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민간인학살사건 직전 벌어진 참극, 무고한 민간인 705명을 학살

한국전쟁 당시 지리산 일대 공비토벌작전 과정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산청·함양사건 희생자를 기리는 ‘제68주기 산청·함양사건 양민희생자 제32회 합동위령제 및 추모식’이 1일 경남 산청군 금서면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에서 유족, 주민, 학생과 관련공무원, 국회의원 등 6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서울신문 2019.11.2)

경남 산청군·함양군·거창군은 합천군과 함께 국회의원 1명이 선출되는 지역구로 되어 있다. 국회의원 1명을 뽑는 지역구 속에 이들 지역이 포함된다는 것은 매우 가까운 이웃 지역을 의미한다.

산청·함양과 거창에서 6.25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2월 국군 11사단 9연대에 의해 민간인 1465명이 학살당했다. 산청에서 551명, 함양에서 181명이 각각 살해된 이틀 뒤 거창에서 733명(15세 이하 어린이 364명)이 참혹한 변을 당했다.

거창사건과 함께 발생한 산청·함양사건 그 참극의 전모가 최근에야 알려진 끔찍한 야만적 집단학살이었다. 거창과 함께 부근의 산청군·함양군 등 3 곳에서 3일 동안 국군이 1천 여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대 참극은 이승만 대통령이 최종적 책임을 지는 것을 부인하는 상황에서 가해자는 거의 대부분 처벌받지 않았다. 설령 재판을 받아도 특사로 풀려났다.

산청군·함양군·거창군 사건은 제주 4.3, 여수·순천 사건, 한국 전쟁 과정에서의 민간인 학살 등 멸공통일을 외치던 이승만 집권 전후에 발생한 참극의 일부이다. 이승만은 미군정에 의해 해방정국의 권력집단이 된 친일세력과 결탁해 집권 야욕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제주 4.3에서 동족을 대량 학살했다. 1947년 발생한 4.3은 미군정이 구소련의 남하와 중국의 공산혁명을 의식해 친일세력이 주장한 사회주의 세력의 무장봉기로 받아드려 제주도민 30만 명 가운데 3만 여명이 학살당하는 참극으로 이어졌다.

미국은 1948년 이승만 집권이후 미군을 철수시켰지만 고문단 5백 여 명을 잔류시켜 한국군의 현대화와 훈련을 지원했다. 그러다가 6.25가 일어나 유엔군이 참전하자 미국이 그 사령관을 맡았고 전쟁 기간 동안 발생한 무수한 민간인 학살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미군은 6.25 전쟁 기간 동안 군경이 민간인을 집단학살하는 현장에 있는 모습이 당시 사진 등에서 나오는데 이를 통해 미국이 이승만 정권의 민간인 집단 학살에 직간접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산청군·함양군·거창군 사건이 발생하기 두 달 전인 1950년 11월 29일 남원의 사단본부의 참모회의에 참석하려고 지리산의 고동재를 넘던 미 군사 고문단의 리 대령, 장교 2명, 사병 28명이 적에게 공격당하여 사망했는데 당시 11사단 9연대가 만행을 저지른 계기의 하나로 제기되기도 했었다.(국방부, 한국전쟁사 59 및 제4권, 전사 편찬 위원회 편, 1971)

