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출장을 자주 다니는 편은 아니지만, 남북교류협력사업이나 대북지원사업 그리고 가끔 휴가를 명목으로 해외에 나가곤 한다. 하지만 다양한 국가를 다니지는 못했다. 태어나 지금까지 다녀본 나라를 꼽아보면 일본, 중국, 태국이 전부다. 당연히 외국이 아니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제외다.

참 활동 범위가 협소한 녀석이다. 남미는커녕 미국 땅 한 번 밟아보지 못했다. 더구나 간이 콩알만 하기에 미국은 일부러 가고 싶은 맘도 없다. 내가 보기에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다.

중국은 주로 업무 차 자주 다녔다. 북경, 상해, 청도, 항주, 서안, 연길 등 나름 많이 다녀온 것 같다. 반면 일본은 주로 휴가 때 많이 다녔다. 도쿄, 오사카, 교토, 오키나와 등 관광을 목적으로 다녀왔다. 태국은 신혼여행 때 푸켓을 한 번 가본 것이 끝이다.

활동 반경이 좁기에 자주 다니는 곳을 비교하는 버릇이 생겼다. 중국과 일본 말이다. 중국은 갈 때마다 무언가 꿈틀거리고 있다는 인상을 많이 받는다. 그것이 긍정적인 면인지 부정적인 면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무언가 쉬지 않고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반면 일본은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그저 편안한 곳으로 느껴졌다. 치안도 안정되어 있는 것 같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친절했다. 과도하다 느낄 때는 많지 않았지만, 적어도 불친절 하다고 느낀 적도 없었다. 그저 관광객을 맞는 서비스 차원이라고만 생각했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중국은 조금 달랐다. 무뚝뚝하고 가끔은 불친절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한국에서 왔기 때문인가, 살짝 기분이 상하기도 했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별반 대하는 것이 다르지 않아, ‘대륙의 싸가지 없음’이라 느끼고 넘어가곤 했다. 뭐 그렇다고 극히 불쾌함을 준 것은 아니다. 대충 넘어갈 만한 수준이었다.

우리의 ‘영원한’ ‘확고한’ ‘절대불변’의 동맹 미국이 존재해서 그렇지, 사실 한·중·일은 미국과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깊은 역사를 공유해왔다. 그 역사가 반드시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서로 협력하고 공존한 역사도 길고, 반목하고 치열하게 싸워 온 역사도 적지 않다. 그리고 일본은 우리에게 영원히 풀지 못할 것만 같은 숙제로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 하토야마 유키오 지음, 김화영 옮김, 『탈대일본주의 - ‘성숙의 시대’를 위한 국가의 모습』, 중앙Books, 2019.6. [자료사진 - 통일뉴스]

그러한 일본과 현재 최악의 관계를 맞고 있다. 아슬아슬한 국면이 이어진다. 그리고 우리는 당연하게도 일본에 분노하고 있다. 그 몰염치와 몰역사성 그리고 뻔뻔함에 기가 막혀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만만한 민족이 아님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겠다는, 조금은 민망한 느낌의 구호가 몰아치고 있다. 지금 이 상황을 어찌 봐야 할까. 여전히 난 어지럽다.

콤플렉스를 누군가 말한다. 패전 이후 미국의 비호아래 경제대국이 되었지만, 굳이 북의 표현만이 아닌, 전 세계의 (내심 가지고 있는) 평가라 봐도 무방한 ‘정치 난쟁이’로 살아온 일본. 그 콤플렉스가 그들을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 심성을 갖도록 만들었다는 해석이다. 그리고 다시금 군사대국화를 꿈꾸며, 헌법으로 금지되어 있음에도 전쟁에 참가할 수 있는 나라가 되기 위해 국제사회를 뒤흔들고 있다는 것이다. 한일 경제 갈등은 그 시작일 뿐이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 우리는 그 어떤 콤플렉스도 없을까. 찬찬히 생각해봤다. 그 성격은 다르겠지만, 분명 우리에게도 콤플렉스는 존재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무엇이든 세계 최초, 동양 최초가 되기 위해 눈물겨운 인정 투쟁을 하고, 해외에서 특히 서구에서 좁쌀만 한 관심이나 인정을 해주면 거기에 감격하여 ‘코리아!’를 외쳐온 우리가 아닌가. 우리의 국력이,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이나 책임감이 어떤지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보다는 그저 남들이 우리를 어떻게 봐주고 있는지에 더 집착하는 모습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가끔은 눈물겨울 정도다.

그리고 우리가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이중성이 존재한다. 일본은 우리에게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대상인 동시에 부러움과 찬탄의 대상이다. 놀라운 기술력으로 세계 시장을 제패하고 미국과 동등한 입장(착시현상이지만)에서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베는 우리 대통령과는 격이 다르게 트럼프와 너무나도 친해 보이고, 때문에 미국이 우리가 아닌 일본의 입장을 먼저 고려해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비록 일본 총리대신이 미국 대통령과 함께 골프를 치다 벙커에 우스꽝스럽게 뒹굴어도, 그 마저도 미일동맹의 지극한 친밀도를 과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과거 우리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을 ‘모시고’ 카트를 손수 운전하며 골프를 쳤던 모습에는 비굴하다고 비웃으면서도, 아베의 굴종적인 대미외교의 모습은 치밀한 전략의 소산인 것처럼 해석한다. 난 이것 역시 콤플렉스라고 생각한다.

