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미경 / 농부

 

살구나무를 찾아서 살구나무 동산을 만들고 있다. 올해는 살구나무 마을을 만들려고 한다. 올해 우리 마을에는 많은 살구나무들이 새로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인데, 나는 그것이 북측 회령 백살구나무이기를 바래서, 그것을 구하려 안타깝게 뛰어다니고 있다.
사라진 살구나무를 찾으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살구나무를 잃어버렸듯이 아주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무엇을 위하여 그 많은 것들을 놓아버린 것일까? 여기 연재할 글들은 살구나무처럼 우리가 잃은 것들, 잊은 것들, 두고 온 것들에 대한 진지한 호명이다. / 필자

 

▲ 벌초된 봉분. [사진제공 - 주미경]

 

여름이 갈 때

여름이 갔다. 정수리를 쪼아대던 한 낮의 태양이 이마 끝으로 기울고, 건너편 산마루를 넘어가는 행차도 눈에 띄게 바빠졌다. 하루도 빠짐없이 울어대며 여름 밤을 고적하게 만들던 소쩍새 울음이 끊기더니 해저물고 창을 넘는 것이 서늘한 기운과 풀벌레 소리다. 입추야 폭염 속에서 가는 줄도 모르고 지났지만 처서 지나 백로에 드니 성큼성큼 다가오는 가을의 냄새가 눈감고도 알려지게 확연하다.

장마보다도 긴 장마가 계속된다. 긴 비소식에 이리저리 쓰러진 기장을 추스려 베어낸 것이 벌써 한 주일이 넘었다. 태풍이 저 혼자 지나가지 않고 여기저기 남긴 흔적을 보며 부지런히 기장 베어낸 것을 스스로 기특해하지만, 겨우 비나 긋게 쌓아놓고 말리지를 못하니 수확을 했다고 말하기엔 아직 이르다.

곡우에 내리는 봄비가 생명을 깨우는 비라면 처서 백로에 내리는 가을비는 죽음을 알리는 비다. 곡우비에 물이 오른 연녹색 숲이 푸르게 성장하여 지어낸 녹음이 짙어지다 못해 컴컴해지는 이즈음이면 초록이 지겨워진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자연의 모습에 대해 갖는 느낌의 한계효용치도 자연의 변화주기에 맞춰져 있는 것이나 아닐까? 이제 그만 좀 다른 빛깔이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자연의 생명이 다할 때

지금의 초록은 생명이 약동하는 초록이 아니라 죽음의 기운이 드리운 초록이다. 그런데 그 죽음의 기운이 드리운 마지막 초록이 하는 일이 있다. 바로 새 생명을 여물리는 일이다. 나무들은 열매를 달고 풀들은 씨를 맺는다. 논에서는 벼이삭이 패고, 마당 끝 돌배나무에선 작은 돌배들이 툭툭 떨어진다. 이제 곧 숲 속에선 후드득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가 두서없이 들려올 것이고 키를 높인 참취 꽃대에선 여문 참취 씨들이 바람에 날릴 것이다.

이런 일들은 보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흔연하지만 도무지 반갑지 않은 풀씨들을 보노라면 내년에도 애를 먹일 풀들을 미리 보는 듯 걱정이 앞선다. 여름내 낫과 호미가 손에서 떨어지질 않았어도 비닐 한 장 덮지 않은 밭에 풀을 다 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배추니 무니 김장채소들을 파종하고 기장을 베어들이고 하는 새에 바랭이며 고마리며 강아지풀 같은 것들이 일제히 씨를 맺기 시작했다. 몇 번을 베어내고 뜯어내도 뿌리만 살아있으면 어떻게든 씨를 맺는 것이 풀이다. 몇 번을 뜯기고도 땅에 바짝 붙어 간신히 살아있는 형편없이 짤막한 줄기에 맺히는 씨앗들을 보면 신기하다 못해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후대를 남기려는 본능이 이다지도 처절한 것인가.

사람이 가진 또 하나의 생명

어쨌거나 자연의 삶과 죽음은 말그대로 ‘자연’스럽다. 싹이 터서 자라고 꽃을 피우고 마침내 씨를 맺고 죽음에 이르는 여정에는 아무런 의식도 없고 의지도 없다. 거기에는 오로지 생물학적 생명의 법칙만이 작동할 뿐이다. 이렇게 생물학적 생명의 법칙만이 작동하는 세계를 자신의 요구에 맞게 변형하고 개조하고 다스리려 하는 것이 사람이다. 사람은 자연과는 달리 의식과 의지를 갖고 살아가며 거기에서 삶의 의미가 생겨난다. 그래서 사람은 생물학적 생명에 더하여 사회적 생명이라는 또 하나의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

사람의 생물학적 생명은 누구에게나 태어나 죽기까지의 시간만큼 유지되는 것이지만 사람의 사회적 생명은 다르다. 사회적 생명이란 집단 속에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있는 생명이어서, 청년시절 생을 마쳐도 대를 이어 집단 속에서 살아있는 생명이 있는가 하면 생을 마치기도 전에 끝나버리는 생명도 있는 것이다.

