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19.10.18 금 19:58
홈 > 특집연재 > 연재
충칭임시정부(3)<연재> 임영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27년의 역정’ (13)
임영태  |  ytlim20@hanmail.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승인 2019.07.16  12:09:40
페이스북 트위터

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상하이서 첫 걸음을 시작해 일제의 패망으로 1945년 11월 고국에 돌아올 때까지 27년간 고난에 찬 투쟁을 이어갔다. 그 사이 임시정부는 상하이,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충칭 등 중국 대륙 곳곳을 누비며 1만3천리(5,200㎞)를 이동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초기 활동 지역인 상하이와 첫 피신처였던 항저우의 임시정부 유적지를 돌아보았다. 상하이・항저우 유적지 답사기와 함께 임시정부 역사를 10여회에 걸쳐 정리하고자 한다. 이 답사기는 매주 화요일 연재된다. / 필자 주


임시정부, 옌안 독립동맹과의 연대 모색

1941년 1월 6일 중국공산당의 통일전선부대인 신사군이 중국국민당의 국민혁명군으로부터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수천명이 희생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신사군 사건 또는 윈난(晥南) 사변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1937년 2차 국공합작이 성립되면서 국민당군과 공산당군 사이에 휴전과 항일투쟁을 위한 공동연합전선이 형성되었으나 공산당의 독자적인 활동과 근거지 확장은 계속되었다. 특히 신사군은 양쯔강 남쪽지역에서 유격전을 벌이며 세력을 확장하면서 장제스의 신경을 거슬리고 있었다. 공산당군대의 세력 확장에 불안감을 느낀 장제스는 1940년 12월 신사군에 대해 안후이성 및 저장성에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장제스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신사군은 이동을 지연시키자 중국 국민혁명군이 포위 공격으로 신사군을 궤멸상태에 빠뜨린 것이다.(주1)

이 사건은 마오쩌둥의 자주적 통일전선론을 확대 적용한 천이 등 신사군 지도부가 낙관주의에 빠져서 장제스의 이동 지시를 바로 이행하지 않다가 전면 공격을 받은 것이다.(주2) 이 사건으로 국공합작은 사실상 깨졌으며, 이후 중국국민당은 반공을 내세우며 중국인 공산주의자뿐만 아니라 외국인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서도 체포,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좌파진영 청년들이 대다수였던 조선의용대는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주3)

동북지역으로 가서 대규모 무장조직을 갖추어 항일전쟁을 전개하자는 의견도 일부 제기되었지만 조선의용대 대원 대다수는 중국공산당 지역인 화북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낙양에 집결한 대원들은 1941년 3월과 5월에 걸쳐 황허를 건너 화북으로 이동했다. 중경에 있던 대본부와 일부를 제외하고 대원의 80%가 황허를 건넜다.(주4)

1941년 1월 10일 중국공산당과 연계돼 활동하고 있던 무정·최창익 등은 타이항(太行)산에서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결성하고 조선의용대를 기다렸지만 조선의용대는 이들의 생각과는 달리 독자성을 유지하려 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공산당과의 연계보다는 조선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동북지역으로 가서 무장투쟁을 벌이고자 했다. 이들은 1941년 7월 화북에 도착한 뒤 곧바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하고 충칭 대본부의 지휘를 받기로 결정했으나 현실은 그들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대원들은 1941년 12월 스자좡(胡家莊)과 싱타이(邢臺)에서 일본군과 큰 전투를 치러야 했고, 1942년 5월에는 삐엔청(編成) 전투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주5)

   
▲ 조선의용군의 선전벽보(사진=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또한 충칭본부가 1942년 5월 중국군사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광복군으로 편입되면서 본부와의 연락도 끊어지고 말았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본대도 없이 지대만 남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무정·최창익 등이 조직한 화북조선청년연합회와 결합해 1942년 7월 화북조선독립동맹을 결성했다. 위원장에는 그해 4월 화북으로 온 김두봉이 맡았다. 독립동맹 결성과 함께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했으며, 사령관은 무정, 지대장은 박효삼이 맡았다. 독립동맹이 정치조직이라면 조선의용군은 독립동맹의 무장조직이었다.