현재 일본의 평범한 국민들은 한국에 대해, 한일 간 아픈 역사에 대해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을까. 이 부분에 대해 우리는 많은 우려와 비난을 하곤 한다. 하지만 되묻고 싶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일의 과거사가 아닌 지금의 일본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일본 주요 관광지에 대한 깨알 같은 쇼핑 정보가 아닌, 일본 연예인이나 영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아닌, 일본 국민들의 정서와 심성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어쩜 우린 여전히 서로를 너무도 모른 채 이중적 감정을 유지해 온 것은 아닐까. 서로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적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남북관계도 그렇지만 한일관계 역시 끊임없이 만나고 소통해야 풀어갈 수 있다. 서로를 더 알아가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도 커진다. 그런 의미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결단은 탁월했다. 왜색 문화의 유입을 두려워하던 당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한일 문화교류의 물꼬를 튼 그의 업적은 평가받아 마땅하다. 그 덕분에 우리는 그나마 일본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일본 역시 한국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한일관계의 골은 깊고도 넓다. 오늘의 모습은 딱 그만큼의 한일 간 이해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아베를 비롯한 일본의 주류 정치세력의 입장일 뿐 대다수 일본 국민들마저 지금처럼 한일관계를 보고 있지 않다는 주장도 할 수 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일본 국민들은 한국을 알지 못한다. 우리가 그런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대한수출규제에 대다수 일본 국민들이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난 이 역시 소통의 부족 탓이라 생각한다. 깊이 있는 소통은 여전히 멀기만 하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일본 정치의 후진성이다. 이 책의 저자인 하토야마 전 총리와 같은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이 이제 일본에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1960년대 전공투의 추억은 이미 희미하다. 자본에 투항한 일본의 진보세력, 노동세력은 이제 아베의 폭주를 막을 힘이 없다. 와다 하루키 선생의 ‘우린 막을 힘이 없다’는 자조 섞인 표현이 단순한 변명만은 아닌 이유다. 여전히 천황을 숭배하는, 그리고 국가를 운영하는 총리가 그냥 총리가 아닌 총리대신인 나라가 일본이다. 아베 역시 천황의 신하일 따름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본의 후진적인 정치수준을 비웃으며 지금처럼 ‘누가 이기는지 갈 때까지 가보자’고 할 수만은 없다. 이미 세계는 혼자 살아갈 수 없는, 홀로 발전할 수 없는 시스템이 되어버렸다. 국제주의와 글로벌 시장경제를 만들어내고 확산한 미국과 영국 등이 그 틀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는 아이러니한 지금이지만, 이는 그들이 그만큼 쇠퇴했다는 증거일 뿐, 그들조차 언제까지 홀로 나갈 수는 없다. 그렇다. 일본이 어려우면 우리도 어려워지고, 우리가 힘들면 일본도 힘든 시스템인 것이다. 이는 곧 남북관계에도 적용될 것이다. 더 이상 이념 대결이 무의미해진 지금, 북의 어려움은 곧 우리의 어려움이 되고 우리의 고통은 북으로 이어질 것이다.

때문에 저자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 일본과 한일관계, 나아가 동북아 평화를 위해 소중하다 할 수 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잘 알다시피 광복 70주년을 맞았던 2015년 8월 서대문형무소를 찾아 그곳에서 숨져간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무릎을 꿇은 바 있다. 마치 빌리 브란트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폴란드를 찾아가 무릎 꿇은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또한 그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 해 한국을 찾아 “경술년 한일합방은 원천무효”라는 입장을 천명하며, 새로운 동아시아 공동체의 출범을 역설하기도 했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의 정치철학과 이상은 “국가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며, 인간은 목적이지 수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일찍이 히틀러와 스탈린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일본의 군부 독재화에 반대하여 도조 내각에 의해 정계에서 추방되었던 조부 하토야마 이치로 전 총리로부터 이어져 온 철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저자는 경제대국에서 군사대국으로 이어지고 궁극적으로 정치대국이 되고자 하는 현 일본 주류 정치인들의 생각을 ‘불가능한 꿈’이라 일축한다. 그리고 빠른 속도의 인구 감소와 고령화 등 객관적 조건과 함께 과거 뼈저리게 경험한 대일본제국의 파탄의 교훈을 토대로 자유와 인간을 존중하는 중규모 국가를 착실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자립과 공생을 원칙으로 하는 동아시아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데 일본이 중추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구상이다.