1951년 발생한 산청군·함양군·거창군 사건은, 이승만 정권과 미군 사령관의 한국 민간인의 인권을 철저히 짓밟는 만행이 벌어지던 시절 11사단장 최덕신의 ‘견벽청야’ 작전명령에서 비롯된 참극으로 지적되었다. 최덕신은 70년대 후반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86년 북한으로 귀국해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견벽청야 작전은 주변에 적이 사용할 만한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제거해 적군을 고립, 약화시키는 방식이다. 이 작전은 최덕신이 중국 황포군관학교 시절 배웠고 훌륭한 전과를 경험했다는 것인데 아군이 아니면 지역의 주민 또한 제거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최덕신이 민간인을 실질적 적대세력으로 보고 그 제거를 지시한 견벽청야 작전도 당시 이승만과 미국의 무자비한 민간인 대책이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산청군·함양군·거창군 민간인학살사건은 당시 11사단(사단장 최덕신 준장), 9연대(연대장 오익경 대령), 3대대(대대장 한동석 소령) 병력이 민간인 1천 여 명을 천인공노할 방식으로 무지막지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최덕신은 “공비가 고기라면, 주민은 물이다. 작전지역 안의 인원을 전원 총살하라, 공비들의 근거가 되는 건물은 모두 소각하라, 적의 보급품이 될 수 있는 식량과 기타 물자는 안전지역으로 후송하거나 불가능할 때는 모두 소각하라!”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방부는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이후 후방에 흩어져 있던 인민군 병력과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국군 제11사단을 창설했고 제9연대와 제13연대·제20연대를 예하부대로 두었다. 제11사단은 1950년 10월 4일부터 1951년 3월 30일까지 경상남도 일부와 전라남도·전라북도 전역에서 작전을 벌였다.

거창사건은 토벌작전의 제4기에 해당하는 1951년 2월 1일부터 3월 31일 사이에 발생한 것이다. 제11사단 13연대 3대대 소속의 군인들은 전북고창군 고창읍 백양마을 민간인 학살 사건을 저지른 것으로 한국전쟁사료59권에서 확인되었다.

11사단이 저지른 이 민간인학살 사건은 제주4·3사건, 여순사건, 보도연맹학살사건, 광주항쟁 등과 함께 근현대사에서 손꼽히는 국가권력이 자행한 반인륜적 범죄행각이다. 거창사건은 학술발표 등을 통해 사건의 전개과정이 상세히 정리된 반면, 산청·함양사건은 피해 지역의 각개 상황이 확인되었다가 그 과정 등이 최근에야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산청군·함양군·거창군 민간인학살사건 등 이승만 정부 수립이후 저질러진 국가 범죄의 경우 대부분에서 드러나는 공통점이다. 먼저 진상규명부터 적극 저지 또는 회피했다. 거창군 민간인학살사건의 경우 국군이 공비로 위장해 국회조사단의 현장 접근을 막기도 했다.

대통령이 최종적 책임을 지는 것을 부인하는 상황에서 가해자는 거의 대부분 처벌받지 않았다. 설령 재판을 받아도 특사로 풀려났다. 이승만은 산청군·함양군·거창군 민간인학살사건의 경우 최종책임자인 신성모 국방장관이나 최덕신 사단장은 재판대상에서 제외하고 재판에 넘겨진 11사단 연대장 등이 실형을 선고받자 1년도 되지 않은 다음해 모두 특별사면 했고 이들 중 일부는 중용했다.

그 뿐 아니다. 정치권력은 피해 지역을 불순분자들의 거주지라는 식으로 낙인을 찍어 그 위상을 왜소화시켰다. 피해자들은 겁에 질리거나 후환이 두려워 진상규명이나 배상 등의 요구를 하지 못했다. 피해자를 분리시키고 그러면서 갈등을 야기하는 식의 정치공작이 자행되었다. 비극의 범위를 축소시켜 사회적 이목이나 역사적 평가를 왜소화하려 하고 그런 과정에서 해당 지역 주민간의 갈등을 유발하기도 했던 것이다.

박정희는 쿠데타를 일으켜 국가 범죄사실을 폭로하거나 주장한 사람들을 처벌하거나 기념지조차 훼손했다. 군이 자행한 천인공로할 범죄를 군사 쿠데타 세력이 비호하고 면죄부를 주는 행위를 한 것이다. 그러다가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그래도 진상규명과 피해 배상 등의 요구가 일부 관철되기도 했다. 그러나 진상규명과 피해 배상 등을 통해 재발을 방지할 장치를 만들기까지 가야할 길은 아직도 까마득하다.

