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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기에 대한 정치투쟁<기고> 유엔사와 유엔깃발 논쟁 (2)
이시우  |  siwoophot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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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8.04  07:3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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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우 / 사진가

 

목차

1. 유엔사와 유엔기

2. 유엔기에 대한 법적논쟁

3. 유엔기에 대한 정치투쟁

4. 유엔깃발투쟁 시 북·미 전술분석
  1) 미국의 실패와 성공
     (1) 미국 발등 찍은 유엔총회
     (2) 안보리이관의 실패
     (3) 유엔에서 미국권위의 균열
     (4) 살라미전술의 성공
  2) 북의 성공과 실패
     (1) 유엔에서의 성공
     (2) 유엔사해체의 실패

5. 유엔깃발 논쟁의 전망
  1) 의제설정 무대
  2) 전제
  3) 전가
  4) 순서
  5) 배치

6. 결론

 

3. 유엔기에 대한 정치투쟁

1975년 8월 25일부터 판문점 유엔사군사정전위 등 정전협정 이행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시설을 제외하고 한국 내 모든 미군기지에서 유엔기가 내려졌다. 정확히 표현하면 그날 아침이후로 유엔기를 게양하지 않았다.

아침마다 깃발이 게양되던 3개의 깃대에는 성조기와 태극기만 게양되었으므로 항상 하나의 빈 깃대가 남아있는 묘한 풍경이 연출되었다. 유엔기는 통상 중앙부의 깃대에 게양되었으므로 가운데가 빈 깃대의 풍경은 미국이 처한 당시의 상황을 암시하는 듯 했다.

   
▲ <자료1> 사진은 1969년 파주 주둔부대였던 블루랜서밸리에서 촬영된 국기하강식 모습이다. 맨 처음 성조기가 내려지고 있다.(주5) [자료사진 - 이시우]

이 날이 더욱 대조되었던 것은 오랜 시간 북이 공을 들여왔던 비동맹회의에 가입한 날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도 리마에서 열린 제2차 비동맹외상회의에서 북은 정식가입국이 되었다. 북은 축제분위기에 휩싸였고 ‘우리혁명의 국제적 연대성을 일층 튼튼히 함으로써 조국의 자주적 통일위업에 유리한 정세를 조성할 뿐 아니라 사회주의가 튼튼한 동맹자를 가지게 되었다’고 기뻐했다.(주6)

유엔깃발내리기는 유엔총회 회원국 중 북한측 국가들의 외교적 공세에 밀려 미국이 스스로 취한 조치였다. 유엔기를 둘러싼 싸움에서 미국이 패배한 것이다. 지폐가 단순한 종이가 아니듯 깃발도 단순한 천이 아니다. 지폐가 가치관계를 체현하면서 동시에 가치를 소외시키듯이 유엔깃발도 유엔이란 국제체계를 상징적으로 체현하면서 그 체계에서 배제된 국가를 소외시킨다. 깃발투쟁은 따라서 정치투쟁의 성격을 갖는다. 그렇다면 유엔에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69년 11월 25일 유엔총회결의는 60년대 중반이후 유엔총회의 각종 문건에 등장했던 다음 문장이 포함된 결의안이 마침내 통과되기에 이르렀다.

“유엔결의에 따라 한국에 보낸 유엔군의 대부분이 이미 철수했고, 한국에서의 유엔군의 유일한 목적은 그 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는 것이고, 해당정부가 언제든 한국이 요구하는 그런 조치나 총회가 이행하고 있는바 공식적이고 최종적인 해결을 위한 상태를 위해 한국으로부터 주둔병력을 철수하기 위해 준비되어 있음에 주목한다.”(주7)

이로써 유엔총회는 ‘유엔군철수’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여기서의 유엔군은 실제로는 미군임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즉 주한미군철수가 유엔총회 의제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까지는 그저 주목할 뿐이었다. 남한과 북한은 유엔회원국이 아니었기에 유엔에서 ‘한국문제’를 주도할 처지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1970년 2월, 닉슨(Richard M. Nixon)은 외교교서로 그 전년도의 아시아 주둔 미군의 삭감을 요점으로 하는 ‘괌 독트린’을 ‘닉슨 독트린’이라 정식화했다. 그리고 같은 해 3월말에는 약 2만 명의 주한미군삭감을 요점으로 하는 국가안보결정비망록(National Security Decision Memorandum: NSDM)-48을 확정했다. 이어서 다음해 1971년 3월, 닉슨정권은 박정희정권의 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제7보병사단의 철수를 강행했고 그때까지 비무장지대의 후방을 담당하고 있었던 제2보병사단도 역시 재배치시켰다.

