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한경제 「원조」 정책의 본질을 분석함(중)
=미국의 대외원조는 미국경제의 필요성 때문에 제공되는 것이다=

한국 사람만큼 타국인을 잘 믿는 민족도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한 예로서 아직도 많은 한국인은 미국의 「원조」라는 것이 전적으로 미국의 자선가적인 호의에 의하여 공여되는 것인 줄로만 알고 있다. 또한 미국의 일반시민 즉 납세자들의 대다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미국을 여행해 본 사람이면 흔히 이런 질문을 받는 수가 있다.

「우리들 세금으로 한국을 어지간히 원조했는데 얼마나 건설되었느냐...」고 하면서도 한국이 계속해서 「원조」를 받아야 할 것이라고 하면 귀찮다는 듯 불쾌한 표정을 짓는 것이다. 미국시민으로서 이러한 태도는 당연하다.

미국의 일반시민은 「원조」라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잘 모르고 있다. 「원조」라는 것이 한국 사람을 위하는 것보다는 미국의 국가적 이익을 수호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며 동시에 그것은 미국의 국내경제의 필요에 의하여 창안된 것이라고 말한다면 미국의 일반시민은 깜짝 놀랄 것이다. 미국의 대한국경제 「원조」정책이라는 것이 바로 미국 자신의 필요성 때문에 창안된 것임을 증명할 수 있다.

미국은 천연자원이 풍부하고 농공산물 할 것 없이 산업이 극도로 발전하여 일년 농사만으로도 삼년은 먹고 살 수 있으며 연간 600만대의 승용자동차를 생산하면서도 오히려 자동차생산시설은 유휴 하여야 할 만큼 풍족한 실정에 있는 것이다. 

바로 이 경이적인 생산력 자체가 미국경제의 성장발전을 저해하고 있다고 하면 믿어지지 않을 소론같이 들릴지도 모르나 사실인 즉 그러한 것이다.

자본주의적인 무제한 잉여생산은 소비시장을 찾아야 하게 된다. 이것을 하필이면 공산당만이 지적하는 이론만은 아닌 것이다. 미국인 자신들이 과잉생산과 국내시장의 협소함을 탄식하고 있다.

미국은 매년 800억대에 달하는 연방정부예산을 세우고 있는데 그 가운데 과반인 450억불 이상이 군사비에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군사예산으로써 원자・수소폭탄이나 대륙간탄도유도탄과 같은 대량살륙무기를 제작함은 물론 전 자유세계에 걸쳐 700개 처에 달하는 군사기지 및 병참지부들을 유지하고 있으며 100만 명이상의 상비병력 외에 약 200만 명에 달하는 군사 및 해외관계의 종사원을 반영구적으로 고용하고 있는 것이다.

「US」상표와 더불어 이들 군사 및 해외관계요원들이 자유세계도처에서 이른바 미국의 국가적 이익을 수호하기 위하여 왕래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이른바 자유세계의 유대를 공고히 한다는 명목으로 연간 40억 내지 50억불이라는 거액의 「원조」를 제공하고 있다.

이것만으로 보면 미국은 강국으로서 자유세계를 수호하기 위하여 타국을 돕는 여유까지 지닌 「착한나라」라는 인상을 갖게 한다.

그러나 한번 미국내부를 들여다보면 그 풍요한 가운데서도 대중적인 빈곤문제가 있으며 570만에 달하는 실업자 문제가 위정자들의 두통거리가 되고 있다. 동시에 경기후퇴 및 해외수지의 악화경향 등등 우리로서는 상상도 못할 만큼 많은 난문제에 봉착하고 있다.

만약 미국이 자국의 생산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한편 국가적으로 실업자에게 취업의 기회를 마련해 줄 수만 있다면 미국민은 계속해서 세계제일의 번영을 누리라는 것은 의심할 바조차 없다. 그러나 미국은 자본주의의 나라이며 자본은 이윤을 벌기위하여서만 움직이는 것이니까 과잉인 것을 알면서도 상품생산을 더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창안된 것이 원조명목으로 외국에 「원조」를 제공함으로써 자국의 잉여상품처리의 일방편으로 삼는 동시에 앞으로의 시장 확보를 꾀하고 나아가서는 피 원조국가의 내정・경제에까지 간섭할 기회를 장악하여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신통한 묘방인 것처럼 기뻐하였던 것이다. 미국이 실업자를 축소시키는데도 유효하고 미국의 불경기를 불식하기 위하여서도 「원조」는 필요하였던 것이다.