이완용의 죽음

이완용은 1858년생이다. 25세에 관계에 나가 민비의 총애를 입고 수구파가 되어 개화파를 탄압했다. 29세에 영어를 배워 미국에 3년간 체류하고 돌아와 친미파가 되었다. 구한말 외세에 의해 이권쟁탈의 아수라판이 된 어지러운 나라에서 고위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독립협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각종 이권을 열강에게 넘겨준 행위로 제명되었다. 40세엔 전북관찰사로 재직하며 거액의 재물을 착복하였으나 파직의 위기를 모면하고 러일전쟁 후 철저한 친일파로 변신한다.

47세에 을사5적, 49세에 정미7적, 52세에 경술9적에 이름을 올리고 이토 히로부미를 영원한 스승으로 떠받들었다. 그 대가로 일제로부터 백작, 후작의 작위를 하사받고 고위관직과 명예직을 두루 거쳤으며, 또한 이름도 다 열거하기 힘든 여러가지의 훈장과 표창을 받았다. 68세에 생을 마치기까지 나라를 팔고 민족을 부정하며 일신의 영달을 좇아 부귀영화를 누렸으니, 그가 생전에 받은 응징은 51세에 이재명 의사의 칼을 맞아 부상한 것뿐이다. 이재명 의사는 이완용 응징의 거사로 사형을 선고받고 24세에 형장에서 순국한다.

안중근 열사의 생명

안중근 열사는 1879년생이다. 26세 때 을사늑약이 체결되고부터 애국심과 민족의식의 본격적으로 발현된다. 정미7조약으로 군대가 해산되고 전국적으로 의병투쟁이 시작되자 의병부대를 창설하여 독립전쟁에 투신할 것을 결심한다. 28세에 결심을 실행하여 연해주에서 300명의 의병부대를 창설하고 참모중장이 되었다. 의병부대는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하고 국내진공작전을 감행하여 전과를 올렸으나,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처참하게 패배하고 끝내 해체된다.

30세에 의병투쟁을 함께 했던 12명의 동지와 〈단지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3년  내에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것을 맹세한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체포되어 다음해 뤼순감옥에서 사형집행으로 순국하였으니, 그의 나이 31세였다.

한 세기도 전의 일들이다. 두 사람의 삶과 두 사람이 서있는 오늘날의 지위는 사람의 사회적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완용은 안중근 열사보다 갑절을 살았지만 그의 사회적 생명은 미국에서 친미파로 되어 돌아온 31세에 이미 끝났다. 이후의 삶이란 오명에 오명을 더하며 세기를 넘어 온 민족의 공적이 되어간 생이었으니, 필시 후손은 있겠으되 후손 누구에게도 알려질까 두려운 이름이 되었다.

반면에 안중근 열사의 생은 31세에 끝났지만 그의 사회적 생명은 세기를 넘어서도 빛나게 살아있다. 사람의 사회적 생명이란 그가 속한 사회와 집단 속에 대를 이어 살아있는 생명이다. 자기 개인의 안위보다 국권의 회복을 열망하여 하나밖에 없는 생물학적 생명을 초개와 같이 버림으로써 그는 불멸의 사회적 생명을 얻은 것이다.

한씨와 그 아들의 죽음

그렇다고 사회적 생명이 사람의 생이 다한 다음에야 그 실체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사회적 생명은 그가 살아가는 동안에도 의연히 사람의 삶을 통제한다.

한씨라 불리운 42세의 여성은 탈북자였다. 지난 8월 서울 봉천동의 임대아파트에서 여섯 살 아들과 함께 두 달 동안 방치된 시신으로 발견되어 세상을 법석 끓게 했다. 부동의 세계1위로, 입에 올리기도 참담한 ‘자살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별로 수치스럽게도 심각하게도 생각 않는 나라에서, 최소 일가족 전원, 또는 셋 이상의 집단자살 정도는 되어야 겨우 뉴스 한 꼭지를 할애 받는 곳에서, 이 죽음이 잠깐이나마 집중조명을 받았던 건 그가 탈북자이고 그들의 죽음이 아사로 추정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죽음보다 굶어 죽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특별히 참혹하게 생각하는 것은, 먹을 것이 쓰레기통에까지 넘쳐나는 도시의 풍요로움과 그 한복판에서의 굶주림이 보여주는 현기증나는 대비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사건은 잠시나마 사람들의 양심을 자극했고, 그래서 책임소재를 따지게 만들었고, 그래서 복지의 사각지대니 뭐니, 탈북자들의 복지정책이 어쨌느니 하면서 향방 없는 푸념들을 늘어놓게 만들었고, 그래서 송파 세 모녀 사건 때처럼 대책을 세우니 계기로 삼니 하는 판에 박은 공정들을 통과하고는 잠잠해졌다.

