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수필/경원소감


= 환자의 신음소리엔 아랑곳 않는
간호원은 누구를 위하여 유존하나 =

 
조용구

 
의사의 진단이 오진이 아니면서도 약의 효과를 못 보는 경우를 흔히 본다. 의사는 병을 고치는데 가치가 있고 병명만을 잘 알아낸다고 해서 명의는 아닐 것이다. 

의사는 병을 진단하기 전에 그 지방의 수토나 환자의 체질·습성·발병원인·동기 등을 먼저 파악분석하고 병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를 가한 연후에 판단을 내리고 처방을 내야한다고 생각한다. 

겸하여 병세의 진도를 참작해서 아무리 좋은 약일지라도 완전히 흡수되어 효과를 얻을 것인지 또는 너무 과중해서 역효과나 안날 것인지도 미리 판단해서 방약에 적용을 기해야 할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점을 참작해서 가미할 줄을 모르고 단지 병명은가지고 방약을 해보았자 효과는 희박하고 때로는 역효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부소할 것이다.

아마도 한국이라는 환자에게 미국이라는 의사의 처방약이 잘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뿐만 아니라 중병환자를 치료함에는 삼자(의사·간호원·환자)가 삼위일체가 되어서 통일된 의사로써 병 치료에만 전심전력을 경주하여야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인데, 한국의 경우에는 삼자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간호원이 무성의 무책임함은 말할 것도 없고 환자에게 공급되어야 할 보약이나 영양제는 간호원의 농간으로 횡류되고 말았으니 십여년을 투약했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이다.

환자는 식사조차 제 때에 못 얻어먹어서 원기를 상실하고 기진맥진해서 이제는 기동조차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십년전의 병세와 오늘의 병세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오늘의 병세는 종전과 같은 시약치료방법이나 간호방법으로는 도저히 소생할 가망은 막연한 것이다.

이와 같이 중태임에도 불구하고 의사의 금반 처방은 환자의 현재 체질로는 흡수 못할 약방문이니 딱한 사정이란 말이다. 의사는 간호원 보고 이 약을 먹이라고 야단이고, 간호원은 환자에게 죽더라도 먹으라고 성화이고, 환자는 간호원 보고 체질에 안 맞아서 못 먹겠다고 아우성이니 삼자가 모두 딱한 사정이다. 

삼위일체가 되어야 할 삼자가 삼?구?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다.

하루 이틀 된 환자도 아니니 아무리 우둔한 의사라도 이제는 환자의 체질쯤은 대강 짐작하게 되었을 터인데 이번 처방만은 이상 기발한 약방문이다. 

십여년이나 투약치료를 했으니 조금이라도 차도가 있어야 할 터인데 낫기는커녕 점점 악화가 되어가니 의사도 공치가 아픈 모양이다. 십여년이나 간호원에게 속아왔으니 이번 간호원에게는 안 속으려고 단단히 닥달을 하는 눈치다.

겸해서 종전과 같이 보약이나 영양제는 주지않고 화풀이로 역??? 쓰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의사의 태도나 투약치료 방법이 달라진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약을 써서 소생하기를 바란다는 것보다 원기가 없어 기동조차 못하게 된 환자에게 강제로 기동을 하라고 몽둥이 찜질을 하는 격이다.

몽뚱이을 기진맥진했어도 의식만은 살아있으니 강제에 못이겨 한두번은 기동하는 시늉이라도 낼는지 모르겠으나 말구에 약사발은 동당이치고 주저앉을 것만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아 – 이것이 모두 누구의 죄냐? 의사의 죄도 아니요. 환자의 죄도 아닐 것이다. ???은 간호원일 것이다.

그러기에 먼젓번 간호원은 환자의 자제들에게 축출을 당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이번 간호원은 책임이 없단말인가? 아니다. 이번 간호원도 책임을 단단히 져야 한다. 환자의 소생여부는 간호원의 책임이 태반을 점령한다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인데, 환자의 신음소리는 못들은 체하고 언필칭 시간여유를 달라고 하니 시간만 경과하면 저절로 병이 낫는다는 말인가? 간호원 된지도 어언간 7개월이나 되었으니 그동안에 무엇 하나 제대로 한 것이 있는가?

살펴보라! 7개월전 환자의 용태와 오늘의 모습을 보라! 무엇이 달라졌고 무엇이 나아졌나? 피골이 상련할 따름이다.

의사에게로 시집을 갈 작정인지? 의사 비위만 맞추려 드니 한심한 노릇이다. 어쩌자고 원기를 상실한 환자에게 무리한 시료방법을 사용하려고 하는 의사의 편만 들고 환자의 신음하는 소리는 이외지청하느냐 말이다. 지금과 같은 간호방법이라면 병소생은 부지하세월이니, 환자의 심정은 답답할 따름이다.

▲ 생활수필/경원소감[민족일보 이미지]

生活隨筆/經援所感


= 患者의 呻吟소리엔 아랑곳 않는
看護員은 누구를 위하여 有存하나 =


趙龍九

 
醫師의 診斷이 誤診이 아니면서도 藥의 效果를 못보는 境遇를 흔히본다. 醫師는 病을 고치는데 價値가 있고 病名만을 잘 알아낸다고 해서 名醫는 아닐 것이다. 