화북지역에 독립동맹이 결성되면서 1940년대 독립운동전선은 새로운 판도가 형성되었다. 중국관내지역의 독립운동세력이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 지역으로 양분된 것이다. 충칭을 중심으로 한 중국국민당 지역에서는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옌안을 중심으로 한 중국공산당 지역에서는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이 각각 독자적으로 활동하면서 1940년대 중국 관내의 독립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 연안독립동맹 지도부가 평양에서 촬영한 모습(1945. 12)(사진=nk투데이)

이런 상황에서 충칭임시정부는 화북지역의 독립동맹과 그 군사조직인 조선의용군과의 연계를 추진했다. 임시정부는 독립동맹과 통일전선을 도모하고 광복군과 조선의용군을 한 곳에 집결시켜 활동하려고 했던 것이다. 임시정부와 독립동맹은 경쟁적인 면이 있었지만 상호 실체를 인정하며 존중했다.(주6) 서로 격려하며 통일전선 의도를 밝히기도 했다. 1944년 4월 임시정부가 좌우연합정부를 구성했을 때, 독립동맹은 “일체의 혁명세력이 모두 완전히 통일되고 단결하여 대규모의 항일투쟁을 전개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김구가 먼저 김두봉에게 편지를 보냈다. 김구의 편지를 받은 김두봉은 “우리가 지역과 파벌을 불문하고 성심으로 단결하여 실제적인 일로 연락을 한다면, 압록강에 군대를 모으는 일의 실현을 촉진시킬 수 있다. 만일 여러 분께서 동의한다면 내가 중간에 나서서 알선하겠다”라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1945년 4월 김구는 임시정부 국무위원 장건상을 옌안에 직접 파견했다.(주7) 일제의 패망을 앞둔 시점에서 임시정부와 독립동맹은 공동으로 대비하자는데 뜻을 같이 했다. 독립동맹 위원장 김두봉은 직접 충칭에 가겠다고 했으나 일제의 패망소식이 먼저 전해지는 바람에 가지 못하였고 회의도 성사되지 않았다.(주8)

임시정부, 만주 및 국내와의 연계 시도

1930년대 만주에서는 한인공산주의자들이 중국공산당과 결합하여 동북항일연군을 조직해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김일성, 최용건, 김책, 허형식, 최현 등 한인공산주의자들이 가담한 동북항일연군은 1930년대 후반부터 진행된 일본군과 만주군의 대규모 토벌 공세에 밀려 1940년을 전후하여 대부분의 부대들이 소비에트 러시아령인 하바롭스크로 퇴각하게 된다. 항일 부대들은 이곳에서 동북항일연군교도려(일명 ‘88여단’)를 결성했다. 임시정부는 이들 만주의 항일무장투쟁세력과의 연계도 시도했다.

임시정부는 이전부터 김일성의 항일유격대가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동삼성 방면에 우리 독립군이 벌써 자취를 감추었을 터이나, 신흥학교 시절 이후 3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 오히려 김일성 등 무장부대가 의연히 산악지대에 의거하여 엄존하고 있다. 이들이 압록 두만을 넘나들며 왜병과 전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의용군과 연합작전을 하고 러시아의 후원도 받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현상유지를 하는 정세라 관내 임시정부 방면과의 연락은 극히 곤란하게 되었다”(주9)라고 언급하고 있다.

만주에서 활동하는 그들의 사정으로 인해 임시정부와는 연락이 어려웠지만, 그들의 활동 상황 정도는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조선민족혁명당이 발행하고 있던 잡지 『전도(前途)』 제18호(1937.6.28.)에서는 “김일성부대 경군 8명 사살”, “14도구에 글어가 적의 주구 수명을 납치, 김일성부대가” 등의 제목 아래 김일성부대의 활동사실을 소개하고 있었다.(주10) 그러나 1940년 10월 김일성 부대가 러시아로 이동한 후에는 이들에 대한 소식을 거의 알 수 없었고, 임시정부가 이들의 소식을 접하게 되는 것은 1944년 무렵이었다.

   
▲ 1944년 소련령 하바롭스크의 동북항일연군 부대원들. 앞줄 오른편에서 두 번째가 김일성, 세 번째가 주보중.

