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민족주의가 위태롭다. 요즘만큼 민족이나 민족주의가 왜곡과 천대로 몰각된 때도 없을 듯하다.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라는 구호에 암묵적 동조를 보내는 학계는 그렇다 치더라도, 정치지도자들이 바라보는 민족주의에 대한 몰이해적 시각이 너무 염려스런 판국이다.

일본 아베 총리의 도발에 대해 우리 정부 역시 적극적 대응을 드러내는 분위기다. 문제는 이에 대한 여야 정치지도자들이 보여준 정치적 고언(苦言)에 있다. 대통령이나 우리 관료들이 일본에 대해 민족주의적 감정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백 번 양보하여 차분하고 냉정하게 해결해 가라는 말로 이해한다 치더라도, 극일(克日)의 과정에서 민족주의가 장애가 된다는 논리이기에 더더욱 기가 찰 노릇이다.

혹여 그분들이, 민족주의를 단절와 배타, 고립과 폐쇄라는 가치로 오해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아니면 서구의 근대민족주의 이론에 너무 경도된 결과가 아닐까 하는 기우를 지울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그분들이 염려하는 가치는 우리만을 고집하려는 태도에 대한 경계일 것이다. 그렇다면 대일 관계를 풀어나감에 민족주의적 감정을 내세우지 말라는 충고는 타당하지 않다. 국수주의‧자민족중심주의는 경계해야 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민족주의는 부정적인 가치가 아니다. 국수주의‧자민족중심주의와는 분명히 다르다. 우리의 아이덴티티를 토대로, 생존하는 우리의 삶 그 자체가 바로 민족주의다. 나를 대신 살아줄 그 누구도 있을 수 없듯이, 우리의 삶을 함께 운명 지을 그 어떤 집단도 이 세상엔 없다. 나를 알지 못하는 자는 민족(주의)를 논할 자격이 없는 이유다.

세계일가나 사해동포주의를 부르짖는 이들에게도 시비해 볼 말이 있다. 이 세상에 애초부터 보편적 가치가 어디 있는가. 이것은 카시러(Ernst Cassirer)의 ‘개별적 보편성’이란 말에서도 찾을 수 있다. 보편성은 이미 개별적인 성격을 포함하며, 개별성 역시 보편성을 잉태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안목이다.

문제는 개별과 보편을 호환시켜주는 가치가 무엇일까. 바로 인종을 넘어선 건강한 인간성, 보편적 이성이라 할 휴머니티라 할 수 있다. 건강한 민족주의가 곧 세계주의로 통한다는 근거이기도 하다. 보편적 휴머니티, 그것은 민족과 세계를 이어주는 소중한 끈이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일제강점기 우리의 애국선열들의 바람도 흥미를 끈다. 독립운동의 치열함 속에서 그들이 바라던 궁극적 소망이 바로 세계주의였다. 망국의 판국에 세계주의라니? 말이냐 망아지냐 할지 모르나, 분명한 사실이다.

민족주의자 김구가 바라던 문화민족주의에 드러나는 가치가 사해일가주의다. 그리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넘나들던 조소앙의 소망에도 세계일가가 종착점이다. 그 뿐인가. 무정부주의의 정신적 기둥이었던 이회영의 삶의 지향도 인류대동으로 달려가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이들의 꿈이 절망적 현실에서 오는 낭만주의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들의 이성에 박힌 신념이자 철학이었다. 공통점이 있다면 민족적 이상주의를 추구했다는 것과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보편성을 공유했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주변에는 과도한 민족주의적 행태를 나무라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묻는다. 우리의 어떠한 모습이 지나친 민족주의의 현상들인가. 개념 없이 외쳐대는 허울 없는 민족 구호를 그렇게 인식하는 것은 아닌지. 혹은 독재나 군사정권에 이용된 사이비 민족주의의 반작용은 아닌가. 그것은 민족(주의)의 탈을 쓴 일탈일 뿐, 진정한 민족주의가 아니다.

살피면 고려 말 이후 우리는 민족적 삶을 살아 본 적이 없다. 자아의 가치를 망실했기 때문이다. 중화의 굴레 속에 살아온 천 년의 시간에서는 중화적 자아가 우리의 전부였다. 더욱이 국권마저 빼앗겼던 일제강점기는 ‘대체된 자아(일본의 정체성)’가 우리의 정체성을 대신했다.

그러한 망각과 억압 속에서 정신적 길항작용이 나타난다. 역설적이게도 민족적 자아의 강렬한 되새김질이 그 족쇄를 뚫고 용솟음친 것이다. 일제강점기 우리의 국학(國學, 文‧史‧哲)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총체적 저항을 보여준 것이 대표적 양상이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각성은 해방과 함께 사그라졌다. 해방 이후의 정치적 여건과 사회적 모순, 그리고 학문적 종속으로 인한 자아의 붕괴를 초래한 것이다. 민족주의 역시 선언적 구호, 왜곡된 구호로만 낙인되었다.

근자에 관심을 끄는 반일종족주의라는 해괴망측한 용어도 자아를 잃어버린 이 민족에 대한 조롱으로 등장하는 가치다. 어쩌면 우리의 가치를 스스로 뭉개버린 데 따른 업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하다. 민족주의를 망각한 집단에게 종족주의로 몰아세운 들 무슨 큰 자존심이 날아갈 것인가.

이 용어를 들고 나온 부류들은 한국 민족주의가 서구의 그것과는 다르며, 서구 민족주의에 뒤떨어진다는 주장이다. 또한 한국의 민족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집단이며 권위인 동시에 하나의 신분이라는 견해와 함께, 그래서 종족이라 함이 옳다는 것이다.

민족 이해의 일천함은 차치해 두더라도, 문제는 그의 주장에 있어 종족이란 의미마저도 학술적 이해와는 격리된 심정적 발로가 강하는 데 있다. 오늘날 한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증오를, 우리의 정신 깊은 곳에 잠복해 있는 배타적인 감정과 연관시킨 것이 그렇다. 또한 반일 심리를, 아무런 사실적 근거 없이 허위와 위선, 거짓말로 쌓아올린 샤머니즘적 세계관으로 몰아세움도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일본에 대해 원초적이고 미개한 감정만으로 대응한다는 것이 반일종족주의의 정체다.

기괴한 것은 반일종족주의의 적극적 주장에 대한 학계의 무반응이다. 우리 정체성의 근본을 흔들어 놓는 중차대한 도발임에도 우리 학계는 묵언수행 중이다. 그렇다는 것인지, 아니라는 것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크게 놀랄 것도 없다. 고위 공직자가 “친일이 애국이다”라고 공언하는 이 판국에 더 이상 경천동지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자아를 잃어버린 시회, 회색적 지식사회에 나타나는 전형적 현상이다. 지적 양심과 정의는 뒷전이다. 그저 이해관계, 기득권의 향배에 따라 선택하면 그만이다.

흩어진 가치는 다시 다잡기 힘들다. 가치의 엔트로피 현상이다. 나라 밖의 음흉한 T씨와 교활한 A씨 때문에 정신 산란한 요즘, 무너져가는 우리의 정신적 질서를 보면서 더더욱 현기증만 인다.

 

 

195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대학에서 행정사를 전공하였고, 한신대학교 강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국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저술로는 『단조사고』(편역, 2006), 『종교계의 민족운동』(공저, 2008), 『한국혼』(편저, 2009), 『국학이란 무엇인가』(2011), 『실천적 민족주의 역사가 장도빈』(2013)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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