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내게는 인간에 대한 믿음 외에 다른 어떤 믿음도 필요하지 않다 (펄 벅)

 

 먼 곳에서부터 
 - 김수영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다시 몸이 아프다

 조용한 봄에서부터
 조용한 봄으로
 다시 내 몸이 아프다

 여자에게서부터
 여자에게로

 능금꽃에서부터
 능금꽃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이 아프다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 활동을 할 때, 교장 선생님에 대한 요구 사항을 정리해 연판장을 만들어 교사들을 상대로 서명을 받은 적이 있다.

‘몇 분이나 해줄까?’ 내심 걱정을 했다. 선생님들에게 요구 사항을 보여주며 서명을 부탁드렸다. 교무 주임과 학생 주임을 제외한 70여 교사가 서명해 주었다. 교무 주임과 학생 주임도 나를 찾아와 내 손을 잡으며 미안해했다.

아, 나는 상상도 하지 못한 기적 앞에서 온 몸이 떨렸다.

나는 그때 교사들에게서 루소가 말하는 ‘일반의지’를 본 곳이다. 겉으로 보면 교사들이 교장, 교감, 장학사들의 권력에 짓눌려 비굴하게 살아가는 것 같지만, 그들은 마음 깊은 곳에 자아(自我)를 넘어서는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에는 대학 동문들이 마련해 준 술자리에 갔다. 그들은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하다면서 술잔을 권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인간에 대한 믿음’을 생각했다.

그 즈음에 나는 얼마나 인간을 불신하고 있었던가! 1987년 겨울 대통령 선거를 하던 날 밤, 나는 개표종사원으로 모 시청에 있었다. 나는 청심환을 갖고 갔다. 시민의 힘으로 얻어낸 대통령 직선제. 하지만 선거 결과가 불길했다. 밤 12시가 넘어서자 윤곽이 드러났다. 오! 어떻게 또 다시 군인 출신이 되는 거야!

나는 청심환을 먹고 화장실에 갔다. 물을 틀어놓고 꺼억 꺼억 울었다. 아니? 투표지에 꾹 찍으면 되는데, 그걸 왜 못하는 거야? 피를 흘리며 얻어낸 직선제를?

나는 겨울 방학 동안 절에 들어갔다. 밥만 먹고 나면 온 산을 헤매고 다녔다. 왜? 역사의 수레바퀴가 앞으로 굴러가는 게 이렇게 힘든 거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군사 독재치하에서 신음하고 살았으면서 또 어떻게 선거를 통해 군사독재가 지속되게 하는 거야?

아팠다, 온 몸이 아팠다.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먼 곳에서부터/먼 곳으로/다시 몸이 아프다//조용한 봄에서부터/조용한 봄으로/다시 내 몸이 아프다//여자에게서부터/여자에게로//능금꽃에서부터/능금꽃으로......//나도 모르는 사이에/내 몸이 아프다’

하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는 앞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모든 부문에서 민중들의 조직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교사들도 각 지역에서 전교조 전신인 전국교사협의회의 지역 조직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도 지역의 교사협의회 준비 모임에 들어갔다. 함께 공부하고 뒤풀이를 했다. 인간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다니!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그 술집에 가서 술잔을 기울인다.

인간에겐 일반의지가 있어 불의한 세상을 견디지 못한다. 따라서 좋은 세상을 만드는 건 쉽다. 특권층만 사라지면 된다. 그들이 우리의 마음을 왜곡시키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자연스레 우리 안의 일반의지가 모여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간다.

특권층을 자처하는 법 권력이 모여 있는 서초동 일대를 수백만의 촛불이 환히 밝혔다. 우리의 일반의지가 모여 피우는 꽃은 이리도 아름답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