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미경 / 농부

 

살구나무를 찾아서 살구나무 동산을 만들고 있다. 올해는 살구나무 마을을 만들려고 한다. 올해 우리 마을에는 많은 살구나무들이 새로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인데, 나는 그것이 북측 회령 백살구나무이기를 바래서, 그것을 구하려 안타깝게 뛰어다니고 있다.
사라진 살구나무를 찾으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살구나무를 잃어버렸듯이 아주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무엇을 위하여 그 많은 것들을 놓아버린 것일까? 여기 연재할 글들은 살구나무처럼 우리가 잃은 것들, 잊은 것들, 두고 온 것들에 대한 진지한 호명이다. / 필자

 

▲ 기장 이삭. [사진제공 - 주미경]

며칠내내 장대비가 퍼붓고 천둥과 벼락이 대기를 흔들었다. 그 혼돈 속에서 눈물처럼 기장 이삭이 달렸다. 비를 흠씬 머금은 땅이 물러지고 작물들은 성큼 키를 키운다. 하지만 풀이 자라나는 속도는 작물들의 성장을 압도한다. 이 땅에서 농사가 시작된 지 수천년이 흘렀어도 풀은 그 때나 지금이나 농부들에게 커다란 난관이다. 밭이랑을 깜장비닐로 덮고 맹독성 제초제를 꼼꼼히 뿌리는 것이 현대농업이 택한 일반적인 방법이지만, 나는 천 년 전의 농부와 다름없이 온몸으로 풀을 매고 있다.

먹을 것을 생산하는 일이란 땅을 만들고 씨앗을 묻어 자래우고 거두는 그 기본에서 달라진 것이 없다. 몸은 고되지만 나는 우리 선조들이 해왔던 방법으로 농사를 행하고, 그들이 보았던 눈으로 농사를 바라보는 길을 택한 것을 아직은 후회하지 않는다.

‘인도다움’의 첫 자리

나는 인도에 가보지 못했다. 인도 가는 일이 무슨 열병처럼 사람들을 휩쓸어 알 만한 사람들은 죄다 인도 땅을 한 자락씩 밟고 올 때도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에 나는 고대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와, 민족생태주의자 반다나 시바와, 「작은 것들의 신」과 「9월이여 오라」를 집필한 아룬다티 로이와, 그리고 남부디리피드가 저술한 「인도독립투쟁사」를 번역한 이병진 선생의 글들을 통해 인도를 만났다. 그래서 내가 인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아주 적지만, 사람들이 인도에 끌리는 것은 인도에 ‘인도다움’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라 여긴다.

‘인도다움’이란 인도의 고유함이라 할 수 있겠는데 우리는 그것들을 통틀어 문화라고 말한다. 문화란 사람들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먹고사는 경제활동 속에서 태어나고, 그렇게 형성된 문화는 다시 사람들의 경제활동과 삶의 방식을 규제하면서 대를 이어 전승되어 거대한 뿌리를 내린다. 그러므로 고유한 문화란 하나의 독특한 삶의 양식이며 그것은 ‘먹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무엇을 어떻게 먹는가’ 하는 것은 문화의 가장 기초가 된다. 그것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땅과 하늘과 물에서 비롯되어 사람을 아우르고, 땅이 내는 산물을 먹는 사람들의 생김새와 기질과 심성을 만들어낸다. 인간의 가장 경이로운 문화적 성과물이라 할 언어도 거기에서 생겨났으며, 먹을 것을 매개로 자연과 사람은 뗄 수 없이 연결된 유기체가 된다.

‘인도다움’에서 내가 가장 첫 자리에 놓는 것은 그들이 ‘소’를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적어도 1천년 이상 소를 신성시하고 소를 먹지 않아왔다. 광우병이라는 저주스런 질병이 발생할 정도로 소 사육두수가 늘어나고, 소고기 소비량이 경제력과 문명수준의 척도로까지 여기게끔 전 세계 사람들의 생각이 감염된 현대에 와서도 그들은 소를 먹지 않는다.

인도 소의 또다른 의미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도인들이 소를 먹지 않는 것을 종교적 금기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서구학자들은 소를 먹지 않는 전통 때문에 인도인들이 가난하고 굶주린다고 떠들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인도인들이 사용하는 ‘소똥비료’와 ‘소똥연료’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반다나 시바는 인도의 소에 대해, 소를 먹지 않는 자기들의 관습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잠깐 들어볼까.