오늘날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정부의 보상 등의 조치를 보면 일관되게 희생자들을 축소하거나 그 역사적 의미를 왜소화 시키려는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산청군·함양군·거창군에서 자행된 국군의 민간인 학살사건처럼 5.18광주 항쟁의 경우도 유사하다. 광주항쟁 당시 전국의 언론사에서 신군부의 학살에 항거해 검열, 제작거부운동이 벌어졌고 그 보복으로 1천 여 명의 언론인이 불법해직되었지만 광주항쟁의 일부분으로 포함시키지 않았다. 광주를 지역 투쟁으로 축소시키려는 음모의 결과였다.

1987년 민주화가 성취되고 김영삼(金泳三) 정부가 들어선 이후 유족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1996년 관련 특별법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어 명예회복과 위령사업을 벌이게 되었다. 이 법률에 따라 사망자 피해유족을 확정하고 거창군 내에 위령시설을 설치했다.

피해자와 유족은 그러나 국가로부터 어떠한 배상도 받지 못했는데 2004년 3월 국회에서 여야합의로 특별조치법 개정 법률안이 통과되었지만, 재정 부담을 이유로 정부가 거부한 바 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정국이어서 대통령 권한대행이었던 고건은 ‘한국전쟁 관련 피해 보상이 통과되면 국가재정에 부담이 된다’는 이유를 들어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후 16,17,18대에 걸쳐 국회를 통과했지만 정부는 ‘국가재정의 부담’을 들어 보상을 거부했다.(한겨레 2018.5.11)

산청군·함양군·거창군 민간인학살 사건은 1951년 군사재판과 1960년 제4대 국회 조사, 그리고 특별법에 의한 명예회복 조치, 언론보도 등을 통해 국군 등의 가해와 민간인 피해가 많이 알려졌지만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진상조사’는 이뤄지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에 대해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 의원 11명은 지난 6월 ‘거창사건 및 산청·함양사건 관련자 배상 등에 관한 특별법’을 발의했다. 관련자 및 유족에 배상금·의료 지원금·생활지원금 지급, 추모사업 지원 등이 주요 내용이다.

군경의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10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에 대해 “국민의 기본권이 제한되었던 전시 수복 과정의 극히 혼란한 상황에서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군경이 비무장․무저항 상태의 민간인을 집단 살해한 것은 인도주의에 반한 것이며, 헌법에서 보장한 국민의 기본권인 생명권을 침해하고 재판 받을 권리를 침해한 불법행위이다”라고 밝히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국가권력이 비무장 민간인을 적법절차 없이 집단살해한 데 대해 국가는 이 사건의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촉구한 바 있다.

다음은 산청군·함양군·거창군 민간인학살사건에 대해 거창사건과 산청군·함양사건 추모공원의 관련 기록 등을 중심으로 각각 작성한 사건에 대해 주요 내용이다.

 

<산청·함양사건>

산청·함양사건은 1951년 2월 초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가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인 "견벽청야"를 수행하면서 산청군 금서면 가현, 방곡마을과 함양군 휴천면 점촌마을, 유림면 서주마을에서 무고한 민간인 705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학살현장은 금서면의 가현, 방곡, 휴천면의 점촌, 유림면의 서주마을 등 4개 지역이고, 관련 피해 마을은 앞 4개 마을 외에 자혜, 주상, 화계, 화산, 손곡, 지곡, 화촌 마을을 포함한다. 이는 같은 작전과 같은 부대에 의해 거창군 신원면에서도 이틀 뒤로부터 3일간(1951년 2월 9일에서 11일까지) 양민 733명이 학살된 사건직전에 발생했다.

2월 5일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육군11사단장 최덕신, 9연대장 오익경, 3대대장 한동석)이 실시되면서 오익경과 한동석은 경찰을 포함한 청년 방위대로 편성된 1개 중대 총 700명을 이끌고 신원면으로 진격했다. 신원면에서 적을 확인 할수 없었던 3대대 주력부대는 빨치산은 흔적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 하자 젊은 여성을 무차별로 성폭행하고, 노약자들에게 강제로 군수 물자 등을 동원케 하고, 정보 장교 이종대는 노인, 부녀자 등을 현장에서 총살하는 등, 수복이라는 미명아래 아주 난폭하게 행동했다.