함경북도 출신으로 만주 봉천(심양)에서 <동아일보> 만총지국을 경영하다가 1931년 러시아로 망명한 이충모가 1944년 7월 충칭에 나타나 이들의 소식을 상세히 전해주었던 것이다. 러시아지역 한인들에 대한 정보를 갖게 된 임시정부는 이들과의 연계를 모색하기 위해 이충모를 연락원으로 파견했다. 이충모는 1945년 3월 충칭을 떠났으나 산서성 타이위안(太原)에서 8·15를 맞음으로써 그 연계 활동은 성공하지 못했다.(주11)

이충모 파견 이전에도 임시정부는 연해주 한인부대와 연계를 도모한 일이 있었다. “1942년 12월에는 임시정부 파견원의 자격으로 김가성을 가진 사람이 무단장(牧丹江)까지 왔다가 우리를 만나지 못하고 충칭으로 돌아갔다”라는 김일성의 회고가 있다. 김일성 등도 임시정부와의 연계를 모색했다. 김일성은 “임시정부가 자기 산하에 광복군과 같은 무장력을 내어 온 것은 그들의 활동에서 하나의 전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우리는 그들(광복군)과도 손을 잡아보려고 시도했습니다. 김구계열과의 합작이 성사되면 조국해방을 위한 최종작전이 벌어질 때 그들의 무장력도 동원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견해였”다고 한다.(주12)

임시정부는 국내와도 연계를 추진했다. 임시정부는 다양한 방법으로 국내진입작전을 추진하고 있었고 이를 위해 국내와 연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 임시정부는 국내와 연계를 위해 국내공작위원회를 설치했다. 제37차 의정원 회의 보고 문건에 따르면 국내공작위원회는 주석 김구가 직접 주관하도록 했고 군무부장 김약산(김원봉) 등을 위원으로 선정했다.(주13)

국내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세력 또한 중경임시정부와 연안독립동맹과의 연계를 추진했다. 국내에서 비밀리에 조직해 활동하고 있던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이 임시정부와 독립동맹과의 연계를 추진한 것이다. 건국동맹은 1945년 5월 말 “중경 임시정부 요인에게 국내사정을 전달하고 내외가 상응하여 협동전선을 형성할 연락을 하기 위해 최근우를 파견”했다.(주14) 최근우는 1919년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할 때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건국동맹은 임시정부와는 직접 접촉하지 못했지만 옌안 독립동맹과는 연계를 맺을 수 있었다. 건국동맹은 옌안의 독립동맹과 연계를 위해 이영선·이상백·박승환 등을 북경에 파견했고, 독립동맹도 북경에 연락원을 파견하여 이들이 연락관계를 맺었다. 소설가 김사량은 연락원 이영선을 통해 옌안으로 갈 수 있었고 건국동맹과 독립동맹 사이에 국내진공과 정치노선 등에 대한 문제가 논의되기도 했다.

임시정부는 옌안의 독립동맹, 하바롭스크의 항일투쟁부대, 그리고 국내 세력과의 연계를 추진했으나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기 전에 일제가 항복하고 말았다.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시도는 일제가 패망하는 최후 순간까지 국내외 독립운동세력과 상호 연계를 통해 통일전선을 추진한 것으로써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시기 이러한 노력과 경험은 해방 후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을 추진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임시정부의 대중·대미 외교

1932년 윤봉길 의거 직후 중국국민당 조직부장 진과부와 김구 사이에 연락통로가 만들어졌다. 1938년 10월부터는 진과부에서 주가화로 바뀌었다. 1942년 7월에는 중국국민당 상무위원회가 대전현·하응흠·왕총혜·진과부·주가화·오철성·왕세걸 등 7명으로 전문소위원회를 만들어 한국문제 전반을 처리하도록 했다. 1944년 5월부터는 오철성이 조직부장을 맡아 한국담당 책임자가 되었다.

