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 유고를 내놓으며>

노회찬 전 의원이 우리 곁을 떠난 지 벌써 1년. 고인을 기리는 많은 이들의 마음이 모여 다양한 기념행사와 추모글들이 이어지고 있다.

고인은 오랜 벗 장석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이사장과 함께 실크로드학의 태두이자 문명교류학이라는 새 학문의 영역을 열어가고 있는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을 알게 돼 그가 이끄는 실크로드 답사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등 각별한 관계를 가져왔다.

정수일 선생을 잘 아는 지인들은 선생이 팔순을 맞은 2013년 기념문집을 발간키로 뜻을 모아 각계 인사들로부터 원고를 받았고, 노회찬 전 의원도 글을 썼다. 그러나 출간이 미뤄져 미수(米壽) 기념문집으로 다시 준비되고 있는 가운데 노회찬 전 의원 1주기를 맞아 이 글을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고인의 ‘민족 문제’에 대한 고민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나눌 수 있다면 그 의미는 충분하다 할 것이다. /편집자 주

 

▲ 고 노회찬 전 의원이 2012년 5월 2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열린 정수일 선생의 <오도릭의 동방기행> 출간기념회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고인은 <정수일의 여행기>를 고대했다. [자료 사진 - 한국문명교류연구소]

2001년 추석. 고향 부산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나는 오래 전에 고향을 떠난 한 사내의 이야기를 책으로 읽기 시작하였다. 발간된 지 며칠 안 된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 두툼한 두께로 두 권. 추석연휴에 틈틈이 읽을 분량으론 안성맞춤이었다.

주인공의 이름은 길었다.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븐 압둘라 븐 무함마드 이븐 이브라힘 알 라와티 알 퇀지. 세상에선 이븐 바투타로 불렀다. 이븐 바투타는 1325년 7월 2일 목요일 오늘날 모로코 탕헤르인 그의 고향을 떠나 여행을 시작하였다. 목적은 성지순례 행선지는 메카였다.

그러나 메카로 가는 도중에 들른 알렉산드리아에서 우연히 알게 된 이맘 부르한 딘이란 학자로부터 인도와 중국에 있는 자신의 형제들을 만나 인사를 전해달라는 권유를 받고 이븐 바투타는 이렇게 결심한다. “그의 말에 퍽 흥미를 느껴서 그곳에 가보기로 하였다.” 부산에서 서울로 가던 중 대전에서 우연히 만난 어떤 사람 때문에 로마까지 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실제 이븐 바투타의 여행은 집 떠난 지 1년 반 만에 도착한 메디나, 메카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의 발걸음은 아프리카 동부와 이란, 이라크를 거쳐 동쪽으로 계속되었고 우크라이나, 카자흐스칸, 아프가니스탄, 인도, 인도네시아, 필리핀을 거쳐 중국 베이징에 도착해서야 반환점을 돌게 되었다. 이맘 부르한 딘이 말한 그의 형제 세 사람도 도중에 모두 만났다.

결국 이븐 바투타는 고향을 떠난 지 25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고 그 후 이베리아반도까지 2년에 걸친 유럽여행과 3년에 걸친 아프리카여행까지 마친 후 30년에 걸친 여행담을 기술하여 책으로 남겼다. 이것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이븐 바투타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탐험가, 대여행가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게 만든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이다.

그러나 고백컨대 정수일 선생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껏 이븐 바투타가 누구인지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정수일 선생이 아니었다면 우리 대다수는 <이븐 바투타 여행기> 한글 완역본을 아직 구경도 못했을 것이 거의 분명하다. 왜냐하면 아랍어로 씌어진 <이븐 바투타 여행기>는 1808년 알제리에서 아랍 탐험가 시첸에 의해 처음으로 필사본이 발견되고 15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으나 대부분 초역일 뿐 완역본은 2001년 정수일 선생에 의해 한글 완역본이 나오기 전까지는 1858년 프랑스 데프레메리와 상귀네티에 의한 불어 완역본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오도릭의 <동방기행>,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까지 포함하여 세계 4대 여행기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 중 <동방견문록>을 제외한 세계적 여행기가 모두 정수일 선생의 번역으로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한글을 사용하는 우리와 후세대가 정수일 선생에게 지고 있는 빚은 매우 크다.