이 부대는 다음 날인 2월 6일 오전 11시 금서면 수철리에 동 3대대 병력이 이동해 와 주둔하고 작전 준비를 하면서 2월 7일 음력 정월 초이튿날 연합 작전의 대 토벌작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산청 방향으로 이동할 계획을 세웠다. 제 1진은 산청 방면에서, 제 2진은 함양 유림 방면에서, 제 3진은 함양군 마천 방면에서 포위하여 지리산 주변에 있는 산청군 금서면 가현, 방곡, 화계, 주상, 자혜리와 함양군 휴천면 점촌, 유림면 손곡, 지곡, 서주리 등 모든 주민들을 집결시켜 미친 듯이 무차별적으로 남ㆍ녀ㆍ노ㆍ소 어린이를 막론하고 처참한 학살을 감행했다. 즉 오전 6시 금서면 가현에 도착, 주민 123명을 학살하고 오전 9시경 방곡에 도착해 주민 212명을 학살하고 이어 오후 1시 30분경 함양군 휴천면 점촌에 도착 주민 60명을 학살했으며 오후 4시 30분경 함양군 유림면 서주리에 도착 주민 310명을 학살했다(인원은 신고 된 숫자이다).

당시 중대장 소지품을 지고 같이 동행하였던 생존자 최남철 씨(73세. 산청군 금서면 구아 부락 거주-당시는 금서면 신 가재 마을 거주)가 2000년 밝힌 증언〔국회속기록 제35회 19, 18쪽 및 김동춘 성공회 신학대 교수 거창사건 학술대회(2000.10.21.)논문집 참고〕은 아래와 같다.

--- 1951년 2월 7일 학살 사건 전날(정월 초하루날) 산청군 금서면 가현 부락에서 3대대 소속 부대 2개 중대 병력이 오전 11시경 도착 주둔하여 일박을 했다. 그 중 다른 중대의 중대장 소지품 등(속칭 짐이라고 함)은 거창 사람이 지고 따라 왔었으며, "이 작전이 심상찮으니 이 사람들(군인들) 요구대로 하여 주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귀띔하여 주었으며, 다른 중대장이(당시 중위로 기억) "이곳이 가재입니까?" 라고 묻길래 "여기는 신 가재부락이고(현재는 수철 이라고 합니다) 가재부락은 저기 산 넘어 30리 정도 가면 가재 부락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이로 인하여 그 부대 지휘관의(3대대 소속 중대장) 요청에 의하여 우리 집에서 숙박을 하고, 중대장 소지품과 먹을 것 등을 지고 다음날 가재마을로 새벽 04시경에 출발, 동행하였으며, 이날 (정월 초이튿날) 가재마을 에서는 처참한 학살 현장을 정확히 목격하여 지금도 그 당시만 생각하면 몸서리 쳐진다. 가재 부락 학살이 끝나고 방곡으로 이동하여 도착하였을 때 가재 부락 주민을 학살한 중대장을 불러서 지시사항이 제대로 안되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무조건 구두 발로 두들겨 패는 장면을 목격하였으며, 그 사람이 내가 동행한 중대장보다는 높은 상관이나 고참 장교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양미개(80세)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산청군 금서면 주상리 463번지 산청ㆍ함양의 대학살은 1951년 2월 7일 음력 정월초이튿날 아침 동이 틀 무렵 산청군 금서면에 소재한 지리산 고동재를 넘어온 3 대대 2중대 등의 병력이 호루라기를 불어대며 시작했다. 군인들은 무조건 가현 부락(당시는 가재라고 호칭 됨)에 들이 닥쳐, 주민들을 동네 앞 논들에 모이게 하고는, 무차별적으로 가옥에 불을 지르고, 주민을 강제로 내몰고, 가축을 내몰면서 무고한 양민을 집단 총살했다. 이후 방곡리에서도 똑같은 방법으로 무고한 주민을 정 조준하여 학살하고(국회 속기록 ,제35회 임시회)시체 위에다 불을 지르고, 총검으로 확인사살까지 하였다. 그 후 점촌 부락마을 앞 하천 변에서 똑같은 방법으로 비무장 양민을 학살했다. 가현, 방곡, 점촌의 3개 부락 학살인원은 360명 정도였다.