중국측 책임자가 정해지면서 1940년대 임시정부의 대중국 외교는 비교적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대중국 외교는 대체로 두 단계를 거쳤다. 우선 임시정부는 중국국민당 조직부장과 접촉하고 조직부장이 이를 중국의 당·정·군 책임자에게 보고하는 형식을 띠었다. 이외에도 임시정부에서 직접 장개석에게 공문을 보내거나 면담을 청하는 특별한 경우도 있었다. 장개석과의 면담은 일단 조직부장에게 요청하고, 조직부장이 이를 장개석에게 건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장개석과의 면담은 주로 주석 김구가 요청하는 형식이었고, 중경시기에 모두 4차례 이루어졌다.(주15)

중국을 상대로 한 외교활동 중에서도 광복군 창설,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세력들에 대한 재정 지원,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 등이 중요한 문제였다. 이밖에도 임시정부 가족들의 생활과 임시정부 청사 등 다양한 문제들이 교섭 대상이었다. 중한문화협회 등 민간외교 활동도 빼놓을 수 없었다.

임시정부는 중국 땅에서 세워졌고 중국 땅에서 활동한 정부였다. 특히 이봉창・윤봉길 의거와 중일전쟁 이후 두 민족은 일제와 공동으로 투쟁하는 관계였기 때문에 음으로 양으로 중국국민당정부의 지원에 많은 부분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외교활동의 주된 부분이 중국과의 관계에서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대중국 외교에서 가장 큰 성과는 장개석을 움직여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명시한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카이로에서 미・영・중 3개국 정상이 전후 국제문제를 논의한다는 사실을 접하고 중국측에 적극적으로 한국의 독립문제를 제기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장제스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적절한 과정을 거쳐서(in due course)’라는 전제를 달기는 했지만, 한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명시하게 된 것은 큰 외교적 성과였다. 임시정부는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적정한 과정을 거쳐서’라는 전제가 결국은 신탁통치 실시를 의미한다고 보고 이에 대한 반대 성명을 발표하는 등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폈다.(주16) 이러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해방 후 모스크바 삼상회담에서 ‘신탁통치안’이 포함되자 김구는 결사적인 반대운동을 폈던 것이다.

중국과 더불어 임시정부가 주요한 외교활동 대상으로 삼은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태평양전쟁에서 대일전쟁을 주도하고 있던 대표적인 연합국이었고, 전후 한반도 문제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임시정부가 미국을 대상으로 외교활동을 전개한 것은 정부수립 직후부터였다. 임시대통령 이승만이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김규식 등과 함께 미국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1934년에는 미국과의 외교를 전담하기 위한 기구로 주미외무행서를 설치한 일도 있었다. 주미외무행서 외무위원으로 이승만을 임명하고 외무부장의 명을 받아 미국에 대한 외교활동을 전개하도록 했다.(주17)

충칭임시정부 또한 미국과의 외교를 전담할 기구를 설치하고, 이를 중심으로 미국과의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임시정부는 미주지역 9개 한인단체가 모여 한족연합위원회를 결성한 것을 계기로 워싱턴에 주미외교위원부를 설치하고, 위원장에 이승만을 임명했다. 주미외교위원부는 임시정부 외무부 소속 산하기관으로 임시정부의 주미대사관과 같은 성격이었다. 따라서 위원장 이승만은 임시정부에서 임명한 주미대사라고도 할 수 있었다.

   
▲ 중국 국민당 장개석 주석의 임시정부 요인 환송연회. (1945년 11월 4일)

임시정부에서는 이승만을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하면서 그에게 주차워싱턴전권대표 신임장도 함께 보냈다. 이로써 임시정부의 대미외교는 주미외교위원부가 전담하게 되었고, 위원장 이승만으로 하여금 전권대표로 미국과의 외교활동을 주관하도록 했다. 이후 주미외교위원부를 중심으로 이승만은 미국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주미외교위원부는 원활하게 운영되지 못했다. 내부 분열과 갈등 때문이었다.(주18)

이승만이 관련된 주미외교위원부의 대립·갈등·분열은 임시정부의 대미외교에 커다란 장애로 작용했다. 1941년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결성하여 임시정부를 봉대하고자 했던 미주한인사회에 임시정부에 반발하는 세력이 형성되었고, 임시정부 권위가 크게 손상되었다. 또한 미주한인사회의 분열상은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의 인식에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주19)