<이븐 바투타여행기>의 원래 제목은 <여러 지방의 기사(奇事)와 여러 여로(旅路)의 이적(異蹟)을 목격한 자의 진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은 지금으로 보면 매우 낯선 14세기의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3대륙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생활의 모든 면에 걸친 다양한 현실을 생생한 체험으로 그려내고 있다. 정수일 선생의 지적대로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는 ‘내용의 사실성과 서술의 생동성으로 말미암아 역사 속에서 오래도록 깊은 여운을 남기는 기록물’이면서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험적 성격이 짙은 작품’이라 ‘그 학문적 가치는 가위 기념비적’이다.

1997년 미국 <라이프>(LIFE)지가 지난 천년을 만들어낸 세계적 위인 100명을 순위별로 선정했을 때 여행가로는 두 사람 이븐 바투타와 마르코 폴로가 각각 44위와 49위로 포함되었다. 당시 대전교도소에 수감 중인 상태에서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를 번역 중이던 정수일 선생은 라이프지의 기사를 언급하면서 “오랫동안 유럽인들이 마르꼬 뽈로를 ‘뭇별 속에서 우뚝 솟아 빛을 발하는 보름달’이라 비유해왔지만,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를 읽고 나면 이븐 바투타야 말로 뭇별 속의 보름달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라고 옥중에서 보낸 편지에 쓰고 있다.

▲ 2006년 7월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오른쪽)이 이끄는 중앙아시아 답사길에 함께한 노회찬 전 의원.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의 김병하농장 관리인 태(太)씨 아주머니의 노모(함경 북도 길주 출신, 93세)와 함께. [사진제공 - 한국문명교류연구소]
▲ 투르크메니스탄의 수도 아슈하바드의 바자르(전통시장) 방문시 채소가게를 운영하는 교포 아주머니(李씨)와 이씨 아주머니 일가족과 함께. [사진제공 -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사실 그 해 추석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를 읽는 중 내내 생각한 것은 <정수일 여행기>는 왜 출간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시대 배경과 여행목적은 판이하지만 세월의 두께와 여정의 파란만장함은 비견될만한 대탐험이자 대여행이 아닌가? 이븐 바투타는 21살에 고향 모로코를 출발하여 카이로를 거쳐 베이징까지 간 뒤 30년 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정수일 선생은 22살에 베이징을 출발하여 카이로로 유학길을 떠났으며 모로코대사관의 외교관 생활을 거치면서 본인은 물론 누구도 예상은 물론 상상하기도 힘든 경로를 거쳐 왔다.

이븐 바투타는 생애의 절반 30년이 넘는 세월을 세 대륙을 넘나들며 10만km의 대장정을 이룬 뒤 고향으로 돌아와 64세까지 살았다. 그러나 정수일 선생의 여행은 중국에서 25년, 북한 15년, 해외 10년, 한국생활 30년을 보내고 팔순을 맞이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어떤 면에서 <정수일의 여행>은 선생이 태어나기도 전인 1919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수일 일가가 고향인 함경북도 명천을 떠나 북간도 백두산 자락의 깊은 오지에서 화전민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은 바로 기미년 독립운동사건 때문이었다. 일본군에게 쫓겨 북간도로 온 이들은 집단부락을 이루고 그 마을을 고향 명천 이름을 따 명천촌이라 불렀다. 윤동주의 생가가 있는 명동촌으로부터 약 2.5km 떨어진 그곳에서 1934년 정수일 선생은 태어났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출범은 <정수일의 여행>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연변고급중학교 3학년이었던 1952년 실시된 제1차 전국통일시험을 거쳐 베이징대학교에 합격하고 1956년 북경대 동방학부 아랍어과를 졸업하면서 중국 국비장학생 제1호로 이집트 카이로 대학 석사과정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 것은 모두 새로 들어선 중국정부의 교육, 외교정책 덕분이라 할 수 있다. 누가 보더라도 그의 앞길에는 전도양양한 외교관으로, 지도층 엘리트로의 길이 열려 있었다.