이 군부대는 산청군 금서면 주상리에서 약 1.5 ㎞ 정도 떨어진 산청군 금서면 자혜, 주상, 화계리 마을에 들이 닥쳐 가가호호를 돌며 호각을 불면서 함양군 유림면 서주리 경호강변 논들과 동사 마당에서 주민 좌담회를 한다며 빨리 집결하라고 소리쳤다. 국군 병사들의 독촉으로 설 명절을 맞고 있던 주민들은 놀란 마음으로 함양군 유림면 서주리 마을 앞 얼음이 얼은 경호 강 빙판위로 도보로 집결했다. 군대는 미리 구덩이를 파놓고, 주민들을 정렬시켜, 눈을 감게 하고는 군, 경 가족들은 대열에서 나오도록 하여 선별하는 등 앞서 가현, 방곡, 점촌 등에서 행한 양민학살 만행 방식과는 차이가 있었다.

서주리의 학살 만행은 11사단 9연대 휘하의 화랑부대라고 하는 3대대의 부대가 시국 강연회 한다고 유림면의 손곡, 지곡, 서주, 금서면의 자혜, 주상, 화계리 등 6개 마을양민 400여명을 아침 일찍부터 집결시켜 오후 늦게까지 눈감고 줄을 세운 후 기관총, 소총으로 정조준, 또는 수류탄으로 처참히 학살했다(국회 속기록, 제 35회 참고).

그리고는 시체 위에다 나뭇가지를 덮어 불을 질렀다. 다음날 피해를 당한 친지와 가족들은 시체를 분간 할 수가 없어 입은 옷의 바느질 형태 등으로 자기 가족의 시체를 확인하는 등(금서면 주상리 463번지 양미개 여 80세 증언) 그 참상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었다. 이리하여 지리산 주변의 산청ㆍ함양의 양민 대 학살은 장장 10여 시간 동안〔항도일보 1984.4.21. 거창사건에 가려진 2.7 참사, 이동춘 성공회 신학대 교수 발표(2000.10.21. 참조)〕 자행됐다.

이어 국군 제 11사단 9연대 3대대(화랑부대) 병력은 이동하기 시작, 산청을 경유해 거창군 신원면 청연 마을에 2월 9일 진입했다. 이 날부터 계속 3일 동안 거창양민 학살 사건이 처참히 자행되었다.

산청·함양사건은 발발 직후 경남계엄사령부 민사부장 김종원 대령의 기자회견에서 약간의 노출이 되긴 했지만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수면 밑으로 잠수된 상태였다. 그러나 4·19혁명 이후 과도정부시기에 국회진상조사에서 개괄적인 사건상황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또한 언론에 의해 심층보도가 되면서 그 실상의 윤곽이 많이 드러났다.

거창이 이들 세 개 지역 중 가장 많은 학살 피해자가 발생하면서 많이 알려진 반면 산청과 함양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게 알려져 있다. 이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정부가 진상조사와 현지 명예회복 등의 조치를 열심히 하지 않은 탓이 크다. 그런데 3개 지역의 피해상황 등이 하나의 학살사건으로 묶여서 조사되거나 위로 등의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산청·함양사건 희생자 합동 묘역 조성과 위령탑 건립은 1996년 1월5일 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 공포와 1998년 2월 17일 거창사건 등 관련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의 사망자 및 유족결정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2001년 12월 13일 합동묘역조성사업 착공이후 4년에 걸친 공사 진행으로 준공했다. 합동위령제 및 추모식을 매년 11월 첫째 주 금요일 거행하고 있다. 추모공원에는 합동묘역, 복예관, 위령탑, 위패봉안각 등으로 구성돼 있다. 묘역 수는 산청 251기, 함양 135기 등 총 386기로, 유족회 주장 희생자 수 705명과 차이가 나는 이유는 사건 당시 일가족이 몰살돼 신고 되지 않은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거창사건>