임시정부가 미국을 상대로 벌인 외교활동의 주요 목표는 임시정부 승인이었다. 임시정부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주미외교위원부는 다양한 통로와 방법을 동원하여 임시정부의 외교적 승인을 위해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한동안 임시정부 승인문제를 놓고 애매한 태도를 취하던 미국정부가 1943년에 들어와 국제공동관리, 즉 신탁통치의 입장으로 확실히 정리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신탁통치로 입장을 정리한 것은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는다는 방침이나 다름없었다. 이후에도 임시정부와 주미외교위원부는 여러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여 승인 요청을 벌였지만, 미국의 방침은 변하지 않았다.(주20)

미국의 군사적 지원을 얻기 위한 활동

미국에 대한 외교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 것은 임시정부의 승인 문제와 더불어 군사적 지원을 얻기 위해서였다. 미국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는 것은 극비리에 추진되었다. 임시정부의 군대인 한국광복군이 중국군사위원회의 통제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군사적 지원 요청은 이승만이 주도했는데 중국 정부의 눈을 피해야 했기 때문에 김구 주석과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면서 진행했다.

이승만은 중국을 비롯하여 연해주 일대에 수많은 무장세력이 일제와 항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미국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미국은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고 있었지만, 일본과 전쟁에 한인무장세력을 활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일본과의 전쟁에서 한반도가 갖는 전략적 중요성 때문이었다. 이승만이 접촉한 미국정보기관은 정보조정국(Coordinator of Information)이었다. 정보조정국은 1941년 7월 루스벨트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국가안보와 관련된 정보수집 및 분석을 위해 설립된 기관으로 도노반(William J. Donovan)이 책임자였다. 이승만은 도노반의 동아시아지역 담당 특별고문인 게일(Esson M. Gale)과 관계를 맺었고, 그를 통해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주21)

게일은 이승만의 요청을 보고서로 만들어 도노반에게 제출했다. 1942년 1월 24일자로 된 「적후공작을 위한 한인고용」이란 보고서에서는 일본본토와 한반도·만주에 있는 한인들을 대일 정보수집과 사보타지에 활용하기 위해, 중경에 있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한 특수훈련학교를 설립하자는 안을 제시했다. 보고서를 제출한 게일은 1942년 3월 8일 중경에 도착하여 약 5개월간 머물렀으며, 김구 주석을 비롯하여 임시정부 요인들을 만났고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의사를 공개적으로 표명하기도 했다.(주22)

   
▲ 충칭임시정부 김구 주석과 미군 OSS측 도노반 소장이 회담 후 걸어 나오고 있다.

그러나 1942년 6월 정보조정국이 전략첩보국인 OSS로 개편되면서, 게일이 제출한 계획안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그 뒤 이승만은 다시 OSS측과 접촉했고, 게일의 주선으로 부국장 굿펠로우(M. Preston Goodfellow)를 만나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승만은 굿펠로우에게 두 가지를 제안했다. 하나는 광복군을 미군의 지휘하에 두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미국 내의 한인을 훈련시켜 단위부대로 미군에 배속시키거나 자유한인무대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김구에게 비밀편지를 보내 광복군을 미군의 지휘하에 두는 방안을 제의했다. 하지만 김구는 이를 거절했다. 광복군을 창설할 때 중국군사위원회가 광복군을 그 예속하에 두려고 하자 이를 거부한 김구가 광복군을 미군의 지휘하에 두자는 제의를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김구는 광복군의 실제 전력이 미국의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과 중국과 관계를 이유로 들어 어렵다고 답했다.(주23)

또한 이승만은 자유한인부대를 조직해 미군 지휘하에 대일전에 참전시키자는 내용을 담은 공문(「미국군사당국에 한인군사지원 제공」)을 1942년 10월 10일 굿펠로우에게 보냈으나 이 제안은 수용되지 않았다. 이는 임시정부 승인문제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의 광복군이나 미국내에 있는 한인들을 미군의 지휘하에 두고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될 경우, 전후에 임시정부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우려가 작용했던 것이다.

대신 미국은 이승만의 제안을 변용하여 추진했다. 미정보당국은 일본과의 전쟁에 한인들을 활용하려는 계획을 독자적으로 세웠다. 한인들을 개별적으로 모집·고용하여 이들을 훈련시켜 각종 지하공작에 활용한다는 것이었다. OSS에서는 한국인들을 일본과의 전쟁에 활용하기 위한 방안으로, 세 가지 계획을 마련했다.

