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代이어 만든 日 강제징용 기념관 30년만에 폐관위기 이용식 '단바망간기념관' 관장...한국노총 초청으로 서울 방문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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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11.25  15: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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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노총은 지난 22일 폐관 위기에 몰린 일본 교토 외곽의 '단바망간기념관' 이용식 관장을 초청해 후원행사를 가졌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일본 교토 외곽의 '단바망간기념관'. 일제 강제징용의 역사를 알리기 위해 1989년 故이정호씨가 자신과 가족의 모든 것을 털어 문을 연 이 기념관이 폐관 위기에 몰려 후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아버지 故이정호씨의 뒤를 이어 30여년 가까이 기념관을 지켜온 이용식(59살) 관장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누적된 운영적자를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기념관 건립에 2억엔이 들었고 20년간 1년 평균 500만엔(약 5,400만원)씩 2억엔의 운영비 적자 등 총 3억엔의 손실이 난 셈이다.

특히 지난 9월 6일 그동안 기념관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연금(200만엔)을 기념관 운영비로 내놓았던 어머니(임청자, 85살)가 돌아가시면서 폐관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노총은 이용식 관장을 한국으로 초청해 22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국노총 13층에서 후원행사를 진행했다.

산하 연맹에서 두루 성금을 모아 전달했고 후원행사에 참석한 설훈, 이용득, 송영길 의원등은 "개인이 이런 기념관을 만들어 낸 것은 사무친 역사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며, "단바망간기념관의 설립과 운영, 폐간에 이르게 된 사정을 전 국민이 알 수 있도록 하고 역사기행 시민들이 들를 수 있도록 하여 다시는 폐관되는 일이 없도록 하자"고 힘을 보탰다.

   
▲ 이날 후원행사에서는 한국노총 산하 연맹에서 성금을 모아 전달했고, 각계 인사들이 단바망간기념관을 폐관 위기에서 구하기 위한 다짐을 밝히며 이용식 관장을 격려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후원행사가 열리기 하루 전인 21일 오후에는 한국노총 대회의실에서 이용식 관장과 기자간담회가 진행됐다.

조선아 한국노총 통일국장은 "양대노총이 매년 8월 진행되는 '일제 강제징용 조선인 노동자 추모사업'의 일환으로 올해에도 단바망간기념관을 방문하여 기념관 운영 지원문제를 다각적으로 협의하려고 했으나 당장 상황이 급박하고 일본을 드나들며 협의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라는 생각에 이 관장을 초청하게 됐다"고 밝혔다.

아울러 양대노총과 단바망간기념관이 맺은 인연과 책임감이 이용식 관장을 서울로 초청해 후원행사를 갖게 됐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지난 2014년부터  단바망간기념관을 방문해 일제강제징용조선인 추모행사를 진행해왔다. 이 기념관이 일본 영토내에서 일제의 강제동원노동을 증언해 주고 있는 유일한 박물관이었기 때문이었다. 

2016년에는 단바망간기념관에 첫번째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건립했다. 일본 영토내에 강제징용 기념물을 세우면 일본 우익 공격 당할 수 있어 우토로 마을 등 다른 장소를 검토했지만 이용식 관장이 "이곳에 강제징용노동자상을 건립해도 좋다. 나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혼쾌히 응해 주었기 때문에 첫번째 강제징용 노동자상이 단바망간기념관에 건립되게 된 것이다.

일본 교토시내에서 북동쪽으로 50km쯤 떨어진 단바지역에는 1889년부터 1983년까지 90여년간 철도 레일과 포신 등 군수물자 생산에 필수적인 망간광산이 약 300여개 운영되었다. 일본 제1의 망간 채굴지역인 이곳에는 1만5,000개에서 2만개의 갱도가 뚫려 있었고 일제는 이곳에 3,000여명의 조선인을 끌고와 강제노동에 동원했다.

일제에 강제 징용되어 16살부터 이곳에서 일하다 1980년대 진폐증을 선고받은 故이정호(1932~1995)씨가 일제 강제징용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폐광산을 매입, 정비해 '단바망간기념관'을 세운 것이 1989년 5월 3일이었다.

진폐증으로 고생하던 故이정호씨는 '이 기념관이 나의 무덤이다. 절대로 역사속에 풍화되어서는 안된다. 돈이 없다면 먹는 밥을 줄여서라도 만들면 된다'는 투지로 3년에 걸쳐 도로도 만들고 갱도도 넓히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마침내 기념관을 완성했다. 