그러나 이 때 이미 청년 정수일은 자신의 일생을 바꿀 새로운 여행을 꿈꾸고 있었다. 1996년에 쓴 옥중편지에서 정수일 선생은 당시의 각오를 이렇게 말한다. “이역 땅 중국에서 살아가는 수십년간 나는 한시도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잊어본 적이 없었으며, 종당에는 고국에 돌아가 헌신하고야 말겠다는 심지를 줄곧 굳혀왔소.” 어릴 때 북간도까지 쫓아와 마을을 불태우는 일제의 만행을 보고 겪으며 ‘내 마을, 내 집에서 일어나는 세찬 항일의 기운은 어린 마음에도 나라와 민족의 소중함을 느끼게 하였다’는 것이다.

북경대학 시절 중국정부가 동북지방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을 일방적으로 중국국적으로 강제 이적시키는 조치에 따라 어느 날 갑자기 ‘중국 소수민족 조선족’이 될 때의 아픔도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언젠가 겨레 품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되었고 많은 기회를 베풀어 준 중국정부에 대해선 ‘최소한의 염치라도 차려야겠다는 일념에서 5년간 중국외교부와 모로코주재 중국대사관에서 열의를 다해 봉사했다’고 술회한다.

정수일 선생은 당시 이미 10개의 언어(나중에 말레이어와 타갈로그어까지 습득하게 된다)에 통달한 외교부에서도 촉망받는 인재였고 주은래 수상 집안에서 혼담이 건네 오기도 하던 차였다. “오늘의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부와 명예를 다 거머쥘 수 있는 가도를 거침없이 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모든 것을 주저없이, 후회없이 단념하고 고국으로 돌아왔소.”

정수일 선생에 따르면 1950년대 초반부터 60년대 중반, 중국에서 문화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약 15년간은 조선족 식자층 속에서 이른바 환국파(還國派)와 잔류파(殘留派)가 나뉘어 격론을 벌이던 시기였다. 당시 북경 소재 중앙정부급 기관에 근무하던 조선족 출신 간부는 정수일 선생를 포함하여 몇 명밖에 안되었지만 연변고급중학교 1,2기 출신으로 동북지방의 중국대학에 진학한 고급인텔리 중 조국에 돌아가 조국건설에 헌신하자는 ‘환국파’는 50-60여명 되었다고 한다. 이들도 대부분 자신의 뜻을 이루었다.

물론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지성인으로서 시대와 역사 앞에 지닌 민족적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라며 당당히 입장을 밝혔지만 돌아오는 것은 ‘협애한 민족주의자’란 비난과 해직이니 하방이니 하는 위협이었다. 정수일 선생은 ‘환국의 당위성과 절박성을 당당히 설파하면서 석달동안 중국 국무원 및 외교부 고위당국자들과 10여 차례 면담하였다.’ “말이 면담이지 치열한 설전이고 투쟁이었다”고 한다. 결국 당시 중국 제1부총리를 겸하고 있던 진의(陳毅) 외교부장으로부터 답을 얻었다. “쑤이니밴(니 마음대로 하라)” 차가운 승인이었다.

