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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 무용계의 큰 별이 지다<기고> 재일 무용수 임추자 선생 별세 - 이철주
이철주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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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6.25  13: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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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주 / 문화기획자

 

   
▲ 고인의 생전 춤추던 모습. [자료사진 - 이철주]

조선춤으로 통일을 염원했던 재일(在日) 조선인 무용계의 선구자이자 지도자로 명성이 높은 임추자 선생이 지난 6월 11일 오후 8시 22분에 평소 앓아 온 뇌경색에 의한 급환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향년 82세.

재일 조선인 무용가 중 최초로 북측의 조선무용가동맹의 맹원으로 선출(1961년)되고, 금강산가극단과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문예동) 무용부장을 역임하며 재일 조선무용의 기틀을 만들고 오늘을 있게 한 분이다.

재일 조선인 무용사에서 오롯이 남을 예술가로서, 재일 조선인 무용의 형성과 변천사에 대한 기록 작업을 위해 지난 몇 년간 도쿄(東京)에서 수 차례 인터뷰를 가진 바가 있었는데 이렇게 선생의 갑작스런 부고 소식을 들으니 충격이었다.

고인은 경상북도 경주가 고향으로, 1936년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무용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주었던 그녀는 초급학교 시절에는 학예회 등에서 무용에 두각을 나타냈고, 무용에 대한 애정과 노력은 도쿄조선중고급학교 시절까지 계속 되었다. 특히 중급부 시절이던 1949년에는 본인이 주도하여 학교에 무용부를 만들고, 무용선생을 모셔오기도 하였다. 이때 무용교원으로 영입한 이가 바로 김장안으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모던발레와 전통무용을 접하게 되었다.

학교 밖에서는 당시 조선인들의 우상이었던 최승희를 동경해 그녀가 수학했던 이시이바쿠무용소에서 모던발레를 배우고, 귀화해 일본 발레의 아버지라 불리는 백성규(白成珪)에게 클래식 발레를 배웠다.

   
▲ 고인은 경상북도 경주가 고향으로, 1936년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났다. [자료사진 - 이철주]

1955년 고급부를 졸업해서는 민족무용을 배우겠다는 열망으로 당시 최승희와 함께 신무용을 이끌었던 조택원에게 무용을 배우고 함께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후 1957년 임추자조선무용연구소를 설립해 지도자의 길로 나섰다.

1959년 재일조선인문학예술가동맹이 창립이 되면서 초대 무용부장을 맡은 김장안을 따라 부부장으로 적을 둔 임추자 선생은 김장안이 북행을 하자 바로 무용부장이 되어 조선무용의 최전선에 서게 되었다. 1962년 임추자조선무용연구소를 해체하고 재일조선중앙예술단(금강산가극단의 전신) 무용부장으로 합류하였다. 이때는 이미 조선대 무용부의 기틀을 만든 친동생인 임선희와 임 선생 이후 무용부장을 역임한 김영애와 리미남을 중앙예술단에 보낸 후였다.

가르치는 지도자 이전에 임추자는 북측의 조선춤을 최우선적으로 배우고 보급하고자 했다.
1960년 3월 처음으로 북측의 무용교원과 무용지도지가 탄 귀국선이 입항하고 그 배안에서 직접적인 전습이 이루어졌다. 조선무용기본동작을 습득하고, 무녀춤, 칼춤, 선녀춤, 부채춤 등의 북측 무용을 배울 수가 있었다. 당시 지도한 이들은 박경식, 정순희, 한금희, 김숙자, 차예진, 주혜덕 등이었다.

이후로도 4대 명작 등을 포함한 다수의 조선춤을 최우선적으로 습득하고 재일에 전수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물론 1974년 평양 방문시 혁명가극 ‘금강산의 노래’를 전습받아 재일에서의 초연을 주관한 것도 임추자 선생이었다.

현역 무용수이자, 지도자로 또 안무가로 청장년 시절의 임추자 선생의 역할은 다재다능했고 또 성과에서도 혁혁했다. 신입단원의 연수부터 전문가 양성을 위한 지도 그리고 주요 공연의 창작과 조직 사업은 당연히 임 선생의 몫이었다. 임 선생이 생전에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 무용부장을 역임한 현계광, 조선무용연구소를 운영 중인 김영란, 현 금강산가극단 책임안무가이자 인민배우인 강수내 등 재일 조선인 무용의 계승 발전의 주역들이 모두 임 선생의 품에서 성장한 이들이다.

 

   
▲ 고인이 기획한 최승희 탄생 100주년 기념공연 포스터. [자료사진 - 이철주]

북측과의 소통 역시 임 선생이 대표하여 당대 최고의 안무가인 백환영, 김해춘, 김락영, 손봉예 그리고 작곡가인 신영철 등과 작품 창작과 전습 등의 교류가 오랫동안 성과 있게 진행이 되었다. 1992년 평양에서 개최된 <국제무용리사회>에 재일무용가 대표로서 참가하기도 하였다.

현역시절을 마감한 후 1988년에 임추자민족무용단 설립해 활동을 이어갔다. 2000년에는 “조국해방 55주년”을 기념한 재일 남북 무용가 무용축전인 <춤놀이> 공연을 기획하기도 했다. 2006년에는 “임추자 무용생활 60주년 기념공연”을 가졌다. 2017년 “임추자 80돐 기념 특별공연”은 70년 간 재일 조선무용을 위해 노력한 고인을 위한 후학들의 헌정한 공연으로 열리기도 했다. 공연명도 그래서 <춤한길>이었다. 여기서 임추자 선생은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작품 <사당춤>을 직접 추어 큰 감동을 선사했다.

   
▲ 기념공연에서 사당춤을 열연하던 모습. [자료사진 - 이철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훈배우(65년), 인민배우(88년) 칭호를 수여받은 임 선생은, 현역 시절에 일본에서 5,000여 회에 이르는 공연 활동과 500편 가까운 작품을 창작했다. 대표 작품으로는 <사당춤>, <환희>, <도라지>, <칼춤>, <아리랑>, <림진강>, <소장고춤>, <고구려의 벽화>, <봉선화>, <바라춤>, <세월아 가지마라>, <한삼춤>, <탈춤> 등이 있다.

“우리 민족의 멋과 흥취. 그리고 자기 무용가로서의 몸가짐, 그것을 세련시켜야 한다. 그러면서 최승희의 춤체를 잊지 말아합니다.” 평생 무용의 한 길에서 ‘조선’의 무용수로 헌신 복무하며 살아온 임추자 선생이 지난 인터뷰에서 남긴 말이다. 얼마 전 만난 재중 조선민족무용계의 거성인 최옥주 선생이 재중 조선민족춤에 대해 “최승희의 품격이 남아 있어야 한다”고 한 말과 그 궤를 같이 하여 울림이 더욱 크다.

평생 소원이셨던 통일된 조국강산에서서 마음껏 춤을 추지 못한 고인께서는, 비록 6월 19일 고별식으로 지인들의 곁을 떠나셨지만, 재일 조선인 무용계에 가장 빛나는 별로, 그리고 민족무용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에 민족무용의 큰 별로 영원히 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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