일제 강제징용의 역사, 광산 노동자들의 열악한 작업환경과 진폐증의 역사를 남기고 싶어했던 아버지의 뜻을 따라 맨몸으로 기념관을 만들어낸 아들 이용식 관장은 개관 6년째 되던 1995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지금까지 23년을 단바망간기념관 관장으로 한결같이 자리를 지켜왔다.

지난 2009년 5월 31일 운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일시 폐관했다가 뜻있는 시민사회의 도움으로 2012년 재개관하는 등 곡절도 겪었고 2016년 8월 24일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이곳에 첫번째 '강제징용 조선인 노동자상'을 건립하기도 했다.

   
▲ 한국노총은 이용식 관장을 명예조합원으로 위촉하고 위촉장을 수여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단마망간 기념관을 살리자. 역사를 지키자"


다음은 이용식 관장과의 일문일답. 간담회는 일본 오사카 미츠메이칸대학교 김연태 연구원의 통역으로 진행됐다.

□  기자 : 단바망간기념관 설립 배경과 현재 상황에 대해 설명해 달라

■ 이용식 관장 : 단바는 교토구 안에 있는 교토시 서북쪽에 있다. 왜 이곳에 단바망간기념관을 세웠는지 설명드리겠다. 

일본에서 강제징용과 관련된 가장 많은 광산인데, 2만개 정도의 광산 중 절반에 가까운 광산에 강제징용이 이루어졌다.

망간을 캐는 광산이 기념관 주변에 300곳이 있었다. 그 300개 광산에 15,000개 내지 2만개 갱도가 있었다. 그곳에 3천명 정도의 조선인이 모집 또는 강제로 끌려와서 일했다.

광산에서 일하는 분들은 기본적으로 발파를 하면서 굴을 파기 때문에 연기로 인해서 진폐증에 걸린 분들이 꽤 많다. 돌아가신 아버지 고 이정호관장도 진폐증을 앓아 18년동안 고생하시다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9년전 박물관을 만들고 싶다고 말씀을 꺼냈다.

3년에 걸쳐서 아버지와 형제들, 가족들이 직접 기념관으로 들어오는 도로도 만들고 건물도 만들었으며,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갱도도 만들어 넓혔다.

아버지는 기념관 개관 이후 6년 지나 결국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만들고자 했던 기념관은 강제연행의 역사, 광산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진폐증으로 고생했던 그런 역사를 담고 싶어했던 것이다.

실제로 일본에는 약 5천개의 박물관, 기념관이 있는데 강제징용이나 위안부, 일본인 아닌 군인·군속 관련 박물관은 한 곳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가 만들고자 했던 박물관은 일본에 대한 레지스탕스와 같은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이 전후에 두세번의 사죄를 했다고 할 수 있는데, 3~4천만 아시아의 희생자를 생각하면 그나마 두세번 했다는 사죄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리고 개인에 대한 보상도 하지 않고 있고 기본적으로 침략했던 사실 자체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여전히 재일 코리안을 차별하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다양한 차별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재일 코리안으로서는 우리 스스로의 뿌리를 확인하기 위해서 이런 기념관이 있으면 직접 볼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선조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박물관을 만들었다.

그런데 지난 9월 6일 어머니(임청자, 85살)가 대동맥 이상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동안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기념관을 아버지가 남기신 유산이라고 생각해서 본인이 받는 연금을 기부하고 기념관에서 자원봉사하듯이 일하셨다. 

기념관 유지하기 위해서는 1년에 약 500만엔 정도가 필요한데, 그중 어머니가 200만엔 정도를 기부했다고 할 수 있다. 제가 100만엔 정도를 채웠었다.

그런데 10년전쯤을 생각해보면 약 300만엔 정도의 수입이 있었다. 그땐 사람들이 꽤 왔었다. 지난 10년사이에 한일관계가 안좋아지고 일본이 우경화되면서 학생들의 수학여행, 연수, 노조 방문 등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리고 한국으로부터의 견학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그래서 가장 사람들이 많았을 때와 비교하면 1/3정도로 방문객이 줄어든 상태이다. 그런 가운데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박물관을 지키고 앉아있을 사람도 새로 구해야 하고...

저도 나이가 있고 이런 저런 지병이 있는 관계로 이정도에서 그만두어야 하지 않을까해서 폐관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다.

 

   
▲ 이용식 관장은 21일 한국노총 대회의실에서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 후계자의 문제와 자신의 건강 및 나이 문제, 운영 적자의 문제를 지금 기념관이 겪고 있는 어려움으로 꼽고 도와 주시는 주변분들과 상의해 좋은 방안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가장 많이 왔을 때 방문객은 몇명 정도였으며, 지금은 얼마나 되나?

■ 2008년이 가장 많아서 연간 5,200명 정도라고 기억이 되고 작년에는 700명 정도가 방문했다.