지금처럼 중국을 견제하고 북한을 압박해 동북아 냉전 구조를 이어가고자 하는 아베 정권과는 질적으로 다른 구상이다. 특히 그는 남북관계 진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 이웃국가인, 게다가 한반도 분단과 전쟁에 책임을 가지고 있는 일본이 적극 도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가 종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같은 생각”이라며 인용한 일본 철학자 우치다 다쓰루의 말은 그가 한일 과거사 문제에 있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과거 전쟁 당시 종군위안부 제도에 대해 한국으로부터 냉험한 비판과 함께 사죄 요구를 받고 있다. ‘한일조약으로 이미 법적으로 해결된 문제다’ 또는 ‘한국에 충분한 경제적 보상을 끝낸 상황에서 언제까지 같은 사항으로 문제 삼을 것이냐’며 짜증 섞인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패전 국가는 전쟁의 피해에 관해 사실상 ‘무한 책임’을 지고 살아가야 한다. 정해진 배상을 했으니 이제 모든 책임을 다했다는 말은 패전국 측에서는 절대 할 수 없다. 전승국이든 점령을 받았던 국가든 그쪽에서 먼저 ‘이제 더 이상 책임 추궁은 하지 않겠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계속 책임을 짊어지고 가야 한다.”

이번 한일 갈등의 시발점이 된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에 대해서도 그의 입장은 확고하다. “1991년에 야나이 조약국장은 ‘개인 청구권 자체를 국내 법적 의미에서 소멸시킨 것은 아니다’라고 답변한 적이 있다.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완전하고도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한일 양국 정부는 강제징용 피해자 분들의 존엄성과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냉철하게 대화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한일 갈등 국면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북미 관계에 진전이 더디어 가면서 북의 조급함이 미사일 도발로 이어지고 있다. 북미대화는 곧 하겠지만, 남북대화는 없다는 북의 입장은 한 편으론 이해가 되면서도, 그동안 우리 정부의 노력을 폄하하는 것 같아 섭섭하고 아쉽다. 무엇이 그들에게 진정한 도움이 되는 행동인지 신중히 판단해야 할 것이다.

처음 일본의 도발이 있은 후부터 우리 국민들은 슬기롭고 친절하게 정부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주었다. “개싸움은 우리가 할 테니 정부는 정공법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상대로 일부 정치인을 비롯해 여전히 과거 권위주의 정치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이 오버하고 있다. 지자체 전역에 일본을 반대하는 현수막을 걸려다 호되게 비판받아 멈추고, 어느 지역은 구청 공무원들의 일본 제품을 회수하여 한 데 모아 봉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지자체 간, 특히 양국 학생 간의 교류마저 막는다. 이는 그야말로 어리석은 행동일 뿐이다.

양 정부 간 갈등과 대립이 있다 하여 그것이 양 국민 간 대립으로까지 이어져선 안 된다. 이럴 때일수록 양국의 민간은 더 많이 만나고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 서로에 대한 우호적인 감정이 증오의 감정으로 바뀌는 순간, 그 때는 그야말로 더 큰 파국을 초래할 것이다. 그것을 부추기는 이들은 애국자가 아닌, 정치모리배일 뿐이다. 양정철 원장의 행동은 때문에 극히 현명치 못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지금의 국면을 통해 가장 이익을 보는 집단이 누구일까를. 한일 양국 관계의 파탄으로 누가 실익을 거둘지를. 이를 파악하는 순간 우리의 다음 행동이 보다 신중해지고 현명해질 것이다. 대마도에서 관광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이 망한다고 해서 국내 관광업계가 살아나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지금은 소모적인 감정대립으로 서로 힘을 뺄 시기가 아니다. 물론 우리의 분노와 국민들의 저력을 보여줄 필요는 있지만, 이것이 일본 정부가 아닌 일본 국민 전체에 향해져선 안 될 것이다. 그보다는 지금의 일본을 더 깊이 이해하고 파악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전문가라는 이들은 이럴 때 제대로 된 길을 제시하라고 그동안 밥 먹고 살아온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밥값 할 시기다.

저자의 책은 일본 내에서도 미약하지만, 공존과 진정한 자립을 추구하고자 하는 이들이 여전히 있음을 보여주는 희망의 메시지다. 그리고 일본이 진정한 아시아의 일원이자, 우리의 이웃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과거 추악한 과거를 덮으려고만 하는 게 아니라, 이를 직시하고 처절히 반성하고자 하는 이들도 존재함을 보여준다. 때문에 깨닫게 된다. 그들의 진정한 ‘탈대일본주의’는 그들 혼자가 아닌 우리들의 도움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리고 우리 역시 또 다른 차원의 우리만의 ‘탈 일본’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는 반일이나 극일이 아닌, 우리의 일본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는 첫 걸음이 되어야 한다. 일본을 진정한 우리의 이웃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노력이다. 물론 한일의 민간이 손을 잡고 나아가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 길에 이 책이 하나의 이정표로 역할하리라 믿는다.

지금처럼 분노 게이지가 솟구치는 시기, 무더위마저도 일본 탓인 것만 같은 시기, 독자의 정신을 한 차원 시원하게 만들어줄 책이다. 우리 모두 똑바로 이기고 슬기롭게 이기자. 아, 사족으로. 일식집에 종사하고 있는 분들은 모두 한국인들이다. 유치하게 놀지는 말자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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