이어서 닉슨 대통령의 중국방문계획 발표(1971년 7월 15일)가 있자 한반도는 큰 영향을 받는다.(주8) 키신저가 저우언라이와의 회담을 마친 직후 ‘알바니아 결의안’을 통과하는 형태로 중국의 유엔가입이 실현되었다. 키신저도 저우언라이도 동년 유엔총회에서 중국의 유엔가입이 실현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주9)

양국은 중국이 국제사회에 참가할 것을 염두에 두면서 한반도에서의 전쟁재발 방지를 위해 협조할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었다. 북한은 키신저·저우언라이의 1971년 7월 9일 1차 회담이 끝난 직후 저우언라이의 평양 비공식방문을 통해 회담내용을 충분히 통보받고(주10) 1971년 9월 7일 외교부 성명을 통해 한반도 주둔 외국군의 철수와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UNCURK: United Nations Commission for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의 해체를 촉구했다. 북한의 이 성명 내용은 또한 그대로 키신저·저우언라이 사이의 1971년 10월 2차 회담에 반영되었다.(주11)

그러나 1972년 2월 28일 ‘상하이 공동성명’을 발표한 당시 미·중 두 정상은 한반도에서의 유엔의 권능을 박탈하는 데 있어서 UNCURK만 해체하고 유엔군사령부에 대해서는 불문에 부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상하이 공동성명서’의 발표를 듣고 󰡔로동신문󰡕에 게재된 논평에는 ‘남조선에 무엇보다도 먼저 유엔군의 간판을 뒤집어 쓴 미제국주의 군대가 물러가야 한다. 남조선에 미제국주의 침략군이 둥지를 틀고 있는 한 조선의 평화와 자주적 평화통일이란 불가능하다’고(주12) 강조하면서 ‘상하이 공동성명서’에는 언급되지 않았던 유엔군사령부 해체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이제 미국측은 언커크의 해체만을, 북측은 상하이공동성명에서 누락된 유엔사해체까지 포함한 의제로 외교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73년 11월 27일 개최된 유엔총회 1차위원회보고서에 의하면 북한측 36개국 결의안은(주13) UNCURK의 해체와 더불어 한국주둔외국군에 의한 유엔깃발사용을 취소할 필요와 유엔사해체 필요성을 언급했다.

유엔깃발사용금지와 유엔사해체가 의제로 정립된 것이다. 아직까지 유엔기는 유엔사하고만 동일시되어 있다. 이후에 나타날 유엔깃발과 모든 주한외국군을 연결시키는 전략은 성립되지 않고 있었다.

   
▲ <자료2> A/8752/Add.9 2항에서 한국주둔외국군에 의한 유엔깃발사용을 취소할 필요와 유엔사해체 필요성을 고려할 것을 권고했다. [자료사진 - 이시우]

이에 비해 미국측 28개국의 결의안은(주14) UNCURK의 해체만을 다루었다. 이 회의에서 튀니지가 낸 결의안은(주15) 한국에서 유엔이 속히 손을 떼기 위한 조치와 한국에 주둔중인 이들 군대의 철수를 언급했다.(주16) 당시 국토통일원정책기획실은 대외비자료를 통해 분석한 바 1973년 28차 유엔총회는 북한의 승리로 보았다.