□  스스로를 차별에 맞선 레지스탕스로 생각한다고 말했는데, 일본 우익의 반격은 어느 정도인가?

■ 일본내 헤이트스피치(혐오발언)를 많이 하는 전국적 단체인 재특회(재일특권을 반대하는 모임)는 '일본에는 강제연행이라는 것이 없었는데 그런 거짓말을 하는 기념관을 만드는 게 말이 되느냐'는 전화나 메일이 왔었는데, 강제징용 노동자상이 건립된 이후에는 매일같이 협박전화나 이메일이 왔다. 주로 '강제연행 거짓말이다. 꺼져라. 나가라' 등 협박성 내용이다.

일본이 저질렀던 가해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면 일본에 안좋은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는 일본인들이 많다.

일본에 대해서 안좋은 이야기이니까 반일이라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안에 원폭기념관을 짓고 추모행사를 크게 하는데, 그럼 일본은 지금 반미를 하는 것이냐고 저는 묻는다.

일본은 원폭박물관을 크게 지어놓고 평화를 위해 지었다고 하고 있지 않나. 저는 단바망간기념관도 마찬가지로 그것 역시 평화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느냐, 왜 그걸 반일이라고 주장하느냐고 반박한다.

일본에 대해 나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일본이 과거에 한 일을 그대로 기록하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가해의 역사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일본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자신들의 가해역사를 일본이 만들어서 기념한는 일을 일본이 나서서 한다면 과거 침략했던 주변국가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고 다시 성실한 관계를 통해서 관계를 회복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일본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는 것이다.


□  아버지가 16살 때부터 광산에서 일했다고 했는데 언제까지 일했는지, 또 여러 형제 중 이용식 관장이 이어받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 아버지는 38살까지 20년 넘게 광산에서 일했다. 그 뒤에는 광산 운영을 했다. 기념관을 만들자는 이야기를 했을 때 다 돈을 모았었는데 10만엔 정도밖에 없었다. 물론 지금 환율로 계산하면 다르지만...

운영비도 없었기 때문에 기념관을 만들기도 쉽지 않았다. 돈을 벌면서,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면서 기념관을 만들어야 했다. 아버지가 보기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던 자식이 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저는 3남 2녀 중 넷째이고 아들 중에는 막내이다.


□  본인은 어떤 결심으로 아버지와 기념관 만드는 일을 시작했나.

■ 아버지가 기념관을 만들겠다고 했을 때 오사카에서 일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불러서 도와달라고 이야기하셨다. 돈도 없는데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느냐고 했더니 아버지가 "마지막 부탁이니까 제발 들어줘라. 같이 해주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진폐증에 걸린 후에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계속 코에 산소호흡기를 달고 고생하셨다. 아버지 뿐만 아니라 주변 분들 중에도 산재로 인정받는 일 등을 도와드리곤 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그만할까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결국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긴 게 기념관이라고 생각해서 결국 없애거나 헐지 못하고 유지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기념관을 만들었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여러 비슷한 처지에 있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되어서 기념관 일을 계속 해왔다.

처음 기념관을 만들때는 그럴 돈이 있으면 부모님의 노후를 위해서 쓰거나 장례식때 쓰시라고 했는데, 아버지는 "진폐증이라 곧 죽을테니 노후 이런 것은 필요없고, 어머니(이용식 관장 할머니)만 한국으로 돌아가셔서 혼자 남은 내 무덤을 만들거나 장례식도 필요없으니까 유골은 한국이 보이는 바다에 뿌리고 그럴 돈이 있으면 기념관을 세우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기념관을 만들고 나서 먼저 자신을 일본에 두고 한국으로 돌아간 어머니를 보러 가야겠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에게는 어머니를 보러 가야하겠다는 생각보다도 기념관을 세우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 자신이나 가족보다도 역사를 더 우선했던 분이라고 기억한다.


□  기념관 일은 몇살에 시작했나. 또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제가 관장이 된 것이 만 35살때였다. 일본정부로부터 지원은 커녕, 보조금도 1엔도 받은 적이 없다. 결국 방해, 무시의 연속이었다. 

무엇이 기뻤을까. 멀리 한국에서 와서 아버지와 우리가 만들어 유지하고 있는 뜻에 대해서 이해해주고 공감해주는 그런 순간들이 기뻤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저 뿐만 아니라 재일 코리안들은 계속 차별받으며 살고 있다. 제도적인 차별도 여전히 남아 있다.

전쟁중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일본 사람들은 전혀 공부하지 않는다. 학교에서도 언론에서도 말하지 않는다. 왜 일본에 재일 코리안들이 그렇게 많이 있는지도 일본인들은 모른다. 

