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회 조용수언론상 수상자로 선정된 민족일보 기자 출신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과 4일 서울 광화문 사무실에서 기념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별로 한 일도 없는데 상을 받게 된다는 게 부끄럽지만 기쁜 일이다.”

통일뉴스 창간 19주년 기념식과 더불어 진행될 ‘제1회 조용수언론상’ 시상식 수상자로 선정된 민족일보 기자 출신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은 구순을 넘겼지만 소년스런 부끄러움을 내세웠다.

조용수언론상심사위원회는 “다방면으로 수상 후보자를 추천받고 물색해 제1회 조용수 언론상 수상자로 김자동 회장을 만장일치로 결정했다”며 “만시지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린다”고 오히려 죄송함을 표했다.

4일 오후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인근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사무실로 찾아가 만난 김자동 회장은 귀가 어두운 것을 빼곤 건강한 모습이었다. 오랜 벗 임재경 한겨레신문 초대 부사장이 통역사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김자동 회장과의 인터뷰에는 김 회장의 오랜 벗 임재경 한겨레신분 초대 부사장(오른쪽)이 배석했다. [사진 - 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김자동 선생은 “조용수 사장은 사실 나이가 나보다 한두 살 밑”이라며 “박정희가 자기가 빨갱이가 아니라는 걸 (입증)하려고 이 사람도 빨갱이, 저 사람도 빨갱이라고 해서 죽였다고. 그때 언론계에서 대표된 게 조용수 사장이야”라고 먼저 조용수 사장에 대한 기억을 꺼냈다.

1961년 4.19 공간에서 민족일보를 창간한 조용수(1930-1961) 사장은 5.16군사쿠데타 세력에 의해 1961년 12월 21일, 31세의 꽃다운 나이에 사형이 집행됐다. 민족일보(1961.2.13.~1961.5.19.)의 폐간과 언론사주의 처형은 역사를 찾아보기 힘든 일로, 2008년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재심에서 무죄를 판결했다.

김자동 선생은 “신문은 그때 분위기에 맞춰서도 그렇고 상당히 제일 진보적인 신문으로 인정받을 정도로 할 소리 하고 그랬다”면서도 “별거 아닌데 군사깡패들이 와서 죽인 것”이라고 말했다. 민족일보의 사시(社是)나 논조가 지금 기준에 비추어 보면 보편적 민주주의나 평화통일 정도에 불과했다는 것.

고승우 심사위원장은 “아마 민족일보 기자를 지내고 현재까지 민족일보의 사시내지 정신을 지키며 사신 분은 김자동 회장이 거의 유일한 분이라 심사위원 모두가 의견의 일치를 봤다”고 밝혔다.

민족일보는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는 신문’,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는 신문’, ‘근로 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 ‘양단된 조국의 통일을 절규하는 신문’을 사시로 내걸고 창간돼 가판에서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다 5.16군사쿠데타 직후인 5월 19일 92호를 끝으로 폐간당했다.

<선정 이유>

조용수언론상 심사위원회는 제1회 수상자로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을 선정했습니다. 민족일보기념사업회는 2019년 조용수언론상을 제정하고, 심사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심사위원회는 다방면으로 수상 후보자를 추천받고 물색해 제1회 조용수 언론상 수상자로 김자동 회장을 만장일치로 결정했습니다.

만시시탄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아마 민족일보 기자를 지내고 현재까지 민족일보의 사시(社是)내지 정신을 지키며 사신 분은 김자동 회장이 거의 유일한 분이라 심사위원 모두가 의견의 일치를 봤습니다.

조용수 언론상 선정 기준은 <민족일보>와 조용수의 정신입니다. 그것은 바로 <민족일보>의 사시에 오롯이 박혀있습니다. ‘민족의 진로를 가르키는 신문, 근로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는 신문, 조국의 통일을 절규하는 신문’ 그것입니다.

<조선일보>에서 언론계 활동을 시작한 김자동 회장님은 61년 <민족일보> 사건을 기화로 언론계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 <한국전쟁의 기원>과 <모택동 전기> 등 <민족일보> 사시처럼 민족의 진로를 가르키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특히 1997년에 직접 ‘민족일보사건 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고, 초대 위원장으로 민족일보사건의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데 앞장 섰습니다.아무도 <민족일보>의 진실과 비극을 기억하지 않으려 했던 당시 그의 헌신적 노력이 없었다면 민족일보 사건은 영원히 묻혔을지 모릅니다.

김 회장은 1987년 헌법에 임시정부 법통이 명시되자, 임시정부 독립정신의 의미를 확산시키기 위해 (사)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 확립’에 매진했습니다. 이 역시 <민족일보>가 창간 후 첫 번째 사업으로 시행한 독립운동가 생활을 돕는 사업과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김 회장의 노력으로 드디어 임정기념관이 건립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특히 김 회장은 민주화 역행 국면에서, 특히 지난 촛불혁명의 중요한 시기에서 올바른 민주화의 길을 지도했습니다. 김 회장은 구순이 넘었지만, 자서전의 제목과 같이 <영원한 임정소년>이었으며 <영원한 민족일보 기자>였습니다. 그가 <민족일보>에 기여한 공로를 따져볼 때 이 상이 오히려 작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다시 한번 김자동 회장께 제1회 조용수언론상을 드리게 된 것을 축하드리며 아무쪼록 건강하시 빕니다.

2019. 11. 6.