‘1973년 28차 유엔총회에서 한국문제에 대한 결과를 타협으로 보는 관점은 북한측으로 보면 타당하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28차 유엔총회의 한국문제에 대한 결과의 형식적인 면에서 보면 타협적형식이라고 볼 수 있으나 실질내용면에서 한국측은 언커크를 자진해체했을 뿐만 아니라 북한과 중공이 가장 불원하고 있는 남북한 유엔동시가입을 한국측이 철회했기 때문에 28차 총회결과는 북한의 승리로 분석·평가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주17)

1974년 3월 26일 북은 1972년 1월 10일의 남북평화협정제안을(주18) 철회하고 미국에 북미평화협정을 제기했다.(주19) 2년 만에 남북평화협정에서 북미평화협정으로 당사자가 바뀐 것이다.

1974년 9월 19일 유엔총회일반위원회 219차 회의에서 권고한 의제 106항과 110항은 ‘유엔깃발하에 한국에 주둔중인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를 제목으로 하고 있다.(주20) 그리고 37개국이 요청한 10월 7일 결의안(주21) 역시 같은 제목을 유지했다.(주22)

이로써 북한측은 유엔기와 모든 외국군을 동일시하는 전략을 관철시켰다. 이는 미국이 유엔사와 주한미군을 분리하려는 의도를 간파하고 유엔깃발을 매개로 유엔사와 주한미군을 동시에 해체·철수시키려는 전략의 표현이었다. 실제 태국군철수를 마지막으로 유엔사는 미군만 남게 되었다.

그러자 1974년 7월부터 유엔사·주한미군사·미8군사의 기능이 통합되어 운영되기 시작했다. 행정의 능률을 꾀하기 위해 인사·정보·작전·병참등 3개 사령부의 비슷한 임무의 참모기능을 일원화하여 미군은 마치 1개 사령부로 통합된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유엔깃발 아래 모든 미군이 통일된 듯 보이는 것은 당연했으며 이는 미국이 스스로 자초한 일이기도 했다.

1974년 12월에는 미 육군태평양사령부가 해체되면서 주한미군은 워싱턴 직할이 되고 형식상으로 유엔조직처럼 착각되던 유엔사에 대한 작전통제권이 미합참으로 이관되었다.(주23)

국제연합한국통일부흥위원회(UNCURK)와 유엔사 해체문제가 거론되던 1973년 3월 15일 미 국무부동아시아담당차관보 마셜 그린이 작성한 유엔사문제 분석문건 중에는 다음과 같은 전략이 이미 포함되어 있었다.

‘그 어떤 것도 유엔사 해체에 대한 극복 못할 장애물이 되지는 않음. 한국 안보에 대한 최우선적인 역할 역시 주한미군으로 지원되는 미국의 대한국안보조약으로 그 기능을 담당하고 있음.’(주24)

즉 미국 전략은 더 이상 유엔사해체를 피할 길이 없으니 유엔사해체를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재빨리 유엔사와 주한미군을 분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73년 당시까지도 미국은 이런 전략을 총회결의안에 반영시키진 못하고 있었다.

유엔총회에서 미국측 전략에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한 것은 1974년 11월 29일 2031차 회의였다. 프랑스는 수정안에서(주25) “유엔사해체를 포함하여”라는 원래의 문구에 “정전협정유지를 위한 적절한 조정과 함께 유엔사해체를 포함하여”라는 문구를 추가했다.(주26)

이로써 미국측은 유엔사해체에 정전협정유지라는 조건을 추가하는 전략상의 변화를 보였다. 이는 북이 1974년 3월에 제안한 북미평화협정에 대한 거부의사를 밝힌 것이다. 당시까지 북은 유엔총회에서 유엔기-유엔사해체-주한미군철수까지는 통합시켰지만 아직 평화협정까지를 엮는 큰 그림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75년에서야 가능해졌다. 그러나 미국은 정전협정고수라는 입장을 세워 평화협정논의를 저지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29차 총회가 막바지로 달려가던 1974년 12월 4일 이종목 북한수석대표의 연설은 ‘유엔깃발하의 외국군철수’라는 제목을 고수하기 위한 것이었다. 더불어 유엔깃발하 외국군철수와 ‘미군철수’를 동일시하려는 전략으로 분석되었다.(주27) 단순히 외국군철수라고 하면 득표가 어려울 것이므로 득표전술상 감각적·직관적 상징으로서 ‘유엔깃발하’라는 구절을 고수하고자 한 것이다.