광산의 역사와 재일 동포들의 역사를 알리는 일을 계속 해왔기 때문에 그런 재일 동포의 처지를 이해하는 일본인도 조금은 늘어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 이 관장은 멀리 한국에서 온 방문객들이 아버지와 자신이 기념관을 만들고 유지해 온 뜻을 이해해 줄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기념관의 정상운영을 위해 필요한 제안이나 부탁, 요청할 사항은?

■ 다시 생각해보아도 기념관 운영이 참 어렵다고 생각이 드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일은 제가 곧 환갑이 되는데 제 뒤를 이을 젊은 인재를 육성하는 일이다. 

광산일은 '기술의 백화점'이라고 한다. 다양한 기술이 필요한 곳이어서 속성으로 배우더라도 5년은 걸린다. 그 다음이 돈이다. 

계속 적자인데, 지금 연간 700명까지 줄어들었다. 계속 줄어들면 그 적자는 심하고 커질 수 밖에 없겠지. 거기다가 어머니가 자원봉사로 메꿔주었던 인건비도 채워야 하는 것이고. 그리고 사람을 키우기 위한 재정도 필요할 것이다. 

정말 금전적으로 적자폭이 너무 크기 때문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다.

만약 기념관이 없어진다면 일본 정부는 좋아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이번에 초청받아서 왔는데, 상황을 공유하고 논의해 보자는 첫 자리이다. 기부해달라거나 도와달라고 호소할 상황은 아닌 것 같다. 은퇴할 생각도 있는데 그렇게 기부를 받으면 은퇴도 못하게 되지 않겠나(웃음). 멀쩡해 보이지만 당뇨, 천식이 있고 여기 저기 병원을 다니고 있다.


□  돌아가신 어머니는 평소 기념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 어머니는 항상 기념관에 대해 아버지가 만들고 남겨놓은 것이라는 말을 줄곧 하셨는데, 그렇기 때문에 쉽게 문닫으면 안된다고 말씀하셨다.


□  방문객을 맞으면서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었다면.

■ 기념관에서 강연형식으로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럴때면 일본이 3천만명 이상의 아시아 사람들을 독일 나치처럼 학살했다고 말한다. 강제연행의 경우 일본 국내로만 300만명을 끌고 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군인·군속에 관한 , 위안부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면 화를 내면서 나가 버리는 일본인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일본의 과거 가해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이 결국 일본을 위하는 것이라고 말하면 왜 그런지를 따져 물으면서도 듣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서 그런 이야기를 듣고 "많은 공부가 됐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한일관계의 화해를 위해서도 도움이 되겠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다. 그럴 때면 조금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해 정말 기쁘다.


□  일본정부에 지원요청을 한바는 없었는지. 있었다면 반응은.

■ 처음 개관할 때부터 일본 행정관청에 여러번 찾아 갔었다. 교토부 내에 교토시가 있다. 정말 멀리 떨어져 있다. 교토시 북쪽에 케이호쿠 지소가 있는데 여길 여러번 찾아갔다. 박물관 만드니까 보조금 달라고 말했다. 

그런데 아버지 친구가 "가봐도 의미가 없다. 네가 조선인이기 때문에 아무리 가봐야 도움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이야길 들었다. 그 뒤로는 저도 아버지도 보조금이나 지원금을 요청하기 위해 행정관청 쪽에 다니지 않았다. 차별을 당한 것이다.


□  아버지는 어떻게 일본에 정착하게 됐는지. 박물관 만들기까지의 과정을 말해달라.

■ 아버지는 2살때 일본으로 오셨다. 경남이 고향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조선이 식민지가 되고 나서 상황이 어렵고 힘드니까 일본에 가면 조선에 있는 것 보다 좀 더 낫지 않을까 해서 먼저 일본에 건너와 있던 아버지의 형님을 찾아 아버지의 손을 잡고 일본으로 건너왔다.

학교도 다녔고 유리만드는 형석을 캐는 광산에서 일도 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일본에 오자마자 일찍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니까 할머니는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남동생(작은 아버지)도 조선에서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재혼을 하셨다고 들었다. 주소를 찾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나이많은 형님인 큰 아버지 손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까 배불리 먹기는 어려운 상황에서 성장했다고 들었다. 일본공산당에서 활동을 하다가 제명처분을 받았고 재일총련에서 활동한 적도 있지만 금방 관두었다. 기념관은 진폐증 걸린 분들을 돕기 위한 활동을 하다가 만들게 된 것이다. 기념관 건립 전후에는 진폐증이 심해져서 다른 활동을 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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