인도의 소들은 매년 7억톤의 재생가능한 거름을 배설한다. 배설물의 절반은 연료로 사용되며 나머지 절반은 비료로 사용된다. 이 절반의 소똥연료는 2,700만톤의 등유, 3,500만톤의 석탄, 6,800만톤의 나무와 맞먹는 열을 내는데, 등유나 석탄, 나무는 모두 인도에서 희소한 자원들이다.

이 짧은 글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 인도인들에게 있어 소똥은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중요한 원천이었고,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연료였다. 말하자면 그것은 다양한 선택지 중의 하나라거나, 더 부유해지기 위해 추가되어야 할 물질이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의 생존과 직결되는 필수재였던 것이다. 비료와 연료를 공급할 수 있을 만큼의 소 개체수를 유지하는 것은 생존여부를 판가름하는 일이었다.

소를 신성시하고 소를 먹는 것을 금기로 하는 것이 종교적 교리의 지위를 차지한 것은 삶의 양식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애초에 생존의 절박한 필요에서 나타난 관습이었을 것이며 그 막중한 중요성으로 인해 엄격한 삶의 규범으로, 종교적 교리로 거듭 지위를 바꾸어갔을 것이다. 그러한 배경을 놓고 보자면, 인도인들이 소를 먹지 않는 것은 무모한 종교적 맹신이 아니라 자기 땅에 대한 매우 생태적이고도 과학적이며 논리적인 분석과 사고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소고기에 대한 금기는 연료자원이 희박한 인도 땅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인도에도 예외없이 녹색혁명과 세계화 바람은 불어 화학비료가 소똥비료를 몰아내고, 수입연료가 소똥연료를 대체하고, 쓰임새를 박탈당하고 남아도는 소를 대규모로 도축하는 소고기 수출국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소를 먹지 않는 그들의 문화는 인도다움으로 남아 사람과 소와 차량이 공존하는 거리라는 인도만의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오랜 시간이 만들어낸 것

우리 땅의 문화 속에서는 먹을 것에 대한 특기할 만한 금기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땅이 사람들을 먹이는 데 있어서 매우 균형있고 풍요로운 땅이었음을 알려준다. 산과 들, 강과 바다, 어디에서나 얻을 수 있는 먹을거리로 우리 땅에서는 매우 일찍부터 정착생활이 시작되고 농경이 이루어졌다. 신석기시대에 이미 시작된 농사는 기장, 조, 보리, 밀, 콩 등을 생산했고, 청동기시대에 들어서는 벼농사가 시작되었다. 쌀, 보리, 수수, 조, 기장, 콩 등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의 식량체계는 이렇듯 수천년의 역사를 가진, 아주아주 오래된 것이다.

오래된 것에는 그 유장한 시간에 걸맞는 여러 가지 관습과 수많은 파생물들이 있게 마련이다. ‘나’보다 ‘우리’라는 개념이 먼저 형성되고, 개인보다 공동체를 중히 여기며, 나이든 어른을 존경하는 사상, 근면하게 일하는 기풍을 높이 사고, 놀아도 함께 어울려 놀며, 물질보다 관계를 중시하는 가치관, 이러한 것들이 모두 쌀을 먹고사는 사람들의 도덕률이다. 또한 쌀을 주식으로 하고 갖가지 찬을 부식으로 하는 세계에서도 독특한 우리의 식품체계도, 음식과 약초로 질병을 고치는 치료체계도 이러한 환경과 오랜 시간이 만들어낸 파생물이다.

그렇게 보자면 오랜 시간 쌀을 먹고 살아온 우리에게는 쌀을 재료로 한 수많은 가공식품들이 있어야 정상이다. 연전에 드라마 대장금에서 그 한자락을 보았던 것처럼, 전해지는 기록으로서, 「음식디미방」으로 알려진 안동 장씨의 「규곤시의방」,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중 「정조지」 등을 보면 놀라우리만치 다채로운 식품의 종류와 만드는 방법들을 만날 수 있다. 그것들은 우리 땅에서 나는 산물과 그것을 먹고사는 사람들의 창조성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우리의 고유함, ‘우리다움’의 바탕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쌀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발전해왔던 우리의 식품체계는 근현대를 거치며 단절과 말살에 이르는 질곡을 겪게 된다. 그 결과로 지금은 빵에 한참 밀려 명맥만 겨우 유지하는 떡 종류와 GMO 콩으로 오염된 장류, 화학적 맛으로 천편일률화된 김치류를 제외하면 이렇다할 대표적 식품이 없다. 이름만으로도 그 전통과 맛을 내세울 수 있는 지역도 가공주체도 사라진지 오래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식품법이 만들어낸 것