한국에 공여되는 미국 「원조」라는 것이 한국민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미국의 대한경제 「원조」가 본질적으로 한국의 자립경제건설에 기여할 수도 없는 까닭이다. 역설적으로 말하여 만약 한국이 자립경제를 구축하고 농공산물면에서 한국산만으로 충족하게 되고 나아가서는 해외수출까지 할 수 있게 된다면 「원조」는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을 미국의 「원조」정책은 바라지 않을 것이다.

「원조」에 의하여 한국이 자립경제를 건설하고 「원조」가 필요 없다고 하는 사태에 이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미국의 대한국경제 「원조」정책의 본질인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악덕의사가 있다면 환자에게 아편을 맞히고 중환자가 되게 하여 의사의 수입을 올리기 위하여 매일매일 아편을 맞으러 오도록 만드는 것과 비슷한 논리인 것이다. 미국의 「원조」정책이 극적변화를 일으키든지 미국의 경제체제가 자본주의 아닌 딴 방향으로 수정되기 전까지는 10년 더 원조가 계속된다고 하여도 한국민이 희구하는 자립경제의 터전을 갖추지는 못할 것임을 깨달아야할 때는 왔다.

논자들 가운데는 흔희 전후 구라파의 부흥・발전 특히 서독의 기적적인 재흥이나 일본의 비약적 발전을 가리키면서 그것이 미국원조의 덕분이라고 하고 있다. 물론 이들 제국이 미국의 원조를 받고 그로써 재흥발전의 계연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 발전을 본 제국들이 예외 없이 자립경제를 구축할만한 기초적 조건이 구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하여서는 안 된다. 또한 서독이나 일본을 원조한 것이 미국의 실용이나 자선심에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똑바로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미국의 당초 전후처리구상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호전국인 독일을 「목축국가」로 고쳐만들고 일본 역시 「수공예품제조국가」로 만들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공산주의 침투를 막기 위한다는 필요성 때문에 즉 냉전의 전략상 서독이나 일본의 공업능력을 온존 배양시키는 것이 미국의 국가적 이익에 유리하다고 생각하였기에 닭그제(엊그제)의 적국민들과 손을 나란히 잡고 냉전태세를 강화하는데 동조하였던 것이다.
 
지난 58년(1958년)을 고비로 미국의 대외수지가 역조에 접어들고 반면 서독이나 일본의 대외수지가 호전되어 마침내는 미국정부고위관리들이 서독에 찾아가서 「애걸」하는 웃지 못할 정경을 빚어내게 한 것 역시 자본주의 경제의 생리적 현상의 일단인 것이다. 냉전 때문에 서독이나 일본을 키워놓고서 이제 와서는 미국자본주의의 국제경쟁에 있어 무서운 적수로 등장케 하였으니 어리석은 「양키」였다고 평하여도 좋은 것이다. 

지금 와서 서독이나 일본이 미국의 압력에 굴하려 하지 않고 되려 「미국이 봐주지 않으면 공산제국과의 통상을 촉진시킬 것이다」고 역습하고 나오는 꼬락서니를 미국이 불쾌해한들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자립경제를 구축하고 난 뒤이니까 미국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하게 되어있는 것이다.

미국은 이와 같이 전 적국까지도 그들의 필요성 때문에 부흥시키면서 한국 같은 나라에 대하여서는 자립경제는커녕 예속경제만 강요하고 있으니 우리가 어찌 이러한 사태를 참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미국의 보통시민들이 개인적으로는 우리와 친근한 벗이 될 수 있으면서도 미국의 대한정책은 우리를 해롭게만 하려고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개인의 호의와는 달라 자본주의적인 「호의」의 이면에는 전기한바 같은 「비정」의 일면이 있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미국의 대한경제 「원조」 정책의 본질을 분석함(중) [민족일보 이미지]

美國의 對韓經濟 「援助」 政策의 本質을 分析함(中)
=美國의 對外援助는 美國經濟의 必要性때문에 提供되는 것이다=


韓國사람만큼 他國人을 잘 믿는 民族도 別로 없을 것이다. 그러한 例로서 아직도 많은 韓國人은 美國의 「援助」라는 것이 全的으로 美國의 慈善家的인 好意에 依하여 供與되는 것인줄로만 알고 있다. 또한 美國의 一般市民 即 納稅者들의 大多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美國을 旅行해본 사람이면 흔히 이런 質問을 받는 수가 있다.