醫師는 病을 診斷하기 前에 그 地方의 水土나 患者의 體質·習性·發病原因·動機 等을 먼저 把握分析하고 病에 對한 綜合的인 檢討를 加한 然後에 判斷을 내리고 處方을 내야한다고 生覺한다. 

兼하여 病勢의 進度를 參酌해서 아무리 좋은 藥일지라도 完全히 吸收되어 效果를 얻을 것인지 또는 너무 過重해서 逆效果나 안날 것인지도 미리 判斷해서 放藥에 適用을 期해야 할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點을 參酌해서 加味할 줄을 모르고 但只 病名은가지고 放藥을 해보았자 效果는 稀薄하고 때로는 逆效果를 招來하는 境遇도 不少할 것이다.

아마도 韓國이라는 患者에게 美國이라는 醫師의 處方藥이 잘 效果를 내지 못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닌가 生覺한다. 

그뿐만 아니라 重病患者를 治療함에는 三者(醫師·看護員·患者)가 三位一體가 되어서 統一된 意思로써 病治療에만 專心專力을 傾注하여야 效果를 거둘 수 있을 것인데, 韓國의 境遇에는 三者中 가장 重要한 役割을 해야 할 看護員이 無誠意 無責任함은 말할 것도 없고 患者에게 供給되어야 할 補藥이나 營養劑는 看護員의 弄奸으로 橫流되고 말았으니 十餘年을 投藥했다한들 무슨 所用이 있느냐 말이다.

患者는 食事조차 제때에 못얻어먹어서 元氣를 喪失하고 氣盡脈盡해서 이제는 起動조차 못할 地境에 이르렀다. 十年前의 病勢와 오늘의 病勢는 判異하게 달라졌다.

오늘의 病勢는 從前과 같은 施藥治療方法이나 看護方法으로는 到底히 蘇生할 加望은 漠然한 것이다.

이와 같이 重態임에도 不拘하고 醫師의 今般處方은 患者의 現在體質로는 吸收못할 藥方文이니 딱한 事情이란 말이다. 

醫師는 看護員보고 이 藥을 먹이라고 야단이고, 看護員은 患者에게 죽더라도 먹으라고 성화이고, 患者는 看護員보고 體質에 안맞아서 못먹겠다고 아우성이니 三者가 모두 딱한 事情이다. 三位一體가 되어야할 三者가 三?龜?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다.

하루이틀된 患者도 아니니 아무리 愚鈍한 醫師라도 이제는 患者의 體質쯤은 대강 斟酌하게 되었을 터인데 이번 處方만은 異狀 奇拔한 藥方文이다. 

十餘年이나 投藥治療를 했으니 조금이라도 差度가 있어야 할 터인데 낫기는커녕 漸漸惡化가 되어가니 醫師도 공치가 아픈 猊樣이다. 十餘年이나 看護員에게 속아왔으니 이번 看護員에게는 안속으려고 단단히 닥달을 하는 눈치다.

兼해서 從前과 같이 補藥이나 營養劑는 주지않고 화풀이로 역??? 쓰는지도 모르겠다.

如하튼 醫師의 態度나 投藥治療 方法이 달라진 것만은 틀림없는 事實이다. 藥을 써서 蘇生하기를 바란다는 것보다 元氣가 없어 起動조차 못하게 된 患者에게 强制로 起動을 하라고 몽둥이찜질을 하는 格이다.

몽뚱이을 氣盡脈盡했어도 意識만은 살아있으니 强制에 못이겨 한두번은 起動하는 시늉이라도 낼는지 모르겠으나 末久에 藥사발은 동당이치고 주저앉을 것만은 明若觀火한 事實이다.

아 – 이것이 모두 누구의 罪냐? 醫師의 罪도 아니요. 患者의 罪도 아닐 것이다. ???은 看護員일 것이다.

그러기에 먼젓번 看護員은 患者의 子弟들에게 逐出을 당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이번 看護員은 責任이 없단말인가? 아니다. 이번 看護員도 責任을 단단히 져야 한다. 患者의 蘇生與否는 看護員의 責任이 太半을 占領한다하여도 過言은 아닐 것인데, 患者의 呻吟소리는 못들은 체하고 言必稱 時間餘裕를 달라고 하니 時間만 經過하면 저절로 病이 낫는다는 말인가? 看護員 된지도 어언간 七個月이나 되었으니 그동안에 무엇하나 제대로 한 것이 있는가?

살펴보라! 七個月前 患者의 容態와 오늘의 모습을 보라! 무엇이 달라졌고 무엇이 나아졌나? 皮骨이 상련할 따름이다.

醫師에게로 시집을 갈 작정인지? 醫師 脾胃만 맞추려 드니 寒心한 노릇이다. 어쩌자고 元氣를 喪失한 患者에게 無理한 施療方法을 使用하려고 하는 醫師의 便만들고 患者의 呻吟하는 소리는 耳外之聽하느냐 말이다. 只今과 같은 看護方法이라면 病蘇生은 不知何歲月이니, 患者의 心情은 답답할 따름이다.

<민족일보> 1961년 3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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