1951년 2월 5일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장 한동석 소령이 인솔하는 병력이 처음 신원면에 들어왔을 때, 마을에는 어린이와 부녀자 노약자들만 남아 있었는데 한동석은 총기를 난사하며 노약자까지 군수물자 운반에 강제로 동원시키며 살벌하게 신원면을 빠져나갔다. 2월8일 신원지서가 빨치산의 공격을 받는 사건이 일어나자 3대대는 2월9일 연대장의 명령을 받고, 다시 신원면 청연마을에 들어와 전 마을을 방화하고, 전 주민들을 마을 앞 눈이 쌓인 논들로 끌어내어 소총과 기관총으로 무차별 난사 학살하고 순식간에 백설이 덥힌 논들은 피바다로, 온 마을은 불바다가 되었다. 이 때 84명이 학살당했다.

2월 10일 한동석은 덕산리 내동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과정리 면소재지로 이동해 군병력을 대현리, 와룡리, 중유리 마을에 투입해 마을마다 가옥은 불 질러 태우고 가축과 양식을 강탈하며 무법 천지로 만들어 주민들을 총으로 위협하여 과정리로 몰아가던 중 날이 저물자 와룡리, 대현리 주민 102명을 탄량골 하천 계곡에 몰아넣고 총으로 처참하게 학살, 시신위에 나무 가지를 덮고 불을 질러 태워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2월 11일 한동석은 전날 3개리에서 끌고 온 주민 1 천여 명을 신원국민학교 교실에 몰아넣고 굶주림과 추위, 공포에 질려 있는 주민들에게 (인공가 불러라.) 군가 불러라, 밤새도록 교대 해가며 광란을 부리다 날이 밝아질 때 주민 517명을 과정리 박산골짜기에 몰아넣고 전투에 사용되는 무기는 모두 사용하여 잔인하게 학살을 하고 피바다를 이룬 시신위에 마른나무 가지를 올려놓고 기름을 뿌려 불로 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군은 박산골짜기까지 연행하는 도중 16 명을 학살했다. 3일간 세 곳에서 희생된 주민이 719명(남자 333명)으로 15세 이하 어린이가 364명, 16-60세 이상 355명이었다.

11사단 9연대 3대대장 한동석은 나이 25세 된 애숭이 육군소령, 그는 군인이 아니라 피에 굶주린 정신병자 같았고 그의 지휘를 받았던 부대원 700 여명도 마찬가지였다. 한동석과 그 부대원의 행위는 인간이 수일간 지속적으로 민간인을 집단학살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잔인해지는지를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3월 29일 제54차 국회 본 회의에서 거창출신 신중목 국회의원에 의해 양민 학살사건이 폭로되어 동년 3월 30일 국회, 내무, 법무, 국방부 합동 진상조사단을 구성했다. 4월 3일 국회와 내무, 법무, 국방 합동진상조사던이 신원면 양민학살 현장을 답사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군 당국은, 국회조사단이 오기 4,5일전쯤에 한동석이 부하 100여명을 출동시켜 이방인 출입을 막고, 사건 현장에 방치된 어린이 시체를 골라내 현장으로부터 약 2㎞ 떨어진 홍동골 계곡으로 옮겨 암매장하여 은폐했다. 또한 공비와 전투를 하다 희생자가 발생한 것으로 거짓 보고했다.

4월 5일 합동진상조사단이 신원면 양민학살 현장에 들어오던 중 길안내를 맡은 경남계엄민사부장 김종원대령은 신성모 국방장관과 모의하여 사전에 학살현장을 은폐시켜놓고 9연대 정보참모 최영두 소령이 인솔하는 수색소대로 하여금 군 병력을 공비로 위장 신원면으로 통하는 험준한 계곡인 수영더미 산속에 매복시켜 국회조사단에게 일제 기습사격을 가해 조사를 못하고 되돌아가게 만들었다.

