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미경 / 농부

 

살구나무를 찾아서 살구나무 동산을 만들고 있다. 올해는 살구나무 마을을 만들려고 한다. 올해 우리 마을에는 많은 살구나무들이 새로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인데, 나는 그것이 북측 회령 백살구나무이기를 바래서, 그것을 구하려 안타깝게 뛰어다니고 있다.
사라진 살구나무를 찾으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살구나무를 잃어버렸듯이 아주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무엇을 위하여 그 많은 것들을 놓아버린 것일까? 여기 연재할 글들은 살구나무처럼 우리가 잃은 것들, 잊은 것들, 두고 온 것들에 대한 진지한 호명이다. / 필자

 

▲ 말년의 도미에. [사진제공 - 주미경]

 도미에를 만나기 위해

때론 백마디의 말보다 한 장의 그림이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기도 한다. 현재처럼 이미지가 활자를 능가할 만큼 넘쳐나는 시대에 와서 이런 말은 진부한 것이 되겠지만, 드물게는 이런 말에 딱 들어맞는 한 장의 그림을 만나기도 한다.

이것은 요새 사람들이 열광하는 고화질의 움직이는 영상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고, 초호화 스펙의 카메라가 잡아낸 선명한 사진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이것은 사진기도 아직 나타나지 않았던 시대, 서양미술사의 년대기를 주요하게 장식한 웅장하고 화려한 그림들에서 저만치 빗겨나 사람들 눈에도 거의 뜨이지 않는 한 장의 그림, 그것도 그림이라기보다는 만화에 가까운 그림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한 장의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파리로 가야한다. 그것은 유행과 패션의 도시 파리가 아니라 혁명의 도시 파리, 1789년 바스티유의 파괴에서 시작하여 1871년 파리코뮌 ‘피의 일주일’에 이르기까지, 80년이 넘는 인류근대사의 가장 역동적인 현장이다. 이 그림은 바로 그 역사적 현장에 대한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내가 도미에의 이름을 알게 된 건 삼등열차라는 그림으로부터이지만 도미에에 주목하게 된 건 그가 그린 돈키호테의 연작 때문이다. 돈키호테를 그린 그림들은 대부분 우스꽝스럽게 과장된 것들이다. 반면 도미에의 돈키호테는 매우 다른 것이었는데, 돈키호테를 그토록 진지하고 우울하게 그려낸 그림이 주는 느낌은 매우 낯선 것이었다. 나는 그 진지하고 우울하고 장중하기까지 한 여러 장의 돈키호테를 따라 19세기 프랑스의 아들이며 시대의 위대한 고발자 도미에를 만나게 되었다. 

▲ 오노레 도미에, 돈키호테, 1865-1870, 유화, 52*32.6cm, 뮌헨, 노이에 피나코텍. [사진제공 - 주미경]

도미에를 만든 것들

도미에는 우리나라에서 그다지 잘 알려진 화가가 아니다. 그나마 가끔씩이라도 마주치는 그의 그림은 「삼등열차」 정도이지만, 도미에는 「이등열차」도 그리고 「일등열차」도 그렸다. 도미에는 유화도 그리고 수채화도 그리고 조각도 했으며, 중요하게는 만화를 그렸다. 그가 풍자만화의 아버지로서 시사만화라는 인기있는 장르를 개척한 화가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도미에가 고야를 계승한, 시대의 위대한 고발자라는 것도, 19세기 프랑스를 그려낸 캐리커처와 정치풍자화와 민중판화의 거장이라는 사실도 웬만하면 모른다.

도미에가 태어난 1808년에, 고야는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략과 마드리드에서의 양민학살을 고발하는 대작 「1808년 5월3일」의 현장을 목격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풍미한 시대를 그려낸 고야의 판화연작 「전쟁의 참화」가 보여주는 시대정신이 도미에에게 직선으로 이어졌을까? 만년에 똑같이 겪어야 했던 실명도 둘을 묶어주는 기묘한 운명처럼 보이기도 한다. 

▲ 프란시스코 고야, 1808년5월3일, 1814, 유화, 266*345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사진제공 - 주미경]

가난에 못이겨 고향 마르세이유를 떠나 파리로 상경한 12살 소년 도미에는 파리에서도 어쩔 수없이 가난했다. 학교교육도 정규미술교육도 받지 못한 그는 법률사무소의 심부름꾼으로, 서점 점원으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고, 그토록 많은 그림을 그리면서도 평생을 빈곤에 시달렸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를 도미에는 메테르니히의 빈체제와 반혁명의 광기가 뒤덮인 샤를10세 왕정의 치하에서 보냈다. 그는 아마도 저 위대했던 1789년으로부터 10년에 걸친 혁명과, 나폴레옹의 영광과 패배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했을 거다. 그를 만든 건, 그것들 뒤에 구축된 왕정복고라는 굴욕과 반동의 시대, 그의 성장에 양분을 제공한 건 혁명의 정신을 거슬러 역사의 나침반을 난폭하게 되돌리는 역류의 현장이었을 거다.