하나는 ‘납코작전(The Napko Project)’으로, 미국본토 및 하와이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과 맥코이 수용소에 있는 한국인포로들 중에서 인원을 선발, 이들을 한반도와 일본에 투입시켜 정보수집과 게릴라활동을 시킨다는 구상이다. 둘째는 ‘독수리작전(The Eagle Project)’으로, 광복군 대원들을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셋째는 중국 연안지역에 있는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을 이용하여 만주·한반도·일본 등지에 대한 첩보활동을 추진하는 ‘북중국첩보작전(North China Intelligence Project)’이다. 미국은 이 세 가지 계획 중 ‘납코작전’과 ‘독수리작전’을 실행에 옮겼다.(주24)

   
▲ 미군과 공동으로 국내 진입하는 독수리 작전을 위해 훈련한 OSS 교관들과 광복군 대원들.


--------------------

<주>

1) 신사군 정예병력 9천명이 3개 방면으로 양쯔강을 건너 집결했을 때 국민혁명군(국민당군) 8만명의 포위 협공을 받아 부대장 예팅이 체포되고 지휘관 다수가 사망했으며, 2천여명의 병사들만 살아서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다. 1941년 1월 17일 장제스는 신사군의 해체를 명령하고 예팅을 군법회의에 넘겼다. 그러나 1월 20일 중국공산당 군사위원회는 부대 재건을 결정하고 천이를 새로운 부대장, 류사오치를 정치위원으로 임명해 7개사단과 1개여단으로 구성된 9만명 규모로 재편했다. 환남사변으로 국공합작은 사실상 끝났다.   

2) 강현사, 「환남사변과 통일전선-발발 원인을 중심으로-」, 『중국근현대사연구』 16, 2002년 12월, 181쪽

3) 한시준, 『대한민국임시정부사3-중경 시기』, 독립기념관, 2009, 100쪽

4) 김영범, 「조선의용대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2, 503〜504쪽; 이정식・스칼라피노/ 한홍구 옮김, 『한국공산주의운동사』, 돌베개, 2014, 307쪽

5) 한시준, 위의 책, 101쪽

6) 한홍구, 「화북조선독립동맹의 조직과 활동」,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8, 11쪽

7) 장건상, 『사실의 전부를 기술한다』, 희망출판사, 1966, 423쪽

8) 한시준, 위의 책, 108쪽

9) 김구/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1997, 315쪽

10) 한시준, 위의 책, 109쪽

11) 한시준, 위의 책, 110〜111쪽

12) 김일성, 『세기와 더불어 8』, 410〜411쪽

13) 한시준, 위의 책, 115〜118쪽

14) 이만규, 『여운형선생 투쟁사』, 민주문화사, 1946, 173쪽

15) 한시준, 위의 책, 127〜129쪽

16) 신용하, 『한국 항일독립운동사 연구』, 경인문화사, 2006, 515〜538쪽 참조

17) 한시준, 위의 책, 150〜155쪽 참조

18)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5, 225〜226쪽

19) 한시준, 위의 책, 154〜155쪽

20) 한시준, 위의 책, 155〜162쪽 참조

21) 한시준, 위의 책, 162〜163쪽

22) 방선주,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미국」,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독립운동』(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80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논문집, 1999), 31〜32쪽

23) 한시준, 위의 책, 165〜167쪽

24) 한시준, 위의 책, 163〜164쪽

 

 

[관련기사]

임영태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트위터 뒤로가기 위로가기
댓글
아이디 비밀번호
(현재 0 byte/최대 500byte)
댓글보기(1)
굽은소나무 (qnseksrmrqhr) 2019-07-17 10:55:04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0 0
통일뉴스 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후원하기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당주동 3-2번지 삼덕빌딩 6층 | Tel 02-6272-0182 | 등록번호 : 서울아00126 | 등록일자 : 2000년 8월 3일 | 발행일자 : 8월 15일
발행·편집인 : 이계환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계환
Copyright © 2000 - 2015 Tongilnews. All rights reserved. mail to tongil@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