「우리들 稅金으로 韓國을 어지간히 援助했는데 얼마나 建設되었느냐...」고 하면서도 韓國이 繼續해서 「援助」를 받아야 할 것이라고 하면 귀찮다는 듯 不快한 表情을 짓는 것이다. 美國市民으로서 이러한 態度는 當然하다.

美國의 一般市民은 「援助」라는 것의 正體가 무엇인가를 잘 모르고 있다. 「援助」라는 것이 韓國사람을 위하는 것보다는 美國의 國家的 利益을 守護하기 위하여 必要한 것이며 同時에 그것은 美國의 國內經濟의 必要에 依하여 創案된 것이라고 말한다면 美國의 一般市民은 깜짝 놀랄 것이다. 美國의 對韓國經濟 「援助」政策이라는 것이 바로 美國 自身의 必要性때문에 創案된 것임을 證明할 수 있다.

美國은 天然資源이 豐富하고 農工産物 할 것 없이 産業이 極度로 發展하여 一年農事만으로도 三年은 먹고 살 수 있으며 年間六百萬臺의 乘用自動車를 生産하면서도 오히려 自動車生産施設은 遊休하여야 할 만큼 豐足한 實情에 있는 것이다. 바로 이 驚異的인 生産力 自體가 美國經濟의 成長發展을 沮害하고 있다고 하면 믿어지지 않을 所論같이 들릴지도 모르나 事實인 즉 그러한 것이다.

資本主義的인 無制限 剩餘生産은 消費市場을 찾아야 하게 된다. 이것을 何必이면 共産黨만이 指摘하는 理論만은 아닌 것이다. 美國人 自身들이 過剩生産과 國內市場의 협소함을 嘆息하고 있다.

美國은 每年八百億臺에 達하는 聯邦政府豫算을 세우고 있는데 그 가운데 過半인 四百五十億佛 以上이 軍事費에 使用되고 있다. 이러한 軍事豫算으로써 原子・水素爆彈이나 大陸間彈道誘導彈과 같은 大量殺戮武器를 製作함은 물론 全自由世界에 걸쳐 七百個處에 達하는 軍事基地 및 兵站支部들을 維持하고 있으며 百萬名 以上의 常備兵力外에 約二百萬名에 達하는 軍事 및 海外關係의 從事員을 半永久的으로 雇傭하고 있는 것이다.

「US」商標와 더불어 이들 軍事 및 海外關係要員들이 自由世界到處에서 이른바 美國의 國家的 利益을 守護하기 위하여 往來하고 있는 것이다.
同時에 이른바 自由世界의 紐帶를 鞏固히 한다는 名目으로 年刊四十億乃至 五十億佛이라는 巨額의 「援助」를 提供하고 있다.

이것만으로 보면 美國은 强國으로서 自由世界를 守護하기위하여 他國을 돕는 餘裕까지 지닌 「착한나라」라는 印象을 갖게한다.

그러나 한번 美國內部를 들여다보면 그 豊요한 가운데서도 大衆的인 貧困問題가 있으며 五百七十萬에 達하는 失業者問題가 爲政者들의 頭痛거리가 되고 있다. 同時에 景氣後退 및 海外收支의 惡化傾向 等等 우리로서는 想像도 못할만큼 많은 難問題에 逢着하고 있다.

萬若 美國이 自國의 生産을 效果的으로 統制하는 한편 國家的으로 失業者에게 就業의 機會를 마련해 줄 수만 있다면 美國民은 繼續해서 世界第一의 繁榮을 누리라는 것은 疑心할바 조차 없다. 그러나 美國은 資本主義의 나라이며 資本은 利潤을 벌기위하여서만 움직이는 것이니까 過剩인 것을 알면서도 商品生産을 더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創案된 것이 援助名目으로 外國에 「援助」를 提供함으로써 自國의 剩餘商品處理의 一方便으로 삼는 同時에 앞으로의 市場確保를 꾀하고 나아가서는 被援助國家의 內政・經濟에까지 干涉할 機會를 掌握하여 그야말로 一石二鳥의 神通한 妙方인 것처럼 기뻐하였던 것이다.