▲ 송기호 선생이 쓴 맛있는 식품법 혁명. [사진제공 - 주미경]

FTA 반대에 탁월한 관점과 논리를 제공했던 송기호 선생은 「맛있는 식품법 혁명」이라는 책으로 다시금 자신의 진가를 증명했다. 그는 ‘식품법’이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나라 식품체계의 역사적 문제점을 일목요연하게 짚어낸다. 그는, 식품체계에는 언제나 고유한 규범이 있으며 오늘날 식품체계에 적용되는 규범은 법이다. 식품법이 허용하는 식품만이 식품체계에 진입할 수 있고(식품규격), 식품법에서 정한 식품정보가 식품체계를 유통한다(식품표시)고 정리한다. 따라서 단절과 말살, 그리고 식량자급률 23%라는 오늘날의 식품체계를 만들어낸 것은 결국 ‘식품법’이라는 것이다.

우리 땅에서의 식품체계의 단절과 말살은 크게 두 시기에 걸쳐 일어난다. 처음은 일제식민지 시기이고 다음은 박정희 정부 시기이다. 식품에 관한 한 나라의 해방과 상관없이 두 시기는 연달아 이어진 시기이며, 하나의 식민지에서 또다른 식민지로 나아간 시기이기도 하다.

조선총독부의 식품법

1911년 조선총독 데라우치는 ‘위생상 유해음식물 및 유해물품 단속규칙’이라는 공고를 통해 ‘데라우치 식품법 시대’를 열었다. 이 식품법은 1900년에 공포된 일본의 ‘메이지 식품법’을 조선에서 시행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일제 식민지지배 정당화의 핵심논리인 조선인 비위생론을 전파하는 강력한 도구였다. 송기호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식품체계는 비위생적이고 저급하며, 조선의 식품산업은 영세하고 졸렬하므로 이를 개조해야 한다는 논리를 끊임없이 만들어 전파했다. 일제는 조선인을 비위생적이고 불결하고 저급한 집단으로 규정하고 자신을 그 개조자로 합리화했다. ‘조선인 비위생론’은 일제가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가장 큰 논리의 하나였다.

이러한 조선총독부 식품법은 해방되고도 17년이나 지난 1962년까지 이 땅의 식품체계를 지배한다. 1911년부터 1962년까지 52년간이다. 하지만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의 국가재건최고회의가 1962년 총독부식품법을 폐지하고 만든 ‘식품위생법’은 일본이 1947년에 만든 ‘일본 식품위생법’을 그대로 이식한 것이었다. 1967년 처음으로 국회에서 식품위생법을 개정했지만 골격에서 달라진 것은 없다.

식품법에서 해방은 존재하지 않았다. 총독부의 식품법은 대한민국에서 1962년까지 실정법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일본의 1947년 식품위생법이 이곳을 지배했다. …… 우리가 사용하는 많은 용어가 일제의 1900년, ‘음식물 기타 물품단속에 관한 법률’, ‘청량음료수 영업단속규칙’, ‘음식물 반부제 단속규칙’ 등 약 110년 전 일제의 식품법에서 비롯되었다. 단지 법이나 용어에서만 총독부식품법에서 해방되지 못한 것이 아니다. 식품법의 정신세계와 이념이 총독부의 그것이다. <송기호>

쌀을 공격하다

조선총독부와 박정희 정부가 인위적으로 조성한 식품체계 아래서 가장 수난을 당한 것이 ‘쌀’이고 곡식으로 빚은 ‘술’이다. 일제는 조선을 일본의 식량기지로 구축했다. 조선에서 생산된 쌀은 추수하는 대로 죄다 일본으로 실어감으로써, 쌀을 주식으로 살아온 조선사람들에게 쌀과 쌀을 재료로 하는 식품체계가 이어지고 발전할 길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그러한 체계를 이어받아 박정희 정부는 1969년 ‘국민영양개선령’을 만들어 새로운 방법으로 쌀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의 식생활을 공격한다. 〈한국영양학회〉의 전문가들이 쌀밥 중심의 전통적 식생활이 저급하고 영양학적으로 열등한 개조대상이라는 논리를 끊임없이 전파하는 가운데, 박정희 정부는 음식점에서 즉석으로 쌀밥을 짓는 행위를 불법화하고, 쌀로 과자나 엿을 만들지 못하도록 하고, 심지어 ‘무미일’까지 만들어 수요일과 토요일에는 쌀밥을 팔지 못하도록 하는 등 억압적으로 쌀 중심의 식품체계를 공격하고 무너뜨리는데 몰두한다.