북측이 유엔기라는 상징을 통해 미군철수를 구체화, 종합화하는 개념적 사고를 했다면 미국측은 깃발은 깃발, 유엔사는 유엔사, 미군은 미군이라는 형이상학적 사고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북측은 종합을, 미국측은 분리를 집요하게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1974년 12월 9일 2039차 회의에서는 프랑스 안에 대해 사우디아라비아 대표가 단어만 바꾼 같은 내용의 수정안을(주28) 제출하였다. 그리고 이 수정안이 통과되었다.(주29) 1974년 12월 17일 유엔총회 2322차 본회의에서 통과된 결의는 다음 부분의 변화를 포함했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정전협정의 계속적 준수를 보장할 필요와 이 지역의 평화와 안보의 전면적 유지에 대해 고려해줄 것이라는 희망과, 두 한국정부가 그들 사이의 영구평화를 견인할 협상과 조정 중에도 한반도에서의 평화와 안보를 유지시킨다고 평가된 정전협정을 유지하기 위한 적절한 합의와 함께 유엔군사령부해체를 포함하여 그들의 책임 내에서 주어진 한국문제에 관한 그런 양상에 직접관련당사자들과 함께 당연히 조정을 고려할 것이라는 희망을 표명한다.’(주30)

   
▲ <자료3> A/RES/3333 ‘한국문제’, 2322nd plenary meeting 1974.12.17. ‘정전협정을 유지하기 위한 적절한 합의와 함께 유엔군사령부해체’를 언급하고 있다. [자료사진 - 이시우]

이 결의안은 첫째 유엔총회에서 안보리로 한국문제의 이관을 시도한 점, 둘째 정전협정유지를 유엔사해체의 조건으로 명확히 했다는 점, 정전협정 논의에서 한국을 포함시키기 위한 ‘직접관련당사자’란(주31) 표현이 처음 등장했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이로써 74년 총회논쟁에서는 “정전협정유지와 유엔사해체” 대 “유엔사해체와 유엔깃발하 주한외국군철수”가 미국측과 북한측의 쟁점이 되었다. 29차 유엔총회에 대해 김달중은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서방측 결의안이 통과되어 통과된 형식면에서는 한국측의 승리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실질면에서 유엔사해체의 당위성을 기정사실화시켰다는 결과에서 북한측의 두 번째 실질적 승리라고 평가할 수 있다고 본다.’

이어 그는 1973년과 1974년 총회에서의 북한의 전략을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28차(1973년)와 29차(1974년) 유엔총회에서 유엔사에 대한 북한측의 전략을 분석해보면 먼저 28차 총회에서 공산측은 그들의 결의안에서 1.언커크 해체, 2.유엔기 사용권리를 취소하고 유엔사를 해체할 것, 3.모든 외국군을 철수할 것을 주장한데 반하여 29차(1974)총회에서는 1.유엔 깃발하의 모든 외국군은 철수해야한다 라는 원칙을 세워놓고 2.철수방법은 관계국간에 협의하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상의 북한측 결의안 내용에서 분석되어질 수 있는 의도는 첫째, 유엔기하의 외국군 철수라고 한 점은 먼저 유엔사자체를 해체시켜놓고 다음 유엔총회에서 유엔사해체는 명목뿐이고 그에 소속하였던 외국군 즉 미군이 아직도 철수하고 있지 않다는 문제를 다시 후속적으로 제기하려는 단계적 전략으로 분석되어질 수 있다.

북한측 결의안 중에 “관계국간 외군철수관련문제해결을 위한 적절한 조치”라는 문구는 1974년 3월 25일 북한이 미국정부에 제의한 평화조약체결과 직결되는 전략으로서 유엔군의 주동세력인 미국을 상대로 협상의 통로를 타개하겠다는 전략으로 분석되어질 수 있다고 본다... 29차 유엔총회에서 이종목은 그의 연설에서 미군철수와 관련하여 미국정부와의 평화조약체결을 주장했던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주32)

1975년 6월 27일자로 미국이 유엔안보리 의장에게 보낸 편지에는(주33) 유엔기 사용의 제한을 포함하여 유엔사령부의 노출을 줄이기 위한 조치와 정전협정이 계속 유효하다고 관련국가들이 동의한다면 1976년 1월 1일자로 유엔사를 해체하고 한국군장교를 후임사령관으로 임명하겠다는 제안이 담겨 있었다.