그는 정말로 복지의 부재로 인해 굶주려 죽었던 것일까? 어떤 기사에 나와있는 그의 사진을 보았다. 머리칼을 말끔히 쓸어 모아 묶은 단정한 얼굴, 정면을 응시하는 초롱한 시선과 알릴 듯 말듯 입가에 떠있는 어렴풋한 미소, 홀로 짊어져야 했을 곡절 속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친 사진 속의 얼굴은 여러 생각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는 무엇때문에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났을까? 그가 거기를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거기에는 부모와 친척들 이웃들이 있지 않을까? 그 소중한 관계들을 다 버리고 그는 도대체 무엇을 바래 여기에 왔을까?

그는 10년 전에 중국 태국을 거쳐 한국에 왔다. 결혼과 아들의 출산, 그리고 이혼, 중국과 한국을 오갔던 생활 끝에 기다리고 있던 죽음, 그의 생은 2019년 42세에 끝났지만 그의 사회적 생명은 이미 10년전 친지들을 버리고 자기를 낳아주고 키워준 땅을 떠났을 때 끝났다. 그는 한국에 와서 10년을 살았지만 그의 사회적 생명은 여기서 재생되지 않았다. 사람의 사회적 생명이 다했을 때 생물학적 생명이 정상적으로 유지되길 기대할 수 있을까?

‘사람이 인정에 주려 못살지 돈에 주려 못살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인정이란 사람의 사회적 생명을 지켜주고 자라게 해주는 굳건한 힘이다. 그는 그것을 여기서 얻지도 발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굶주림이 아니라 인정의 부재였으리라. 넘쳐나는 풍요 속에서의 굶주림보다 숱한 사람들 속에서 그가 느꼈을 외로움이 더 가슴에 마쳐와 마음을 무겁게 한다.

죽은 이들을 만나는 시간

곧 추석이다. 추석은 산 이와 죽은 이가 만나는 날이다. 오곡과 백과가 무르익어 쌓이는 시기에 산 이와 죽은 이가 만나는 날을 명절로 마련한 풍속은 오곡과 백과의 수확이 죽은 이들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양인들은 추수를 감사하기 위해 신을 만나지만, 우리는 수확을 낳은 땅에 평생의 노동을 바친 조상들을 만난다. 이러한 우리의 풍속은 아주 오랜 시간 정착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져온 유장한 역사의 실재를 말없이 보여준다.

평범한 사람들의 사회적 생명은 후손들의 가슴 속에 터를 잡고 살아간다. 후손을 남기려는 사람의 의지를 어떤 학자들은 본능적인 생물학적 생명연장의 욕구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의식하든 못하든 사람들이 더 가치를 두는 것은 실은 사회적 생명이다. 예로부터 집단에서의 추방을 사형에 버금가는 형벌로 여겨왔던 것이나,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이나, 죽는 것보다 잊혀지는 것이 더 두렵다는 말이 공감을 얻는 것도 사람의 사회적 생명의 무게를 말해주는 것이다. 이 땅에서 이어져온 역사의 내용도 이 땅에서 살다 간 사람들의 사회적 생명에 대한 이야기라 할 것이다. 그래서 죽은 이들을 잊는 것은 곧 자신을 잃는 것으로 된다.

여기 시골은 산 이와 죽은 이가 공존하는 장소이다. 여기서는 죽음이 낯설지 않다. 여기의 죽음은 삶과 어울려 있고, 여기의 삶은 죽음에 포개어져 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어머니와 할머니의 무덤은 그들이 온 삶을 바친 논과 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았으니, 어디를 가나 흔하고 흔한 것이 둥그런 봉분이다. 산 이와 죽은 이의 유대는 땅을 통해 굳건히 이어지고, 그래서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짓는 것이 농사라 하나보다.

사람들은 죽은 이들을 만나기 위해 벌초를 하고 술과 음식을 장만한다. 골짜기마다 등성이마다 한동안 요란스럽게 울려대던 예초기 소리가 끊겼으니 이제 집집마다 제사음식을 장만하는 고소한 냄새들이 풍겨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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