1830년 「7월의 영웅」을 이해하기 위하여

이제 드디어 우리는 한 장의 그림을 만나게 된다. 20대 청년기의 도미에를 폭발시켜 정치풍자의 길로 곧장 달려가게 만든 것은 1830년의 ‘7월혁명’이었다. ‘영광의 3일’ 왕정타도와 공화제의 수립을 위한 투쟁으로 1천명이 희생된 그 3일 동안, 도미에는 들라크루아와 베를리오즈와 함께 파리 시가전의 현장에 있었다.

이 시기에 탄생한 도미에의 석판풍자만화는 1871년의 파리코뮌을 거쳐 그의 눈이 실명에 이르는 1872년까지 지속된다. 장장 42년에 걸친 격랑의 역사를 그는 몽당연필로 석판화에 담아냈다. 공감과 찬사, 탄압과 투옥의 세월과 함께 혁명과 반혁명, 쿠데타와 내란, 전쟁과 출병, 왕정과 공화제의 폭풍 같은 시대와 인물들의 모습이 그의 석판에 정직하게 새겨졌다. 

▲ 오노레 도미에, 7월의 영웅, 1831. [사진제공 - 주미경]

「7월의 영웅」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그림이다. 이 그림을 아무리 뚫어져라 바라봐도 우리는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다리 부러진 초췌한 인물의 남루한 뒷모습과 ‘7월의 영웅’이라는 제목은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가.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은 그림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배경이나 맥락에 대한 파악없이 어떤 그림을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 그림을 이해하자면1830년의 ‘7월혁명’을 불러와야 한다. 1789년의 대혁명이 나폴레옹 제정으로 귀결되고, 나폴레옹 시대가 끝나면서 과거로 후퇴한 15년간의 왕정을 뒤엎은 사건이 ‘7월혁명’이다. 봉기한 민중들은 왕정타도와 공화정을 요구했으나 의회를 장악한 자유주의파 부르주아들은 루이 필립을 왕으로 추대한다. 이 때 군주제를 주도한 인물이 도미에가 1백번을 넘게 풍자하며 변절한 지식인의 전형으로 신랄하게 비판한 티에르, 그는 40여년 후 ‘파리코뮌’을 피의 바다에 잠군 장본인이 된다.  

그림을 보자. 혁명은 성공했으나 혁명의 열매는 다시 왕족과 부르주아에게 돌아갔다. ‘시민왕’, ‘평등왕’이라는 기만적인 이름아래 군주제가 부활하고, 희생된 1천여명의 명예는 버려졌으며, 노동자와 민중의 투쟁은 배반당했다.

저 7월혁명의 영웅은 상처 입은 외다리로 세느강의 다리난간에 서있다. 전당포 선전지로 도배된 옷을 입고, '최후의 수단'이라고 쓰여진 돌을 목에 매달고 막 강물에 뛰어들 참이다. 저만치 의회건물 꼭대기에는 삼색기가 펄럭이고 있지만 외다리 영웅의 어깨는 절망으로 초췌하게 굽어져 있다. 도미에가 보았던 것은 혁명이 끝나고 모든 것을 빼앗긴 7월의 영웅들이 자살의 길로 내몰렸던 현실이다.

이 창백하고도 단순한 그림에 대한 이해는 전율을 몰고온다. 함께 시가전의 현장에 있었던 들라크루아가 그렸던 7월혁명은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현실과 동떨어진 그 화려한 그림을 그려 살롱에 출품할 때, 도미에는 저 그림을 그려 잡지에 발표했다. 상류층 출신 들라크루아가 볼 수 없었던 냉혹한 현실을 도미에는 명징한 눈으로 바라보았고, 배반당한 사람들의 고통 속에 함께 있었다. 

▲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 325*260cm, 파리, 루브르박물관. [사진제공 - 주미경]

흔들림 없는 민중의 벗, 도미에

내가 도미에에게 감동하는 것은 그의 초지일관함 때문이다. “인간은 그 시대의 것이어야 한다”고 그가 말했듯이, 도미에는 19세기 프랑스의 격랑 속에서 흔들림없이 역사와 시대의 증인으로 살았다. 그의 초지일관함을 쿠르베는 ‘어쩔 수 없는 몽상가’라 표현했지만, 그가 몽상가였다면 피와 죽음이 시퍼렇게 춤을 추는 혁명의 복판에 남아있었을 리 없다. 그는 1830년 7월혁명과 1848년 2월혁명의 현장에 있었고, 1871년 파리코뮌의 62일 동안 그가 있었던 곳도 피흘리는 파리, 그 혁명의 현장이었다.

나폴레옹을 따르는 장군의 아들로 태어나 부유하고 유명한 인사로 평생을 살았던 빅토르 위고는 당시 정치적 입장을 자주 바꾸는 지조 없는 지식인의 한 사람이었다. 1848년 2월혁명 시기, 왕당파와 공화파를 오가며 루이 나폴레옹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공작에 열중하는 위고를 비판하여 도미에는 한 편의 풍자화를 그리기도 했다. 