조용수언론상 심사위원장 고승우(민주언론운동연합회 전 이사장)
                  심사위원 원희복(민족일보기념사업회장)
                  심사위원 이계환(통일뉴스 발행인)

김자동 선생은 “4.19후 분위기는 평화통일이 고조된 분위기야. 민족일보는 그 분위기에 맞추기도 하고 상당히 평화통일을 주장했다”며 “자기(조용수)가 과거에 우파 관계한 사람인데, 군사정권이 왔다고 해서 큰 해가 오리라고 생각 안 했다.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는데 그런 위험성을 안 느꼈다”고 안타까워했다.

▲ 2007년 통일뉴스 창간 7주년 기념식에서 민족일보 관계자들이 통일뉴스 기자들에게 민족일보 영인본을 전달하며 민족일보 복간운동을 마감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통일뉴스 창간 11주년 기념식은 '민족일보 조용수 50주기 기념 학술토론회' 형식으로 진행됐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조용수 사장의 동생 조용준 선생과 지금은 고인이 된 민족일보 기자 출신 전무배 선생 등과 민족일보 복간 운동도 한때 추진했던 선생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지만, 경제적 여유도 없고, 신문사 만드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며 “한겨레신문이 잘하고 있고, 경향신문도 괜찮은 신문”이라고 칭찬했다.

김자동 선생과 조용준, 전무배 선생 등은 2007년 통일뉴스 창간 7주년 기념행사에서 ‘민족일보의 얼을 통일뉴스가 이어 받는다’고 공포하고 민족일보 영인본을 통일뉴스 기자들에게 전달함으로써 복간 추진운동을 마무리지은 바 있다.

김자동 선생은 1928년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가 가문에서 탄생했다. 할아버지 동농 김가진과 부친 김의한 선생과 모친 정정화 여사 모두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원으로 활동했다. 선생은 2004년 (사)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지금까지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선생은 “평양 갔을 때 분위기가 연례 행사로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정권이 바뀌었다. 이명박이 와서 완전히 남북관계가 끊겨서 지금까지 안 된다”며 “현재 남북관계가 문재인 대통령 오고 나서 어떻든 조금씩 좋아지는 편이니까 잘하면 금년에 되리라고 했는데 어렵고, 내년에는 가능할 것 같다”고 기대감을 내비쳤다.

▲  2006년 평양 룡성구역 소재 재북인사의묘를 찾아 선친 김의한 묘를 처음으로 참배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선생은 2006년 재북애국지사후손 성묘단을 조직해 평양을 방문해 선친 김의한이 묻혀 있는 재북인사묘역을 참배한 바 있지만 딱 한 차례로 끝나고 말았다.

고승우 심사위원장은 “김 회장은 1987년 헌법에 임시정부 법통이 명시되자, 임시정부 독립정신의 의미를 확산시키기 위해 (사)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친일청산과 민족정기 확립’에 매진했다”며 “김 회장의 노력으로 드디어 임정기념관이 건립되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했다.

선생은 “지금은 사실 친일파 앞잡이 하던 사람은 다 죽었다”며 “인적 청산 문제는 지금 논의할 수 없고, 단지 역사는 제대로 기록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사람은 왜놈 앞잡이, 이 사람은 독립운동을 위해, 항일투쟁을 위해 노력하고, 이런 것을 계속 밝혀나가야 한다”는 것.

▲ 김자동 회장은 통일 보다는 우선 평화가 정착돼야 한다며 통일뉴스의 분투를 당부했다. [사진 - 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민족일보의 얼을 이어받기로 한 통일뉴스가 창간 19년을 맞았다고 덕담 한마디를 부탁하자 선생은 “생전에 통일이 되는 걸 보려고 오래 살았는데 지금은 그런 기대를 안 한다”며 “우선 평화가 정착되길 바라고 그러기 위해서 통일뉴스가 계속 분투해 노력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제1회 조용수언론인상은 6일 오후 6시 서울 한국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열리는 통일뉴스 창간 19주년 기념식과 함께 진행되며, 원희복 (사)민족일보기념사업회 이사장이 시상할 예정이다.

▲ 김자동 회장은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외길을 걸었다. [사진 - 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1928년 상하이 임정청사 인근 아이런리에서 독립운동가인 부친 김의한 선생과 모친 정정화 여사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김구, 이동녕, 이시영 선생 등 독립운동가들의 품에서 임시정부와 함께 자랐다.

1946년 조국에 귀국한 필자는 보성중학과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거쳐 《조선일보》와 《민족일보》 등에서 기자생활을 했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에 의해《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이 사형당하는 것을 겪으며 언론계를 떠났다. 쿠데타 직후 민주공화당이 요직을 제안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군사정권에 협조하지 않은 일은 잘 알려지지 않은 일이다. 민주화운동에 기여하고자 하는 열망을 1980년대에 브루스 커밍스의《한국전쟁의 기원》,《모택동전기》(한수인 저) 등을 번역하면서 표출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새롭게 탄생한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이 기술되면서 저자는 임시정부의 의의를 교육하고 사료를 발굴하는 일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나 역대정부의 무성의로 여의치 않았다. 이 사업을 민간운동으로 발전시키고자 2004년 (사)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지금까지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민족일보사건 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든 저자와 유가족 등의 노력으로《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은 명예를 회복했다. 2011년 《한겨레》 ‘길을 찾아서’란에 ‘임정의 품 안에서’라는 제목의 글을 83회 연재했다. 중국어와 영어에 능통한 저자는 지금도 국제관계에 남다른 식견을 가지고 있다.

(제공 - 민족일보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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