   
▲ <자료4> S/11737. 1976년 1월 1일부로 유엔사를 해체하겠다는 미국의 약속이 서술된 서한.(1975.6.27.) [자료사진 - 이시우]

이러한 내용은 북한과 중공과의 합의가 아니라 미국정부와 한국정부의 일방적인 조정조치로서 이행해 버리고 말겠다는 것이다. 유엔총회의 결정에 따르지 않고 미국 스스로의 결정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날의 편지는 1975년 11월 18일 유엔사해체를 결정한 유엔총회결의안의 핵심내용이 되었다. 짧은 결의안에 ‘정전협정유지’주장은 무려 4차례나 중복하여 언급되었다. 즉 이는 미국의 유엔총회에 대한 핵심전략이었던 것이다.

한국측은 이런 일방조치에 대하여 북측이 도전할 수 있는 방법은 정전협정 자체의 무효선언밖에 없다고 보고, 그러나 북한은 정전체제의 전면 무효선언보다는 이미 서방측이 제시한 유엔사 후계조정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리라 판단하였다.(주34) 그러나 북은 정전협정 지속 대신 정전협정 폐기와 평화협정으로의 대체를 주장했다.

석 달 뒤인 1975년 9월 22일 미국은 다시 유엔안보리 의장에게 보낸 편지에서(주35) 6월 달에 약속하고 8월 달에 실행한 유엔기의 사용제한은 유엔군사령부의 정전협정 의무수행에 직접 연관된 미군과, 상호방위조약에 따른 주한미군을 구별하는데 효과가 있을 것이나, 유엔기의 사용을 자제한다고 해서 정전협정에 따른 유엔사의 책임이 변하진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 <자료5> S/11830 유엔기사용의 자제가 정전업무책임을 변경시키지 않는다는 통보를 한 미국의 서한.(1975.9.22.) [자료사진 - 이시우]

유엔기사용취소 문제는 유엔깃발법과 일치하지 않는 유엔안보리 결정의 하자에서 생긴 것인데 미국은 깃발법과 안보리 결정에는 하자가 없고, 미군기지에까지 유엔기 사용을 남용한 것만을 바로잡으면 된다고 주장한 셈이다. 법률차원의 오류를 규칙차원의 오류라고 주장한 셈이다. 미군기지에서의 유엔기사용 포기를 유엔사의 정전유지책임과 분리한 것이다.

크리머 대령에 의하면 1975년 8월 25일 유엔기 게양의 포기는 되도록 유엔군을 노출시키지 않는 조치였으나 결국은 유엔사가 유엔기를 사용할 권한이 있는 동안은 깃발을 과감하게 사용하기로 한 것이었다.(주36) 결국 미국은 두 달 만에 유엔기 사용자제에서 유엔기 계속사용으로 재빨리 선회한 것이다.

결국 유엔기사용취소에 대한 총회결의안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왜곡했을 뿐이다. 그리하여 75년 이전에 비해 그 숫자는 줄었지만 오늘날까지 유엔기는 계속 게양되고 있다. 그러나 정작 75년 총회결의안 어디에도 유엔기계속사용의 합법성 주장은 반영되지 않았다.

드디어 1975년 11월 18일 북한측과 미국측 결의안이 각각 유엔총회에서 통과되었다. 우선 미국측 결의안의(주37) 핵심조항은 다음과 같다.