美國이 失業者를 縮小시키는데도 有效하고 美國의 不景氣를 拂拭하기 위하여서도 「援助」는 必要하였던 것이다.
韓國에 供與되는 美國「援助」라는 것이 韓國民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能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美國의 對韓經濟「援助」가 本質的으로 韓國의 自立經濟建設에 寄與할 수도 없는 까닭이다. 逆說的으로 말하여 萬若 韓國이 自立經濟를 構築하고 農工産物面에서 韓國産만으로 充足하게되고 나아가서는 海外輸出까지 할 수 있게 된다면 「援助」는 必要없을 것이다. 그런 狀態가 되는 것을 美國의 「援助」政策은 바라지 않을 것이다.

「援助」에 依하여 韓國이 自立經濟를 建設하고 「援助」가 必要없다고 하는 事態에 이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美國의 對韓國經濟「援助」政策의 本質인 것이다.

이것은 마치 惡德意思가 있다면 患者에게 阿片을 맞히고 重患者가 되게하여 醫師의 收入을 올리기 위하여 每日每日 阿片을 맞으러 오도록 만드는 것과 비슷한 論理인 것이다. 美國의 「援助」政策이 劇的變化를 일으키든지 美國의 經濟體制가 資本主義아닌 딴 方向으로 修正되기 전까지는 十年 더 援助가 繼續된다고 하여도 韓國民이 希求하는 自立經濟의 터전을 갖추지는 못할 것임을 깨달아야할 때는 왔다.

論者들 가운데는 흔희 戰後歐羅巴의 復興・發展 特히 西獨의 奇蹟的인 再興이나 日本의 飛躍的 發展을 가리키면서 그것이 美國援助의 德分이라고 하고있다.
물론 이들 諸國이 美國의 援助를 받고 그로써 再興發展의 契緣을 만들었다는 事實은 否認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 發展을 본 諸國들이 例外없이 自立經濟를 構築할만한 基礎的條件이 具備되어 있었다는 事實을 看過하여서는 안된다.
또한 西獨이나 日本을 援助한 것이 美國의 實用이나 慈善心에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똑바로 認識하여야 할 것이다.

美國의 당초 戰後處理構想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好戰國인 獨逸을 「牧畜國家」로 고쳐만들고 日本 역시 「手工藝品製造國家」로 만들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共産主義浸透를 막기 위한다는 必要性때문에 即冷戰의 戰略上 西獨이나 日本의 工業能力을 溫存培養시키는 것이 美國의 國家的 利益에 有利하다고 생각하였기에 닭그제(엊그제)의 敵國民들과 손을 나란히 잡고 冷戰態勢를 强化하는데 同調하였던 것이다. 

지난 五八年을 고비로 美國의 對外收支가 逆調에 접어들고 反面 西獨이나 日本의 對外收支가 好轉되어 마침내는 美國政府高位官吏들이 西獨에 찾아가서 「哀乞」하는 웃지못할 情景을 빚어내게 한 것 역시 資本主義經濟의 生理的 現象의 一端인 것이다. 
冷戰때문에 西獨이나 日本을 키워놓고서 이제와서는 美國資本主義의 國際競爭에 있어 무서운 敵手로 登場케 하였으니 어리석은 「양키」였다고 評하여도 좋은 것이다. 지금와서 西獨이나 日本이 美國의 壓力에 屈하려하지않고 되려 「美國이 봐주지 않으면 共産諸國과의 通商을 促進시킬 것이다」고 逆襲하고 나오는 꼬락서니를 美國이 不快해한들 所用이 없다.

왜냐하면 自立經濟를 構築하고 난뒤이니까. 美國의 支配力이 미치지 못하게 되어있는 것이다.

美國은 이와같이 前敵國까지도 그들의 必要性때문에 復興시키면서 韓國같은 나라에 對하여서는 自立經濟는 커녕 隸屬經濟만 强要하고 있으니 우리가 어찌 이러한 事態를 참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美國의 普通市民들이 個人的으로는 우리와 親近한 벗이 될 수 있으면서도 美國의 對韓政策은 우리를 害롭게만 하려고 하고 있다는 事實을 認識하여야 할 것이다. 個人의 好意와는 달라 資本主義的인 「好意」의 裏面에는 前記한 바같은 「非情」의 一面이 있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민족일보> 1961년 3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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