그것은 순전히 미국산 밀을 위한 것이었다. 미국산 잉여밀의 소비를 위해 국가기구를 총동원하여 수천년을 이어져온 이 땅의 식품체계를 억압적으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하여 미국 밀가루는 오늘날 쌀과 나란히 우리 주식의 반열에 올랐다. 미국으로부터 권력을 부여받고 유지해간 박정희 정부로서는 결초보은의 당연한 소행이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쌀농사를 근간으로 한 소농 중심의 우리 농업체계를 뿌리까지 뽑아버린 일이었다.

송기호 선생은, 불과 40년이 되지 않은 짧은 기간에 밀은 우리의 주식이 되었다. 세계의 식품체계에서 자연조건의 급격한 변화가 없었는데도 이렇게 짧은 기간에 한 사회의 주식이 바뀐 사례는 찾기 어렵다고 말한다.

우리 술의 실종

쌀밥이 그나마 위축되는 것에 그쳤다면 술은 두 시기에 걸쳐 말살의 지경에 다다른다. 일제가 1916년부터 시행한 ‘주세령 체제’는 양조면허를 받을 수 있는 최저 생산규모 기준을 만들고, 그것을 계속 높이는 방법으로 조선 각지의 중소규모 양조장을 모두 폐쇄했다. 그런 가운데 일본의 대규모 술산업이 조선에 진출하였고, 각 가정에서 빚는 술까지도 까다로운 조건을 붙여 처벌함으로써 조선의 전통적인 술을 말살하고 그 제조방법의 맥을 끊었다.

박정희 정부는 거기에서도 한 차원을 더 나아간다. 1965년 고시 공고를 통해 소주생산에 있어 일체의 곡류사용을 금지시켜버린 것이다. 그것으로 이 땅에서 나는 곡물은 술로 빚어질 수 없다는 금기가 생겨난다. 게다가 ‘주세법’을 개정하여 주정을 물로 희석해 화학첨가물로 맛을 내는 ‘사카린 소주’를 합법화함으로써 우리 사회를 기형적인 알코올 무한공급사회로 전변시켜버린다.

술은 지역에서 원료와 기술을 얻고 지역사회를 부양하며, 술지게미는 가축의 먹이가 되고, 이 순환 가운데 사람들의 문화가 전승된다고 송기호 선생은 말한다. 그는, ‘전통소주의 불법화’와 ‘사카린소주의 합법화’라는 기형적 조치는 지역사회의 쌀과 수수 등 양곡에 의존하여 생태계의 공급능력 안에서 제한된 알코올만을 공급해왔던 건강한 사회를 망가뜨렸을 뿐 아니라, 중국 쓰촨성의 ‘우량예’나 일본 니가타현의 ‘구보타’와 같이 우리 곡식을 대표할 술을 갖지 못한 경제적, 문화적 공백상태를 야기했다고 탄식한다.

자주적 존재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인도인들이 소를 지키듯 우리는 우리 쌀을 지키지 못했다. 오늘날 일제에 의해 100년 넘게 지배당해온 식품체계를 또다시 잠식해오는 것은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무역기구(WTO)와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 체제다. 우루과이 라운드를 기점으로 한 농산물 수입개방시대는 미국의 식품체계를 우리에게 강요하고, 일제와 박정희 정부의 체제에서 일사불란하게 훈련된 우리는 아무 저항 없이 그것을 받아먹을 정도로 길들여졌다.

무엇을 먹고 살 것인지, 우리는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가 먹고 있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것을 먹는다는 일의 의미도 알지 못한다. 마트마다 넘쳐나는 것은 수입농산물을 재료로 대량으로 생산되는 대기업의 딱지가 붙은 식품들과 가공식품들, 이 땅의 산물은 가축들조차도 먹이지 못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의 자연과 지역에 근거한, 우리 농부들이 생산해내는 먹을거리들은 우리의 식품체계에서 발붙일 곳을 잃고 점점 소멸의 단계에 들어가고 있다.

일본의 경제공격에 대항해 온 나라가 들끓고 있다. 우리가 일본에 대해 분노하고 불매운동과 규탄대회로 맞서는 것은 삼성을 위한 것도, 하이닉스를 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우리가 자주적 존재임을 증명하기 위한 것, 그러나 나는 진정한 자주성의 기초는 결국 농사에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먹일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진정한 자주적 존재임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7월이 간다. 눈물처럼 기장이삭이 달리고, 농장은 가끔씩 새소리가 작은 파문을 일으키는 뜨거운 정적으로 가득하다. 몸은 여기서 풀을 매고 있지만 마음은 반일의 함성이 가득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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