 되기 위해 태권도를 배웠다.   

 버스를 타면 눈을 감고 ‘무협의 세계’에 빠져 들어갔다. 나는 무림의 고수가 되어 강호를 휘젓고 다녔다. 항상 하얀 말을 타고 다녔다. 주위엔 미녀들이 끊이지 않았다. 소림사를 위시한 9대 문파를 통합하여 절대 지존이 되었다.  

 졸업하고 김천 기관사 사무소에 발령이 났다. 나는 이제 무림의 고수에서 초라한 하급 공무원으로 돌아왔다. 밤낮으로 다니는 기차에 실려 다녔다. ‘돈벌레’가 되어 고물고물 기어 다니는 삶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다음 해 봄에 폐결핵에 걸렸다. 눈앞이 캄캄했다. 마산의 결핵전문병원으로 통원치료를 다니며 직업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좀 더 좋은 세무 공무원이나 법원, 검찰 공무원을 생각했다. 하지만 환자인 상태에서 시험을 볼 수 없었다. 대학에 가자! 전국의 대학을 다 알아보다 국립사대가 눈에 확 들어왔다. 등록금도 싸고 졸업하면 교사로 특채되었다. 오! 이런 대학이 있었구나!     

 그래서 다음 해에 충북대 사회교육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동생뻘 되는 학생들과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니 불편했다. 고독한 새내기 시절을 보냈다.

 겨울 방학이 되었다. 또 다시 축 늘어진 시간이 내 앞에 놓여졌다. 논문을 쓰자! 섬광처럼 떠 오른 이 한 생각이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꾸리라는 것을 그때는 전혀 몰랐다.

 논문 쓰는 법을 배운 적도 없는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는 긴긴 겨울방학동안 도서관을 오가며 ‘남녀불평등에 관한 소고’를 완성했다. 원고지 60여 매였다. 

 개학이 되고 다시 나는 쓸쓸한 대학 2학년생이 되었다. 4월이 되자 대학에서 ‘4.19기념 논문상’을 모집했다. 오! 이런 상이 있었구나! 나는 써 놓은 논문을 투고했다. 당선이었다. 학보사 기자가 찾아오고 인터뷰를 하고 논문 전문이 대학 신문에 실렸다. 

 심사위원 중 한 분이 지도교수님이었다. 인사차 찾아뵈니 교수님이 일어나셔서 두 손을 맞잡으며 축해해 주셨다. ‘석근아! 너 학문해! 좋은 학자가 될 수 있어!’ 세상에! 학자라니? 교수님이 공부하라고 장학금을 주셨다. 졸업할 때까지 해마다 30만원을 받았다. 등록금이 1년에 20만원도 안되던 시절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직업’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어떻게 살아갈까?’ 항상 ‘형편에 맞는 직업’을 찾아왔는데, 꿈을 꾸는 게 직업이라니!

 그 때 나는 처음으로 하염없이 흘러가던 시간들이 내 앞으로 모였다가 (한참을 고여 있다가) 다시 천천히 앞으로 흘러가는 신비로운 체험을 했다.

 고대 그리스의 시간의 신은 둘이다. 일직선으로 흘러가는 시간의 신은 크로노스이고 내적인 영혼으로 체험하는 시간의 신은 카이로스이다. 나는 그 때 크로노스의 시간 안에서 카이로스의 시간을 경험한 것이다.

 대학 졸업 후 돈이 없어 대학원에 진학하지 못하고 교사로 발령이 났다. 돈을 모아 대학원에 가자! 다시 나는 크로노스의 시간 속으로 들어갔다.      

 1987년 6월 항쟁을 보며 다시 나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맞이했다. 사람의 물결이 역사의 물길을 바꾸다니! 그 뒤 전교조를 하며 나는 꿈을 꾸는 직업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나의 꿈은 결코 파리한 상아탑의 학자가 아니었다.

 아카데믹한 학자의 길이 문득 끊어지자 나는 망연자실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야?’ 나는 무조건 교직을 그만두었다. 백수의 길에 과감히 뛰어들었다. 그 때 어머니께서는 많이 우셨다고 한다. ‘큰 아이가 왜 저러나? 한 번도 저런 적이 없었는데...... .’      

 빈민단체에 들어가 데모를 하고 온갖 강연을 들으러 다녔다.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사회과학 공부를 체계적으로 했다. 한 3년 쯤 지나자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가야할 길이 어렴풋이 보였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시골로 이사를 갔다. 농사지어리라 생각했는데, 이것저것 많은 지역 활동을 했다. 그러다 나의 길이 점점 선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나’라는 인간이 보이고 ‘나의 소명(召命)’ 같은 게 느껴졌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크로노스의 시간 안에 카이로스의 시간이 있었다. 크로노스의 시간밖에 없다면 일생이 너무나 슬플 것이다. 한바탕의 봄꿈. 너무나 허망하지 않는가?    

 하지만 카이로스의 시간이 있다. 과거 현재 미래가 뚝뚝 끊어지는 시간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로 꿰어지는 시간. 오롯이 현재인 시간. 분수처럼 위로 폭발하는 시간. 찰나가 영원인 시간.

 이런 기적은 꿈이 직업이 될 때 일어난다. 돈벌이 수단의 직업은 크로노스의 시간 안에 갇혀 버린다. ‘옥리처럼 우리의 등 뒤에서 채찍을 휘두른다(쇼펜하우어).’

 ‘올페는 죽을 때/나의 직업은 시라고 하였다/후세 사람들이 만든 얘기다’

 ‘나는 죽어서도/나의 직업은 시가 못 된다/우주복처럼 월곡(月谷)에 둥둥 떠 있다/귀환 시각 미정’  

 김종삼 시인은 평생 시를 살았던 고귀한 영혼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하고 행동으로 보여줄 뿐(비트겐슈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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