‘유엔군사령부가 1976년 1월 1일을 기하여 해체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동 일자로 남한에는 유엔 깃발아래의 군대는 잔류하지 않도록 상기 협의가 완결되고 정전협정 유지를 위한 대안이 마련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 <자료6> A/3390 (A). 유엔사해체의 조건으로 정전협정의 유지를 위한 대안마련을 전제한 미국측 결의.(1975.11.18.) [자료사진 - 이시우]

정전협정유지를 전제조건으로 한 유엔사해체 안이다. 정전협정유지에 대해선 전체결의안에서 4번이나 강조되어 있다. 이 결의안에서는 8월 25일 유엔기사용과 유엔사임무의 분리방침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았다. 언급된 것은 유엔기사용제한을 약속한 6월 27일 편지뿐이다. 미국도 자신의 조건부전제를 포기한 것이다.

또한 정전협정유지를 주장했지만 평화협정체결을 반대하진 않았다. 또한 이 결의안에서 ‘국제평화와 안보의 유지에 관한 유엔헌장의 원칙과 목적에 따라 유엔이 한반도에서 이같은 목표의 달성을 보장하기 위한 지속적인 책임을 가진다는 것을 인정’함을 전제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한다.

1950년 6월과 7월의 안보리 결의에서는 ‘평화의 파괴’가 발생한데 대해 ‘평화의 회복’을 결의하였다. 평화가 깨졌다면 ‘유지’될 수 없고 오직 ‘회복’할 수만 있다.(주38) ‘평화의 위협’이 발생했다면 평화는 침략의 진압이 아닌 평화의 위협에 대한 제거와 진압으로서 ‘유지’될 수 있다.(주39) 국제평화의 ‘유지’란 평화의 파괴를 예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전협정 60항의 평화적 해결 권고, 즉 평화협정 체결 권고는 파괴된 평화의 회복으로 볼 수도 있고 평화의 파괴를 예방하는 평화의 유지로도 볼 수 있다. 그런데 미국이 평화의 유지를 정전협정의 유지로만 본 것은 유엔헌장에 대한 일방적이고 협소한 해석일 뿐이다.

유엔헌장의 원칙에 기반한 평화의 유지로서 더 적합한 것은 정전의 유지보다는 평화협정체결이다. 즉 평화협정체결과 정전의 유지는 어떤 갈등이나 대립관계에 있지 않다. 미국측 결의안도 단지 평화체제가 마련될 때까지 정전협정의 유지만을 주장했을 뿐이다. 이처럼 북측결의안과 대립·모순되지 않았기에 두 결의안 모두 통과된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다음으로 북측 결의안의(주40) 핵심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전협정의 실제당사자들에게 "유엔군사령부"의 해체 및 유엔 깃발아래 남한에 주둔하는 모든 외국군의 철수와 관련하여 한국에서의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를 유지, 공고히 하기 위한 조치로서 한국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도록 촉구한다.’

   
▲ <자료7> A/3390 (B). 유엔군사령부해체 및 유엔깃발하 주한외국군의 철수, 평화협정체결을 주장한 북한측 결의.(1975.11.18.) [자료사진 - 이시우]

북측은 이 결의안에서 비로소 유엔깃발, 유엔사해체, 주한미군철수, 평화협정체결을 완전히 통일시켰다.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대체는 문서상으로는 정전협정 마지막 조항에만 명시되었지만 이 유엔총회 결의를 통해 문서에 등재됨으로써 두 번째 법적효력을 갖게 되었다. 다음은 유엔총회에서의 북·미간 전술의 차이를 좀 더 자세히 분석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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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5) http://image04.webshots.com/4/9/21/25/70692125tSXcFh_ph.jpg (2010년‎11월 20일 검색)

6) http://nkd.or.kr/pds/nk/view/236 (2019년 7월 22일 검색)

7) A/Res/2516(XXIV), “Question of Korea”, 1818th plenary meeting 25 November 1969, p.10

8) 구라타 히데야, 「미·중 접근과 군사정전체제 유엔(UN)군사령부의 온존과 북·미 직접협의 제기의 기원」, 『일본공간』,Vol.8, (2010), pp.117-118

