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대는 인간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 (니체)


 직박구리
 - 고진화

 어떤 시인이
 꽃과 나무들을 가꾸며 노니는 농원엘 갔었어요.

 때마침
 천지를 환하게 물들이는 살구나무 꽃가지에
 덩치 큰 직박구리 한 마리가 앉아
 꽃 속의 꿀을 쪽 쪽 빨아먹고 있었지요.

 곁에 있던 누군가 그것을 바라보다가,
 꽃가지를 짓누르며 꿀을 빨아먹는 새가 잔인해 보인다며
 훠어이 훠어이 쫓아버렸지요.

 아니 그렇다면
 꿀이 흐르는 꽃가지에 앉은 生이
 꿀을 빨아먹지 않고 무얼 먹으란 말입니까.


 ‘꽃가지를 짓누르며 꿀을 빨아먹는 새가 잔인해 보인다며/훠어이 훠어이 쫓아버렸지요.’

 새를 쫓아버리는 마음은 ‘사랑’ ‘측은지심(惻隱之心)’일까? 

 시인은 아니라고 한다.
 
 ‘아니 그렇다면/꿀이 흐르는 꽃가지에 앉은 生이/꿀을 빨아먹지 않고 무얼 먹으란 말입니까.’

 사랑은 다른 존재들과 더불어 사는 삶일 것이다. 

 ‘어떤 시인이/꽃과 나무들을 가꾸며 노니는 농원엘 갔었어요.’ 시인과 꽃과 나무들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농원. 이것이 사랑일 것이다. 서로 생명을 나누는 곳.

 그런데 우리는 이 생명의 잔치판에서 어느 한 장면만 보고, 어느 한 편의 입장에 서서 생각한 것들을 ‘사랑’이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사랑의 이름으로 온갖 잔인무도한 폭력들이 횡행한다. 모든 사람이 가해자이고 피해자다. 죄인은 없고 죄만 난무한다. 억울하고 한 맺힌 사람들뿐이다.

 ‘때마침/천지를 환하게 물들이는 살구나무 꽃가지에/덩치 큰 직박구리 한 마리가 앉아/꽃 속의 꿀을 쪽 쪽 빨아먹고 있었지요.’

 이런 장면을 보며 생명의 춤을 느낄 순 없을까?

 왜 우리의 사랑은 폭력이 되어 버릴까?

 인도와 네팔에서는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나 작별할 때 ‘나마스테’하고 인사한단다. ‘내 안의 신(神)이 당신 안의 신에게 감사드립니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우리는 우리 안의 신이 아니라 겉으로 보이는 ‘자아(自我)’에게 경배를 한다. 자아의 지위, 재산에게 경배를 한다. 

 우리 안의 신의 눈으로 보면, 이 세상은 생명이 서로의 생명을 나누는 잔치판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자아는 ‘나’ 중심의 사고를 하기에, 이 세상이 서로 생명을 나누는 것으로 보이지 않고 강자가 약자를 먹는 약육강식의 정글로 보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 너머를 꿈꾸며 ‘명상 공동체’ ‘마을 공동체’를 만든다. 하지만 우리가 이 세상을 약육강식의 정글로 보는 시각을 갖고 있는 한 그런 공동체 운동들은 성공하기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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