환국파와 잔류파의 당시 논쟁도 있었지만 오늘의 시점에서 보더라도 어느 입장이 더 옳았느냐를 판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철학과 세계관의 문제이며 가치판단에 따른 선택의 문제이고 구체적으로는 민족문제에 관한 이해와 태도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중국정부와 조선민족 출신 청년들의 가치와 판단이 충분히 다를 수 있었다는 사실이며 중국정부가 용케 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며 이른바 환국파는 개인적으로 더 고난의 선택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환국파와 잔류파의 운명이 대비되는 상징적 장면은 바로 2000년 4월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조남기 부주석의 한국 방문이다. 11살인 1938년 조부를 따라 연변으로 간 그는 중국인민해방군 대장을 거쳐 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의 지위까지 올랐다. 조남기는 중국내 전체 소수민족 출신 중에서 최고직에 오른 인물로 유명하며 ‘조선족의 영웅’으로 지칭되기도 하였다. 언론은 그의 방문을 ‘62년만의 금의환향(錦衣還鄕)’이라 표현했으며 한국정부는 국빈 수준으로 영접하고 고향주민들은 잔치를 벌였다. 당시 대구교도소에서 보낸 정수일 선생의 옥중편지는 ‘수의환향(囚衣還鄕)’으로 이어진 환국파로서의 선택에 대해 여전한 자부심을 토로하고 있다.

조남기는 잔류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간된 <조남기전>을 보면 6.25전쟁 당시 중국지원군 최고사령관 팽덕회 장군의 참모로 참전한 그를 본 박헌영 부수상이 팽덕회에게 두 차례나 조남기를 조선에 남아서 일하게 해달라고 요청을 하였다. 이에 팽덕회는 조남기에게 어떤 길을 선택하든 허락하겠다고 말했지만 조남기는 조선에 남지 않고 중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분명하게 답한다. <조남기전>은 “이 일은 팽덕회에겐 큰 일이 아닐 수 있지만 조남기에겐 일생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순간”이었고 조남기는 훗날 이 일을 회고할 때면 늘 감개무량해서 팽덕회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했다고 전한다.

▲ 2011년 7월 3일 백두산 정상에서 정수일 소장과 함께. [사진제공 - 한국문명교류연구소]
▲ 백두산 천지 캠프에서 답사 일행과 함께. [사진제공 - 한국문명교류연구소]

1963년 4월 정수일 선생은 마침내 ‘조상의 뼈가 묻어 있는 고국 땅’ 북한으로 돌아왔다. 평양에 도착한 정수일 선생은 환국자들을 관리하는 ‘교포사업총국’에 제출하는 사업지망란에 자신의 희망을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조국통일성업에 이바지 하는 일”이라 써냈다. 그리고 ‘1천여년 통일민족사에 오점으로 남아 있는 이 국토분단과 민족분열의 비극을 우리 세대에 꼭 종언하고자 하는 일관된 겨레관’에서 였다고 설명한다.

정수일 선생은 1964년부터 평양국제관계대학과 평양외국어대학 교수를 역임한 후 다시 먼 여행길에 나선다. 그리하여 1980년 튀니지대학 사회경제연구소 연구원, 1982년 말레이대학 이슬람아카데미 교수를 거쳐 1984년 드디어 한국으로 ‘환국’한다.

어느 해 옥중에서 보낸 편지에서 정수일 선생은 ‘평양에서 서울까지 200km를 오는데 10년 2개월 걸렸다’면서 서글픈 분단현실로 ‘자동차로 오면 2시간이면 족할 거리를 3,700여일 동안 매일 54m씩 주파한 셈’이라고 이 때의 역정을 술회하고 있다.

한국에서 단국대 사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할 때 학위논문의 주제는 ‘극동에서의 이슬람전파사연구’였으나 1985년 카이로에 가서 신라에 관한 귀중한 아랍 문헌기록들을 발굴하면서 새 주제 ‘신라, 아랍-이슬람제국 관계사연구’로 바꾸어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1988년부터 단국대 사학과 초빙교수를 맡아오면서 ‘신라서역교류사’를 출간하는 등 문명교류사와 이슬람연구의 새 지평을 열던 중 1996년 ‘레바논계 필리핀인 무하마드 깐수’로 체포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수형 중 2000년 특별사면으로 석방된다.