9) Henry A. Kissinger, White House Years, (Boston: Little Brown, 1979), p.786(桃井眞 監修/斎藤彌三郎·小林正文·大朏人一·鈴木康雄 訳, 『キッシンジャー秘録③北京に飛ぶ』, (小学館, 1980년), p.240), 「周首相との会見詳報」 『朝日新聞』 1971년 11월 6일. 및 『周恩来語録』 (秋元書房, 1972년), p.164.; 구라타 히데야, 「미·중 접근과 군사정전체제 유엔(UN)군사령부의 온존과 북·미 직접협의 제기의 기원」, 『일본공간』,Vol.8, (2010), p.136

10)「1971년도 국방대학원 졸업식 및 제16기 합동참모대학 졸업식 유시(1971년 7월 20일)」, 『박정희대통령연설문집(제8집)』, p.381

11) 박승준, 「韓·美 外交의 美·中 外交에 대한 從屬性 硏究 ; 닉슨·키신저와 毛澤東·周恩來 사이의 1971~1972년 비밀 대화록을 중심으로」, (高麗大學校 政策大學院석사논문, 2004), p.13

12) 사설 「승리는 정의의 위업을 위한 인민의 편에 있다」, 『로동신문』 1972년 3월 4일; 구라타 히데야, 「미·중 접근과 군사정전체제 유엔(UN)군사령부의 온존과 북·미 직접협의 제기의 기원」, 『일본공간』,Vol.8, (2010), p.152 인용.

13)A/8752/Add.9

14) A/9146

15) A/C.1/L.661

16) A-9341. QUESTION OF KOREA. REPORT OF THE 1ST COMMITTEE, 1973.11.27, p.9

17) 김달중, 『유엔군사령부해체시 대책연구』, (국토통일원정책기획실』(1977.6(77.12.31까지 대외비)), p.27

18)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당면한 정치·경제정책들과 몇 가지 국제문제에 대하여―일본 《요미우리신문》기자들이 제기한 질문에 대한 대답(1972년 1월 10일)」 , 『김일성전집(48)』, pp.166~167; 구라타 히데야, 「미·중 접근과 군사정전체제 유엔(UN)군사령부의 온존과 북·미 직접협의 제기의 기원」, 『일본공간』,Vol.8, (2010), p.147;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공식적으로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할 것을 주장한 것은 1955년 8월 14일 ‘8.15 해방 10주년 기념대회’에서 한 김일성의 연설에서였다. 이 연설에서 김일성은 “조선사람 자체의 의사에 의”한 통일문제 해결을 주장하며, 남북한 당국이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어떠한 무력행사도 하지 않고 통일문제를 오직 평화적 방법으로 해결할 것을 선포하고 남북한 군대를 최소한도로 축소할 것을 제의하였다. 1957년 9월 18-20일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2기 1차회의에서 김일성은 “정전협정의 모든 조항들은 엄격히 준수되어야 하며 정전을 공고한 평화에로 전환시켜야”한다고 주장하고, “조선에서 모든 외국군대를 철퇴”시켜야 함을 강조하면서 “북남조선의 병력을 각각 10만명으로 혹은 그 이하로 축소”할 것을 제의하였다.(국토통일원 편, 『남북한 통일제의 자료총람』제1권 (서울: 국토통일원, 1985), pp.288-289, 343-345)

19)「미합중국국회에 보내는 편지」, 『민주조선』 1974년 3월 26일; 심병철, 『조국통일문제 100문 100답』, (평양출판사, 2003), pp.90-92; 국토통일원, 『북한최고인민회의 자료집』, (제3집: 4기 1차회의~5기 7차회의), 1988, p.858; 구라타 히데야, 「미·중 접근과 군사정전체제 유엔(UN)군사령부의 온존과 북·미 직접협의 제기의 기원」, 『일본공간』,Vol.8, (2010), p.121인용; 북한의 평화관은 통일관과 함께 남북한 체제경쟁에서 북한이 유리한 위치에 있을 때 확립되었다. 북한은 한반도의 분단상태가 평화를 저해하고 있다는 인식 아래, 주한미군 철수와 북미 평화협정 체결을 통해 평화체제를 실현할 때 평화 상태를 가져올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북한은 ‘자주적 평화통일’ 실현을 위해 외국군 철수가 필수적이라는 기본 인식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해당 시기 대내외 정책환경 및 목표에 따라 주한미군철수에 대한 입장에 변화를 보여 왔다. 즉각 철수, 단계적 철수, 주둔용인 가능성 시사발언 등이 그런 예들이다. 또 북한은 주한미군 문제를 대남, 대미관계와 평화체제의 국제법적 보장 방안과 연계하여 접근해왔다. (정세진, 「주한미군감축 및 위상변경에 관한 주요논의 분석」, 『국제정치논총』제41집2호, (2001), pp.27-44 참조)