▲ 오노레 도미에, 빅토르 위고와 에밀 지라르댕은 루이왕자를 왕으로 받들고자 하나 받침이 시원찮다, 1848. [사진제공 - 주미경]

도미에의 촌철살인과 신랄한 비판이 주효했던 것일까? 이후 위고는 다시 입장을 바꿔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에 반대하는 연설을 하고 망명의 길을 선택한다. 그 망명지에서 완성하여 대성공을 거둔 것이 유명한 「레미제라블」이다.

도미에는 사실주의 대표화가라는 역사적 명칭은 쿠르베에 양보했고, 19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자리는 빅토르 위고에 내줬다. 누구보다도 치열했으나 화려하지 않았고, 누구보다 열정적이었으나 야단스럽지 않았던 그의 삶은, 그가 생애를 통틀어 일관되게 흔들림 없는 민중의 벗이었음을 증거하는 수많은 그림들로 남았다.

2만여명이 학살되고 처형당한 피의 일주일로 파리코뮌이 막을 내린 1872년, 생애 마지막 석판화를 잡지사에 보낸 도미에는 실명의 어둠에 갇히기 시작한다. 그는 실명으로 인하여 위고를 비롯한 친구들의 도움으로 열린 자신의 개인전도 보지 못하고 1879년 마침내 파란의 삶을 마친다.

1870년과 1877년, 두 번의 레종 드뇌르 훈장의 수여도 거부해버린 도미에는 단 하나 생전의 소원대로 파리 동부의 페르 라쉐즈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곳은 파리코뮌 최후의 거점, 147명의 마지막 희생자들이 정부군과 독일군에 의해 사살된 현장이다. 그의 묘비명에는 이런 말이 쓰여있다 한다.

“사람들이여,
위대한 예술가이자 위대한 시민,
선인 도미에 여기에 잠들다.”

프랑스혁명을 이해하기 위하여

프랑스혁명을 군주제에 대항한 공화주의의 승리라고 읽는 건 반쪽만 읽는 것이다. 그것은 19세기 프랑스 민중의 투쟁과 희생이 부르주아에 의해 강탈된 패배의 역사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하여 도미에의 그림 「7월의 영웅」은 그것이 그려진 1830년에 한정되지 않고 프랑스혁명 전 시기를 관통하는 보편성을 획득한다.

프랑스혁명이 그토록 치열한 피의 투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 세기를 통해 일보전진과 삼보후퇴를 거듭했던 배경에는 프랑스 제국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19세기 들어 산업혁명으로 무장한 프랑스는 1830년 알제리 침공을 시작으로 세네갈 튀니지, 사하라 지역을 집어삼키면서 아프리카를 영국과 분할 점령하고, 1858년 베트남 침공, 1860년 중국침공, 1863년 멕시코 침공 등 숱한 식민지 침략으로 영국과 함께 전 세계를 피로 물들인 장본인이다.

식민지 수탈로 살찌운 지배권력의 힘을 프랑스 민중은 결코 이겨낼 수 없었던 것이며, 독수리의 눈과 프로메테우스의 심장을 가졌던 도미에도 그것만은 보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도미에에게 있어 이 결정적인 결여는 그도 역시 프랑스인이었음을 씁쓸하게 상기시키기도 한다.

「7월의 영웅」은 왜 자꾸 나타나는가

그럼에도 가끔씩 저 그림을 떠올리는 것은 그것이 갖고있는 시공을 뛰어넘는 시사성과 보편성 때문이다. 그러니까 저 그림은 1980년 봄과 광주항쟁 뒤에 찾아온 백색 공포를, 그리고 1987년 6월, 뜨거웠던 거리의 함성이 잦아들고 다가왔던 12월의 얼어붙은 겨울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나뭇잎들을 붉게 물들이며 깊어가는 가을, 오늘 또다시 저 그림을 떠올리는 것은 주인공의 그지없는 남루함이 세 해전 겨울내내 엄동설한 추위를 불태운 촛불항쟁이 가져온 지금의 모습에 겹쳐지기 때문이다. ‘촛불정부’라는 명명이 무색하게 숨길 수 없이 드러나고 있는 도덕적 파탄의 현장에서, 배반당한 ‘7월의 영웅’을 또 한번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프랑스 민중의 투쟁이 제국주의라는 배경 속에서 힘을 잃었듯이 우리의 싸움은 분단의 벽에 갇혔다. 우리에게 있어 진정한 민중의 진출은 분단의 벽을 뛰어넘을 수 있을 때에야 이루어진다. 세계화 시대, 정보화 시대라 떠들어대지만 우리는 요란하게 치장된 세계의 바다와 싸구려 정보의 홍수 속에서 분단의 벽에 갇힌 자신을 잊고 나아갈 길을 잃었나 보다.

초로의 도미에는 돈키호테를 그렸다. 그것은 평생 자화상을 그리지 않았던 도미에의 뒤늦은 자화상이다. 돈키호테를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돈키호테를 비웃지도 조롱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도미에가 돈키호테에게서 자신을 발견한 것은 우연일 수가 없다.

도시에서의 갈등과 대립은 날이 갈수록 첨예해져 가고, 나는 이 멀고먼 시골구석에서 돈키호테처럼, 7월의 영웅처럼, 마음을 앓는다. 오늘도 여기저기서 뜬금없는 촛불들이 켜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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