4월 24일 국방부 장관 신성모, 경남 계엄민사부장 김종원의 온갖 은폐 공작에도 사건의 소문은 외국신문에 까지 크게 보도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잔악하게 저질러진 사건은 외면한 채, 외지에 보도된 것만 트집 잡아 국방장관 신성모, 내무부장관 조병옥, 법무부장관 김준연, 3부장관을 해임하면서도 정권 연장에만 눈이 멀어 사건자체를 왜곡하고 양민을 학살한 군을 맹목적으로 두둔하여 "군은 용공분자 187명을 처형"했다는 터무니 없는 허위 담화문을 발표했다.

5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문이 왜곡된 허위라는 것이 세상에 알려져 진상을 밝혀야 된다는 여론이 들끓게 되자, 국회가 ‘양민학살 관련 책임자 처벌에 관한 결의문’을 채택키로 의결했다. 이후 7월 27일 양민학살이 발생된 지 5개월여 만에 대구고등군법회의는 재판장 강영훈 준장, 심판관 정진환 준장, 이용문대령, 법무관 이운기 중령, 검찰관에 김태청 중령, 김부남 소령, 김동수 대위로 심판부를 구성했다.

12월 15일 거창 양민 학살사건 관련자에 대한 구형 공판에서 9연대장 오익경 대령 사형, 3대대장 한동석 소령 사형, 소대장 이종대 소위 징역 10년, 계엄민사부장 김종원 대령 징역 7년이 구형됐다. 구형 공판이 있은지 하루만인 12월 16일 선고 공판에서 오익경 무기징역, 한동석 징역 10년, 이종대 무죄, 김종원 징역 3년이 각각 선고되었다. 이는 수많은 양민을 학살한 관련자에게 말도 안 되는 엉터리 판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더욱더 가관인 것은 그 후 국방장관 신성모는 주일대사로, 11사단장 최덕신은 장관 및 천도교 교령을 지내다 월북하여 북괴군 대남전략 부위원장을 맡았다. 실형을 받은 김종원은 이듬해 3월에, 오익경은 9월에, 한동석은 1년 6개월 뒤 풀려났고 김종원은 경찰 간부에, 오익경과 한동석은 군에 복직 되었다.

1954년 4월 5일 이승만 정권의 은폐공작 탓으로 박산골짜기에 방치된 시신을 3년여 만에 발굴, 수습하려했으나 세월의 흐름 속에 시신들은 형체를 알아 볼 수가 없고 성별 구별이 되지 않았다. 결국 큰 뼈는 남자, 중간 뼈는 여자, 작은 뼈는 어린이로 구별하여 유족들의 통곡 속에 화장하여 박산에 안장하였다.

1960년 3월 5일 양민학살 사건이 발생된 지 9년만에 ‘묘비 건립추진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그 해 5월 11일 박산 합동묘역에 위령 비를 운반하는 작업이 실시되었다.

그 작업 도중, 사건 당시 주민 성분검사에 참관하여 생사갈림길에 놓인 면민들에게 방관적인 행동을 한 당시 면장이 타살되었다. 5월 23일 이와 관련해 4대 국회에서 박상길 의원의 제안으로 거창 양민 학살사건 진상조사단 파견 결의안이 통과되어 국회조사단이 1개월간 현지 조사를 벌였고 11월 18일 박산합동묘역 위령비 제막식이 열렸다.

1961년 5월 18일 박정희 군사 쿠데타 후 유족회 간부 17명이 반국가 단체 혐의로 구속되었고 6월 25일 경남지사 최갑중의 합동묘역 개장명령서가 발부되어 박산묘소는 파헤쳐지고 위령비문은 정으로 지워져 땅에 파묻히는 수난을 당했다. 1962년 7월 14일 반국가 단체 혐의로 구속된 유족회 간부, 군사재판에서 무죄 석방되고 면장 피습 혐의자는 집행 유예로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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