20) A-9973. QUESTION OF KOREA. REPORT OF THE 1ST COMMITTEE, 1974.12.16., p.2

21) A/C.1/L.677

22) A-9973. QUESTION OF KOREA. REPORT OF THE 1ST COMMITTEE, 1974.12.16., pp.3-4

23) 서울신문사, 『주한미군30년』, (서울: 서울신문사, 1970), pp.376-377

24) 이흥환, 「미 비밀문서로 본 주한미군의 국제역학」, 『신동아』통권543호, (2004.12), pp.318-319

25) A/C.1/L.704

26) A-9973. QUESTION OF KOREA. REPORT OF THE 1ST COMMITTEE, 1974.12.16., p.5

27) 김달중, 『유엔군사령부해체시 대책연구』, (국토통일원정책기획실』(1977.6 (77.12.31까지 대외비)), p.23

28) A/C.1/L.705/Rev.1

29) A-9973. QUESTION OF KOREA. REPORT OF THE 1ST COMMITTEE, 1974.12.16., p.10

30) A/RES/3333 ‘Question of Korea’, 2322nd plenary meeting 17 December 1974

31) 북은 이에 맞서 정전협정 서명자만을 가리키는, 즉 한국을 제외시킨 ‘실제당사자’란 개념을 사용했다.

32) 김달중, 『유엔군사령부해체시 대책연구』, (국토통일원정책기획실』(1977.6(77.12.31까지 대외비)), p.23. 이종목의 평화협정주장은 다음해인 1975년 30차 총회 결의안에 명문화된다.

33) S/11737. LETTER DATED 75/06/27 FROM THE PERMANENT REPRESENTATIVE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TO THE UNITED NATIONS ADDRESSED TO THE PRESIDENT OF THE SECURITY COUNCIL

34) 김달중, 『유엔군사령부해체시 대책연구』, (국토통일원정책기획실』(1977.6(77.12.31까지 대외비)), pp.40-41

35) S/11830, LETTER DATED 22 SEPTEMBER 1975 FROM THE PERMANENT REPRESENTATIVE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DDRESSED TO THE PRESIDENT OF THE SECURITY COUNCIL

36) Shawn P. Creamer(U.S. Army Colonel), The United Nations Command and the Sending States, p.2

37) A/RES/3390(XXX), Question of Korea (A), 1975.11.18.

38) Hans Kelsen, The Law of The United Nations A Critical Analysis of Its Fundamental Problems (New York: Frederick A. Praeger, 1950), p.13

39) Hans Kelsen, The Law of The United Nations A Critical Analysis of Its Fundamental Problems (New York: Frederick A. Praeger, 1950), pp.13-14 참조. 평화 ‘유지’의 예방적 기능은 유엔의 목적으로 규정된 1조 1항에 의해 성립되었다. ‘평화의 파괴로 치달을 우려가 있는 국제적 분쟁이나 사태의 조정, 해결을 평화적 수단에 의하여 또한 정의와 국제법의 원칙에 따라 실현한다.’ 유엔의 이러한 목적은 총회, 안보리, 국제사법재판소에 의해 수행되는 기구의 기능을 구성한다. 이런 기구의 기능은 2조 3항에 ‘원칙’으로 나타난 회원국의 의무와 일치한다. ‘모든 회원국은 그들의 국제분쟁을 국제평화와 안전 그리고 정의를 위태롭게 하지 아니하는 방식으로 평화적 수단에 의하여 해결한다.

40) A/RES/3390(XXX), Question of Korea (B), 1975.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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