1952년 고향 연변을 떠나 베이징으로 향하면서 시작된 <정수일의 여행>은 어느덧 60년의 세월을 넘어 계속되고 있다. 조선에서 시작된 국적은 중국, 북한, 레바논, 필리핀을 거쳐 한국에 이르고 있다. 여행을 떠날 때 베이징대 합격생이었던 신분은 해외 유학생, 외교관, 대학교수, 남파공작원을 거쳐 문명교류학과 아랍-이슬람학의 세계적인 학자로 변해왔다.

실크로드를 중심으로한 문명교류사를 섭렵하는 수많은 현장답사 과정에서 방문한 지역은 세계 4대 여행가 혜초, 오도릭, 마르코폴로, 이븐 바투타가 여행한 곳을 다 합친 것을 이미 넘어서고 있다. 이 세기적인 여행을 위해 정수일 선생이 구사해 온 언어는 한국어, 일본어,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 아랍어, 페르시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에스파니아어, 말레이어, 타갈로그어 등 12개 언어이다. 2006년 투르크메니스탄의 어느 시골에서 10세기경 세워진 이슬람사원을 찾았을 때 모스크 입구에 새겨진 10세기 아랍 고어를 술술 읽으며 해석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처럼 학문세계를 보나 그간 걸어온 삶의 역정을 보나 정수일 선생을 능가하는 코스모폴리탄도 드물 것이다. 그래서 어느 기자가 물었다. “스스로를 코스모폴리탄(범세계주의자)으로 생각합니까?” 선생은 답한다.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저는 철저한 민족주의자입니다.” 사실 정수일 선생의 옥중편지를 모아 출간된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를 보면 험난한 <정수일의 여행>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은 다름 아닌 ‘겨레(민족)에 대한 사랑’이며 이 여행의 나침반은 항상 ‘한민족의 통일’에 맞춰 있음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민족, 민족주의 문제는 한국에서 여전히 뜨거운 쟁점이다. 한쪽에서 민족주의가 과잉되었다고 비판하고 다른 쪽에선 민족주의가 사라지고 있다며 걱정하는 상황이다. 민족주의를 넘어서야 세계화가 가능하다는 주장부터 세계화와 강대국 패권에 맞서기 위해 민족주의를 강화해야한다는 주장까지 난무한다. 우리 민족끼리 우선 단결해야 한다는 입장과 남과 북은 더 이상 같은 민족으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이 대립하고 있다. 물론 국내에서만 뜨거운 것은 아니다.

2007년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한국에서 ‘단일 민족’을 강조하는 것은 국제적인 기준으로 볼 때 인종차별적 행위에 해당할 수 있으므로 정부가 다른 인종·국가 출신에 대한 차별을 근절하기 위해 앞장서야 한다고 권고하였다.

또 북한은 1993년 평양시 강동군 대박산 기슭에 있는 무덤을 발굴, 두 사람분의 인골을 발견하고 이를 연대측정을 통해 5천11년 전의 것으로 입증된 단군과 그 부인의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나아가 북한 역사학학회는 고조선이 평양을 중심으로 이 일대에서 창조된 고대문화를 ‘대동강문화’로 명명하고 그것을 세계 5대문화(북의 ‘대동강문화’, 이집트의 ‘나일강문화’, 서남아시아의 ‘양강문화’<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인도의 ‘인더스강문화’, 중국의 ‘황하문화’)의 하나로 선포하였다.

