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공자)

 
 노란 꽃에 바치는 노래
 - 파블로 네루다                     

 우리들은 먼지, 먼지가 되리.
 공기도, 불도, 물도
 아닌
 땅,
 단지 땅이 될 뿐
 그리고
 몇 송이 노란 꽃이 될 뿐.


 가끔 악몽을 꿀 때가 있다. 대개 궁지에 몰려 쩔쩔매고 있을 때 깬다. 깨고 나서도 잠깐 동안 착각한다. 꿈속이라고. ‘어떡하나?’ 그러다 화들짝 깨닫는다. ‘아, 꿈이었구나!’ ‘휴- ’ 모든 것에서 해방된다. 

 깨어나지 않는 악몽이라면 얼마나 무서울까? 아마 우리의 무의식이 견딜만한 악몽일 때 우리를 깨어나게 하는 것 같다.

 인생도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고 한다. 하나의 긴 봄날의 꿈. 살아갈수록 산다는 게 엄청나게 힘든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간다. 한평생의 짐이란 얼마나 무거운가!

 삶이 꿈이라면 죽음은 인생이라는 긴 꿈에서 깨어나는 것일 것이다. 인간에게 일생의 짐을 한순간에 벗을 수 있는 죽음이란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인가! 

 나이가 쉰이 되었을 때 ‘죽음’은 너무나 무서웠다. 나를 한 순간에 다 버리고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대사건! 내 몸이 서서히 늙어가다 어느 한순간에 썩어 문드러져 사라져버린다는 사실은 얼마나 끔찍한가.  

 그러다 크게 아프고 나서 ‘죽음’이 그렇게 무서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막상 죽음의 문턱에 들어가니 죽음은 그냥 일상이었다.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다 보니 죽음 앞에서 나는 담담했다.

 공포를 느끼려면 몸에 에너지가 있어야 할 것이다. 힘없는 몸은 그냥 무심한 살덩이로 누워있었다. 죽음에 대한 온갖 환상은 우리의 생각이 지어낸 허상이라는 것을 그때 확연히 알았다.    

 몸이 회복되고 나서 다시 죽음은 신비와 공포의 모습으로 내게 다가와 내 주변에서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많은 현자(賢者)들은 말한다. ‘참된 삶을 맛보지 못한 자들만이 죽음을 두려워한다.’ 살면서 이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일생 동안 한 시대의 모순과 치열하게 맞섰던 칠레의 저항시인인 파블로 네루다에게 죽음은 ‘흙이 되고 다른 생명체로 부활하는’ 너무나 자연(自然)스러운 현상이다. 

 ‘우리들은 먼지, 먼지가 되리./공기도, 불도, 물도/아닌/땅,/단지 땅이 될 뿐/그리고/몇 송이 노란 꽃이 될 뿐.’ 

 한 시대의 모순 앞에 굴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온갖 환상을 만들어낼 것이다. 삶이 생생하지 않으니까. 천국(天國), 극락(極樂), 지옥(地獄) 같은 온갖 허상을 만들어 마음에 위안을 얻고 싶어 할 것이다.

 사실 인간세상(人間世上)만한 지옥이 어디 있을까? 이 세상의 실상을 똑바로 바라보면 이보다 더 끔찍한 일들이 어디 다른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을까?

 인간외의 다른 생명체들을 보면 참 행복하게 살다 간다는 생각을 한다. 산에서 바라보는 여러 생명체들. 얼마나 평온해 보이는가! 숲에서는 항상 향기가 난다.

 인간과 함께 사는 가축들, 채소들이야말로 가장 불행할 것이다. 개, 돼지, 소, 닭, 오리...... 들과 온갖 채소들은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삶과 죽음이야 말로 지옥일 것이다. 그들과 비슷해져버린 인간들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그래서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는 슬프게 노래했다.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는 인간은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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