민족문제를 둘러싸고 뜨거운 전선이 형성되는 것은 식민통치와 분단의 경험이라는 한국적 특수성도 있겠지만 민족문제가 홀로 존재하기보다 계급적 정치적 이해관계와 결합해서 표출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100년이 넘는 민족문제 논쟁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으로 적용가능하고 수용되는 이론은 아직 정립되지 못하고 있다. 많은 권위 있다는 학설들도 특정 시기, 특정 지역의 사실만을 반영하거나 특정진영의 이해관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이 복잡하고 어려운 주제의 늪에 뛰어든 정수일 선생의 용기와 기존의 학설에 얽매이지 않고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이론적 발전을 모색하는 열의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정수일 선생은 민족을 “일정한 지역에서 장기간 공동체생활을 함으로써 혈연, 언어, 경제, 문화, 지역 등을 공유하고 공속의식(共屬意識)에 따라 결합된 최대 단위의 인간 공동체”로 정의한다. 어떤 면에서 “민족이란 공통된 언어, 지역, 경제생활 및 문화에 나타나는 심리상태 등의 공통성을 기초로 하여 이루어지며 역사적으로 구성된 사람들의 견고한 공동체”라고 규정한 스탈린의 정의와 유사하지만 “민족이란 단순한 역사적 범주가 아니라 일정한 시대 즉 대두하는 자본주의 시대의 역사적 범주이다”는 스탈린의 견해와는 크게 대별된다. 민족이 프랑스혁명 이후 근대국가 형성과정에서 나타났다는 주장은 유럽의 경험일 뿐 아시아는 훨씬 이전부터 민족이 출현하였으며 최근 여러 연구보고에 의하면 유럽에서도 훨씬 오래 전부터 민족의 출현이 확인된다는 것이다.

동시에 정수일 선생은 민족을 ‘초역사적인 보편적 실체’나 ‘영구불멸의 초역사적 상수’가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출현해 존속하다가 사라지는 역사적 변수’로 규정함으로써 기존의 대표적인 학설인 근대주의과 영속주의의 비합리적인 면을 털어내고 한계를 보완하는 ‘최적화’를 시도하고 있기도 하다.

민족주의에 대해서도 그것이 본질적으로는 위로부터 만들어진 정치적 가공물이며 민족이란 것도 민족주의가 만들어낸 관념이라는 견해를 배격한다. 민족을 구성하는 요소에는 혈연, 언어, 지역, 경제, 역사, 문화 등의 객관적 요소와 함께 귀속의식, 민족주의 등 주관적 요소가 있으며 주객관적 요소를 다 갖춘 대자적(對自的) 민족과 객관적 요소를 갖춘 즉자적(卽自的) 민족으로 구분하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민족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단계에서 민족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수일 선생의 민족주의관은 긍정 그 자체이다. “민족주의는 보편적 진보주의이며 국제주의와 상치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진정한 민족주의자는 진정한 국제주의자”라고 선언한다. 우리 민족 역시 열린 민족이었으며 세계와의 교류를 통해 타문명을 배척하지 않고 창의적으로 수용하며 세계화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남과 삶을 나눌 줄 아는 열린 민족이었다. 세계 문명을 우리 나름의 창의성과 독창성으로 받아들였다.”

그 역사적 증거로서 신라와 고려의 예를 든다. 신라는 전통문화 바탕 위에서 북방·남방 문화, 멀리 로마를 비롯한 서역문화까지도 받아들였으며 고려의 ‘팔만대장경’은 이웃 나라들의 판본을 죄다 가져다 꼼꼼히 검토·보완하여 가장 방대하고 완벽한 팔만대장경을 완성해 불교 경전을 집대성했다. 고려의 소수민족 정책도 “오는 자는 다 받아들인다는 ‘내자불거(來者不拒)’의 정책이었다. 실제 고려의 절반은 외국인이었다. 고려의 275개 성씨 중 귀화성이 130개였다”고 한다.

▲ 2015년 11월 제1차 중국 대장정 답사길에 함께 노회찬 전 의원. 대장정 출발지 징강산(井崗山)에서 일행과 함께. [사진제공 - 한국문명교류연구소]
▲ 징강산 혁명역사박물관 입구에서. [사진제공 -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정수일의 민족주의는 배타주의를 거부한다. 배타적 민족주의는 애당초 민족주의가 아니며 민족배타주의일 뿐이라 주장한다. 세계화는 단일화가 아니라 다양화여야 한다는 주장도 같은 맥락이다. 독보적 업적을 쌓아온 필생의 연구과제인 문명교류학에 대해서도 교류의 주체 즉 문화를 전하고, 또 받아들여 자신의 문명으로 만들어내는 실체적인 단위로서 민족의 중요성을 강조해 온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다민족, 다문화주의 시대에 민족의 의미가 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문제를 해결할 모델을 제시해준다는 주장 역시 많은 공감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지난 세기의 민족주의가 서로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민족주의는 늘 지킬 박사도 아니었고 늘 하이드 씨였던 것도 아니다. 민족주의가 절대군주에게 반대하고 애국심이 시민혁명을 지키는 일일 때 민족주의는 공화제와 민주주의의 벗이자 시대의 진보였다. 그러나 강한 민족주의가 약한 민족주의를 억압하는 제국주의시대에 민족주의는 반동의 모습으로 역사발전을 위협했다. 파시즘의 벗이 된 민족주의는 사상 최대의 비극을 남기기도 했다.

정수일 선생은 “민족주의야말로 역사의 보편가치로서, 보편적 진보주의로서 정연한 논리체계와 내재적 구조를 갖춘 이념이고 의식구조이며 생활모습”이라며 “내재적 속성으로 인해 역사성과 보편성, 역동성을 함께 지니고 있는 민족주의는 다른 주의들과 달리 어떠한 한시적인 시류나 흥행물이 아니라, 통시적인 역사과정에서 형성 축적된 역사와 생존의 보편가치”라 규정한다.

민족주의가 낳는 폐단에는 민족에 대한 무지나 오해, 민족주의의 남용이나 악용도 물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족주의가 역사의 보편가치, 보편적 진보주의로 기능하기 위해선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성찰이 실천적 보완재에 대한 논의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

역사적 현실에서 민족주의는 홀로 존재한 적도 홀로 기능한 적도 없다. 민족주의가 진보였을 때는 늘 민주주의와 함께 할 때였다. 민주주의 없는 사회주의가 대부분 21세기의 문턱을 넘지 못한 것도 마찬가지 이치이다.

민족의 존재방식, 민족과 국가와의 관계 역시 중요한 성찰의 과제이다. 세계는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모든 사람이 특정 민족에 소속되거나 어느 민족으로 분류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민족이 하나씩의 국가를 가져야 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의 민족은 반드시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남과 북도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우리는 하나의 국가로 통일하는 날보다 서로 싸우지 않는 나라로 존재하는 일을 더 서둘러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과정을 어느 정도 거쳐야 민족이 하나되는 날도 빨리 오지 않을까?

20세기말이 민족주의의 황혼이 될 것이라는 예언도 무색하게 21세기 벽두부터 민족 갈등과 충돌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반도에선 19세기 20세기에 한반도에서 한 차례 이상 우리와 전쟁을 벌였던 당사자들이 여전히 우리를 둘러싼 강대국으로 건재하고 있다. 분단현실은 여전히 가장 폭력적인 정치행태로 남과 북 대다수 국민의 생활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민족은 관념이 아니듯이 민족문제는 관념적 접근으로 해결될 수 없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민족문제의 이해와 해법은 그래서 우리 모두의 생존의 문제이다. 과거를 뛰어넘는 새로운 도전으로 ‘민족문제에 관한 체계적인 보편이론’을 정립하는 일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정수일의 여행>에 거는 기대도 바로 이 때문이다.

누군가 나에게 세계 5대 여행기에 대해 물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세계 5대 여행기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오도릭의 <동방기행>,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 그리고 <정수일의 여행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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